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설비 최강 업체'나노'
기술.복지 갖추자 인재 몰려
수도권.지방 일자리 미스매치
지방 강소기업 키워야 풀려
외환위기가 절정이던 1999년 초.당시 경상대 교수로 있던 신동우(53) 나노 대표는 절망감에 빠졌다. 자신이 가르친 석사 졸업생이 나왔지만 직장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핸디캡 앞에선 석사 졸업장도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하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아예 제자들이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자 결심했다"며 "그해 가을 캠퍼스 안에 졸업생 1명, 재학생 3명과 함께 창업했다"고 회고했다. 현재 경북 상주에 본사를 둔 탈질 촉매(SCR) 전문기업 '나노'의 시작이다.
신 대표는 지방대 출신을 채용하고, 각종 비용이 저렴한 입지 여건을 활용해 회사를 키워갔다. 현재 나노는 직원 100여 명에, 연매출 360억원을 올리는 강소기업으로 컸다. 국내 SCR의 90%를 나노가 공급한다. 지역경제 발전과 일자리 창출 등에 기여한 공로로 '상주 시민상' '경북 기술대상'도 받았다. 지방에서 뿌린 창업의 '씨앗'이 중견기업으로 '열매'를 맺고, 나아가 지역에서 육성한 인재들이 지역 산업현장에서 활약하게 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셈이다.
회사가 경쟁력을 갖추자 인재가 모이기 시작했다. 직원 가운데 20명정도가 석.박사 출신이다. 국내 명문대는 물론 해외 유학파 인력도 있다. 미국 오리건주립대를 졸업한 과주섭(31)대리는 "틀에 박힌 대기업보다 미래가 밝은 중소기업에서 날개를 펴겠다"고 이 회사를 택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년은 여전히 수도권 일자리에 목을 맨다. 16일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에 따르면 '대졸 취업생의 타 지역 이탈률'은 수도권의 경우 71.9%, 호남.강원권은 이 비율이 50%를 넘는다. 대졸자 절반이 자신이 기반을 둔 곳을 벗어나 수도권 등에서 일자리를 찾는다는 의미다.
신용한 청년위원장은 "취업준비생은 수도권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반대로 지방 기업은 젊은 인력을 구하지 못하는 서울.지방 간 '일자리 미스매치가 심각하다"며 "이런 인재 유출은 지역 산업현장의 창의성을 떨어뜨리고 잠재성장률을 악화시킨다"고 우려했다.
희망의 싹은 자라고 있다. 탄탄한 지방 강소 기업이 늘면서 여기에서 자신만의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가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의 가정용 전열기기 기업 보국전자에서는 여름이 되면 2M높이의 '수출용 박스'에 양모.섬유 같은 원재료를 넣어 보관한다. 종이로 된 박스가 습기를 흡수해 원재료의 상태를 유지해주는 데다, 박스를 재활용할 수 있어 1석2조다.
지난달 25일 새벽 광주종합터미널은 말끔한 양복을 입은 젊은ㅇ들로 북적였다. 서울에서 진행하는 채용 면접시험에 응시하는 취업준비생들이다. 이진호(27)씨는 "왕복 버스요금, 식비 등을 합치면 하루 상경비용이 8만원 정도가 드는데 부담이 크다"며 "광주.전남의 채용인원이 적다 보니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씨처럼 '괜찮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들이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적인 일이다. 지방 구직자의 역량은 높아진 반면, 괜찮은 일자리는 수도권에 집중돼 있는 탓이다. 수도권과 가까운 충남과 제주를 제외한 여타 지방의 청년 고용률은 전국 평균(40.4%)를 밑돈다.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 조사),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정재훈 원장은 "지방-서울 간. 대기업-중소기업 간 일자리 수급 불균형 문제를 풀 실마리가 바로 지방 강소기업을 키우는 데 있다"고 말했다.
길은 보인다. 차별화된 기술력에 대기업 못지않은 복지. 근무여건을 갖춘 지역 강소기업이 늘면서 지방 기업 생태계를 바꿔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주에 본사를 둔 인터넷 기업 IMI는 '전주의 구글'로 통한다. 2002년 전주 원룸에서 대여섯 명이 모여 시작한 회사가 지금은 직원 250여 명의 강소기업으로 컸다. 직원들은 근무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스크린 골프장, 풋살장, 당구장, 헬스장 등을 이용한다. 생일, 결혼기념일 등 각종 대소사는 물론 비가 오면 우산까지 챙기는 배려가 이어진다. 평균 근속년수는 약 10년. 인터넷 업계의 근속연수가 3년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업계 최고 수준이다. 김삼흠 부사장은 "직원이 행복해야 회사가 성장한다는 생각으로 소통한다면 지방 기업도 얼마든지 우수한 인력을 유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역의 경쟁력이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글로컬'시대에 강소기업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지방이 하나의 독립된 경제권역으로 자리 잡으려면 지역 청년들이 미래를 설계하고 도전할 만한 지역 일자리가 많아져야 한다. e러닝 콘텐트 등을 만드는 피엔아이시스템은 직원의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 2010년 제주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서울에선 외주 용역에 의존하던 사업 구조가 제주에선 직접 콘텐트를 생산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국제대회에서 잇따라 수상하며 제주를 대표하는 콘텐트 기업으로 컸다. 이 회사는 제주대.제주도청 등과 협력해 제주 애니메이션 인력 양성과정을 만들었고, 맞춤형 인력을 제주에서 직접 채용한다.
지방 강소기업은 현실적인 취업 대안이기도 하다. 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300인 이상 기업의 정규직 등 이른바 '선망 일자리'는 최근 10년 새 45만 개 이상 늘었지만 여기서 근무하는 청년층(15~29세)은 7만5000명 이나 줄었다. 2005년 선망 일자리의 22.6%를 차지했던 청년층의 비율은 올해 16.7%에 불과하다. 청년층의 좋은 일자리 신규 진입이 막혀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청주대를 졸업한 현수진(27)씨는 금융회사 최종 면접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신 뒤 지방 강소기업으로 눈을 돌렸다. 취업사이트 등에서 회사의 성장성과 비전 등을 꼼꼼히 살핀 그는 지난 8월 충북 진천의 산업용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기업인 에스폴리텍에 입사했다. 그는 "각 지방의 강소기업으로 시야를 넓히는 것도 취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방대 취준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희망근무 지역은 지방(61.5%)이 수도권(38.5%)를 앞선다. 일자리 창출 측면에서도 대기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지방 중소기업을 키우면 더 만들 수 있다. 지방 중소기업을 키우면 중견. 대기업으로 성장해 일자리를 더 만들 수 있다. 세계경제연구원(IGM) 글로벌 전한석 대표는 "국내에도 독일의 '히든 챔피언'처럼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지역 중견기업이 많다"며 "수두권 못지않게 근무.생활 여건이 갖춰진 회사도 적지 않은 만큼 지방 기업 취업을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