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다양성과 그 “비극”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문학동네, 2013.
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1899-1977)는 영리하다. 그는 스무 살에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와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영문학 최고의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2007년 영어권 대표적 현역작가들에게 최고의 소설을 조사한 결과 1위 안나 카레니나, 2위 마담 보바리, 3위 전쟁과 평화, 4위 롤리타가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국어인 러시아로 작품활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비애를 갖는다. <롤리타> 작가의 말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의 개인적인 비극은, 물론 남들의 관심사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내가 타고난 모국어. 즉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한없이 다루기 편한 러시아어를 포기하고 내게는 두번째 언어에 불과한 영어로 갈아타야 했다는 사실이다. 모국어를 사랑하는 작가들은 마술사처럼 연미복 뒷자락을 펄럭이며 자기만의 절묘한 방식으로 전통을 뛰어넘을 수 있건만 나의 영어에는 그런 -이를테면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거울, 검은 벨벳 배경막, 혹은 함축적인 연상이나 전통 같은-도구가 없기 때문이다.(p.509)”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훗날 <롤리타>를 러시아어로 번역하기도 한다.
<롤리타>가 출간할 당시 그는 미국 코넬대학교 문학교수로 있을 때였다. 37세의 중년 남자가 12세 5개월의 어린 소녀를 사랑하는 내용을 출판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일이다. 가명으로 출판하려다 자신을 속이고 쉽지 않아 본명으로 출판한다. 그의 대담성이 엿보이는 면모다. 나보코프는 나비수집가로도 유명하다. 하버드 자연사 박물관의 한 전속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나보코프는 “실제로 보통 사람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을 종들을 구분해내는 데 매우 탁월했다. -일주일에 6일, 하루 6시간 동안, 시력이 영원히 손상될 때까지 현미경으로 나비들의 생식기를 보았다.” 그의 이런 집요함은 문학에도 드러난다.
롤리타를 사랑하는 것. 가능할까. 롤리타의 첫 문장은 유명하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p.17) 독자는 처음부터 험버트처럼 롤.리.타를 발음하게 된다. 벌써 나보코프의 마력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여러 구도와 장치, 트릭을 사용하여 독자를 자신의 마술 안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소설이 풀어야하는 수수께끼처럼말이다. 화려한 문체를 바탕으로 험버트 험버트의 ‘님펫’이라고 부르는 롤리타를 사랑하게 될지 모른다.
소설은 험버트의 고백록이다. 험버트는 1910년 13세 애너밸 리와 사랑에 빠졌지만 소녀가 죽자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 그 단절은 그를 아동성욕소유자로 만들어버린다. 험버트는 롤리타를 강제로 탐하며 그와 애정행각을 벌이고 롤리타를 구속한다. 험버트가 아무리 미학적인 언어로 자신을 정당화시키려고 해도 그의 죄는 정당화되지 못한다. 그도 알고 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그는 고백한다. 그 고백이 <롤리타>이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험버트의 수기인지 독자는 헷갈린다. 험버트+험버트는 두 명일까. 롤리타를 유혹한 퀼티라는 인물은 또다른 험버트일까. 험버트와 퀼티의 동질성 암시는 대부분의 연구자가 동의하는 입장이다. 나보코프는 예술적 기교를 부려 독자를 혼란시킨다. 예를 들면 험버트가 퀼티를 살해하는 장면으로 연극적 요소가 드러난다. 험버트가 쏜 총에 퀼티가 맞아도 바로 죽지 않는다. 약간의 블랙코미디를 연상시킨다.
한 명의 험버트는 롤리타를 사랑하고 퀼티를 살해한 험버트다. 또 한 명의 험버트는 서술자 험버트이다. 감옥에서 56일 동안 과거를 회상하며 회고록을 쓴 험버트다. 그리고 퀼티가 있다. 험버트는 롤리타를 사랑한 죄에 대해선 스스로 강간죄 35년형을 내린다. 그러나 퀼티를 살해한 행위는 무죄판결을 스스로 내린다. 자신의 사랑은 정당화 될 수 있지만 롤리타를 뺏아간 퀼티는 용서할 수 없다는 증거다. 퀼티는 롤리타를 사랑하지 않고 이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독자들은 <롤리타>를 끝까지 읽지 못한다. 험버트를 정당한 인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끝까지 정당화했지만 독자는 공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면목을 파악하려면 나보코프의 수수께끼를 풀어야한다. 그는 미학적, 탐미주의적인 문학관을 갖고 있었고 아름다운 구조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트릭, 퍼즐, 유머를 사용했다. 작가는 “독자를 의식한 글쓰기”, “독자 참여적 소설의 시초”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술사다. 마술의 트릭을 관객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마술의 화려함에 속아 우리는 험버트를 결국 공감하게 될지 모른다. 그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을까.
예술은 금기의 영역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무대다. 예술에서 그것을 받아주지 않을 때 인간의 또다른 모습을 어디서 펼쳐야할까. 그것이 금기의 영역이라도 말이다. ‘금기’의 영역도 인간의 모습이다. 그것에 대한 자유로운 담론과 비판과 공감의 형성이 오갈 수 있는 장은 “예술”뿐이 없다.
“모든 사람의 저주를 감당하면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했던 주인공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분명 처음에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을 이성의 힘으로 억누르려고 했을 것이다. 롤리타에 대한 사랑이 자신이나 그녀의 삶에 미칠 악영향을 계산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감정은 용수철과 같다. 누르면 누를수록 더 큰 반발력을 갖기 마련이니까. (...) 사랑을 부정하면 자신을 부정하게 되고, 반대로 사랑을 긍정하면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마침내 주인공은 알게 된 것이다. 롤리타에 대한 감정 그 자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강신주의 감정수업>,p.19)
“험버트는 롤리타를 만났을 때 기쁨을 느꼈고, 반대로 그녀와 헤어질때 슬픔을 느꼈던 것이다.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롤리타를 사라하면서 자신의 삶이 완전해진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롤리타에 대한 그의 사랑을 부정하고 저주하려고 했다. 여기서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이 완전해지는 기회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기쁨의 감정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차가운 이성을 선택할 것인가? 다행스럽게도 험버트는 사회적 통념과 이성의 손가락질을 담담히 감당하면서 스피노자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 것이다. 그에게 롤리타는 자신의 삶을 환히 비추어 주는 ”빛이요, 생명의 불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에게 ‘죄’라는 꼬리표는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작은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이다.(<강신주의 감정수업>,p.22)
나보코프는 험버트를 문학이라는 무대에 주인공으로 출연시켰다. “어떤 분들은 내가 그녀를 죽일 거라고 짐작했지만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 영원히 사랑하리라.”(p.433)
“지금 나의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p.497)” 이렇게 험버트는 부르짖는다. 롤리타를 그는 사랑했던 것이다. 누가 그에게 롤리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만, 사랑의 표현이 무참했고, 그 사랑하는 대상이 비극이었을 뿐이다. 문학의 다양성에 측면에서도 <롤리타>는 중요한 작품이다. 문학적으로 <롤리타>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면 바로 이 비극이지 않을까.
<서평-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