피를 나눈 5월
증 언 자:김지호(남)
생년월일:1962. 7.14(당시 나이 18세)
직 업:고등학생(현재 대학생)
조사일시:1989. 1
개요
계엄령 확대조치로 대동고에서 19일 교외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위를 목격했다. 22일 도청에 들어갔고, 23일에는 전남대병원에서 헌혈을 했다. 5·18 이후 사회과학 학습내용을 배포하려다 제적당했다.
1980년 5월 18일 계엄령이 확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내를 가보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에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고 있던 때라 초파일 행사를 준비해야 했으므로 원각사도 들를 예정이었다. 동운동이 집이었으므로 시내로 가기 전에 전남대는 어떻게 돌아가나 볼 생각으로 자전거를 타고 10시 30분경 전남대 정문으로 갔다. 정문 앞에는 착검을 한 서너 명의 공수부대들이 수위실 쪽에 있었고 정문다리에도 서너 명이 서 있었다. 정문 앞 수위실 옥상 위에는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시민들 7, 8명이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난 대동고등학교 여름 하복을 입고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정문에 도착했더니 공수들이 경상도 말로 욕을 하며 꺼지라고 했고 자전거를 부숴버린다는 말도 했다. 겁도 나서 시내 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갔다. 시내에 차량이 차단되어 있는 상태여서 양동시장 쪽으로 빠져나갔다. 양동시장에 들러 가게에 자전거를 맡겨두고 걸어서 공원 쪽으로 갔다. 공원에 이르니 군용지프차 4대가 지나갔다.
그런데 그 당시 이상하다고 여긴 것은 차에 탔던 군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상기된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그 군인들은 지나가는 여자들을 희롱하면서 위압감을 주었다. 공윈 앞을 지나 시내 쪽으로 갔더니 금남로는 차단된 상태였고 도청 부근,우체국 앞에 최루탄 가스가 자욱했다. 충장로에선 각 도로마다 2개 소대 정도의 전경들이 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충장로를 빠져나와 화니 백화점을 거쳐 겨우 원각사 부근으로 갈 수 있었다. 그 당시에 지하상가가 공사중이었는데 그 사거리에는 시민들이 인도로 지나가고 있었고, 공수부대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다녔다. 몇 차례의 투석전이 벌어졌다. 도청 쪽에 있던 군인들과 사거리에 있던 시민들의 밀고 밀리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그날 본 것중에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것은 젊은 청년들 중 빨간 옷을 입은 청년이 광남로 쪽으로 도망치는데 끝까지 공수부대들이 쫓아갔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은 때리지 말라고 고함을 질렀다. 또 그날 현대극장 쪽에 서 있는 젊은 신혼부부를 보고는 남자에게 달려들어 공수부대 중 한 명이 가지고 있던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그 즉시 피가 솟구쳤다. 다른 젊은이들은 구타하고 나면 연행해 갔는데 다행히 그 사람은 연행하지 않아 일반시민들이 부축해서 광남로 쪽으로 데리고 갔다. 오후 5시경 원각사에 들러서 연등을 만들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집으로 왔다. 그때 들은 이야기는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었다. 19일 8시 30분경에 학교에 도착했다.
10·26 이후 민주화의 봄을 맞이하여 만연하였던 민주화 분위기는 고등학교까지 그 기운이 확산되었다. 대동고등학교에 있었던 '독서회'서클도 이에 힘입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양서조합(YWCA 2층에 있었고 사회고발적인 이념서적을 취급했음)과 관련있는 박석무 선생님을 비롯, 박행삼 선생님,윤광장 선생님들의 힘이 컸다. 4월쯤에 생긴 '독서회'는 1, 2학년을 합해서 140명 정도의 회원이 있었고, 세 분 선생님의 지도로 5·18 이전에 이미 사회에 대한 관심과 민주화의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아침에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독서회'를 중심으로 회원들이 전날 보았던 18일의 참상에 치를 떨면서 규탄대회를 하자는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에 다른 학생들도 공감하게 되었다. 2교시가 끝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체적인 분위기가 요구했듯이 운동장에 학생들은 모여들기 시작했다. 11시쯤 1천5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운동장에서 정덕연이란 2학년 학생이 육성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 내용은 즉흥적으로 썼기 때문에 일종의 18일 상황에 대한 규탄이었다. 구호는 '전두환이 처단하라', '김대중 씨 석방하라' 등이었다. 몇몇 학생들은 겁을 먹기도 했고, 학생회 간부들 같은 경우는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오셔서 다 데려가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방관하는 상태였고, 다만 교외 진출은 막았다. 시위 전에 교외 진출을 시도할 계획은 없었고 시위 도중에 나온 제의였다. 시위 도중 백운동 로터리 쪽의 공수부대가 학교에서 시위가 있는 줄 알고서 진압하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선생님들이 교외 진출은 개죽음밖에 되지 않는다며 극구 말리셨으므로 시위를 일단락 짓고 하교했다. 교문을 나설 때가 12시 30분경이었다. 난 시내가 어떻게 돌아가나 볼 생각으로 3번 버스를 탔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는 시위했던 흔적이 역력했다(최루탄 냄새가 코를 찌르고 돌 등이 도로에 흩어져 있었다).
버스가 MBC방송국쪽으로 못 간다고 해서 차에서 내려 집으로 왔다. 20일은 부모님의 만류가 심하여 동운동 집에서 보냈다. 오전 11시쯤에 상무대 쪽에서 온 1개 소대의 군인들이 운암아파트 뒤에 있는 운암봉 기슭을 거쳐 불공부락 쪽으로가는 것을 보았다. 고속도로를 차단하러 가는 병력인 듯싶었다. 그 뒤 상황은 북한방송을 통해서 알았다. 남한방송은 맨날 헛소리만 하고 있었으므로 동네 사람들은 북한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20일 밤에는 운암동 중봉에 올라갔더니 시내 쪽에서 불이 훤하게 솟았다. 22일은 그 전날 도청이 시민군에 접수되어 해방 광주를 맞는 첫날이었다. 오전에 도청으로 가보니 학생들은 대부분 마스크나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헬리콥터로 사진을 촬영한다는 말이 돌아서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다닌 것이다. 전일빌딩 셔터에 시민군을 조직한다는 벽보가 붙었다. 난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시민군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도청 민원실을 통해 도청으로 들어갔다. 그 안의 상황이 궁금해서였다. 민원실을 통해 들어간 도청의 상황은 조용한 느낌이었다. 도청 본관 뒤의 경찰국으로 갔다. 경찰국장실에는 군인들이 벗고 간 군복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군인들 옷 사이에서 사과탄(최루탄이었는데 그때는 사과탄인 줄 알았다)이 보여 가지고 나왔다. 큰 무전기가 있었는데 들고 나올 수가 없어 그냥 두었다.
특히 놀란것은 도경찰국장실이라는 데의 옷장을 열어보니 신사복이 20∼30벌이나 깔끔하게 걸려 있었다. 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올 때도 민원실 쪽으로 해서 나왔으나 제지받지는 않았다. 전남여고 후문 있는 곳까지 걸어와서 시민군들에게 접수된 미니버스를 탔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버스에 올라탔더니 30대 후반쯤 되어 뵈는 아저씨가 내가 가 지고 있는 최루탄을 보고는 어린 아이가 가지고 다니면 위험하다며 운전석 있는 곳으로 가지고 갔다. 운전석 뒤에는 총 몇 자루와 실탄이 조금 놓여 있었다. 23일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남대병원 영안실로 가보았다. 대부분의 시체들은 대검으로 난자 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17∼18구 정도의 시체가 있었다. 시체들 중 군인인 듯 스포츠 머리인데 짓이겨져 죽어 있는게 있었다. 돌아서 오려는데 시민들 사이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영안실에서 왼쪽으로 돌아가 보았더니 땅바닥에 매트리스 하나를 깔아놓고 헌혈을 하고 있었다. 나도 헌혈을 하였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특이할 만한 것은 여자,특히 젊은 여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며칠인지 기억은 없는데, 광주역 앞에서 낫을 실은 경상도 소속 트럭이 전소되었다는 말을 들었고, 순복음교회와 광주역 사이에 있는 가스차(Ml6이 들어 있었음)를 시민군이 도청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광주 해방기간 중에 몇 차례 궐기대회가 있었는데 데모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훌라송(정의가) 등이 었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 훌라(좋다 좋다) 같이 죽고 같이 산다. 훌라 훌라(좋다 좋다) 무릎 굽혀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단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 훌라 5·18이 일단락되고 학교에 등교했을 때 우리들은 너무나 처참히 깨져버린 것에 분해 있었다.
그러나 감히 무어라 말 한마디 못 할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5·18 이념을 계승하자는 열기와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전처럼 '독서회'가 활발하게 활동할 수 없었음은 두말 할 여지도 없다. 2학년을 중심으로 '끌텅'(전라도 사투리)이란 이름으로 나를 포함하여 조병현, 정덕연, 조용필, 김향현, 이덕재 등이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이념서적들을 읽었다. 2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 그동안의 토론내용을 정리해서 복사해 선배들이나 후배들에게 배포할 생각으로 방학하자마자 준비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 도서관에서 그 작업을 하다가 학교당국에 발각되어 다른 애들은 정학으로 끝나고 주동자인 나와 용필이만 제적당했다. 제적당하기 전에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옳길 것을 종용했으나 그럴 마음도 없었고 집에서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적통지서를 받고서 5·18의 패배감으로 실의에 빠진채 2년을 지내다가 검정고시를 볼 생각으로 전일학원에 등록했다.
그러던 중 내 형편을 아셨던 선생님의 배려로 학원의 일을 도우며 먹고 자면서 지냈다. 198B년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1985년 3월 호남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으나 과에 대한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퇴를 했다. 1987년 3월에 서강전문대 영어과에 입학하여 지금은 졸업반이다. 그동안 전일학원, 한림학원, 영재학원 등에서 지냈고, 지금도 학원일을 도와주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특히 유성수 선생님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학원에서 때때로 수업 시작 전에 우스갯소리처럼 수강생들에게 사회고발적인 이야기와 우리가 지금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말하곤 했다. 1987년도엔 민주화의 열망에 힘입은 이야기를 하다가 학원에서 그런이야기는 삼가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다. 지금 5·18을 생각하면 시위 도중 광주 민주화운동 기간에 줄곧 불려졌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노래가 함성처럼 들려온다. 5·18의 민주화 이념이 통일로 승화되어 결실맺기를 간절히 바란다. (조사·정리 김문주)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 합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