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 외 4편
이진흥
내 정신의 벼랑 끝에 선
아름다운 여자
그녀는 하나의 질문이다
내가 안간힘으로 다가서면
아득히 물러서고
돌아서면 안타깝게 손짓하는
매혹의 눈빛
보일 듯 말 듯 미소하며
가파른 벼랑길을 소요하는 여자
그녀를 바라보면 나는
벼랑 끝에 매달린 한 잎의 어둠
하늘에는 별빛 가득한데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그녀는 영원한 질문이다
어디에도 답이 없는,
어떤 풍경
당신이 산이라면 나는 강, 나는 당신을 넘지 못하고 당신은 나를 건너지 못합니다. 천년을 내게 발을 담근 채 당신은 저 건너에만 눈길을 두고, 만년을 당신 휩싸고 돌며 나는 속으로만 울음 삭였습니다. 그렇게 세월 지나 당신의 능선 위로 별빛 기울고 나의 물결 위로 꽃잎 떨어져 당신은 죽고 나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주검 돌아보니 산은 첨벙첨벙 강 속으로 들어가고 강은 찰랑찰랑 산의 허리 감싸 안고 흘러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슬픔도 그리움도 모두 잊어버리고 푸른 하늘 너울너울 날아다니는 새들 바라보며 골짜기에 보얗게 안개 피워 올리는 그런 풍경이 되었습니다.
꽃은 말하지 않는다
꽃은 말하지 않는다.
엷은 미소나 활짝 웃음으로
속마음을 감추고
스칠 듯 말 듯
향기를 펼치지만, 꽃은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
다만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날아온 한 마리 나비
꽃의 눈썹 위에 아찔하게
햇살 한 가닥 내려놓고 사라질 때
바람에 잠깐 자신을 맡겨
몸을 흔들 뿐, 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고백
50점짜리 남자가 90점짜리 여자와 살고 있으니 늘 미안하지요. 구청이나 은행 일은 고사하고 마트에서 과일 사는 것도 서툰데다가 다용도실 세탁기도 돌릴 줄 모르면서 삼시세끼 밥은 꼬박꼬박 축내는 그런 남자를 데리고 살아주니 얼마나 고마운지요. 가만히 바라보면 그 여자 곱던 눈가엔 어느새 주름살이 모여들고 꼿꼿하던 어깨도 기울었는데 요즘엔 가끔 안 쓰던 사투리로 언성을 높이기도 하지요. 그럴 때면 글쎄 나도 모르게 벌컥 말대꾸도 한답니다. 물론 금방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딴청을 부리지만.... 그런데 이제는 그런가 봐요. 세월의 강물에 밀려온 게 어디 그런 것뿐인가요? 어느덧 한평생이 꿈결처럼 흘러가서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리고 보니, 들숨은 날숨 속에 햇살은 그늘 속에 녹아들어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이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네요. 아 그래요, 누군가 그랬지요, 모든 게 불이不二요 유심조唯心造라고....
시의 탄생
세상에는 길이 참 많습니다. 숲길 들길 오솔길 바람길... 그런데 시인은 있는 길을 버리고 없는 길을 찾느라 애쓰고 노력합니다. 노력하는 자는 헤매게 마련¹⁾, 지치고 넘어져서 다치고 피흘리지요. 시인은 길 찾기를 포기하고 새 길을 만듭니다. 아슬아슬 가파른 벼랑에 올라서면 아찔한 낭떠러지, 더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시인은 잠깐 망설이다가 눈감고 벼랑 아래로 뛰어내립니다. 아, 수직으로 낙하하는 꽃 한 송이..., 마침내 한 편의 시가 탄생합니다.
¹⁾ 괴테의 [파우스트] 317행, 노력하는 자는 헤매느니라 (Es irrt der Mensch, solang’ er strebt.)
왜왜 外 4편
김상환
德萬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만 벼랑에 핀 홍매가 말없이 지고 나면 무릎을 펼 수 없어 나이테처럼 방안을 맴돌고 물음은 물가 능수버들 아래 외로 선 왜가리가 왜왜 보이지 않는지 먼산 능선이 꿈처럼 다가설 때 두엄과 꽃이 왜 발 아래 함께 놓여 있는지
達蓮 어머니에 대한 궁금은 앵두 하나 없는 밤의 우물가에 몰래 흘린 눈물 이후 단 한 번의 말도 없는 손 다시는 펼 수 없는 축생의 손가락, 산수유나무 그늘 아래 먹이를 찾는 길고양이처럼 길 잃은 나는 왜 먼동이 튼 아침마다 십이지신상을 돌고 돌며 천부경을 음송하는지 좀어리연이 왜 낮은 땅 오래된 못에서 피어나는지 어느 여름 말산의 그 길이 왜 황토빛이고 음지마인지
해맞이공원을 빠져나오다 문득, 사리함이 아름답다는 생각
봄편지
어머니, 당신의 손을 놓은지도 벌써 십수 년이 지났습니다 꿈같은 세월이 흘러 이 자식도 이제 이순의 나이가 다 되었습니다 하지만 귀가 순해지기는커녕 세상 이치는 멀고 여전히 아득하기만 합니다 며칠간 고뿔이 심해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도 내심은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음양이 서로 반(半)인 춘분 지나 오늘은 조심스레 문밖을 나섰습니다 양지 바른 언덕엔 잔디가 웃자라고 먼산을 에돌아 강물이 흐릅니다 저 하늘 두우(斗牛)가 되고 싶어 그 빛의 소리가 듣고 싶어 지상의 별자리를 돌고 돌아 돌에 새겨진 천부경 여든 한 자를 가만히 되뇌어 봅니다 그러다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쉼을 얻고 보면 등허리가 저리도 따사롭습니다 낮과 밤인 어머니, 당신의 나라에도 꽃이 피고 봄이 왔는지요 다음 주말에는 좀더 멀리 집을 나설 요량입니다
유적(流謫)의 은유
인간을 두고 유적지의 신이라 명명한 자는 누구? 유형(流刑)의 땅에서 바라본 바다와 자색 구름은 얼마나 아름답고 공교로운 것인가. 슬피 우는 꾀꼬리 눈물이 강을 이루었다 하여, 파도소리가 앵무의 소리와 닮았다 하여 앵강, 앵강의 만(灣)이라 한다. 만은 곡이다. 그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활처럼 휘게 되면 노래[曲]가 될까. 느티나무와 흰젖제비꽃, 마삭줄과 모람과 매화, 겹동백이 있는 섬을 떠나온지 오래, 허묘(墟墓)의 계단을 내려오다 헛디딘지 오래. 벽련항에 비가 오시면 푸른 새가 하늘을 날까. 유적의 은유, 그 길목에서 잿빛 고양이가 숨을 고르면, 봄꿈이다.
나무 믹담
겨울 산사를 찾았다
부인은 없고
부인과 함께 바라본 느티가 묻는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
그럴 땐 나를 봐 무를 봐,
라고 곁에 선 왕벚이 거든다
나무에 새겨진 칼날의 허
공에는 마침내의 도가 있다
한쪽 귀가 깨진 서탑
풍경과 바람과 석등의 비밀이
부인에 있다
대웅전 지붕 끝 치미(雉尾)가
하늘을 오르다말고
산신각 앞에 내려와 앉는다
흠도 티도 없는 절집 아침
마당과 마음을 돌고 도는 나는
포도나무 잎진 자리
떨켜를 생각한다
저잣거리로 내려가는 길
눈의 흰 그림자
*믹담(מכתם, Michtam). 조각에 새겨 놓은 금언이나 지혜의 말씀.
초승달
음력 초사흘
새로 산 조선낫이 빛나는 밤
명주실 같은 고양이 울음이
서쪽 하늘에 가 닿을 즈음
마침내 드러난 뼈, 희다
별 보는 숟가락 외 4편
이 진 엽
별빛이 마당에 내리고
어둠 속에서 방문이 잠긴다
얇은 창호지가 발려 있는 툇문
문고리에 끼워둔 숟가락 하나가
드센 겨울바람에 딸가닥거린다
찢어진 문종이 밖으로 문득 보이는
어두운 하늘의 별빛
그들과 입맞춤하려고 고개를 연신 흔들지만
숟가락은 더욱 차가운 늪에 갇혀 버린다
한 입 가득 허공을 물고
문설주에 목 매달린 뜨거운 저 몸짓
그 좁은 구멍 안에서 가쁜 숨을 토해보지만
더 이상 은하 멀리 날아갈 수가 없다
문풍지 가득히
회초리로 내려치는 밤바람소리
하지만 숟가락은
낯선 생의 구렁에서 두 눈을 부릅뜬 채
혼신의 몸짓으로 바람에 맞서 부르르 떤다
밤새 별을 보며 혼자 날개를 파닥인다
겨울 아이가 되어
첫눈이 내리면
겨울 벌판은 새하얀 귀를 열고
죄의 고백을 기다리는 젊은 사제司祭가 된다
눈 쌓인 벌판에 홀로 서서
순백의 빛에 온몸을 찔리며
나는 웅얼웅얼 잠시 죄를 뉘우친다
몰아치는 눈보라의 아픈 고문
하지만 그건 강요된 죄의 자백이 아닌
저 설원雪原에 바치는 내 삶의 고백이었다
까만 숯덩이가 되어
입에서 튀어 나오는 한 생애의 파편들
눈 덮인 벌판에 새 발자국처럼 총총 찍히면
그 아래에서 들려오는 대지의 맥박소리
뭇새들의 따스한 깃털도 함께 포개어져
한 장 판화로 찍혀 겨울나무에 걸린다
아하, 첫눈 내리는 날
나는 그렇게 눈동자 커다란 겨울 아이로
다시 하얗게 태어난다
그가 잠깨는 순간
길에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웠다
주인을 찾아 줄 수도 없어
호주머니에 넣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누굴까, 익명의 얼굴들이 실루엣처럼 흔들리다가
흑백 필름으로 스쳐갈 때
불현듯 호주머니에서 날개 치는 소리
대지의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던 것이
내 눈빛을 받은 후부터 푸른 기지개로 일어섰다
이제 호주머니는
잠 깬 사물이 숨 쉬는 존재의 작은 방
아늑한 그 방에서
종이돈이 저렇게 온몸을 비트는 것은
그를 비추는 내 의식의 불빛 때문이라 생각할 때
불현듯 이 세계가
나의 열쇠로만 달까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는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풀숲의 축제
그 여름
들풀이 우거진 한낮의 못둑 위를
나는 그을린 얼굴로 혼자 서성였다
옷섶으로 튀어 오르며 연신 꽂히는
작은 풀무치들
나는 긴 풀대 하나를 재빨리 뽑아들고
녀석들을 간질여 주었다
가슴 깊이 파고드는 풀숲의 거친 숨소리
온몸은 마냥 달아올랐다
날개를 붕붕이거나
풀잎 여기저기에 가파르게 매달린
푸른 고깔의 난쟁이들
못둑은 차라리 뜨거운 신화의 왕국이었다
먼 곳에서 허우적대는
기침과 먼지뿐인 저 도시의 그림자들
지나온 길목을 긴 삽으로 파헤치며
풀씨 한 줌을 그 바닥에 뿌려 주었다
아후, 숨 막히는 이 자유
야성의 피를 뿜으며 들풀을 흔드는
끝없는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가
모든 것,
살아있는 모두가 저마다 빛을 쏘아 올리며
가쁜 신호를 주고받았다
숨 쉬는 것들의 작은 꿈의 축제
잠시 손을 내밀면 파란 허파가
한 아름 가득 풀숲에서 묻어 나왔다
그 여름, 야생초가 무성한
한낮의 못둑에는 맥박소리가 번져가고
나도 마음속으로 꽹과리를 치면서
생명의 잔치에 흠뻑 빨려들었다
벽의 바깥
한 중년 사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마을 앞 산책로에서 오줌을 누고 있었다
남의 시선은 아랑곳 않은 채
그 길섶에서 방뇨를 즐기고 있을 때
주인의 퉁퉁한 엉덩이를
덩치 큰 셰퍼드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개가 없을 때는
그저 스쳐갈 일상의 장면이었지만
개로 인하여 인간의 조건이 씁쓸해진
그 순간에 사르트르*가 생각났다
왜, 오줌에 젖은 사내에 겹쳐져
내 감춰진 본능도 거울에 비친 듯 드러날 때
자꾸만 구토증이 나는 것일까
사람은 깊고 높은 것
그러나 포장을 찢고 벽의 바깥으로 나오면
저렇게 실존하는 한 인간을 만난다
지금, 그리고 여기서
온몸을 꿈틀대는 나를 만난다
*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 프랑스의 철학자
달의 수레바퀴 끌고 간 소 외 4편
장하빈
외양간 옆 감나무 가지에
달이 덩그러니 걸렸다
집 나간 송아지 찾아오라고
휘영청, 등불 밝혀 놓은 거다
한밤중 텅 빈 외양간에
달빛 주르르르 흘러들었다
이 집에서 늙은 저 달,
쇠잔등 타고 놀던 그때가 몸속에 사무쳤던 것
달은
코뚜레 꿰인 소의 그렁그렁한 눈망울 닮았다
그믐 지나 달그림자 보이지 않았다
어미 소가 달의 수레바퀴 끌고서
먼 길 떠나고 나서였다
낙관
오늘 까치가 날아와 유리창에 입맞춤하고 갔다. 우리 집 거실창 안에 환히 들이비친 감나무 앉으려다 날개 부딪친, 저 하얀 비명!
얼마나 콩닥거렸을까? 엉겁결에 까치는 대문간 드리운 소나무 올라앉아 놀란 가슴 쓸어내리고 동구나무 쪽으로 날아갔다.
내 어찌 모를까? 저 눈먼 새가 제집 잘못 찾아온 게 아니라, 이 몹쓸 것이 숲속 옛 둥지 차지해 남쪽으로 창 하나 걸어두고 사는 것을.
한데 또 어쩌랴! 저 가여운 새가 유리창에 쿡! 몸도장 찍어, 공산에 깃들인 내 생의 진경산수화 완성하는 것을.
첫눈
밤사이 사철나무 머리가 하얗게 셌다
눈 세례 받으며 눈부신 아침 마당 서성거리면
내 키는 한두 치 가량 솟는다
목화송이 머리 장식하고, 풀 먹인 눈 밟고 서서
쉰 지난 나이에
배소配所의 적막 깃든 시린 눈밭에서
홀로 이렇게 수북해질 수 있다니!
망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는다는데
이 순간
나는 가벼운 망치일까, 솟는 못일까?
몽당싸리비로 길바닥에 탑 어지러이 새기며 골목 꼬부라져 가는데
싸륵 싸르륵
목덜미에 등허리에 신발등에 고봉으로 쌓이는 밥
저 하염없는 눈발 속, 쌀목탁 치는 소리 들린다
개밥바라기 추억
겨울 금호강에서 그에게 편지를 썼다
등에 업혀 새록새록 잠들다가
어두운 강물 속으로 사라져 간 개밥바라기
하얗게 얼어붙은 강어귀에서
모닥불 지펴 놓고 그를 기다렸다
한참 뒤, 폭설 내려와
강의 제단에 바쳐지는 눈발 부둥켜안고
모래톱 돌며 재齋를 올렸다
눈 그친 서녘 하늘에 걸린 초롱불 하나
펠리컨
만년필은 제 뚜껑 열어 꽁무니에 끼우는 순간
긴 부리와 금빛 날개깃 달린 펠리컨으로 태어나지
잉크빛 바다에서 부활한 펠리컨은
섬 기슭에 둥지 틀고 알 낳기도 하다가
사막으로 날아가 긴 부리로 시간의 발자국 남기지
한때 나도 방바닥에 날개 펼치고 부리 내민 채
불립문자不立文字 속에서 만년의 고독과 사랑 꿈꾸며
심장 쪼아 밤의 사막 붉게붉게 물들인 적 있지
펠리컨이 날개깃 접고 서랍 속 다시 깃들이는 순간
긴 부리도, 긴 부리가 남긴 발자국도 사라지고
사막은 저 혼자 어둑어둑 빈집으로 돌아가지
이 시인 놈아 외 4편
김동원
닥쳐요, 잊히면 좀 어때요.
진짜 시인이라면 구름에게 명령해요.
입금 좀 제때 하라고요.
집세가 없어요, 여보!
제발 노을에게 부탁이라도 해 봐요, 우리.
넷이서 밤마다 보름달만 뜯어먹을 순 없잖아요.
달무리라도 덮고 실컷 울고 싶어요.
당신이야 장미 년, 모란 년, 매화 년
끌어안고, 행간 속에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시인의 아내는 뭐예요.
그만, 그만, 내일 바람이 송금한다는
허황한 그딴 소린, 집어치워요. 제발!
빈말이라도, 돈 좀 줘 봐라,
이 시인 놈아!
작부酌婦
술집 작부 치마폭에 쌓인 것 맨키로, 볼또그리 취한 강구항 밤 야경. 어판장 뒷골목마다 그 옛날 홍등에는 야화夜花가 피어 흥청망청했지. 속초로 울릉도로 고깃배 타다 뭍에 내리면, 낮부터 술판에 젓가락 장단에 홍도야를 불렀지. 작부 년 분 냄새에 불뚝불뚝 아랫도리 힘은 뻗쳐, 그 어부들 주장군主將軍 명태 대가리만 했네. 소주 막걸리에 떡이 되면, 영순 아버지 마누라 새끼들 까맣게 잊어먹고 곱사춤을 추었지. 연분홍 치마저고리 입은 작부 엉덩이는 얼마나 컸던지, 고랫등만 했네. 아니, 아니 밤바다 보름달만 했네. 그 겨울 폭설에 대구 명태 방어 잡아 번 돈, 구삥에 도리짓고땡에, 그년들 치마폭에 다 녹아들었지. 새벽 오줌 누러 나와 어둑어둑한 방파제 파도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면, 그때서야 동해에 밥 찾으러 나간 아비 기다리는, 올망졸망한 자식들 얼굴이 등댓불처럼 눈앞에 깜박깜박 비추는 거라.
깍지
내 손을 나꿔 챈 그녀에게 아내가 있어 안 된다고 했다. 곁에 벗은 예쁜 속옷은 유채 꽃빛이었다. 등 뒤에서 그녀가 “오늘 밤만이라도 하늘 물속을 헤엄쳐, 저 샛별까지 갈 수 없냐”고 내 허리를 꽉 깍지로 껴안았지만, 나는 두 자식이 있어 진짜, 안 된다고 뿌리쳤다.
돌아보지 말걸, 꿈속 그녀는 알몸으로 초승달 위에 웅크려 울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그 밤부터 꿈만 꾸면, 구름 위로 떠오르는 달에게 올라타는 연습을 한다. 제멋대로 엉켜버린 두 인연이 천년의 허공 속에 헛돌지라도, 미친 듯 미친 듯 그녀를 위해, 나는 밤마다 꿈속에서 달을 타는 연습을 한다.
오십천
어릴 적 난 홀어머니와 함께, 강가 백로 외발로 선 오십천 천변에 핀 복사꽃 꽃구경을 갔다 봄 버들 아래 은어 떼 흰 배를 뒤집고, 물결이 흔들려 뒤척이면 붉은 꽃개울이 생기던, 그 화사한 복사꽃을 처음 보았다 젊은 내 어머니처럼 향기도 곱던 그 복사꽃이 어찌나 좋던지, 그만 깜박 홀려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갓 서른이 넘은 어머닌 울고 계셨다 내 작은 손을 꼭 쥔 채, 부르르 부르르 떨고 계셨다 그 한낮의 막막한 꽃빛의 어지러움, 난 그 후로 꽃을 만지면 손에 확 불길이 붙는 착각이 왔다
어느새 몸은 바뀌고, 그 옛날 쪽빛 하늘 위엔 흰구름덩이만 서서, 과수원 언덕을 내려다본다 새로 벙근 꽃가지 사이로 한껏 신나 뛰어다니는 저 애들과 아내를, 마치 꿈꾸듯 내려다본다
*오십천은 청송 주왕산에서 발원해 영덕읍을 가로질러 강구항으로 흘러듬.
처녀와 바다
―시간의 저편 너머에 묻힌 h에게
내 마음속엔 언제나 해당화 꽃처럼 붉게 멈춰 버린
처녀의 무덤이 산답니다
저 바닷가 물밑에 가라앉아
진주가 돼버린 처녀랍니다
처녀는 곱고 수줍고 아름다운 머릿결이 물풀 같았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운명처럼 만나
아침마다 해가 뜨기 전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바닷물 위 걸어서
해를 만지러 가곤 했습니다
해는 출렁이는 우리의 운명 같아
잡힐 듯 잡힐 듯 손길에서 멀어졌습니다
나는 언제나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처녀는 그 겨울 바다 속 生이 잠기고
영원히 바닥에 잠겨서 물풀에 가려졌습니다
그 후 난, 문득문득 깊은 밤 혼자 잠에서 깨어나 웁니다
그토록 그리운 처녀는, 내 바다 위 어디에도 없고
백사장 흰 모래알 속에나 등대 불빛 밑으로
찾고 또 찾아 헤맸지만,
잃어버린 바닷길은 그대로 천 길 물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따금 처녀는 그 처녀는, 저 먼 시간의 저편 너머 수평선에서
붉은 해를 타고 올라와,
그 새벽 깨어나 우는 내 서러운 등을 두 손길로 따뜻이 어루만져 줍니다
AI 외 4편
김욱진
저 아이 요즘 뭐든지 물으면 척척 대답을 다 해준다고?
에이, 세상에 그런 아이가 어디 있어
태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말로만 듣던 AI, 딴 세상 얘기처럼 들리더니만
어느새 그 아이가 이렇게 많이 컸어
챗GPT라고 부른다면서
그래, 맞아
조무래기라고 얕보지 말게
지난 번 이세돌 하고 바둑 둬서 이겼다는 그 아이야
그럼, 돌아이구만
이게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인가
야, 이 친구야
지금, 여기 농담할 상황 아닐세
머잖아 자동차 자율주행 운전도 저 아이가 하고
자네가 몇 날 며칠 끙끙거려 짓는다는 시 한 편
저 아이는 몇 초 만에 후딱 써버린다네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
심지어 나의 일기까지도 줄줄 다 써준다네
짧다 그러면 금방 늘여주고
좀 길다 그러면 눈치껏 줄여주고
“…해줘" “…알려줘" 하면
전문적이면서도 캐주얼하게
간단명료하면서도 자신감 있고 친근하게
애교 떨듯 눈 몇 번 깜빡깜빡하면서
입맛대로 요리조리 맞춰주는 AI
대체 저 아이는 어느 세상에서 왔는지, 속도 없어
에이, 시발 것
시고 나발이고
이러다 저 아이 종노릇하다 가게 생겼네, 참 나
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집 한 권 냈다고
팔십 평생 땅뙈기 일구고 산 오촌 당숙께 보내드렸더니
달포 만에 답이 왔다
“까막눈한테 뭘 이래 마이 지어 보냈노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를, 우린
시래기 국만 끓여 먹고 살아도 배부른데
허기야, 물 주고 거름 주고 애써 지은 거
아무 맛도 모르고 질겅질겅 씹어 봐도 그렇고
입맛 없을 때 한 이파리씩 넣고 푹 삶아 먹으면 좋것다
요즘은 시 나부랭이 같은 시래기가 금값 아이가”
이전에 장날마다 약장수 영감 따라 와서
한 많은 대동강 한 가락 불러 넘기고
한바탕 이바구하던 그 여자
시방도 어데서 옷고름 풀듯 말듯 애간장 태우며
산삼뿌리 쏙 빼닮은 만병통치약 팔고 있나 모르것다
“그나저나 니 지어 논 시
닭 모이 주듯 시답잖게 술술 읽어보이
청춘에 과부 되어 시집 안 가고 산 아지매
고운 치매 들었다하이
내 맴이 요로코롬 시리고 아프노
시도 때도 없이 자식 농사가 질이라고 했는데
풍년 드는 해 보자고 그랬는데”
병원간담니다
시월의 마지막 날 밤
김광석 거리 콘서트홀 빙 둘러앉아
시인의 날 잔치 마치고
별 볼일 없는 낙엽처럼
이 골목 저 골목 간을 보며
바스락바스락 돌아가다
서남시장 들머리 순대집 천막에
썰다만 순대처럼 붙은 글자
“병원간담니다”
순대보다 먼저
간이 서늘해졌다
가끔 들르던 집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또 왔네
그 병엔
순대보다 간이 더 좋아
이 가을에
그 할머니
어디로 갔을까
병원간담니다
비뚤비뚤 남겨둔 채
순대는 없고
내 간만 더듬는 밤
뭉텅뭉텅 떼어주던 말 한 마디
구불텅구불텅 돌아온다
“간은 원래 사람 마음을 닮았어”
어느 노송의 주례사
주례 없는 혼례식 끝나고
마당 벤치에 앉아 있는데
전깃줄에 묶인 노송 한 그루
불이 들어오자 입을 열었다
서로 다른 누구와 붙어산다는 것
번쩍, 불꽃을 켜는 일이라오
일 촉쯤이야 했지요
한꺼번에 번쩍일 때는
심장이 터질듯하오
남들은
환하다며 박수치지만
솔방울처럼 매달려 사는 목숨이
다 객일 뿐이지요
이 세상
늘 푸른 솔이 어디 있겠소
살과 설 사이
까치설날 아침
골목을 도니
사람들 굴비처럼 엮여 있다
홍게 열 마리 삼만 원
고향 대신 붉은 등판만 흘긋
대게 대신 홍게를 집어 든다
대목엔 늘 바가지라지만
설인데 설마
설마가 슬쩍 줄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비닐장갑 낀 손들
게 다리를 들춰보고 배를 눌러보고
살아있는 값을 깎는다
"설 대목인데, 이 정도면 그저 아이껴"
껴껴, 게 장수 입에서 튀어나온 말
구불텅구불텅 골목을 후벼 판다
김이 오르는 골목 끝
리어카 하나 지나간다
폐지 더미 위에 겨울이 앉아 있다
할머니 하나
게 껍질 대신 냄새를 오래 들이마신다
홍게 든 손은 무겁고
빈 손은 겨울처럼 가볍다
살과 설 사이
먼저 가져가는 쪽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