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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 | 그냥 38 | 2008-12-03 오후 6:03:39 |
이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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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뉴잉글랜드를 선택했다. 첫째, 뉴잉글랜드는 인디언들에게서 잔인하게 빼앗은 땅이기는 하지만 종교적 정치적 반골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지금도 뉴잉글랜드는 신중하고 절제할 줄 아는 반골들의 땅이다. 여기서는 공개적으로 내놓을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반대의견이 암암리에 용인되고 존중되고, 때로는 명예로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뉴잉글랜드 토박이들은 새 이주민들이 지나칠 정도로 남의 눈에 거슬리게 행동하지 않는 한 무척이나 관대하고 친절하다. 뉴잉글랜드 토박이들은 사생활을 존중하고 힘겨운 육체노동을 높이 평가한다. 현재 이 지역을 압도하고 있는 정치적 보수주의에도 불구하고 토박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가 털어놓는 자리인 읍민회를 모든 사람들에게 열어놓고 있다.
뉴잉글랜드의 기후조건은 대단히 변덕스러워서 예측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뉴잉글랜드의 오늘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조금만 기다려라. 조금만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나 더 화가 날 것이다. 날씨가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라는 옛말이 있을 정도이다. 한마디로, 뉴잉글랜드의 날씨는 여행객이나 현지인들을 절대로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다. 남부나 남서부에서처럼 끊없이 햇빛만 내리쬐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날들이 계속된다면 얼마나 따분하겠는가.
뉴잉글랜드에도 코네티컷 주처럼 토양이 기름진 강 유역이 있지만, 뉴잉글랜드의 땅 대부분은 돌이 많고, 얼음 같은 표석과 기성암의 노출로 평탄치가 않다. 농토는 전반적으로 빈약하지만 그런 대로 기름지고, 무리한 경작이나 관리 소홀로 토양이 손상되거나 고갈되지 않은 곳에서는 꽤 많은 수확물을 거둬들일 수 있다. 암석이 많은 언덕빼기의 숲지대 땅들이 다 그렇듯이, 고르게 분산되어 내리는 연평균 강우량이 풍작을 결정짓는 가장 커다란 요인이다. 경치로 말하자면 뉴잉글랜드는 그림엽서에서 볼 수 있는 온갖 풍경을 거의 다 갖추고 있다. 언덕과 계곡, 가파른 산, 기복이 완만하고 물이 많은 시골 등, 뉴잉글랜드의 경치는 아름다우면서도 변화무쌍하다. 뉴 잉글랜드에는 시내와 강과 연못과 호수가 많다. 또 한적한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인적드문 암초투성이의 해변이 더없이 좋은 휴식처가 된다. 메인 해안만 해도 길이가 직선거리로 2백 50마일이며, 시간이 있고 마음이 내켜서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길을 구석구석 따라가 본다면 2천5백 마일은 족히 된다.
뉴잉글랜드의 땅 가운데 적어도 4분의 3은 아직까지 숲으로 남아 있다. 도끼와 톱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뉴잉글랜드에서는 건물밀집지역만 벗어나면 거의 공짜로 장작을 얻을 수 있다. 사실 전기와 석유와 천연가스와 압축가스의 사용이 보편화된 뒤로 뉴잉글랜드 시골에서는 공짜 장작이 그냥 나뒹굴거나 그 자리에서 소각되거나 마을 쓰레기장에 내버려진다.
우리가 뉴잉글랜드에서 살기로 결정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선택의 문제였다. 우리는 미국의 행락지와 휴가지를 대부분 가보았다. 하지만 그런 곳은 건축법과 지역제가 적용되어 자급농이 거의 불가능할 뿐 아니라, 땅값과 임대료와 세금이 치솟아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급농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지역에서는 사방에서 장사꾼들이 주초부터 주말까지 밤낮으로 소리쳐댄다. 건물과 놀이문화와 사회생활이 모두 천편일률적이다. 노동은 조롱의 대상이 되고, 기생생활은 고상한 것으로 찬양된다. 미국 남서부와 남동부에서만 이런 게 아니다. 그 사이에 낀 '환락'지역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뉴잉글랜드도 여름철에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릴지 모르지만, 이곳 주민들 대다수는 여전히 자급자족을 존중하고 검소한 생활을 한다. 그리고 유흥가와 관광중심지, 업무시설, 싸구려 술집같이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면 간접비(부동산값, 세금, 지대, 금리)가 미국 표준치에 비해 상당히 저렴한 편이다. 뒷길에 위치한 벌목지와 오래되고 초라한 건물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자급농 생활자로서 간접비를 적게 들이고 자급농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미국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정된 자본과 건강, 협력이 잘 되는 가정, 공들인 만큼만 얻는다는 원칙에 입각해 자연을 다룰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뉴잉글랜드는 미국에서 자급농을 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 축에 든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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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농으로 생계문제가 해결되는 않는다. 그러나 자급농은 많은 사람들에게 보통 정도의 정력과 에너지와 목표와 창조력과 결단력을 가진 가족이라면 경쟁과 탐욕과 약탈을 기반으로 한 문화의 멍에를 계속 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고도 남을 만큼 큰 위력을 발휘했다.
미국 도시와 도시 근교의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단위로서, 그리고 사회집단으로서의 모습을 사실상 잃어버렸다.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성장한 나는 가족들과 한지붕 밑에서 자고, 정해진 식사시간에 한자리에 모이고, 함께 놀고, 함께 책을 읽고, 함께 얘기하고, 함께 일하고, 희로애락을 함께 느꼈다. 의견 차이도 있고 대립도 있고 다툼도 있었지만, 부모와 자녀들은 가족이라는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책무를 알고 자신이 맡은 집안일을 수행했으며 가정생활의 기쁨을 누렸다. 부모님의 집에서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하루 일과를 준비했다. 정해진 식사시간이 되면, 모두 식탁의 자기 자리에 와 앉았다. 빈자리가하나라도 있으면, 빠진 사람이 와서 자리를 채울 때까지 모두 식사를 시작하지 않고 기다렸다. 모이 아파서 빠진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사정 얘기를 듣고 난 다음에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식탁에 냈다. 자기가 먹을 음식의 양은 각자 알아서 정했지만, 일단 자기 접시에 받은 음식은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했다. 아이들을 구슬리고 달래거나 설득하는 일은 없었으며, '아이들이 가장 잘 안다'는 꿈 같은 얘기도 그 시절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1890년대 미국 촌락의 가정생활과 우리가 50년 뒤에 방문한 미국 도시와 도시 근교 가정들의 생활은 엄청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교육문제를 짚어보기 위해 미국의 빈민가들을 순회한 기록은 [오늘의 미국]에 담겨 있다). 가정생활의 친교와 예절과 규율은 갈가리 찢긴 상태였다. 아파트생활이보편화되었고, 이혼과 별거로 인해 무정형의 가정들이 흘러가는 구름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고전적인 의미의 가정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가정에 길들여지지 않았다.
몇 가지 요인이 결합해 1900년 이후 반세기 동안 미국 가정의 구조와 기능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첫번째 요인은 드넓은 야외에서 혼잡하고 비좁은 주거지역으로의 이동이다. 시골과 마을에서 읍내와 도시로, 농가와 농장에서 도시의 주택과 아파트로, 맑은 공기와 신선한 물과 햇빛과 달빗에서 매연과 불소를 넣은 썩어가는 물과 인공조명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전통적인 미국 가정은 식구들이 모이는 장소이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원칙에 의해 운영되는 작업장이었다. 성인 남녀가 주로 일을 도맡고, 유아와 노인들은 가족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지만, 모든 가족구성원에게 고루 의식주가 돌아가고, 모두가 보살핌과 사랑을 받았다. 식구들은 각자의 능력에 맞게 힘든 일과 가벼운 일을 나누어 했다. 모두가 책임을 분담하고 가정의방침을 이행했다. 가정의 화롯가는 사람들이 몸을 녹이고 양분을 공급받는 자리라는 점에서 사회제도의 상징이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정에 따라 단합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전체적인 패턴은 같았다.
농가와 촌락의 가정에는 대부분 채소밭과 가축, 가내수공업이 있었다. 동틀녘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가족구성원들은 이런 집안일을 수행하고 가정생활을 개선하는 데 모든 시간과 관심을 쏟았다. 집안일을 함께 하다 보면 가족간의 유대가 깊어지고, 사회적 책임감도 싹텄다. 원만한 가정생활이 건강한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을 뒷밭침해 주었던 것이다. 집 근처의 농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들은 점심시간이면 집에 들어와 식구들과 함께 식사하고, 언제나 집안일에 신경을 쓸 수 있었다. 집에 있거나 자주 집에 들락거리는 부모들은 항상 집을 비우는 현대의 부모로서는 바랄 수 없는 권위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가정생활의 경제적 사회적 책임을 맡고 있는 어머니 또한 가족들을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잦은 부재로 일시적인 고아가 되는 자녀들이나, 아침 일찍 학교나 일터로 떠났다 오후 늦게 돌아오는 자녀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가족 분열의 상태에 내몰려 있다. 또한 자기가 먹을 것을 스스로 생산하는 방식에서 슈퍼마켓 쇼핑으로의 전환은 시골 가정의 경제적 기초를 더욱 뒤흔들고 도회지 가정에게서는 가정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기능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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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급농에 관한 이야기를 왜 자급농인가, 왜 뉴잉글랜드에서의 자급농인가, 하는 두개의 질문으로 시작했다. 이제 가장 많이 받았던 세번째 질문을 소개하겠다. 이렇게 풍요로운 사회, 이런 산업회 시대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급농을 시도하는가? 어째서 이 좋은 사회가 도시생활과 기계화와자동화라는 방식으로 제공해 주는 편익을 이용하지 않는가? 그동안의 발명과 발견 들로 인해 자연과 자연력을 상당 부분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에게, 그리고 창조와 변화와 경험을 바라는 인간의 지칠 줄 모르는 충동에 충분한 기회가 제공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의식주의 해결을 위한 기본적인 필수품들을 더 적은 비용으로, 그리고 몸과 마음에 훨씬 이로운 방식으로 얻을 수 잇다고 생각한다. 중상층 가정의 집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많은 기계와 전자제품과 가재도구를 보면서 그것들을 손에 넣는다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나는 타자기보다는 펜으로 글을 쓰고 싶다. 기계적인 운송수단을 쓰는 것도 내키지가 않는다.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 걷는 게 좋다. 발을 땅에 대고, 내 주변에서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을 만큼 느릿느릿 움직이는 게 좋다.
나는 꽤 많은 양의 육체노동을 손수 한다. 오늘 아침에는 곡괭이로 잔디를 떼어내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다음, 잔디 밑에 깔려 있던 진흙을 삽과 외발수레로 퍼 날랐다. 불도저로 했다면 같은 일이라도 시간이 5분의 1밖에 안 걸렸을 테고, 그 소음과 불쾌한 냄새를 견딜 수 있다면 그냥 곁에 서서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나는 작업하는 시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즐기며 개똥지빠귀와 갈매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침 먹으러 들어오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아쉬운 기분마저 들었다. 매일 하루에 열 시간씩을 곡괭이와 삽을 들고 보내고 싶지는 않지만, 몇 시간 정도씩 힘든 신체운동을 하는 것은 즐기는 편이다. 내가 세운 계획이 진척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내가 들인 노력의 결과를 볼 수 잇을 때는 특히 그렇다. 매사에 그렇듯 육체노동을 하는 데에도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한계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내 목표와 계획과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서 최소한의 필요한 노동을 기꺼이 해낼 자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구체적으로 실천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기계의 버튼을 누르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내가 먹는 음식을 슈퍼마켓에서 사거나 통조림을 이용하거나 식당에서 해결하기보다는 내 손으로 직접 기르고 싶다. 어떠한 문화 수준에서든 인간은 먹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고체, 액체, 공기, 햇빛, 방열 같은 생존환경의 요소들을 섭취함으로써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이런 섭취물들이 질 좋은 것인 데다 양까지 적당하다면, 그래서 이런 섭취물의 산물인 인간 유기체가 별 고통없이 정상적으로 제기능을 한다면, 그 결과는 건강이다. 유기체가 고통 없이 정상적으로 안정되게 기능하는 것이 곧 건강아닌가.
건강은 인간 유기체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얼마나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가를 효과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이런점에서 판단컨대, 컴퓨터로 관리되는 미국이라는 자동화 사회는 형편없이 기준에 못 미친다. 미국같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수천만 명의 성인들이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은가 하면, 변비나 불면증, 소화불량, 신경과민 등의 질환을 앓고 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가?
답은 명백하다. 보통의 미국인은 건강이 무엇인지, 혹은 건강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건강이 나빠진 것 같다 싶으면 의사를 찾아가는데, 이 의사라는 사람들은 병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엄청 많지만 건강에 관해서는 자신을 찾아온 환자만큼이나 아는 게 거의 없다. 의사는 '특효약'을 처방하여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는 있지만, 부실한 건강에 따르기 마련인 질병을 예방하지는 못한다. 의사들조차 미국 사회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온갖 질병들을 앓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의사는 본래 건강에는 관심이 없다. 의사의 전문 분야는 질병이다. 만약 세상에 질병이 없다면,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다 건강하다면, 의사들은 사고로 인한 부상이나 유아기와 노년기의 불가항력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것 말고는 할일이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현대인들은 건강에 관심이 없다. 병을 앓을 경우에도 잘못된 생활의 결과라고 단정할 뿐, 올바른 삶을 사는 법과 그것이 가져오는 평범한 결과 - 유기체의 고통 없는 기능 -에 대해서는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게 절망적이다 보니, 우리같이 먹는 것에 까다로운 사람들은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고 가능한 한 질병과 의사를 멀리하게 된다. 물론 양심적이고 의술도 뛰어난 의사들이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뼈가 부러지거나 갈비뼈에 금이 가거나 눈에 가시가 박히거나 이와 비슷한 불상사를 당하면, 나는 의사 친구를 찾아가고 부러진 뼈를 도로 붙여놓는 그들의 기술을 고맙게 받아들인다. 또한 그들과 건강에 관해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들은 내 말이나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여럿이 때 이르게 세상을 떠난다. 이유인즉 그들이 건강에 대해 거의 혹은 전혀 모르며, 알고 있는 것들조차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의사는 메인에 있는 우리 농장으로 블루베리를 사러 왔다가 우리가 힘들게 일하는 것을 보고는 우리처럼 나이 든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많은 에너지가 있을 수 있다는 데 놀라워했다. "댁의 주치의가 누구입니까?" 그 의사가 물었다. 우리는 웃으며 주치의가 없고, 주치의가 필요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 의사는 우리가 채식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극히 절제된 우리의 식생활 때문에 우리 몸 어딘가에 틀림없이 이상이 있거나 부족한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이론은 '사람은 동물성 단백질을 풍부하게 섭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였다. 그는 우리더러 우리가 실제로 겉보기처럼 건강한지 알아보게 자기 병원에 와서 종합검진을 받아보라고 했다. 그의 권유대로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은 결과, 우리의 몸은 굉장히 건강한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가 슈퍼마켓에서 팔고 있는 음식물의 섭취를 거부하고 우리만의 소박한 섭생법을 취하는 것이 이렇게 성과를 거두고 있다.
언젠가 동유럽의 한 마을에서우리를 위한 소규모 환영회가 열려 거기에 참석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 우리는 그곳 사람들이 정성 들여 준비한 음식들을 거절하느라 못해도 일곱 번은 "아닙니다"를 되풀이해야 했다. 처음에 나온 것은 꼬냑이었다. "고맙습니다만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러자 와인을 마시겠느냐고 했다. "아니요, 됐습니다." "그렇다면 블랙커피라도 한 잔 드시지요." "고맙습니다만 우리는 커피나 차를 마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 좀 드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샌드위치가 흰 빵에다 고기와 생선을 얹어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번에도정중하게 거절하고 우리는 채식주의자라고 말했다. 달콤한 초콜릿 쿠키와 자극성이 강한 피클, 후추 등이 식탁에 올라 있었는데, 다들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음식이었다. 담배가 한 순배 돌았지만, 우리는 이것도 거절했다. 우리는 물, 그것도 광천수를 마시는 것으로 만족했다.
우리를 무례한 손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사실 우리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이 대다수 사람들의 기준과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꼭 다수의 기준을 따라야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세계를 여행할 때는 우리의 정치적 성향보다 식사에 관한 우리의 근본주의가 더 문제가 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치적 견해보다 식사법이 공격을 받는 경우가 더 많은데, 그래서 우리가 식사 초대에 응하는 게 과연 잘하는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종종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원칙을 지킨 경우 가운데 재미있는 예도 있었다.
내가 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어느 가정에 초대를 받았을 때의 일이다. 점심 식탁에 큼직한 청어구이가 올라 있었다. 주인이 내 접시에 청어 한 조각을 덜어주었을 때, 나는 미리 알려두지 못해 미안하지만 나는 채식주의자라 생선은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인 부부는 자신들도 고기를 먹지않는데, 나를 위해 생선을 준비한 것이라고 대꾸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들은 음식 접대받는 사람을 불편하게 할 정도로 채식을 철저하게 지키지는 못한다고 했다. 내가 예의를 차리기 위해 청어를 먹었더라면, 나와 주인 부부 모두 단지 사회적 격식 때문에 원칙을 잠시 보류할 뻔했던 것이다.
강연을 가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식사하는 만찬에 참석할 때가 종종 있는데, 아무리 풍성하고 정성이 깃들었다 하더라도 나는 소화하기에 좋지 않은 음식들을 거절하고 미리 준비해 온 사과나 오랜지를 꺼내 먹는다. 사실 우리 같은 이단아들은 집을 멀리 떠나거나 격식을 갖춰야 하는 모임에 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사교를 위해 우리의 몸과 위장을 쓰레기통으로 만들지 않도록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워놓았다. 우리는 유해하거나 유독한 음식을 거부한다. 그럴듯한 레스토랑 음식을 앞에 놓고도 우리는 사과와 생수를 택한다.
1920년대 초 랜드 스쿨에서 시사연구 강좌를 맡고 있을 때, 나는 건강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초봄의 맑은 날이었다. 나는 오전 내내 책상 앞에 붙어앉아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느덧 정오가 되었다. 시간이 그렇게 된 줄 몰랐는데, 시계를 보니 12시 30분이었다. 45분 후에 시사연구 강의를 시작해야 했다. 나는 아침식사를 한 뒤로 아무것도 못먹은 상태였다. 남은 45분 동안 14번가에 있는 중국 식당으로 달려가 서둘러 점심을 먹을까, 점심은 거르고 유니온 광장으로 나가 30분 정도 햇빛을 쬐며 참새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까?
어릴 때부터 나는 버나르 맥패든의 잡지 <피지컬 컬처> 애독자로 그의 건강처방 - 충분한 운동, 신선한 공기와 햇빛, 간소한 식사, 금식 -을 신봉해 왔다. 나는 그때까지 집에서나 밖에서나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식사를 해왔다. 그런데 끼니를 거른다면 강의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약간의 고민 끝에 나는 점심을 거르고 1시까지 광장에 앉아 햇빛을 쪼였다. 시사연구 강의는 아무 탈없이 진행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잊을 수 없는 교훈 하나을 얻었다. 인간의 신체가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양껏 식사를 한 뒤에는 적어도 두세 시간 동안 음식을 소화하는 데 에너지가 소모된다. 의욕이 넘치는 많은 청중을 상대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일에 충분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면, 식사를 거르는 편이 낫다. 음식을 소화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코앞에 닥친 일에 있는 에너지를 다 쏟은 다음 식사는 나중에 하면 된다.
금식에는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단식은 미국에서나 다른 나라에서나 저항의 한 형태이다. 헬렌과 나는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같이 온 국민이 폭식을 하는 날에 자발적으로 먹지 않고 지냄으로써 저항의 수단으로서의 금식을 실천한다. 수억의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평범한 식사조차도 예의를 벗어나는 행위처럼 보인다. 우리는 일 주일에 하루씩 금식을 한다. 소화기관에 쉴 시간을 주고, 주부에게 휴가를 주고, 우리의 하루를 먹는 것보다 좀더 의미있는 활동으로 채우기 위해서이다. 일요일을 금식일로 삼는 것이 가장 좋다. 아무래도 일요일은 일과가 주중과는 다르고, 많은 사람들이 소화 안 되는 음식들로 배를 과도하게 채우는 날이니 말이다.
금식, 소박한 식사, 운동, 휴식은 수명을 조절하거나 생명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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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뵙니다^^
사시사철이 있어 아름다운 우리나라 그 곳의 구석구석을 걸어다니며 느껴보고 싶다는 꿈을 꾼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요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이 정답일까요
오늘은 한번도 정답이라는게 없다고 생각했던 인생에 혹시나 정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아니 그 정답을 무지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입니다
멋진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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