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긴 글입니다. 모니터로 보기엔 좀 힘드실 겁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화제작 "얼음밥"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본문중에서.-이외수
얼음밥
1
나는 세상으로부터 유배당한 기분으로 혼자 인적 없는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개떡 같은 세상.
나는 어디에서도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사극을 보면 옛날의 유배자들은 떠나기 전에 임금님이 거하는 방
향으로 부복을 한 채 전하, 부디 만수무강하옵소서 하는 따위의
대사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한다. 임금님에 대한 증오심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표정이다. 정말로 대단한 인품이 아닐 수 없다.
얼마나 수양을 쌓으면 나도 그런 인품을 가질 수 있을까. 나라면
그런 대사를 구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전하, 눈에 백태
라도 끼었나이까 하는 따위의 대사를 내뱉었을 것이다. 나는 산길
을 걷다 말고 잠시 돌아서서 세상을 향해 팔뚝질이라도 해주고 싶
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
각은 들지 않았다. 이제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대로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한평생을 이름없는 음지식물로 살다가 목숨
이 다하면 산그늘에 파묻혀 흙으로 돌아가는 절차만이 남아 있었
다. 소설가의 꿈은 버리지 않았으나 나로서는 너무나 요원한 꿈이
었다. 너무나 실낱 같은 희망이었다.
지프 한 대가 간신히 기어오를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비좁은 산
길이었다. 그러나 자동차가 지나다닌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개통이래 보수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상태
같았다. 몇 걸음만 걸어도 커다란 돌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고,
몇 걸음만 걸어도 깊은 고랑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사방에
높고 가파른 산들이 가로막혀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인가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철쭉꽃만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어디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여행용 가방 하나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원고지와 볼
펜과 사전. 쌀과 마른반찬과 수저. 그밖에 간단한 생활용품 몇 가
지가 들어 있었다. 그래도 가볍지는 않았다. 수시로 가방을 내려놓
고 쉬어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방의 무게가 가중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의 무게도 가중되고 있었다. 산길은 가도가
도 끝이 없었다. 몇 번이나 중도에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걸어도 목적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10리 건너 한 채씩 집이 보였다. 집들은 한결같이 길로부터 멀
리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집 옆에는 화전이 일구어
져 있었다. 사람들은 쟁기를 들고 농사일에 열중해 있었다. 나는
얼마나 더 가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또아리
를 틀고 있다 인기척에 놀라 풀숲으로 사라지는 독사를 만나기도
했다. 때로는 도토리를 줍고 있다 인기척에 놀라 나무 위로 도망
치는 다람쥐를 만나기도 했다. 다리가 아파 오고 있었다. 배도 고
파 오고 있었다. 이제는 너무 깊이 들어와서 되돌아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얼마를 걸었을까.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
스로 억제하며 산모퉁이 하나를 돌자 그제야 건물 한 채가 보였
다. 인제남국민학교에 예속되어 있는 객골분교였다. 교실 한 칸에
직원실 한 칸. 뒤쪽에 조그만 사택이 보였다. 운동장은 부잣집 앞
마당보다 좁아 보였다. 전체를 다 합쳐도 본교 화장실보다 못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선생이지요.
분교장이 운동장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40대 후반의 나이
였다. 온화해 보이는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이선생이라는 호
칭에 적지 않은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 다른 사람을 기다
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전달부라는 임시
고용직 신분이었다. 이선생은 당치도 않은 호칭이었다. 통례에 따
르면 이씨가 마땅한 호칭이었다.
나는 마누라의 병환이 위중해서 비공식적으로 학교를 비우는 사
례가 많으니, 그때는 이선생이 수업을 대신해 주셔야 합니다. 교대
출신이니까 그만한 자격이 충분하시리라는 판단입니다. 본교에서
도 그래서 이선생을 선택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학부형들이나 아
이들에게도 이선생으로 소개할 터이니 그리 알고 계십시오. 폐교
직전인 상태라 교육청에서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실
정입니다. 본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달이 지나도록 공문 한
장 구경하기 힘들지요. 전화는 없습니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으
니까요.
아무래도 교대 출신이 전달부로 전락했을 때의 자존심을 고려해
서 나를 이선생으로 부르는 방법을 창출해 낸 모양이었다. 한편으
로는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비애스럽다는 생
각도 들었다.
학생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농번기에는 일손이 모자라 아
무도 학교를 보내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농번기가 아니라도 가
만히 내버려두면 월평균 출석률이 3일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수시로 가정방문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학교현황에 대한 설명
을 듣고 나니 어느 새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여기는 세상에서 제일 늦게 해가 떠서 세상에서 제일 빨리 해가
집니다.
분교장의 말이었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분교 운동장보다 약간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었다. 산들이 사방으로 하늘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머
리 위에 깊은 우물 하나가 만들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물
속으로 놀이 번지고 있었다. 나는 허기 때문에 쓰러져 버릴 지경
이었다. 분교장은 내일 아침에 등교해서 학부형들과 학생들에게
인사를 시켜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산길을 내려가 버렸다.
나는 우선 밥솥과 그릇들을 개울로 가지고 나가 깨끗이 씻었다.
밥을 안치고 나니 순식간에 어둠이 밀려들었다. 램프를 켜고 짐들
을 정리했다. 첩첩산중. 개울물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비
로소 외부와의 교신이 일체 두절된 오지에 자신이 유배되어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뼈저린 외로움이 늑골 속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2
분교장은 부인의 악화된 병세 때문에 업무 일체를 나에게 맡겨
버린 채 1주일에 한 번 정도만 학교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위독
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농번기가 끝나자 학생들이 더러 학교로 나오기는 했지만 언제나
극소수였다. 많아야 5명을 넘지 않았다. 학교가 존립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나는 선생도 아니었고 전달부도 아니
었다. 날마다 가정방문을 통해서 학교에 나오지 않은 학생들을 개
별적으로 지도해 주는 가정교사였다.
그러나 학부형들은 나의 가정방문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 학부형들이 접대에 부담을 느껴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집을 방문하더라도 일체의 부담감을 느낄 필
요가 없다는 사실을 누차 강조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해였다. 학부형들은 자식을 가르치는 사실 자체를 전적으로 달
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학부형들은 모두가 화전민들이었다. 산에다 불을 질러 목초를
제거하고 척박한 땅을 일구어 밭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었다. 물론 불법적 행위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유일한 생계수단
이었다. 그들에게는 공통적인 적대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우리는
배운 놈들한테 속아서 전재산을 날리고 여기까지 흘러 들어와 화
전민이 되었다. 바로 배운 자들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타인이 배운 놈들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배운
놈들을 경계의 대상으로는 삼을 수 있지만 투쟁의 대상으로는 삼
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타인들과의 접촉을
병적으로 꺼리고 있었다. 집들도 각기 멀리 떨어진 장소에 독채로
은폐되어 있었다. 자기들끼리도 발길을 멀리하려는 의도 같았다.
그들이 신뢰하는 대상은 오직 화전과 곡식들뿐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불가항력적인 가난의 사슬에 포박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거의가 무학자들이었다. 전교생 17명의 학부형들 중
에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겨우 3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학부형들은 자신들의 불행이 무지나 무능에 의
해서 초래된 결과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오직 배운 놈들의
농간에 의해서 초래된 결과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정부는 얼마간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하고 화전민들을 합법적 거
주지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단계적으로 실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결코 선의적인 소행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피땀으로
일구어 낸 마지막 터전조차 배운 놈들이 박탈하려 드는 악행에 불
과했다. 그들이 감내하고 있는 일체의 불행 뒤에는 배운 놈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배운 놈들이 나쁜 놈들이다. 배운 놈들이 법을 만들어서 의무적
으로 학교를 보내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보내기는 하지만 우리
한테는 손해가 막심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밭이라도 한 고랑 더
파면 감자 한 알이라도 더 먹을 수 있지 않느냐. 왜 자식들을 학교
에 보내서 자기들처럼 나쁜 놈들을 만들려고 하느냐. 학부형들은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내게 묻고 있었다.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이 없는 소피스트적 명제였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학부형들은 계산을 해야 할 때 거의가 단순한 가감법을 쓰고 있
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사용해야만 계산이 가능한 사람까지
있었다. 다른 계산법을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
른 계산법을 몰라도 지금까지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았다는 견해 때
문이었다. 곱하기나 나누기를 안다고 곡식이 많이 열리지는 않는
다는 것이었다. 페스탈로치가 온다고 하더라도 설득이 불가능하리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거의 병적으로 타인의 접근을 꺼리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너무나 견고하게 결빙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녹여 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았으나 전혀 실효를 거둘 수가 없었다. 구급약을 사다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도 무슨 계략이 있는 줄로 알고 더욱 경계하는 눈빛을
보였고,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밭일 따위를 거들어 주어도 무슨 계
략이 있는 줄로 알고 더욱 경계하는 눈빛을 보였다. 나는 화전민
들 속에서조차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었다.
학생들 역시 한결같이 배운다는 사실을 지겨워하는 눈치들이었
다. 가정방문을 통한 개별지도는 주로 밤에 시행되었는데, 집들이
여기저기 먼 거리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한 바퀴 돌고 나면 녹
초가 되어 도저히 원고지를 들여다볼 기력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르치려고 부지런을 떨어 보았으나 도
무지 진척이 되지 않고 있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하루 종일 밭일
에 시달렸기 때문에 책을 펼쳐 놓기가 무섭게 졸음에 빠져드는 습
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 때는 공부가 고문이 된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간단히 끝내고 물러서는 방법을 강
구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자신이 너무 오래도록 노래를 잊고
살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어느 새 나조차도 마음이 결빙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전율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동요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동요는
따스한 노래의 모닥불이었다. 나는 동요를 통해 학생들의 마음만
이라도 결빙되지 않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학생들이 알고 있는 가락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학부형들이
소몰이를 하면서 부르는 민요조의 가락이었다. 어떤 가사든지 마
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애국가조차도 그 가락에 맞추어서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동요를 가르치려고 해도 악기가 없었다. 학교에 장난감
처럼 작은 풍금이 있기는 했으나 페달도 건반도 모두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육성으로 가르치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
다 어려운 일이었다.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해내고야 말았다. 무려 3개월이라는 기간을 허비한 끝에 동
요 하나를 전교생이 부를 수 있도록 만드는 과업을 성취하고야 말
았다. 반달이라는 동요였다. 이따금 어디선가 푸른 하늘 은하수 하
얀 쪽배에 하는 학생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나는 감
격에 겨워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성악가도 내게 그런 감격을 안겨 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학생들은 모두가 최악의 학습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크
레파스를 가지고 있는 학생도 없었고, 도화지를 가지고 있는 학생
도 없었다. 컴퍼스나 삼각자나 분도기 따위는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 학생도 있었다. 대부분이 교과서와 공책과 연필과 지우
개만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맨손으로 등교하는 학생까지 있
었다. 오래 전에 아버지가 교과서와 공책으로 담배를 말아 피워
버렸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등교한 몇 명의 학생들에게 다음날 감자 한 알씩을 가
지고 오라는 과제를 낸 적이 있었다.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몇
학년 자연과목이었더라. 기억이 확실치는 않았지만, 감자에서 녹말
을 추출하여 종이에다 글씨를 쓴 다음 열을 가하면 보이지 않던
글씨가 드러나는 현상을 실험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서 분교장이 아연해질 수밖에 없는 소식 하나를 전해 주었다. 본
교에 들러 보니 학부형 하나가 교장실을 찾아가서, 내가 반찬을
해먹으려고 학생들에게 감자를 공출했다는데 이런 파렴치한 사람
을 그대로 내버려둘 작정이냐고 격분한 목소리로 항의를 하고 돌
아갔다는 것이었다. 정말 어디를 가도 개떡 같은 세상이라는 생각
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학부형들의 그 철두철미한 배타성에
그만 두 손을 들어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학생들을 가르
치는 일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학생들과 나 사이
의 간격은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드실래유.
어느 날 학생 중의 하나가 도망치는 뱀을 맨손으로 재빨리 낚아
채서 능숙한 동작으로 껍질을 제거하고 먹어 보겠느냐고 내게로
내밀었다. 나는 그들과 동류항이 되기 위해서 날뱀을 이빨로 한
토막 썩둑 잘라먹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덕분에 가을 농번기가
끝났을 때에는 월평균 출석률이 세 배로 늘어나 있었다. 분교장은
여전히 부인의 병환을 핑계로 결근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는 한
달에 두 번 정도밖에는 얼굴을 내밀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분교장은 현실과의 싸움에 극도로 지쳐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어떤 사람과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 첩첩산
중에서 몇 년씩 혼자 살아온 분교장으로서는 당연한 처사라는 생
각이 들었다. 부인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사실도 왠지 조작극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을 탈피하고 싶은 심정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토요일이면
이따금 인제로 나가 소주병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단절감 때문에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
이었다. 화전민들은 배운 놈들의 농간에 의해서 이리로 흘러 들어
왔다지만, 나는 어떤 놈들의 농간에 의해서 이리로 흘러 들어오게
되었을까. 때로 소주를 마시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나는 불현듯
소설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3
겨울이 오고 눈이 내렸다.
한 번 눈이 내리면 무릎까지 빠질 지경이었다. 나는 철저하게 고
립되어 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극도의 외로움을 참
아내며 소설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편도 완성시킬 수가
없었다. 내가 보아도 엉망이었다. 우선 소설의 기본이라는 문장조
차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총이 없는 포수였
고, 그물이 없는 어부였다. 사유의 하늘 위로 소설이라는 이름의
새들이 아무리 떼지어 날고 있어도 잡을 수가 없었고, 의식의 바
다 속으로 소설이라는 이름의 고기들이 아무리 떼지어 헤엄치고
있어도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런 첩첩산중으로의 유배를 자처한 이유는 문학에 대한
두 가지 큰 빚을 갚겠다는 의도에서였다.
첫째는 강원일보 신춘문예에서 나를 당선시킨 김동리 선생님과
유주현 선생님에 대한 빚을 갚아야 했다. 그분들은 내가 응모한
단편소설이 다소 어리고 서툴기는 하지만 장래 개성 있는 작가로
발전할 소지가 엿보인다고 당선 이유를 밝히고 있었다. 만약에 내
가 개성 있는 작가로 발전하지 못한다면, 그분들은 틀림없이 당시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안목이 없
는 작가로 평가받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은 문단의 거목들이었다. 하찮은 시정잡배 하나로 인해서
그분들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는 없었다.
둘째는 문학을 위해 일생을 바친 동서고금의 여러 문인들에 대
한 빚을 갚아야 했다. 나는 너무도 춥고 배가 고파서 신춘문예에
응모했을 뿐이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상금에 눈이 어두워서 신
춘문예에 응모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죄책
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분들이 평생을 바쳐서 숭배해 온 문
학을 고작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는 일시적 방편으로 삼았다는 사
실에 혐오감까지 치밀어오를 지경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의 빚을 청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감동적인 소설을 쓰는 일이었다. 그러나 방법을 알
고는 있었지만 능력을 갖추지는 못한 상태였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작정이었다. 그러자면 소설의 가장
기본이 되는 문장력부터 습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런 경우 내가 춘천교육대학을 7년 동안 다닐 기회가 있었다는 사
실은 더없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화가에 대한 꿈이 꺾여 버린
뒤 나는 주로 문학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려다니고 있었다. 그때
친구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각종 문학서
적과 현대문학 영인본을 모조리 섭렵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
는 어떤 작가들이 어떤 문장을 주무기로 삼고 있는가를 아주 소상
하게 간파할 수가 있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서술적 문체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묘사적 문체로 소설을 쓰고 싶었다. 소설은 문학이고 문학은
예술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아름다움은 서술
되어질 때보다 묘사되어질 때 더욱 선명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나
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고정관념이 문제였다. 문학성을 내포한 문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의 외형적 묘사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
다. 반드시 내면적 묘사가 가미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설탕은
달다. 태양은 눈부시다. 말은 발가락이 없다. 거지는 가난하다. 고
양이가 쥐를 먹는다. 기린은 목이 길다. 이런 따위의 표현은 너무
나 상투적이어서 아무리 음미해 보아도 생명력을 느낄 수 없는 고
정관념의 껍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탈피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려고 해도 그
사물의 외형에 가리워져 있는 고정관념의 껍질을 깨뜨릴 수가 없
었다. 나는 차츰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날마다 방 안 가득 파
지만 쌓여가고 있었다.
나는 정신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와신상담臥薪嘗
膽이라는 고사성어가 떠올랐다. 오나라의 임금이었던 부차가 아버
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복수의 일념을
불태운 고사. 그에게 패배한 월나라의 임금 구천이 쓸개를 핥으며
보복을 다짐한 끝에 부차를 패배시킨 고사에서 유래된 성어였다.
나는 소설이라는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정신을 강화시킬까를 모색해 보았다. 밥이 떠올랐다. 일찍
이 밥만큼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존재는 이 세상에 없었다.
나는 한 솥 가득 밥을 지어서 바깥에 내다 놓았다. 얼음밥을 만들
기 위해서였다. 나는 얼음밥으로 끼니를 연명하면서 묘사적 문체
를 획득하는 일에 골몰해 있었다. 더럽게 눈물겨운 시간이었다. 얼
음밥은 도저히 수저로는 먹을 수가 없었다. 망치와 못을 이용해서
깨뜨린 다음 으적으적 씹어먹는 수밖에 없었다. 정신뿐만이 아니
라 내장까지도 투명해지는 느낌이었다. 한솥 가득 밥을 지어서 바
깥에 내다 놓으면 1주일은 족히 정신과 내장을 투명하게 유지시킬
수가 있었다.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방문을 열어 놓
고 흩날리는 눈보라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글 한 줄이 머
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습관적으로 원고지에다 옮겨 보았다.
수천만 마리의 나비떼가 어지러이 허공을 날고
단 한 줄이었다. 더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너무 추워서
방문을 닫고 방금 원고지에 옮겨 적어 놓은 글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게 만약 한 줄짜리 시라면 어떤 제목이 어울릴까. 눈보라로 정
한다면 역시 고정관념을 탈피하지 못한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터. 나는 왜 그때 화장터라는 단어가 떠올랐을
까. 혹시 얼음밥을 먹어가면서까지 묘사적 문체를 얻어내려고 발
버둥치는 내게 하나님이 영감이라도 내려주신 것이 아닐까.
화장터라는 제목을 붙이자, 나비떼는 놀랍게도 사자의 소지품을
태울 때 날아오르는 연소물의 사해조각을 연상시키더니 이내 영혼
의 편린으로 변하고 있었다. 제목을 제지공장으로 붙인다면, 나비
떼는 종이조각으로 변해 버릴 것이 분명했다. 내가 원고지에 써넣
은 나비떼는 곤충이 아닐 수도 있었다. 눈보라가 될 수도 있었고,
사해조각이 될 수도 있었고, 종이조각이 될 수도 있었다. 뿐만 아
니라 영혼의 편린까지 될 수 있었다. 관측자의 위치가 어딘가에
따라 내가 빌려오는 사물들은 판이하게 다른 상징성으로 되살아날
수가 있었다. 알았다. 불시에 막혀 있던 시야가 환하게 밝아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마침내 고정관념의 껍질을 탈피하고 있었다.
배반자로부터 보내온 설탕은 달지 않다. 결핵에 걸린 태양은 눈
부실 수가 없다. 발가락이 자라는 조랑말의 당혹감. 구걸을 중단한
거지의 허영. 쥐를 보면 도망치는 고양이의 비애. 목이 짧은 기린
의 절망.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순간 나는 만물들의 외형을 자유자
재로 변형시키면서 상징성을 부여하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제 사물의 외형이 주는 고정관념 때문에 사물의 내부를 들여다
보지 못하는 난관은 극복되어 있었다. 세 솥째의 얼음밥이 비어
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사물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늘을 쳐다보며
앙상한 모습으로 겨울을 지키고 있는 굴참나무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도 알아낼 수가 있었고, 끊임없이 얼음 밑으로 흐르고 있
는 개울물의 도란거림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찌푸린 표정으로
낮게 내려앉아 있는 회색 하늘의 음모도 간파할 수가 있었고, 폭
설을 뒤집어쓰고 묵상에 잠겨 있는 산들의 자비심도 읽어낼 수가
있었다. 나는 고정관념의 껍질을 탈피하면서 만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게 되었고, 만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면서 만물의 영혼과
합일하게 되었다. 어느 새 개떡 같은 세상에 대산 증오심조차 모
조리 소멸되어 있었다. 아무리 개떡 같은 세상이라도 눈물겹게 사
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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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 어느 날.
월간《세대》지로부터 전보 한 장이 날아들었다.《훈장》이라는 제
목의 중편소설이 신인문학상 공모에 당선되었다는 내용의 전보였
다. 내 아버지의 별명은 미친 개였다로 시작되는 소설이었다. 얼음
밥을 절식한 지 3년이 되던 해였다.
나는 그제서야 문학에 대한 두 가지의 빚을 모두 청산한 기분이
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훈장》은 원금에 해당될 뿐이었다. 그때
는 한동안 작가가 되었다는 기쁨에 들떠서 이자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이자는 죽을 때까지 소설을 써서 갚아야 한다는 사
실을 나는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