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살인적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15호 조사실앞에 14일 오후 조화가 놓여 있다.ⓒ권우성
일곱번째 고문은 9월 10일 저녁 7시경부터 10시경까지 자행되었다.
이번 고문은 처음 행한 방법이었다. 전기봉고문인데 양쪽 발등에 무슨 장치를 하고 진동을 일으켜 고통을 가하는 방법이었다. 지휘자는 김영두이고 김수현이 뒤에서 조종하였다. 박병선ㆍ최상남ㆍ정현규ㆍ경북출신의 경찰이 번갈아가며 고문을 하였다.
전기봉고문은 이렇습니다.
대단히 빠른 진동 때문에 발등에는 심한 통증이 옵니다. 상처가 생기고, 깊이 파이는 것 같은 느낌조차 옵니다. 피가 흐르는 기분도 듭니다. 그러나 이 전기봉고문은 그래도 받을 만하다고 할까. 상쾌하다고나 할까. 아니 양념고문이었다고 할까요. 원체 심한 고문을 당해서 그런지 이날 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조차 했었습니다. 더구나 물고문도 이날은 하지 않았습니다. (주석 28)
악마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김근태를 압박했다. 일종의 심리전이다. 고문을 가할 경우에는 밥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끼니 때가 되어도 밥을 주지 않으면서, 곧 고문의 순간이 도래한 것처럼 인식케 하여 심리적 불안을 가중시키는 방식이었다. 악마들은 다른 무슨 자백을 받아내거나 자신들이 무슨 일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어김없이 이 방식을 썼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9월 13일 이후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데, 이 밥을 안 주는 것과 고문을 가하는 것을 연관시켜 매우 잘 사용하였습니다. 즉 고문자들이 뭔가 불만이 있으면 밥을 안 주고, 그러면 본인은 고문이 박두했음을,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파랗게 질리곤 하였습니다. 이때 고문자들은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덜덜 떨면서 나는 시키는대로 하구요. 고문, 그것은 마음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과학적이고,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정리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의 시점, 방법 등에 대해서는 정말 사장급 이상의 회의에서 여러 가지로 검토하고 결정하는 것이 틀림없이 분위기로 전달되었습니다. (주석 29)
수사기관은 양심수나 확신범을 체포해다가,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기간에 지내온 일을 빠짐없이 기술하라고 다그친다. 몇 차례 되풀이 하여 쓰고 나면 우선 기가 빠진다. 나중에는 왜 앞의 내용과 다르냐고 후려친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도 수년 전의 일시, 만난 사람이 일치하기란 쉽지 않다. 김근태에게 대학시절, 제대 뒤 복학 때의 친구 관계,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행한 행사 등을 캐묻고, 빛바랜 사진을 들고 와서 자신과의 관계를 쓰라고 겁박했다.
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30 08:00 김삼웅
9월 11, 12, 13일 오후까지는 ‘무사’히 지나갔다.
육체적인 고문이 없었다는 뜻이다. 13일 저녁식사가 들어와 막 숟가락을 들고 두번인가 먹을 때 복도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정현규가 들어와 밥그릇을 빼앗아갔다. 다시 고문을 가하겠다는 신호였다.
김수현은 본인을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는 말했습니다. 오늘이 금요일이고 13일이다. 무슨 날인지 알겠느냐라고. 이에 대해 악마의 날이라고 하니까 조소하면서, “서양에서는 오늘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한다. 너의 최후의 만찬날이다. 각오하라” 하였습니다. 고문기술자는 8일 이후 본인의 사건에 이렇게 깊이 개입해 오지는 않았었는데 13일 이날은 팔 걷고 나섰습니다.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새벽 2시 반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계속하여 가했습니다. 마음은 물론 몸도 도무지 견뎌 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고문기술자는 기승을 부리며 고문을 하고 김수현은 퍼렇게 핏대를 세우고 끊임없이 모욕하였습니다. (주석 30)
김근태는 그동안의 혹독한 고문으로 허위자백까지 하면서 한번도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에는 이미 기력을 잃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가해도 발버둥을 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 때마다 고문은 중지되고, 찬물을 머리에 붓고 가슴을 손바닥으로 쳐 댔습니다. 점차 아슴프레해 가는 의식 속에서 아, 이제 내가 정신을 잃겠구나 하는 순간이 되면 고문은 중지되었습니다. 고문기술자들은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13일 고문 이후 남영동에서는 물론 구치소에서 생활해나가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참으로 나빠졌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밥을 먹고 소화해 낼 수 없었으며, 보행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두통이 걷잡을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다다른 것은 물론이구요. 어떤 한계점, 분수령이었습니다. 일단 13일 고문은 이튿날 새벽 2시 반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김수현은 남아서 박명선과 또 한 사람을 데리고 14일 새벽 3시경부터 5시 반경까지 또 고문을 해댔습니다. 이 새벽녘 고문에서 김수현은 또 다시 문용식의 NDR과 학생운동의 배후로서 민추위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자백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주석 31)
수사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악마들은 민청련의 재정문제에 대해 더욱 잔혹성을 보였다. 앞서 소개된 재미 교포 언론인 신기섭이 한국민주화운동의 성금으로 준 기금을 기독교교회협의회가 인권위원회를 통해서 민청련에 전달된 것을 불순자금의 유입으로 엮으려 한 것이다.
김근태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도 진실을 밝히고자 마지막 의지를 가다듬었다. 회원들의 월회비 160~180만 원과 지도위원 40여 명의 월 2만원 이상씩 60~80만 원이 민청련 재정의 골격임을 사실대로 말했다.
악마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불순자금의 실상을 밝히라고, 다시 물고문, 전기고문을 가했다.
13일, 이날은 김수현의 말대로 본인의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그 고문의 강도는 8일의 경우보다 못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이 13일 이후 본인은 결정적으로 균형상태를 잃어 버렸습니다. 이튿날인 14일부터 남영동을 떠나는 26일 점심 때까지 본인은 밥을 못 먹었습니다. 국물과 두어 숟가락 정도의 밥을, 그것도 오래 씹어서 겨우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요기는 주로 햄버거빵을 우유에 녹여서 채웠고, 즉석라면에 물을 부어서 그 국물과 약간의 라면줄기로 허기를 메웠습니다.
김수현은 이러한 본인을 보고 단식투쟁을 하는 것이냐고 묻더군요. 참 어이가 없더군요. 그런 의사가 약간이라도 통할 수 있는 사람들로 내가 자신들을 생각하리라고 믿었던 것일까요. 목은 붓고 쉬어서 말을 제대로 못하고, 머리는 깨어져 나갈 것 같고,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기 직전 같았습니다. 말하고, 쓰고, 베끼고, 손도장 찍고, 또 찍고 하면서 26일까지 갔습니다. (주석 32)
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31 08:00 김삼웅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살인적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15호 조사실앞에 14일 오후 조화가 놓여 있다.ⓒ권우성
마지막 고문은 9월 20일 저녁 8시경부터 밤 10시 반경까지 전기ㆍ물고문의 합동고문이었다. 김수현ㆍ김영두ㆍ정현규ㆍ박병선ㆍ최상남, 또 한 사람이 고문에 가담했다. 이제까지의 ‘자백’과 ‘번복’의 되풀이였다. 민청련이 반국가단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고문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김근태는 “아, 죽게 되는구나.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이구나” 절망하고, 마구 눈물을 흘렸다.
바깥사회와 완전히 차단되었던 나는 정치적 사정이, 정치군부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본인의 생명의 말살을 절대로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각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끔찍한 고문, 말도 안 되는 각본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그래, 죽을 수도 있다. 40년을 살아왔다. 유관순도, 윤동주도, 그리고 김주열도, 80년 광주의 숱한 선량한 시민들도 그렇게 살해당하지 않았는가. 추하게 정치군부 너희들에게 굽신거리지는 않겠다. 절대로 휘청거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주석 33)
이후에도 고문과 모욕은 그치지 않았다. 반주검 상태가 된 김근태는 9월 26일 오후 3시경 인간 도살장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게 되었다. 악마들은 ‘자백’을 통해 일건 서류를 충분히 마련했고, 더 오래 잡아두었다가 사망하기라도 하면 사후 처리문제가 귀찮았을 것이다.
9월 4일 남영동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한 지 22일 만이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이 기간, 김근태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야수들에게 도합 열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고문자들은 상처를 남기지 않고, 죽이지 않고 고문하는, 고도의 기술자들이었다.
26일 오후 3시경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김수현과 백남은을 찾았습니다. 잠시 책상을 사이에 두고 김수현과 방에서 앉아서 얘기했습니다. 별 의미있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처참하게 고문을 당하고 간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간다. 이러고도 속수무책인 것이 원통하다. 더구나 너무 끔찍하게 당해서 분노하기조차 두려운 것이 한스럽다. 떠나는 지금도 내놓고 욕 한 마디 할 수 없고 그런 용기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 말이다. 이 저주받을 인간들이, 악마같은 자들이 내 생사 여탈권을 가진 것처럼 군림하였으며 그에 아양조차 떨어야 했던 이 끔찍한 지옥을 All Mighty처럼 덮쳐왔던 것을….” (주석 34)
지난 5월29,30일 열린 태안아버지학교에서 이근안씨는 특별강사로 초청돼 자신의 재소자시절을 얘기했다.
남영동에서 김근태에게 살인적인 고문을 총지휘한 자는 90kg이 넘는 거구의 이근안이다.
처음에는 가명이어서 몰랐으나 뒷날에야 그가 이근안임을 알았다. 이근안은 공군 헌병 출신으로 1970년 경찰에 입문하여 1972년부터 대공분야에 근무하면서 악질적인 ‘고문기술자’의 역할로 특진과 승진을 거듭하여 1984년에는 경감에 올랐다. 그에게서 고문을 당한 인사들의 증언대로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고 할 정도로 가학성을 지닌 인물이다.
1979년 <조선일보>가 청룡봉사상을 준 것을 시작으로 1981년 내무부장관 표창, 1982년 육군 제9사단장 표창, 1986년 전두환 정부에서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면서 이를 지휘하는 이근안의 인상착의를 입력했다가 뒷날 이재오ㆍ이선근ㆍ박문식 등 그로부터 고문을 받은 피해자들과 함께 사진 속의 인물이 이근안임을 밝혀냈다.
김근태의 고문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규탄과 진상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10월 17일 민청련에서는 ‘고문 철폐를 위한 투쟁위원회’와 ‘민주화운동에 대한 고문수사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 위원회’(고문 공대위)가 결성되고, 민통련ㆍ민추협ㆍ신구교 성직자ㆍ불교 승려ㆍ주요 사건 구속자 가족 등이 참가했다. ‘고문 공대위’는 정부의 고문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어서 11월 11일에는 김대중ㆍ김영삼 등 60여 명이 참석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김근태는 남영동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러나 풀려난 것이 아니었다. 9월 26일 오후 검찰청 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이날 검찰청에서 호송되는 순간 부인 인재근을 만났다. 그동안 남편의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당일 검찰로 이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던 중 해후한 것이다. 짧은 순간에 부인에게 발뒤꿈치의 고문당한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이 기적 같은 일이 김근태의 고문실상이 세상에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기적이었다.
계단을 경찰 한 사람과 본인의 처가 부축해 내려가면서 나는 망설이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말했습니다. 불과 1분여 동안이었습니다. 그 고문은 나 개인에 국한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얘기했습니다. 고문 얘기를 듣고 처가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고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문제도 아니었고 도무지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에 나는 말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침착하게 말하면서 신고 있었던 양말을 벗었습니다. 발뒤꿈치의 상처들과 발등의 꺼멓게 탄 부분을 보여 주었고, 팔꿈치의 상처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만남은 정말 기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관례와는 달리 늦은 오후에야 도착한 본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정치군부의 고문과 그 은폐행위가 폭로되고 국내외적으로 맹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게 된 이 만남은 본인에 대한 영원한 기적일 것입니다. (주석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