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류에 편승한 악습
임병식rbs1144@hanmail.net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힘 있는 자에게는 굴종하며 몸을 낮추고 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리 사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는 일종의 경험이 작용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러한 데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터득한 나름의 노하우일 수도 있다.
일본은 한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면 살아 남기가 무척 어렵다고 한다. 철저히 무시를 당하기 때문에 고립무원 상태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단 두 가지 예외가 있단다. 바로 상을 당할 때와 불이 날 경우라고 한다. 이때는 이웃이 나서서 도와주지만 그 이외에는 거의 백안시 하고 상종을 하려들지 않는단다.
이순신 장군에 관한 기록을 보면 장군이 공직생활을 하며 얼마나 따돌림을 많이 받았는지 알 수가 있다. 장군이 32세때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전관의 임무를 마치고 훈련원 봉사로 발령받아 서울로 귀환했을 때였다.
부임해 보니 훈련원 병조정랑 서익(徐益)이라는 사람이 서열을 무시하고 사사로이 지인을 승진시키려 했다. 이때 장군은 “아래 있는 자를 건너뛰어 천거하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누락되어 공정하지 못하다” 며 반대했다. 이에 서익은 직위를 이용하여 장군을 힐문했다. 이를 보고 하급관리들은.
“감히 저분과 대항하다니...앞길이 어찌 될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구나”하며 걱정했단다.
또 한 번은 1580년 고흥 발포만호가 되었을 때 전라좌수사 성박(成鎛)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시켜 관아앞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가려 했다. 장군은 단호히 막아섰다.
“이 오동나무는 나라의 물건이라 사사로운 용도로 쓸 수가 없다. 오래된 고목을 국용에 쓰지 않고 어찌 함부로 베어간단 말이냐?”
이런 강직함 때문이었을까. 장군은 이후로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일단은 전라감사 손식의 태도와 말에서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전하는 말만을 믿고 벌을 주기위해 진지의 도형을 그려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교하게 그려내자 손식은 장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내가 진작 그대를 알지 못한 것이 한 이로다”라고 말했다. 이후 전라 좌수사에 부임한 이용도 점고를 빌미로 괴롭히려들고, 나중 군기차감으로 다시 부임한 서익은 발포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파직까지 시키고 말았다. 복직되어 다시 여진족을 물리칠 때도 마찬가지다. 그곳의 함경병사 이일(李鎰)은 수차례 병력지원 요청도 거부했다.
종국에 이르러 원균에게 당한 무고는 어떠한가. 두 차례 고신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럴 듯 그들만의 끼리끼리의 문화는 한사람을 매장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한데도 꿋꿋하게 일어났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이러한 장군의 의를 시키고자 한 일은 감동적이기만 한데, 나의 지난날의 공직생활을 돌아보면 당신의 행적에는 감히 근처에 가지 못하겠지만 나름의 의를 구현하고자 한 나의 태도도 한줄기 빛으로 기억이 된다.
어느 날이었다.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자리에 위치한 파출소에서 차석근무를 하고 있는데 한창 잘나가는 방송국 PD가 술이 거나하여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그러면서 대뜸 하는 말이 노상장애물을 단속하라는 것이었다. 사무실을 비우고 나갈 수가 없어 잠시 지체더니 성화를 부렸다. 앞에서 교통저리를 하는 전경을 앉혀놓고 나가보았다.
그런데 노상장애물이 문제가 아니었다. 수박장수에게 얼마나 횡포를 부려놓았는지 여러 덩이가 깨진 채 나딩굴고 있었다.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돌아와서 변상을 하고 뒷말이 없도록 하라고 조언을 했다. 그랬더니“내가 무엇을 잘못 했냐."라며 기고만장하였다. 대번에 내 멱살을 잡고 흔들며 인격적인 모독을 가하였다. 파출소 내에서 밀고 밀치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는 한술을 더 떴다. 경비전화를 집어 들더니 서장실로 전화를 걸어 큰 소리쳤다.
“여기 이파리 두 개 순경자식 처벌하십시오. 내 몸을 쳤어요.”
전화 저편에서 들어오는 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으나 아마도 알아서 조치를 하겠다고 하는 것 같았다.
“너는 이제 죽었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자기 편을 들어준 것으로 믿는 듯 했다.
얼마 있지 않아 경찰서에서 들이 닥쳤다. 상황실장이 직접 나온 것으로 보아 하명을 받은 듯 했다. 근심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자초지종을 적은 경위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바로 서장실로 호출 할 줄 알았더니 한동안 말이 없다가 돌아가서 근무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나는 돌아와 수박장수를 목격을 했던 사람부터 찾아나서 인적사항을 확보했다. 내가 당한 수모 때문이 아니라 어렵게 사는 서민의 재물을 손괴시킨 것을 그냥 모른 체하고 넘길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한나절쯤 지난 뒤에 지역 유지가 나를 차 한잔 하자며 불렀다. 그 자리에 그 PD도 앉아있었다. 그 유지는 변상조치도 끝났으니 화해하라며 억지로 손을 끌면서 종용했다.
그 일은 아마도 내가 당시 지레 겁을 먹고 ‘잘못했다’고 빌었다면 틀림없이 품위유지 위반으로 중징계를 당하고 말았을 터이다.
세상에는 엄연한 장벽이 존재한다. 힘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만의 집단을 이루며 정보를 공유하면서 눈엣가시로 비치는 사람을 결딴낸다. 이러한 형태는 지금도 알게 모르게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 드러난 법정관리를 앞둔 기업주의 주식매각 행태. 그리고 천문학적인 변호사 수임과 이를 둘러난 로비활동. 이런 것을 바로잡는데 눈을 감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고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아무리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해서, 남들도 다 적당해 사는데 나라고 중뿔나게 나설게 있나. '정 맞을 지도 몰라' 하고 피하고 움츠리기만 하면 어찌 바른 가치관과 정의가 바로 설수 있을까.
시류에 편승한 답답한 악행들을 보면서 흙탕물 일지라도 그래도 맑은 물이 흘러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역사적 사료와 개인사의 일면을 들추어서 되돌아본다. 그러면서도 답답한 생각이 들면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을 당최 모르겠다는 생각만 자꾸 든다. (2016)
첫댓글 그런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참으로 절통 분개한 일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 버금가는 옳은 일을 하셨습니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하여 출세하는 일부 공직자들을 생각하면 의가 무엇인지 생각나게 합니다.
세상은 악한 자가 승승장구하여 잘 될 거라 생각하지만 결국은 사필귀정입니다.
청석님은 이제 장남이 존경스러운 변호사가 되어 부러움을 사고 있으니 경하할 일입니다.^^
오래된 일이지만 당시도 시류에 편승하여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 꼴이 보기실어 맞선일은 지금 생각해도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힘없는 사는 밟고 힘센자에게는 아부하는, 그리고 끼리끼리 카르텔을 만들어 울타리를 높이 막고서 살아가는 특권층의 행태는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강직한 사람은 주위에 적을 만들기 쉬워 해를 받기 십상인듯합니다.
전에 캡틴으로 모셨던 분은 후에 장관을 지내기도 했는데 어느 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물은 맑아야 되는데, 한편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지 않으니 처신을 잘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선생님을 안다고 하는 분이 선생님을 "한 마디로 융통성이 없는 분이었다."는 평가를 하시는데 수긍이 가기도 했었지요. 공무원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바로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라던 어느 유명인사의 말이 떠오릅니다. 저 또한 공직생활 내내 곡선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더랬습니다. 저는 흙탕물을 일으키는 그 바탕을 병적일만큼 배척했던 것같습니다.
현직에 있을때는 불의를 보면 병적으로 참지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장을 서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많이 했지요.
정작 도움은 받은 사람은 나중에 만났을때 피해버리더군요.
그때는 공연히 고생을 했다는 후회도 했으나, 내가 생각한 것은
잘못된 것은 고쳐져야하고 공직자는 청렴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밥값을 해야한다는 일념으로 근무를
했던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부당한 밥을 누가 내도 직원이 참석하는 걸
말렸지만 나중에는 원망이 많아 나만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정하고 말았지요.
선생님의 정직한 삶은 충무공이순신을 흠모해서 생긴 것이 아닌가 싶네요. 인생의 닮고싶은 롤모델이 있다는 건 감사할 일입니다. 아마 선생님을 롤모델로 삼는 이가 후대에 많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직자에게 쳥렴은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공직생활을 했던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