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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장준하, 박정희에게 “너는 만주군 장교…” 면박
백범과 함께 1946년 겨울 서울 우이동 화계사를 찾은 백범 김구 선생(앞줄 중절모 쓴 이)과 장준하 선생(백범 선생 오른쪽 뒤로 둘째줄 안경 쓴 이)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1975년 8월 장준하 선생이 숨진 뒤 37년 동안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장 선생이 60·70년대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무릅쓰며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맞섰던 숙명의 정치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장 선생은 언론인으로, 야당 정치인으로 박 전 대통령과는 팽팽한 대척점에 섰다. 일제강점기인 20대 중반 젊은 시절 장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대위로, 박 전 대통령은 일제 만주군 중위로 극명히 대조되는 길을 걸었다. 장 선생은 언젠가 박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일제가 그냥 계속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고 면박준 일도 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만주군 복무와 광복 뒤 남조선노동당 가입 같은 과거를 손금 보듯 알고 있던 장 선생이 자신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 선생이 숨진 직후부터 실족사로 처리된 사인을 두고 의문이 제기됐다.
유신헌법을 개헌해야 한다는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 1호를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돼 재판정에 선 장준하 선생 |
■ 37년간 이어진 장준하 타살 의혹 장 선생 사망 당시 경찰은 장 선생이 1975년 8월17일 산악회원 40여명과 함께 서울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인 경기도 포천시(당시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489m)에 올랐다가 높이 14m의 낭떠러지에서 ‘실족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지방에서 올라왔다가 산행에 합류한 ‘김용환’이라는 인물이 유일한 목격자였다. 김용환은 장 선생이 출마한 총선 때 자원봉사자로 활동했으나 산행 이전 몇 년 동안 만난 적이 없었다. 그날 일행이 약사봉 샘물터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 장 선생과 김용환이 따로 산길을 올랐다가 다시 일행 쪽으로 내려오는 길의 비탈에서 실족했다는 것이 당시 경찰의 발표 내용이었다.
하지만 경사 75도의 암반에서 굴러떨어졌는데도 체중 73㎏이던 장 선생의 신체에 큰 외상이 없었고, 사인으로 지목된 ‘오른쪽 귀 뒤의 두개골 파열’이 단순 추락 때문에 생긴 상처로 보기 어려웠다는 점 때문에 당시부터 의문사 논란이 일었다. ‘추락사고 지점은 산이 너무 험해 젊은 등산가들도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경사 75도, 높이 14m의 가파른 절벽인데 장 선생 혼자서 아무런 장비 없이 내려오려 했다’(<동아일보> 75년 8월19일치)는 기사가, 장 선생 사망 이틀 뒤에 지면에 실리기도 했다.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을 던진 기사를 쓴 내외신 기자들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혀가 곤욕을 치르거나 한국에서 추방됐다.
장 선생 타살 의혹은 1970~80년대 군사정부 시절에는 입소문으로 나돌다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뒤 민주당이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다시 공론화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의혹으로 머물러왔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한 뒤 ‘진상규명 불능’이란 판정을 내렸으나, 목격자 김용환이 장 선생 사망 뒤 갑자기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한 사실, 그의 일관성 없는 진술, 장 선생 주검에서 추락 흔적이 거의 없는 점 등을 들어 “과거 수사 결과는 대단히 신뢰하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 독립투사·반독재투사 장준하 장 선생은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태어났다. 1944년 일본군의 학도병으로 중국에 파병됐으나 일본군을 탈출했다. 그의 저서 <돌베개>를 보면, 고향을 떠나면서 아내 김희숙씨에게 ‘내가 형제와 골육을 위하는 일이라면 비록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하여도 이는 원하는 바이라’는 성서 구절을 남겼다. 편지에 이 구절이 적혀 있으면 일본군에서 탈출했다는 뜻으로 알라는 귀띔도 남겼다. 그는 44년 7월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한 뒤 중국군을 거쳐 그해 11월 53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까지 2400㎞ 길을 걸어 백범 김구 산하의 광복군에 합류했다.
영원한 광복군 광복군 장교로서 1945년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중국 시안에서 미국 정보기관(OSS) 특수 훈련을 받던 당시의 장준하 선생(오른쪽)과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가운데), 노능서 선생. |
광복군 장교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국 정보기관(OSS) 대원을 자원해 특수 게릴라 훈련을 받았다. 일본의 항복 뒤인 1945년 11월2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로 귀국해 김구 주석의 수행비서로 일했다.
한국전쟁 때인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월간 <사상계>를 창간해, 50년대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며 당시 지식인들이 가장 주목하는 잡지로 이끌었다. <사상계>는 5·16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육군 소장이 대통령이 된 뒤 추진한 한-일 수교 협상이나 베트남 국군 파병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장 선생은 특히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의 연사로 전국 순회강연을 하면서 70여회의 연설을 통해 박정희, 김종필 등 한-일 협상 주도 세력을 비판했다. 베트남 국군 파병과 관련해선 1966년 방한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을 두고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온 것”이라며 신랄하게 공격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매진된 <사상계>를 반품하거나 한 해에 두번씩이나 세무사찰을 하는 방식으로 <사상계>를 압박했다.
장 선생은 1962년 한국인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며 나라 밖에서도 업적을 인정받았다. 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수감된 상태에서 국회의원으로 옥중당선됐다. 72년 10월 유신 이후엔 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는 등 반유신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장 선생이 숨진 뒤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영결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장준하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뿐”이라고 말했다. 박기용 권혁철 기자 xeno@hani.co.kr
사진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장준하와 박정희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장준하 전 사상계 사장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일으켜 18년 동안 군사독재정권을 유지한 권력자이고, 장준하는 독재자가 파괴한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정론지 <사상계>를 발행하고 민주주의와 통일운동에 온몸을 바쳤다.
생존 시 두 사람은 양 극단에서 타협을 거부하며 각기 신념의 길을 걸었다. 대결과 대치의 평행선을 유지하면서 한 사람은 부하의 총격으로 숨지고, 한 사람은 의문사(박정희에의해)로 숨졌다.
두 사람은 출생과 성장배경이 상이하고 인생관 국가관도 크게 달랐다.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났고, 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박정희는 농사꾼 아버지의 6남 2녀 중 막내아들이었고, 장준하는 목사 아버지의 4남 1녀 중 장남이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 공립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장준하는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신안소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일치점이 있다면 식민지 시절 청년기에 3년 여간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교편생활을 하던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일본 군인이 되는 길로 들어섰고,
장준하는 일본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가서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갈림길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박정희는 1940년 봄, 그의 나이 23세 때 느닷없이 교직을 팽개치고 만주로 건너가서
'충직한 일본제국의 군인'이 되는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다.
장준하는 24세 때 학병을 탈출하여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면서 독립운동가로 나선다.
박정희의 세계관이 권력주의적, 목표지향적이라면
장준하는 민족주의적, 가치지향적이라 하겠다.
■ 친일과 항일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만주국 황제 부의로부터 금시계와 일본육사 진학의 특전을 받는다. 그가 최우등상을 타고 답사를 읽는 졸업식 장면은 뉴스영화로 촬영되어 당시 만주국 각 도시의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다.
반면 장준하는 일본군 제42부대에 배속된지 얼마 후에 중국 서주로 전속되었다. 여기에서 탈출에 성공, 고향에 있는 아내에게 약속한 내용의 암호서신을 띄운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노라." 장준하는 훗날 그의 수기 돌베개에서 일본군을 탈출한 그날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44년 7월 7일 이날은 광활한 대지에 나의 운명을 맡기던 날이다. 중경을 찾아가는 대륙횡단을 위해 중국 벌판의 황토 속으로 그 뜨거운 지열과 엄청난 비바람과 매서운 눈보라의 길 6천리를 헤매기 시작한 날이다. 풍전등화의 촛불처럼 나의 의지에 불을 붙이고 나의 신념으로 기름 부어 나의 길을 찾아 떠난 날이다." |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일본육사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수료한다. 투철한 제국군인정신과 열성적인 학습으로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이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육군 대신상을 수상한다.
일본육사 졸업과 함께 1944년 육군장교에 임관된 박정희 소위(다카키 마사오)는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 산하 제8군단 열하 보병사단에 배속된다. 열하지구는 일본군에 대한 항일세력의 저항이 끊이지 않게 전개된 곳으로서 주력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었다.
팔로군 외에도 동북3성과 화북지방의 국부군, 지방군벌, 항일유격대, 비적들까지 일본군과의 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임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한 박정희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의 토벌작전에 동원되었다.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박정희는 전후 110회에 걸쳐 항일게릴라 토벌작전에 참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일본군을 탈출한 장준하는 중국천지 6천리를, 왜군의 추적과 모진 비바람․굶주림․질병에도 지칠 줄 모르고, 때로는 중국 국민군의 포로가 되기도 하면서 독립군의 근거지 중경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한 때 국부군 중위로서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장준하는 중국대륙을 헤맨지 7개월만에 중경에 도착하여 임시정부 청사에서 김구 주석을 만나게 된다. 1945년 1월의 일이다.
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대위에 임관한 장준하는 <등불>, <제단> 등 독립군의 기관지 발간을 주도하면서 광복운동에 나선다. 이무렵 장준하는 특수요원으로 선발되어 서안으로 가서 미 육군군사교육(OSS) 과정을 마치고 국내 밀파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다가 해방을 맞는다.
박정희와 장준하의 운명적인 첫 만남은 이역에서 맞은 8․15해방 직후였다. 일제의 항복으로 패잔병이 된 박정희는 중국 민간인 복장을 하고 신형준․이주일 등과 함께 북경 성안에 나타났다. 이 무렵 임시정부측에서는 소련군이 한국에 들어가게 되면 공산주의 세력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내의 한인병사들을 광복군에 흡수하여 이들을 귀국시켜 공산세력을 막아낸다는 방침이었기 때문에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이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박정희도 이 무렵에 북경에 나타나서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고 장준하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광복군 정진대의 일원으로 국내진입을 시도하다 실패한 장준하는 서안에서 귀국의 날을 기다리고 있을때 박정희와 해후를 하게 된다. 9월 초순경이다.
장준하는 이때 일본장교라는 과거를 별로 참회하지 않고 행동하는 박정희에게『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자진해서 일본군을 탈출하지 않은점』,『일본이 패전하지 않았다면 일군장교로서 여전히 한국 독립투사를 학살했을 것이라는 점』,『유난스럽게 기회주의적인 자세』 등을 들어 크게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측근 이철우씨 증언)
■ 해방과 귀환
박정희는 1946년 6월 미상륙선으로 중국 천진을 통해 부산으로 귀환했다. 귀환 3개월 후 육군사관학교 2년 졸업반에 편입, 3개월 장교 훈련 과정을 마치고 대위에 임관했다. 국군장교로 변신한 박정희는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주모자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직접 청원하여 감형이 되었고, 6․25전쟁이 터지면서 소령으로 군에 복직하게 된다. 1953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육군소장에 승진하여 군에서 나름대로의 지위를 확보한다.
장준하는 1945년 11월 김구 주석과 함께 귀국하여 김주석의 비서실장, 비상국민회의 서기 및 민주위원 비서 등을 역임하면서 건국과업에 참여한다.
1947년에는 이범석 장군이 지도하는 조선민족청년단에 참가하여 중앙훈련소 교무처장을 맡고, 1949년초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하여 신학도가 된다. 이후 대한민국정부 서기관에 임명되어 국민사상연구원의 기획업무를 관장하고 1952년 9월 월간 <사상>지를 발행하여 16년 동안 자유․민주․반독재 투쟁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다.
박정희가 군에서 시련을 겪으며 군장성으로 진급한데 비해
장준하는 언론계에서 산고를 겪으며 언론인으로 성장한다. 장준하도 독립군 장교 출신이라는 전력으로 보아 뜻만 있었으면 신생국군에 들어가서 쉽게 승진하여 박정희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백범의 노선을 좇아 통일정부를 추진하다가 좌절하여 언론을 통한 민주주의 실천과 국민사상 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 5.16과 장준하
두 사람이 정치현장에서 맞부딪치게 된 것은 박정희 주도의 5.16군사 쿠데타가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는 60만명의 한국군병력 가운데에서 겨우 1,600명을 동원, 8개월전에 국민적 합의로 출범한 민주당 정권을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장준하는 이때 민주당 정권의 국토건설본부장직을 맡고있었다.
평소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장준하는 장면 정부의 요직 제의를 거부하고 국민운동 차원의 국토건설본부일을 맡고있었다. 때문에 쿠데타 세력은 장면 정권의 요인들을 대부분 체포하고 국토건설본부를 해체시키면서도 장준하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의 직위가 체포될 위치도 아니었지만 <사상계>1)대표라는 국내외적 권위가 크게 작용되었을 것이다.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두사람은 또 한차례 양극점을 서게 된다. 박정희는 명실상부한 군정의 실권자로서 반공국시, 구악척결, 경제건설, 세대교체 등을 내걸고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준하는 이에 굴하지 않고 도전한다. 6월호 <사상계> 권두언을 통해 "5․16 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라면서 군은 최단시일 내에 그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장준하가 군사정권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 것은 <사상계> 7월호 함석헌 옹의 '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논설을 통해서이다. 함옹은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이 글을 썼고, 장준하는 잡지사의 문을 닫을 각오를 하고 실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박정희와 일전을 각오한 도전인 것이다. 쿠데타 이후 언론인․학자․지식인 할 것 없이 모두 주눅이 들어 있던 판에 장준하가 <사상계>와 함석헌옹을 통해 5․16 비판의 물꼬를 튼 것이다.
군사정부는 즉각 함옹을 구속하고 장준하를 입건하였다. 그래도 장준하는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의 필봉을 멈추지 않았다. 군정기간 동안 <사상계>는 5․16 쿠데타 비판의 전위지 역할을 했다. 박정희는 정치적인 번의를 거듭하면서 어용 지식인, 언론인, 일부 구정치인들을 끌어들이고, 사상계 출신 지식인들을 포섭하였는데 5․16의 합리화 작업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박정희는 5․16의 불가피성을 다음과 같이 합리화시킨다.『첫째, 용공조직 및 단체의 출현』『 둘째, 경제적 위기』『셋째, 사회적 무질서와 국민도덕의 퇴폐』『넷째, 고질적인 정치적 병폐 』『다섯째, 군부의 성장과 군사혁명의 불가피』
이에 대해 장준하는 <사상계> 1964년 5월호 권두언 '유산된 혁명 3년'을 통해 5․16의 불가론을 제기한다.
"5․16 세 돌을 맞는 오늘 이 나라의 저류에서 이글거리는 위기의 지열은 자유당 지배 말기 증상과 다름이 없는 한계점에 이른감이 없지 않다. 그 부패․부정․무능에 있어서 굳이 차이점을 들자면 신악이 구악보다 그 방식이 교묘하고 그 스케일이 오히려 대담하게도 규모가 커졌다는 여론에 접할 때 이 민국을 위해 너무 애달픈감을 금할 길이 없다.
국민혁명을 구두선으로 외치던 5월혁명이 세 돌을 경과하는 동안에 집권욕과 물욕만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서 점차 민심을 등져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음은 실로 이 나라 장래를 위해 심히 슬프고도 위태로운 사태가 아닐 수 없다..." |
5․16에 대한 주역과 비판자의 관점은 이토록 대척점을 이루었다.
■ 한일협상 반대
박․장 두사람이 본격적으로 정면에서 대결하게 된 것은 한․일 굴욕회담 추진과정에서이다. 박정희는 여러 가지 필요에서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외교경험이 거의 없는 쿠데타 출신들이 회담을 주도하다 보니 여러 부문에서 일본측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많은 양보를 하여 국민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또 비밀 협상으로 인한 여러 가지 흑막에 싸여서 국민의 분노를 가중시켰다. 이때 장준하는 굴욕회담 저지투쟁의 앞자리에 선다. 여기에는 일본군 장교 출신에 대한 근원적인 거부감정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박정희는 1964년 6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시민의 시위를 통제하기 위한 계엄령을 서울지역에 선포했다. 그리고 다시 한일협정비준을 반대하는 학생데모가 거세게 일어나자 8월26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2)을 내렸다. 박정희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굴욕협상을 체결하고 비준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상계> 지면 이외의 별다른 방법이 없는 장준하는 권력의 물리력 앞에 한 자루 붓으로 대항의 길을 찾았다.
■ 국가원수 모독?
장준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국민을 짓누르면서 굴욕협정을 체결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더이상 국가원수로 인정하기 어려운 심경에 이른다.
1966년 삼성재벌 계열의 한국비료에서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정경유착의 한 상징으로 단정한 야당과 학생들은 전국적인 규탄대회를 열었다. 장준하는 10월 15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린 민중당 주최 재벌밀수 규탄대회에 초청연사로 참석하여 "밀수왕초는 바로 박정희"라고 공격하면서 박대통령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박정권은 즉각 장준하를 수감했다. 국가원수 모독죄로 3개월간의 옥고를 겪게 된 것이다. 박정희가 장준하를 투옥시킨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국내외적 여론에 휘말려 1개월 만에 그를 석방하기에 이른다. 석방이 된 장준하는 1967년 재야 4자회담을 주선하여 야당통합을 달성하고 신민당에 입당, 박정희의 재선을 막기 위한 정치일선에 나선다.
이 무렵 박정희는 눈엣가시와 같았던 <사상계>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여 이 잡지는 창간 이래 최악의 경영난에 빠지게 된다. 세무사찰을 비롯하여 지방서점에 압력을 넣어, 서기에 진열도 못하고 반품토록 했다. 장준하가 성격에 맞지도 않으면서 정계에 투신한 원인의 하나는 정부의 방해로 인한 언론투쟁의 한계를 느껴, 정치투쟁을 통한 정권교체라는 방법론상의 변화를 찾기 위해서라 하겠다.
'행동하는 야당인'으로 변신한 장준하는 1967년 4월 대통령선거 유세를 통해 다시 박정희 비판에 열을 올린다. 박정희를 월남전에 한국청년의 피를 파는 매혈자라고 규탄하고, 예의 '국가원수 자격 불가론'을 거듭 제기한 것이다. 이로 인해 또 '국가원수 모독죄' 혐의로 3개월간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 박정희에 의한 두 번째 투옥이다.
박정희의 거듭되는 탄압에도 장준하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1967년 악명 높은 6․8 부정선거에서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옥중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박정희에 또 한차례 충격을 가한다. 장준하의 의정활동은 '국회의원 장준하'라기 보다 '사상계 장준하'의 연장이었다. 다른 위원들이 기피하는 국방위원으로 지원하여 군 내부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파고들었다. 박정희와 간접싸움을 벌인 셈이다.
■ 유신하의 사투
박정희는 1972년 10월 친히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만든 헌법을 중단시키고 대통령이 3권위에 군림하는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선포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이번 비상조치는 결코 한낱 정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국권을 수호하고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성실한 대화를 통해 전쟁 재발의 위험을 미연에 막고, 나아가서는 5천만 민족의 영광스러운 통일과 중흥을 이룩하려는, 실로 우리 민족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불가피한 조치라고 확신한다." |
박정희의 이러한 추상적인 명분속에는 국회해산, 정당활동 중지, 야당인사 구속 등 그야말로 초법적이고 비민주적인 행동이 은폐되어 있었다. 박정희의 민주주의의 상도를 짓밟는 폭압조치에 장준하도 침묵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1973년 12월 24일 함석헌․김재순․이병린․지학순․김수환씨 등과 개헌청원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고, '헌행헌법을 개정하여 현행헌법 이전의 민주헌법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는 청원 내용을 박정희에게 공개발송한 것이다. 장준하는 자신이 쓴 '개헌청원운동 취지문'에서 "오늘의 모든 사태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전히 회복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경제의 파탄, 민심의 혼란, 남북긴장의 재현이란 상황속에서 학원과 교회, 언론계와 가두에서 울부짖는 자유화의 요구 등 이 모든것을 종합하면 오늘의 헌법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라는 백만인 개헌 청원운동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권력욕이 이런 정도의 청원으로 자제될 리는 없었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제1호를 발동하여 그 첫 대상자로 장준하와 백기완을 구속, 정치보복에 나선 것이다. 장준하로서는 세 번째의 구속에 해당되는데, 비상군법회의는 15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 출범에 앞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가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3)을 채택케 했다. 그런데 이제까지 박정희의 행로에 끊임없이 비판을 가해온 장준하가 7․4 남북공동성명에는 지지를 보냈다. 그가 박정희의 정책을지지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박정희가 비록 정치목적으로 통일문제를 이용하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통일에 접근하게 되면 다행이라는 생각에서 남북공동성명을지지한 것이다. 7․4 공동성명을 전후하여 박정희는 중간에 사람을 넣어 장준하에게 남북회담 대표직을 맡아줄 것, 국가공로상․연금지급을 제의 해왔다. 그러나 장준하는 민주정부가 수립되면 몰라도 박정권에서는 일체의 공직이나 연금을 받을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한다. 두 사람 사이의 은밀한 제의와 거부 또한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 마지막 대결점
장준하가 긴급조치4)위반 혐의로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건강의 악화로 석방된 것은 1974년 12월이다. 감옥에서 협심증이 악화되어 더 이상 수형생활을 하기 어려워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것이다.
장준하 석방 무렵의 긴급조치의 위력이 절정에 이르고, 이에 맞선 저항세력의 투쟁이 치열하여 정국은 최악의 상태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감옥은 양심수들로 가득 찼다. 이 무렵 박정희는 여러가지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밖으로는 최대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씨를 도쿄에서 납치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사게 되었고, 가정적으로는 8.15행사장에서 문세광의 저격으로 자신은 피격을 모면하였으나 부인 육영수가 총상을 입고 운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생․재야․종교․지식인들은 긴급조치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반유신 저항운동에 나섰으며, 인권문제 등으로 카터 미국정부와 외교마찰을 빚고 있었다.
1년여 만에 출감한 장준하는 성치 않은 몸으로 다시 민주회복투쟁의 대열에 돌아왔다. 1975년 1월8일 '박정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격적으로 공표하면서 민주헌정의 회복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감옥에서 더욱 날이 선 장준하의 민주회복의 의지는 다시 한번 박정희의 심장을 향해 던져졌다.
장준하는 이 서한에서 "5․16 군사정변 이후 귀하의 정치노선에 계속 비판적이었던 본인도 벅찬 감격으로 통일을 위한 남북대화가 기필코 성공되기를 기원하면서 귀하가 취한 역사적 결단에 찬사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라고 전제, "민주주의만이 북과 대결할 수 있는 우리의 정신적 지주요, 도덕적 바탕" 이라면서 다음의 6개항의 실천을 촉구했다.
1. 파괴된 민주헌정의 회복을 위해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하되 민족통일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완전한 민주헌법으로 하여 이 헌법에 의해 자신의 거취를 지혜롭고 영예롭게 스스로 택함은 물론, 앞으로 올 모든 집권자들의 규범으로 삼게 할 것.
2.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전원 무조건 석방할 것.
3. 학원․종교․언론사찰을 즉각 중지하고 야비한 정보정치의 수법인 이간․분열공작으로 더 이상 불신풍조와 상호배신 행위의 습성을 우리 사회에 조장하지 말 것.
4. 자유언론(특히 일제 이래 한국언론의 수난의 여왕이요, 민족지로서 연면한 전통과 역사를 가진 동아일보, 동아방송 등)에 대한 비열하고 음흉한 탄압정책을 즉시 철회할 것.
5. 정부의 경제적 실책으로 가중되는 당면한 민생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획기적인 경제정책을 실현할 것.
6.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이상적이고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수립․추진하되 민중의 대표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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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정희는 장준화와 민주인사들의 우국적인 요구를 거부했다. '거부' 라는 표현보다 묵살했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에 따라 민주회복 국민회의는 '민주헌장'을 선포하면서 더욱 결집된 역량으로 유신체제 타도에 나섰다. 각계 재야지도자들의 힘을 묶는데는 장준하의 인격과 헌신이 큰 몫을 했다.
장준하는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계곡에서 57세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한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독립군정 진대로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한 3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사망하기전 어느 해 8월 15일, 기관원에 연행되었다가 저녁 늦게 귀가하여 비통한 심경으로 후진들에게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광복군 장교였던 내가, 조국광복을 위해 중국땅 수천리를 맨 발로 헤맨 내가, 오늘날 광복이 되었다고 하는 조국에서, 그것도 광복절날 끌려다녀야 하는가?" 장준하의 이 말은 일본군 장교 출신인 대통령과 연결시켜보면 분노가 섞인 것일 터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잘못 전개돼온 우리 현대사의 오류와 모순을 개탄하는 순열한 민족주의자의 독백이었음에 틀림없다.
잘못된 현대사의 오류는, 그러나 '끌려다니는' 정도에서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더욱 참혹한 시련으로 이어졌다. 많은 의혹을 남기면서 박정희의 정신적․이념적 그리고 '근원적'인 적수 장준하는 산계곡에서 사체로 변한 것이다.
*** 70년대 시대상황 ***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사회는 여러 측면에서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다. 즉,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가 현저하게 변화하였으며, 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의 성장주의 정책에 따른 국민경제구조 및 사회 계급구조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또한 상부구조로서의 국가구조 및 이데올로기가 권위주의적 독재체제로 굳어져 가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창조적 정치참여는 배제되고 패배주의와 퇴폐적 문화만 생성되었다.
■ 국제 정세분야
먼저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이른바 미국의 ‘닉슨독트린5)’에서 천명되었듯이 동북아시아의 냉전체제가 완화되고 화해무드가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중공 봉쇄정책’으로 특징지어진 동북아의 냉전구조는 월남전쟁에서의 확실한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미국이 스스로 중공과의 국교수립을 추진하게 되면서 화해분위기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동북아에서의 군사적인 후퇴와 경제적인 침략구조의 정착이라는 신고립주의적인 제국주의 정책으로 전환하였으며, 중공은 문화대혁명 이후 다시 제기된 경제적 발전의 필요성 때문에 선진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적극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미국은 동아시아의 군사전략상 동반자로서 일본을 적극 육성하기 시작하여, 일본의 재군비 문제가 심각한 관심사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의 대소 전진기지라 할 수 있는 한반도는 미‧소관계의 평화적 공존을 보장하기 위한 완충지대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게 되어 분단상태의 현상유지를 위한 긴장완화정책이 요구되었다. 그에 따라 주한미군의 일부 감축 및 남북대화가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은 이러한 국제관계의 변화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 사회분야
60년대 성장일변도의 경제개발정책이 낳은 국민경제구조의 변화 및 사회적 계급갈등의 심화현상이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60년대 중반 이후 엄청난 외국자본의 도입과 함께 실시된 수입대체 공업화는 그 결과물로서 한국사회의 중심적인 생산양식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즉 예속적 독점자본주의 경제구조로 정착시켰으며 농업생산력의 피폐화를 초래하였다.
농업생산력의 황폐화를 가져온 수출지향적 성장정책은 전체 국민경제구조의 대외의존성 심화, 내포적 공업화의 결여로 인한 도시 농촌간의 극심한 불균형과 파행적 이중구조의 정착,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몰려든 광범한 이농인구로 인한 도시의 급격한 팽창과 그에 따른 도시 빈민문제와 공해문제 등 이루 헤아리기 힘든 문제들을 양산해 놓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산업예비군으로 형성된 광범한 도시빈민층은 산업 노동자계급으로서 정상적인 이전의 길이 대부분 봉쇄당한채, 극심한 저임금에 시달려야 하는 주변적 노동자층을 형성하거나 영세상인으로 전락,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면서 한국사회의 계급구성을 현격하게 변화시켰다. 즉 공업생산력의 성장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급성장, 이농으로 인한 농촌인구의 격감과 도시빈민층(도시 쁘띠부르주아즈 하층)의 광범한 창출이 이 시기의 사회구성을 특징짓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정치분야
앞서 말한 동북아시아 냉전체제 이완과 국민경제구조 및 사회적 계급구성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상부구조로서의 국가구조와 이데올로기 또한 크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60년대 말까지 형식적이나마 지켜지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3선개헌과 유신을 거치면서 의사 민간화된 군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로 변화되었고, 냉전 이데올로기에 덧붙여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주요한 지배이념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이른바 ‘통치행위’의 절대적 권위만이 존재할 뿐, 국민들의 정당하고 창조적인 정치행위는 극도로 위축되기 시작하여 1975년의 ‘긴급조치 9호6)’에 이르러 완전히 소멸해 버린다.
장준하 의문사
■ 개 요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민족의 자주․평화․통일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張俊河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풀․나무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라." [ 장준하선생이 숨져 누워있던 약사봉 골짜기에 세워진 표석문 중에서...] |
1975년 8월17일 오후 1시20분께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에 대한 반대투쟁을 벌이던 재야 지도자 장준하가 경기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약사봉 등산도중 벼랑에서 의문의 추락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55세, 박정희 독재가 언제까지 지속 될 지 모르던 당시의 정치상황 속에서 없어서는 안될 선생께서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때 서돈양 의정부지청 당직검사는, 장준하선생이 벼랑에서 떨어져 귀밑 부분이 함몰돼 뇌진탕으로 숨졌다고 발표하고 단순 변사사건으로 사건을 종결처리했다. 등산 도중 일행과 떨어져 김용환씨(중학강사)와 같이 하산하는 도중 경사가 급해 소나무를 잡고 발을 딛는 순간 나무가 휘어지면서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서돈양검사는 사고 다음날 새벽 1시경 현장에 도착, 캄캄한 상태에서 현장조사를 마쳤을 뿐이고, 그날 낮 김용환씨를 검찰로 불러 조사기록을 작성했을 뿐이었다. 당시 검찰조사에서는 장준하가 14m 높이의 험한 벼랑 아래로 떨어졌는데도 주검에 외상이나 골절상이 하나도 없는 등 사인을 둘러싸고 제기된 숱한 의혹들이 전혀 해명되지 않았다
장준하 [張俊河]
태어난 때 | 1918. 8.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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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곳 | 평북 의주 |
죽은 때 | 1975. 8. 17 |
죽은 곳 | 경기 포천. |
소속 국가 | 한국 |
직업 | 언론인·정치가 |
언론인·정치가.
기독교 목사인 장석인과 김경문 사이에서 4남 1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44년 6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곧 탈영하여 중국군에 편입된 후 바로 김준엽 등과 함께 충칭[重慶]으로 가서 1945년 1월 광복군에 가담해 광복군 대위가 되었고, 1945년 8월 중국 시안[西安]에서 미육군 군사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다가 8·15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수행원으로 입국, 김구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및 민주의원 비서 등을 역임했고, 1953년 4월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여, 지속적으로 자유·민주·통일·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1962년 8월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상을 수상했고, 1967년 3월 야당통합을 위한 4자회담을 주선하여 통합을 이루어냈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중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으며 그해 6월 옥중출마로 서울 동대문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2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참가했고,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에 피임되었다. 1973년 12월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 인 서명운동'을 주도했으며,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974년 4월 15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2월 지병인 협심증이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출옥 후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해 다시 박정희정권과 맞섰고, 1975년초에는 민주회복을 위한 범민주세력의 단합을 강력히 촉구, 각계에서 그의 호소에 동조하는 성명이 잇따르면서 재야세력의 확고한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저서로 〈돌베개〉가 있다.→ 사상계
장준하의 사상계, '5.16 혁명' 지지 권두언 全文
'<4.19혁명>은 '민주주의 혁명.. <5.16혁명>은 '민족주의적 군사혁명'
'<5.16 혁명>은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때는 '불가피한 일''
'<5.16 군사혁명>으로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는 마련된 것'
일년전(一年前) 우리나라의 젊은 학도(學徒)들은 그 꿈 많은 청춘을 바쳐, 부패와 탐욕과 수탈과 부정(不正)에 도취한 이승만독재정권(李承晩獨裁政權)을 타도하고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사경(死境)에서 희생시켰었다.
그러나 정치생리(政治生理)와 정치적(政治的) 행장(行狀)과 사고방식(思考方式)에 있어서 자유당(自由黨)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민주당(民主黨)은 혁명직후의 정치적(政治的) 공백기(空白期)를 기화로 지나치게 비대(肥大)해진 나머지 스스로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혀 정권(政權)을 마치 전리품(戰利品)처럼 착각하고, 혁명과업(革命課業)의 수행은커녕 추잡하고 비열한 파쟁(派爭)과 이권운동에 몰두하여 그 바쁘고 귀중한 시간을 부질없이 낭비해왔음은 우리들이 바로 며칠 전까지 목적해온 바이다.
그러는 동안 국민경제(國民經濟)는 황폐화하고 대중의 물질생활은 더 한층 악화되고 사회적(社會的) 부(富)는 소수자의 수중으로만 집중하였다. 그 결과로 절망(絶望), 사치, 퇴폐, 패배주의(敗北主義)의 풍조가 이 강산을 풍미하고 있었으며 이를 틈타서 북한(北韓)의 공산도당들은 내부적 혼란의 조성과 붕괴를 백방으로 획책하여왔다.
절정에 달한 국정(國政)의 문란, 고질화(固疾化)한 부패, 마비상태에 빠진 사회적(社會的) 기강(紀綱)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民族的) 활로(活路)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 군사혁명(軍事革命)이다.
4.19 혁명(革命)이 입헌정치(立憲政治)와 자유(自由)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혁명(民主主義革命)이었다면, 5.16 혁명(革命)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無秩序)와 공산주의(共産主義)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군사혁명(軍事革命)이다.
따라서 5.16 혁명(革命)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開花)시켜야 할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이념(理念)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民族的) 현실(現實)에서 볼 때는 불가피(不可避)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군사혁명(軍事革命)은, 단지 정치권력(政治權力)이 국민(國民)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데서 그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혁명공약(革命公約)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무능(無能)하고 고식적(姑息的)인 집권당(執權黨)과 정부(政府)가 수행하지 못한 4.19 혁명(革命)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革命勢力)이 수행한다는 점(點)에서 우리는 5.16 혁명(革命)의 적극적 의의(意義)를 구(求)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는 5.16 혁명(革命)은 4.19 혁명(革命)의 부정(否定)이 아니라 그의 계승(繼承), 연장(延長)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냉철히 생각할 때, 4.19 일년 만에 다시 정변(政變)을 보지 않으면 안 된 이 땅의 비상(非常)하고 절박한 사태에 대한 책임을 우리는 어느 한 정당(政黨)이나 개인(個人)에다만 전적(全的)으로 뒤집어씌움으로써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 배후에서 또는 주변에서 사회적(社會的)혼란(混亂)을 선동한 방종 무쌍했던 언론(言論), 타락한 망국적(亡國的) 금력선거(金力選擧), 이미 도박장으로 화(化)한 국회(國會), 시세에 끌려 당쟁(黨爭)에만 눈이 어두웠던 소위 정객(政客)들에게도 책임이 적지 않으며,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국민각자(國民各自)에도 다소를 막론하고 간접적 책임이 있음을 우리들은 준렬하게 자아반성(自我反省)하지 않을 수 없다.
5.16 군사혁명(軍事革命)으로 우리들이, 과거의 방종, 무질서(無秩序), 타성(墮性), 편의주의(便宜主義)의 낡은 껍질에서 자기탈피(自己脫皮)하여 일체의 구악(舊惡)의 뿌리를 뽑고 새로운 민족적(民族的) 활로(活路)를 개척할 계기는 마련된 것이다.
혁명정권(革命政權)은 지금 법질서(法秩序)의 존중, 강건한 생활기풍(生活氣風)의 확립, 불량도당(不良徒黨)의 소탕, 부정축재자(不正蓄財者)의 처리, 농어촌(農漁村)의 고리채정리(高利債整理), 국토건설사업(國土建設事業) 등에서 괄목할만한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누백년(累百年)의 사회악(社會惡)과 퇴폐한 습성(習性), 원시적(原始的) 빈곤(貧困)이 엉크러져 있는 이 어려운 조건 밑에서, 정치혁명(政治革命) 사회혁명(社會革命) 도덕혁명(道德革命)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정권(革命政權)이 치밀한 과학적(科學的) 계획(計劃)과 불타는 실천력(實踐力)을 가지고 모든 과제를 해결해 나아갈 것을 간곡히 기대하는 동시에 동포들의 자각(自覺)있는 지지(支持)를 다시금 요청해서 마지않는 바이다.
불리(不利)한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와 막다른 정치적(政治的) 한계상황(限界狀況)에서, 국제공산제국주의(國際共産帝國主義)와 대결하면서 자유(自由)와 복지(福祉)와 문화(文化)의 방향으로 국가(國家)를 재건(再建)하여야할 우리들의 민족적(民族的) 과업은 크고도 어렵다. 이제 모든 정치권력(政治權力)은 혁명정권(革命政權)에 집중되었고, 혁명정권(革命政權)은 민족백년(民族百年)의 운명을 그 쌍견에 짊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혁명정부(革命政府)는 우리사회를 첩첩히 억매고 있는 악순환(惡循環)의 사슬을 대담하게 끊어야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민정(民政)아닌 군정(軍政)의 의미(意味)가 있는 것이요, 혁명(革命)의 가치가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일체의 권력(權力)이 혁명정권(革命政權)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권력(權力)이 남용되지 않도록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는 이에 만전의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본래 권력(權力)은 부패하기 쉽고 더욱이 절대권력(絶對權力)은 절대적(絶對的)으로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함은 하나의 정치학적(政治學的) 법칙(法則)이다. 이러한 권력(權力)의 자기부식작용(自己腐蝕作用)에 걸리지 않고 오늘의 청신(淸新)한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는 시급히 혁명과업(革命課業)을 완수하고, 최단 시일 내에 참신하고 양심적(良心的)인 정치인(政治人)들에게 정권(政權)을 이양한 후 쾌히 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엄숙한 혁명공약(革命公約)을 깨끗이, 군인(軍人)답게 실천하는 길 이외의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국군(國軍)의 위대한 공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사상(民主主義史上)에 영원히 빛날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한국(韓國)의 군사혁명(軍事革命)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후진국국민(後進國國民)들의 길잡이요, 모범으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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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에는 장준하 선생이 그렇게 바라던
<5·16혁명>은 <5·16 쿠테타>가 되어버렸다.
박정희는 최단시일내에 사회안정을 꽤하고 정치인에게 정권을 내어 놓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박정희의 음흉한 야망이 드러난 셈이다.
장준하는 유신론의 3년을 통해 유신론의 불가론을 주장한다.
국민혁명을 구두선으로 외치던 5월혁명이 세 돌을 경과하는 동안에 집권욕과 물욕
만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서 점차 민심을 등져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음은 실로
이 나라 장래를 위해 심히 슬프고도 위태로운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장준하-
박정희는 계속 유신독재정권을 유지했고, 독재자로 전락해버렸다.
그래서 그는 무려18년간이나 정권을 독재했다.
박정희의 독재권력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이 바로 그의 최측근 김재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