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4 자전거하이킹 금강뚝방길 하구뚝 군산월명공원 기행일지
자유인은 집에서 자전거로 만성들역을 거쳐 마포마을을 지나 마룡저수지 공주산 원나포 마을에 도착 금강뚝방길 자전거도로를 따라 군산월명공원까지 30km를 hiking하다.
☛hiking시간 및 거리 : 9:00-19:00(10시간) 30.0km
왕복 60km
☛hiking코스 : 만성들역-마포마을-공주산-원나포-금강뚝방길자전거길-금강철새조망대-금강하구둑-진포해양공원-월명공원
☛귀로길 : 웅포곰개나루 갓점마을 함라산고개 마포마을을 거쳐 익산도착함
☛자유인 조동화 오늘의 행복이야기
자유인 조동화는 일주일에 한번정도 자전거하이킹으로 아무생각없이 세월을 낚는 사람이올시다.
오늘 자전거하이킹은 만성들역에서 시작하여 원나포 공주산에서 금강뚝방길자전거길을 따라 군산월명공원까지 자전거하이킹한 것은 복잡한 세파를 떠나 만성들역을 구경하고 아름다운 금강호을 탐사하고자 하는 아주 단순한 목표였다.
오늘의 자전거하이킹거리는 총 60km정도였으며 도보거리는 약 20,000보였다.
집에 귀가하여 체중을 재어보니 약 1.5kg이 땀으로 빠져나가 체내의 노폐물을 제거하니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나홀로 자전거하이킹 목표설정은 혼자 결정하기 때문에 내 발길 닿는데로 이곳 저곳 구경하면서, 정자가 있으면 쉬어가고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였으며 월명공원까지 이동하는 거리는 아주 멀게 느껴졌으나 두발이 쓸만해 자전거하이킹을 할수 있었고, 집에 까지 이동 귀로 할수 있었다.
두눈과 두발에 감사하자.
감사한 마음으로 세월을 낚으니 행복하다.
인생의 삶의 행복이 무엇인가?
자유인의 신조는 “평범한 일상속에서 행복을 느끼자”입니다.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유인 조동화의 하루는 두발이 쓸만해 월명공원까지 자전거하이킹하며 세월을 낚는 나그네 방랑자가 아니더냐.
귀로중 하구뚝공원에 채만식문학관이 있어 들리다.
말로만 듣던 채만식문학을 살펴보니 일제하 1000여편을 글을 남긴 유명한 문인이었다.
금강을 배경으로 글을 많이 남겨 이곳 하구뚝에 채만식문학관을 세운 것 같다.
그냥 평범한 작은 행복, 자두 몇개 주인 몰래 몇 개 따서 깎아 먹고, 자유인 조동화는 하구뚝 정자에서 남은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30여분 누워서 망중한하고나니 기분이 좋아 감개무량하였다.
성현군자께서 말씀하시길,
老覺人生 萬事非(노각인생 만사비)
늙어서 생각하니 만사가 아무것도 아니며.
憂患如山 一笑空(우환여산 일소공)
걱정이 태산 같으나 한 번 소리쳐 웃으면 그만인 것을.
온 세상이 훨씬 넓고 아름답게 보이고 편하고 진실하게 보이네
人生事 空手來 公手去 (인생사 공수래 공수거)
인생사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을........
===좋은글===
◉하구둑 개요
"금강하구둑"은 총길이 1,841m의 전북과 충남에 농업용수, 공업용수공급과 홍수 조절을 위해 8년동안 1천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1990년에 완공되었다.
1억 3,000만톤의 담수량을 자랑하며 1,841m의 제방은 충남과 전북을 잇는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
◈ 위 치 : 군산 상류 5㎞지점(군산시 성산면⇔서천군 마서면)
◈ 하 구 둑 : 연장1,841m(방조제 1,127m, 배수갑문 714m)
◈ 배수갑문 20련 (30×10.3m), 어도 통선문 각 1개소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일원에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금강 주변 지역의 홍수를 조절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토양과 모래가 흘러내려 강하구에 쌓이는 것을 막아 군산항의 기능을 유지시키면서 바닷물의 역류를 막아 농경지의 염해 피해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또 금강하굿둑은 군산과 장항(長項)을 잇는 교통로로도 이용되어 관광지로서 큰 몫을 하고 있으며, 장항선의 일부인 장항-군산 대야 철도가 놓여 있다.
월명공원
월명공원은 월명산, 장계산, 설림산, 점방산, 석치산 등이 이어져 조성된 군산의 명소로 군산의 60~70년대에는 최고의 수학여행 코스였다. 총 면적이 약 77만 평이나 되고, 산책로의 길이도 12km나 되는 거대한 공원이다. 해망동과 신흥동에 걸쳐 있으며, 군산의 상징이자 월명공원의 상징인 수시탑에 오르면 군산 앞바다와 금강하굿둑, 그리고 군산시가지와 장항제련소 등의 주변 전경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공원 정상에는 전망대와 바다조각공원, 수시탑, 삼일운동기념비, 개항35주년 기념탑, 생각하는 시민상, 채만식 문인비가 있다. 수시탑은 타오르는 불꽃과 바람에 나부끼는 돛의 형상을 띠고 있다. 공원 서쪽 설림산 기슭에는 고찰 은적사가 있으며, 점방산과 설림산 사이를 막아 만든 제일수원지가 있다. 공원 안은 조경이 잘되어 있으며, 수령 30년 이상의 등나무와 벚나무가 우거져 경관이 수려하다. 매년 4월에는 전국 규모의 벚꽃사진 촬영대회가 열린다. 사계절 모두 아름다운 공원이지만 특히 봄, 벚꽃이 만개했을 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군산 문화관광과===
이성당빵집
군산시 중앙로 177번지
군산에서 유명한 이성당 빵집, 빵을 사기 위해 몇십미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작년인가 내가 이성당 빵집에서 줄을 서 빵을 먹어본 맛은 빵맛이 빵맛이지 별 맛이 아니더라고...
이성당 빵집은 어떻게 유명세를 타서 날이면 날마다 50-100여미터 줄을 서서 빵을 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지 이성당빵집 대한민국 돈이 다 모이겠구만.
무엇인가 비법이 있겠지만 이성당빵집은 감히 재벌이라고 해야 할판이여.
이성당빵집소개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으로
군산에 있는 본점 이외에도 현재 총 4개(서울 3개, 천안 1개)의 공식적인 분점이 있다합니다.
이성당(李成堂)은 전북 군산시 중앙로 1가 옛 시청 건물 맞은편에 자리한 제과점이다. 1945년에 문을 연 이후 74년째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기도 하다.
이성당의 창업주는 지금은 고인이 된 이석우 전 대표이며, 그는 이종사촌에게 가게를 물려주었고 1977년 사망한 뒤 그의 아내가 경영에 나서 이성당을 군산의 대표 빵집으로 키우다.
현재 이성당의 대표는 2003년 시어머니로부터 이성당을 물려받은 김현주 대표입니다.
이성당빵집의 역사
1910~1920년대에 일본 시마네 현 이즈모 시(出雲市)에 살다가 아들의 군복무를 피해 1906년 조선으로 건너온 히로세 야스타로(広瀬安太郎)(1869~?)라는 일본인이 '이즈모야(出雲屋)'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어 영업하기 시작하였다.[5] 메이지 유신 이후 빵문화에 익숙해진 일본인들은 이때도 빵을 즐겼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고위공무원과 무역거상(수탈자)들이 한국으로 이주하였고, 일본인 집성촌이던 이곳[6]에서 그들을 상대로 하는 고급 빵집이었기에 조선인들은 이용이 힘들었다.
특히 이즈모야는 야스타로의 장남 히로세 켄이치대에서 가장 크게 번성하였는데, 히로세 켄이치는 당시 군산 내 일본제과점들의 사실상 대표역을 맡으면서 각종 제빵기구의 주문 및 구입을 대표하는 모임의 장을 역임하기도했다. 야스타로 대까지만 해도 이즈모야에서는 주로 일본식 화과자에 가까운 상품이 주를 이루었지만, 켄이치는 직접 도쿄에 가서 제빵 기술을 배워와 이즈모야에서 본격적으로 빵을 만들어 판매하였고, 동생과 협력해서 케이크와 커피 판매를 주로 하는 카페까지 확장해서 운영했다.
실제로 당시 군산 지역에서 이즈모야가 가진 영향력은, 일제강점기 후반의 물자통제가 이루어진 시점에서의 일화에서 잘 나타난다. 당시 기초물자통제로 인해서 이즈모야 또한 빵을 만들기 위한 기초재료 확보가 매우 어려워지자, 히로세 켄이치는 지역의 군사식량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의 임원을 역임하면서 가지게 된 영향력을 이용, 공장에서 빵을 유통해서 이즈모야에서 팔기도 했다.
그러나 광복 이후 히로세 가문은 급하게 가게는 물론 모든 제빵기구를 내버려두고 귀국하게 되었다. 당시 히로세 켄이치는 그동안 타지에서 이룬 가게를 버리고 떠나는 것을 극구 거부하여, 결국 켄이치를 제외한 가족만이 군산을 떠났다. 하지만 우연히 이들이 타고 가던 보트 배가 여수에서 고장나는 바람에, 잠시 이곳에 머무는 사이 켄이치의 아내가 군산으로 돌아가 설득해서 결국 같이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후 이들 가문은 히로세 켄이치의 부인의 고향인 사가 현 이마리시로 이주하여, 이곳에서도 제과점을 차려서 살고 있다. 여담으로 사실상 이즈모야 시절을 경험한 채 생존 중인 유일한 히로세 가문의 구성원인 히로세 츠루코[7]는 종종 이성당과 교류를 이어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당을 중심으로 하는 관련 일상사연구들에서 중요한 구술자로 참여한 바 있다.[8]
1945년, 해방 이후 이즈모야가 사라진 자리에는 한국인 이석우 씨가 자리를 잡았다. 이석우 씨는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이씨의 부모님은 본래 전라북도 남원 출신이었지만, 자발적으로 광산노동자가 되어 돈을 벌기 위해 일본 홋카이도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반도로 돌아온 이씨의 부모님은 고향인 남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군산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이석우 씨는 당시 군산에서 나름 재산을 가졌던 대동사이다 공장의 사장에게 설탕살 돈을 빌려[9] 과자를 만드는 장사를 시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번 돈이 어느정도 모이자 당시 적산가옥으로 등록되었던 이즈모야의 건물을 불하받아 이성당을 차리게 된다.[10]
이석우 씨는 초기에는 히로세 야스타로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과자류만을 팔았지만, 송씨라는 제빵기술자를 영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빵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11] 이후 각종 기술 공유를 통해 상품의 폭을 넓혀가던 이성당은 보다 효율적인 재료 공수를 위해 주변지역의 제과점들과 협력하여 삼영상사라는 회사를 차렸고 이를 통해 각종 제과제빵에 필요한 재료와 기구를 구입하는 일을 도맡았다.[12] 당시 이석우 씨는 가장 젊고 계산에 능하다는 이유로 삼영상사의 대표직을 겸했는데, 이 상사는 이후 아래에서 언급할 대두식품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성당의 주요 사업은 이석우 씨 이후에는 이종사촌인 조천형 씨가 물려 받았다. 조천형 씨는 현재 이성당의 대표인 김현주 대표의 시아버지이다. 조천형 씨는 다시 아내인 오남례 씨(2010년 작고)에게 이성당의 운영을 맡겼고, 2003년부터 오남례 씨의 며느리인 김현주 대표가 4대 대표로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광복 이후로 기산해도 70년, 일제강점기 시절 전신인 '이즈모야' 시기까지 포함하면 1세기, 100년의 역사를 가진 곳.
===나무위키 옮김===
고향무정-이석화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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