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원래 전자산업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식민지 출신 후진국의 군인출신 인물이 당시로서는 최첨단 산업이었던 전자산업을 이해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니겠는가?
전자산업에 대한 박정희의 무관심에 첫 충격을 던진 인물은 초대 과학기술처장관 (67년 4월~71년 6월) 김기형 (金基衡.72) 씨. 세라믹공학 권위자로 미국 뉴욕 에야리덕션 전자요업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있다가 한국 정부의 해외 두뇌 유치 케이스로 66년 8월 하순 귀국한 金박사는 곧 朴대통령을 만났다.
金박사는 1시간 가량의 대화시간을 주로 전자공업 (전자산업은 최근의 용어) 과 세라믹공업의 육성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할애했다. "노동집약적인 산업이어서 유휴노동력이 많은 한국에 유리하다" 는 요지였다.
대화가 끝날 무렵 金박사가 "선물로 가져왔다" 며 손수 만든 인조 다이아몬드 목걸이등 액세서리와 저항체 소자 (素子) 한 세트를 불쑥 내밀었다. "그게 뭡니까?" "제가 개발한 겁니다. 여기 (플라스틱)에 붙은 이게 저항체 소자라는 건데 하나에 1달러짜리입니다. 주로 전자제품을 만들 때 쓰이지요. " "아니, 그 손톱만한 걸 1달러나 받아요?" 박정희는 그때까지 전자라는 용어조차 몰랐다.
원래 그는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한 전자업계에 대해 "사치품이나 만들면서…" 라고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상당수의 언론인.정치인.식자층까지 TV 국산화를 "사치풍조를 조장한다" 고 반대하던 시절이었다. 66년 당시 19인치 국산TV 가격은 8만7천원. 대통령 월급 (7만8천원) 보다 많았다.
在美 김완희박사 영입
그 시대의 전자공업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하나. 한국 전자산업 산파역중 한사람인 이만희 (李晩熙.71) 씨는 상공부 사무관 시절이던 62년 3월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개최된 국제무역박람회 한국관 관리책임자로 파견됐다.
1개월 뒤 귀국, 정부관리로는 최초로 전자공업 육성을 건의하는 리포트를 제출했다. "뚱딴지 같은 소리 한다고 핀잔만 들었지요. 명색이 상공부에서…. " 李씨의 수난은 66년 2월 전기공업과장 때도 계속된다.
"몇군데 업체에서 TV 국산화를 위해 샘플로 TV를 수입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상역과 (商易課)에 가서 얘기를 꺼내는데 한 사무관 (李씨는 그때 서기관) 이 대뜸 '이 자식 정신 나갔어? 업자의 앞잡이냐' 고 소리를 치더니 '국산화 좋아하네' 하면서 벌떡 일어나 오른 뺨을 올려붙이더라고요. 우리 국장 (공업2국장)에게 얘기했더니 위로는커녕 '당신 같은 사람은 국가에 보탬이 안되니 한강물에나 빠져 죽으시오' 하면서 어떻게나 기합을 주던지…. "
李씨는 그러나 당시 오원철 (吳源哲) 공업1국장의 주선으로 박충훈 (朴忠勳) 상공장관으로부터 직접 OK 사인을 받아냈다. 김향수 (金向洙.85) 아남그룹 명예회장의 회고는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68년 반도체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입니다. 간신히 김정렴 (金正濂) 상공장관에게 대부 추천을 받고 은행문이 닳도록 뛰어다니는데 (반도체의) 부피가 작다고 사업으로 쳐주질 않아. 어렵게 대부받아 기자재를 수입해 오니까 이번에는 세관이 골치야. 반도체 칩과 리드 프레임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금줄이 있는데 금을 밀수하는 줄 알고 통과시켜 주질 않는 거야. "
아무튼 김기형 박사로부터 '손톱만한 돈보따리' 를 선물받은 박정희는 그것을 봉투에 담아 친필로 '요검토 (要檢討)' 라고 써서 박충훈 장관에게 내려 보낸다. 이것이 박정희의 전자산업 관련 최초의 지시였다.
그해 12월 朴장관은 전자산업을 수출전략산업으로 발표하고 朴대통령은 이듬해 연두교서에서 전자산업 중점 육성을 선언하게 된다. 박정희의 인식 변화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은 훗날 '한국 전자산업의 대부' 로 불리게 된 김완희 (金玩熙.70.미국 거주) 박사. 그는 박정희의 초청으로 67년 9월4일 귀국, 국내업계 현황을 둘러본 뒤 9월16일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건의서' 라는 제목의 브리핑 차트를 들고 청와대로 갔다.
막 들어서는 그를 향해 박정희가 말했다. "金박사, 우리도 이런 걸 만들어 팔아야 되지 않겠소. (주력상품인) 섬유는 창고 가득해 봐야 10만달러도 받기 어려운데 이런 건 손가방 하나 만큼이 30만달러, 50만달러 하니 말이야. "
당시 박정희가 보여준 것은 그해 3월 한국에 진출한 미국 모토로라사가 샘플로 제출한 트랜지스터 회로세트였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전자.컴퓨터공학과 주임교수이던 金박사는 "곁에서 도와달라" 는 朴대통령의 요청을 가족들의 반대 때문에 고사했지만 방학 때마다 귀국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박정희와 1백여통의 편지를 주고 받는 '전자산업 개인교수' 역할을 했다.
박정희는 金박사를 '상공.체신.과기처장관 특별고문' 이란 기묘한 직함을 주어 활용했다. 70년 1월 조선호텔에 머무르던 金박사는 육영수 (陸英修) 여사의 전화를 받았다.
陸여사는 "박사님 때문에 우리애 (맏딸 槿惠.46.정수장학회 이사장) 를 전자공학과에 보내게 됐어요. 저는 가사과에 보내려고 했는데…" 라면서 전자공학과 장래성에 대해 물어봤다. 박정희의 고향 구미에 들어선 전자수출공단과 함께 전자산업에 대한 그의 인식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정희의 이런 인식 변화는 그가 직접 기업인들을 설득하거나, 투자 유치를 발벗고 나선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전자산업은 생소한 분야였으므로 기업가들은 투자를 꺼렸다. 박대통령은 이런 실정을 간파, 정부의 해외 두뇌 유치계획에 따라 귀국한 과학자들과 연구원들에게 국내 굴지의 재벌들을 직접 찾아가 전자산업에 대한 투자를 적극 권하게 했다. 김완희 박사 역시 이병철 회장을 만나 "전자산업이야 말로 개발도상국가의 실업인들이 사운을 걸고 파고들어야 할 분야"라고 설득했다.
이런 박정희의 전자산업에 대한 집요한 추구는 한비사건 이후 정권과의 화해점을 찾고 있던 삼성과의 접점으로 작용하게된다. 자신의 첫번째 딸까지도 사회적 관습을 파괴하고 파격적인 공대 그것도 전자공학과로 진학시킬 정도의 강한 의지를 가진 박정희에게 삼성정도의 자본력을 가진 재벌이 전자산업에 진출하겠다는 소식만큼 반가운 것이 있었을까?
삼성으로서는 정권과의 험악했던 관계를 개선시킬 절묘한 통로였고, 박정희로서는 전자산업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처럼 삼성전자는 박정희의 강한 의지를 배경으로 탄생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