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사라봉공원 모충사 김만덕 나무
제주도를 바람, 돌, 여자가 많다고 하여 삼다도라 한다. 비바리는 제주 처녀를 가리키는 향토어이다. 여기서 삼다도의 여자는 제주 비바리의 강인함과 근면함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김만덕(1739~1812)은 그 강인함과 근면함의 표상인 제주 비바리였다. 본관이 김해인 아버지 김응렬과 어머니 제주 고씨의 2남 1녀로 북제주군 구좌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상인으로 제주와 전라도 나주를 오가며 미역,·전복,·귤 등을 팔고, 쌀 등 곡식을 사 왔다. 그러던 중 김만덕이 11살 되던 해에 풍랑으로 사망했고, 어머니도 그 충격으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김만덕은 외삼촌 집에 잠시 머물다 퇴기 월중선에게 기예를 배우며 기적에 올랐다. 하지만 20살 때 제주 목사 신광익과 판관 한유추를 찾아가 부득이 기녀가 된 사정을 하소연하고 다시 양인으로의 환속을 요청해 면천 받았다.
어렵사리 양인이 된 김만덕은 객주업을 열어 본토와 제주도의 물자 유통업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객주들의 시기와 질투로 부정축재 혐의를 받아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따라서 당시 문인 심노승의 ‘만덕이 기녀 노릇을 할 때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하여 남자가 돈이 많으면 따랐다가 돈이 떨어지면 떠나되 옷가지마저 빼앗아서 그녀가 지닌 바지저고리가 수백 벌이었다’는 폄훼의 글은 일부 객주들의 거짓말을 옮긴 거로 여겨진다.
1790년 이래 제주는 흉년과 태풍 피해로 많은 백성이 굶어 죽었다. 또 1794년은 바람과 해수로 인한 100년 만의 큰 흉년이었다. 정조 19년인 1795년 윤이월 조정은 5천 섬의 구휼미를 배 12척에 실어 보냈으나, 5척이 난파당했다. 이때 김만덕이 1천금을 내놓아 육지의 곡식을 사와 친척과 은혜 입은 사람을 돕고, 나머지를 모두 관아로 보냈다. 이 일이 제주 전임 목사 유사모에 의해 조정에 알려졌고 정조는 김만덕의 소원이 ‘한양에서 왕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1796년 마침내 김만덕은 한양에 가서 우의정 윤시동의 부인 처소에서 지내며, 혜경궁 홍씨를 비롯한 왕실 어른들을 만났다. 정조는 김만덕에게 명예 관직인 내의원 ‘차비대령행수의녀’의 직책을 주고 당시 초계문신 친시에 ‘만덕전’을 주제로 과거를 치르게까지 했다. 김만덕은 이듬해 봄까지 한양에서 지내며 금강산의 명승지까지 두루 구경하고 제주로 돌아왔다.
기녀 출신 양인이 왕을 알현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제주도 사람들은 인조 7년(1629년)에 내려진 출륙금지령으로 평생 섬을 나갈 수 없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이 김만덕의 일은 당대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큰 관심이었다. 채제공은 만덕전을 집필했고 정약용, 김정희, 조수삼 등 문인들도 김만덕의 구휼 사업을 칭송하는 시와 글을 남겼다.
김만덕은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다시 객주 일을 계속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오빠 김만석의 아들 김성집의 장남 김시채를 양손자로 삼아 대를 이었다. 그리고 1812년 10월 22일 일흔네 살에 세상을 떠나며 양손자의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주도의 빈민들에게 기부했다.
1975년이다. 사라봉의 공동묘지와 충혼묘지를 정비하고 한말의병과 순국지사, 김만덕을 기리는 모충사를 세워 사라봉 아래 김만덕 묘비와 묘탑을 이전했다. 또 제주 무역선이 오가던 화북포구와 이웃하는 건입포구 산지천가에 김만덕 객주를 열고 길 건너에 기념관을 세웠다.
산지천가 김만덕 객주에서 제주 전통 집의 구조와 생활상을 엿보고, 기념관에도 들린 다음 이어 사라봉 오름 모충사 김만덕 묘탑을 찾는다. 해송과 녹나무 우거진 틈새로 보이는 아! 한라산! 지위만 챙기고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 명예는 내팽개치는 농단 세태가 답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