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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듯 한여름의 열기가 신록을 짙푸르게 산천을 뒤덮은 7월입니다.
이번 문화 힐링 탐방은 경남 진주시의 역사와 자연, 음식문화 및 산청군, 함안군 일원에서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과 한의학의 보고인 동의보감을 만드신 허준의
스승 유의태 선생의 한의학 탐방과 남명 조식 선생의 정신, 문익점 선생의 면화 시배지 그밖의 사찰 문화의 우수함과 힐링 숲을 탐방하고자합니다.
회원 여러분!
이번 7월 문화 힐링 탐방에도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팀 장 남 무 열 드림
◈ 7월 문화 힐링 탐방 행사 일정 : 2018. 07. 20.(금)
◐출발장소:(07:40 범어동 어린이대공원, 07:50 대구은행 본점 건너편,
08:00 반월당 동아백화점)
◈ 7월 문화 힐링 탐방지 (경남 진주시․산청군․함안군 일원)
- 진주시 진주성, 촉석루, 논개와 의암 바위, 김시민 장군과 삼충신(三忠臣) 정신
및 무명(無名) 의병의 애국 정신, 진주국립박물관
- 진주댐 역사 및 자연 풍광 감상
- 음식 문화 탐방 : 진주냉면의 유래 및 시식 (당일 점심 식사 : 하연옥 냉면)
- 남명 조식의 선비정신이 살아있는 사당과 남명기념관
- 대원사 사찰의 역사 및 불교 문화
- 문익점 선생의 면화 시배지 및 목화박물관 탐방
- 한의학의 산실 동의보감촌 (구형왕릉 탐방)
- 함안 상림숲 산책길 힐링 걷기
(현지 사정에 따라 일정이 다소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2018년 7월 경북교육삼락회 문화 힐링 탐방
- 진주시 진주성, 촉석루, 논개와 의암, 김시민 장군과 삼충신(三忠臣) 정신
및 무명(無名) 의병의 애국 정신, 진주국립박물관 -
- 진주성 -
진주성(晋州城)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 조선시대 이래로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晋陽城)으로도 불렸다. 현재 성내에는 국립진주박물관 ·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 순의단 · 의기사 · 창렬사 · 호국사 등의 시설과 유적이 있다. 고려시대 말기인 1377년 빈번한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토성으로 쌓았는데, 2년 뒤인 1379년(고려 우왕 5)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돌로 쌓는 도중 왜구의 침입이 있었고, 왜구가 퇴각한 후에야 성곽 축조를 마무리했다.
1591년 7월 경상도관찰사 김수가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수축하고 취약한 동쪽 부분을 확장하여 쌓았으나 그 지역은 지반이 약하여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중에 방어에 지장을 초래했다. 1593년 진주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성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듦으로써 진주성의 흔적을 지웠다. 1604년 우병사 이수일이 합포(지금의 마산)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온 이래 경상도 우병영이 설치되어 있었고, 1618년에는 병사 남이흥이 촉석루 · 북장대 · 서장대 · 동장대 등을 중건했다. 이곳에는 1895년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1896년 8월부터는 경상남도 관찰사 감영이 있었고,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이 있었다
- 촉석루 -
진주성 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이 2층 높이의 촉석루이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던 장수의 공간이었고, 평시에는 풍류를 즐기던 선비의 공간이었다. ‘촉석루’라는 명칭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아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며, ‘남장대’ 또는 ‘장원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1241년에 세워진 촉석루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과 중수를 거듭했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다. 1618년에 예전의 것보다 웅장한 건물로 중건했으며,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불탔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을 거두어 중건한 것이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누대이다
- 논개와 의암 -
▶논개
논개는 전라북도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출생으로 1574년 선비 주달문(朱達文)과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반가(班家양반)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 주달문은 진사(進士)로 일찍이 슬하에 아들 주대룡을 두었으나 15세에 괴질로 요절하였고 이후 40세가 넘은 나이에서야 딸 논개를 보았다.
1578년 부친 주달문의 별세 후 숙부 주달무에 집에 의탁되었으나, 숙부가 벼 50석에 김부호(金富豪)의 집에 민며느리로 혼인시키려 하니 이를 피해 모녀는 경상도(慶尙道) 안의현의 친가에서 피신하였고, 이에 부호는 1579년 기소하여 모녀를 구금하였다. 이때, 장수 현감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의 명판결로 모녀를 석방시키고 모녀는 현감의 관저에 의탁하게 되고 후일에 최경회가 성년이 된 논개를 후처로 맞아 들인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경회가 전라 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병사를 훈련할 때 논개는 이를 도우며 보필한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동행하였으나,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순절(殉節) 하였다. (게야무라 로쿠스케가 확실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본에서는 박종화의 소설 《논개와 계월향》(1962년)에서 최초로 언급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의암 바위
원래는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으로 불리다가 임진왜란 때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이 바위로 유인해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후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하여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의암 바위 옆에 새겨진 '의암'이라는 글씨는 정문부의 유언에 따라 그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전서체로 쓴 글씨인데 남강에 물이 찼을 때는 안보이다가 물이 빠지면 보인다.
- 김시민 장군과 삼충신(三忠臣) 정신 및 무명(無名) 의병의 애국 정신
▶ 제1차 진주성 전투(1592.10.05~1592.10.10)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조선군은 한동안 육상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조선 군대와 의병군이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고 일본군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먼저 진주성을 확보한 후 호남지역을 공략하고자 했다.
1592년 10월 5일 김시민 장군은 군사 3,800여 명으로 호소카와 등이 이끄는 일본군 2만여 명의 공격을 받아 10월 10일까지 6일간 싸워 이를 물리쳤다.각주1)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가토 미쓰야스(加藤光泰)가 선봉에 선 일본군은 수적 우세와 조총 등 신식 장비를 앞세워 공격했으나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갔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전투이다.
육상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던 조선군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고, 결과적으로 곡창지대 호남지방을 지킬 수 있었다. 한편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남해에서 일본 수군을 격퇴하고 있었고, 충청도 금산 지역에서는 조헌이 분발하고 있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1593.06.22~06.29)
일본군은 1592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593년에 7만 대군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년 2월 진주성 공격을 명령했고, 3월 10일과 4월 22일에도 연이어 진주성을 공격하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1593년 5월 20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공격을 위해 장수 및 부대 배치를 확정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 구로다 나가마사 · 가토 기요마사 · 시마즈 요시히로 휘하 병력 25,624명과, 고니시 유키나가 · 소 요시토시 휘하 병력 26,182명을 제1군, 우키타 히데이에 휘하 병력 18,882명을 제2군, 모리 테루모토각주3)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휘하의 병력 22,344명을 제3군으로 하여 모두 92,972명에 대해 진주성 공격에 직접 참여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경상남도 김해에서부터 진주성까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성을 연결하여 배치하고 부산에는 모리 테루모토의 병력, 동래읍성에는 마에노 나가야스, 김해에는 모리 시게마사(毛利重政), 부산 기장성에는 가메이 코레노리(龜井慈矩) 등 병력을 각각 배치했다. 이밖에 거제도에는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가덕도에는 구키 요시타카(九魁嘉隆) 등의 선단을 배치했다. 일본군은 1593년 6월 18일 의령으로 들어갔고, 다음날 군사를 돌려 진주로 향했다. 그리고 6월 19일부터 6월 21일까지 일본군은 진주 동북쪽 마현봉(馬峴峰)에 진을 치고 진주성을 에워쌌다. 그리고 제1, 제2, 제3군 약 7만의 병력으로 조선군과 백성들이 있는 진주성을 포위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모리 히데모토, 깃카와 히로이에 등이 이끄는 또 다른 일본군 부대인 제4군과 제5군이 진주성을 구원하러 올 조선군에 대비하여 진주성 외곽에 진을 쳤다.
진주성 방어는 창의사 김천일의 지휘 하에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을 삼충신(三忠臣), 진주목사 서예원, 거제현령 김준민, 의병장 고종후, 김해부사 이종인이 각각 담당구역을 정해 일본군과 맞섰다.
외부의 조선군 지원부대가 올 것에 대비하여 2중으로 포위망을 구축한 일본군은 6월 22일 성에 접근해 공격을 시작했다.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8일간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 그리고 약 7만 명의 일본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제2차 진주성 전투라고 부른다.
당시 교전 중에 황진이 죽자 서예원이 그를 대신하여 구역 지휘를 맡았는데,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갓을 벗은 채 말을 타고 울면서 돌아다녔다고 한다.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고 하여 최경회가 그를 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는 장윤에게 대신 맡겼다. 그런데 장윤도 곧 조총에 맞아 전사했기에 이종인 혼자서 동서로 뛰어다니며 적에게 응수했다. 6월 29일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진입하자, 서예원은 성을 버리고 도망가 숨어 있다가 잡혀 살해당했다. 그의 처 이씨와 맏며느리 노씨, 시집가지 않은 딸 모두 남강에서 투신했다.
▶귀갑거와 양민 학살
전투 사흘째 되던 날 일본군은 튼튼한 나무궤짝을 바퀴가 네 개 달린 수레 위에 올려놓고 궤짝 속에 군사들이 들어가 손으로 수레를 앞으로 굴려 전진하고 후퇴할 때에는 밧줄을 뒤에서 당기는 무기를 사용했다. 이 무기는 궤짝의 윗부분이 거북의 등같이 생겼다 하여 ‘귀갑거’라고 불렀다.
조선군이 섶에 기름을 묻힌 뒤 불을 붙여 귀갑거 위로 던져 불태우자 일본군은 일단 퇴각했다. 그리고는 귀갑거 위에 물기가 도는 쇠가죽을 씌워 화공에 대비한 다음 돌격대를 선발하여 동문 성 밑으로 투입했다. 6월 29일 성벽의 기초석 몇 개를 뽑아내자 성벽은 힘없이 무너지고 일본군 몇 명이 성벽 위로 올라섰다. 뒤이어 일본군이 몰려왔고 곧이어 서문과 북문 방어도 무너졌다.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오는 일본군에게 쫓긴 나머지 조선군은 촉석루 밑 남강가 바위에 모였다. 장수들은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무기를 강물에 던졌다. 그리고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이 차례로 강물에 뛰어들었다. 김천일은 아들 김상건의 손을 잡고 투신했고, 이종인은 적군과 격투하다가 양쪽 팔에 적군을 하나씩 끼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될 무렵 일본군은 이리 쫒기고 저리 몰려다니며 우왕좌왕하는 백성들에게 창고로 들어가면 죽이지 않겠다고 소리쳤고 이에 살아남아 있던 군졸과 백성들이 창고로 들어가자 그대로 불을 질러 불태워 죽였다. 이렇게 6월 22일부터 8일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진주성은 6월 29일 함락되었다. 이번 전투에서 이종인 · 이잠 · 강희진 · 오유 등이 전사했고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 고종후 · 양산수 등 대부분의 지휘부가 남강에 투신, 자결했다. 일본군에게 밀려 촉석루로 온 조선군은 맞아죽거나 남강에 투신했다. 성 안에 있는 시체는 촉석루에서부터 남강 북안에 이르기까지 서로 겹쳐 있었고, 청천강으로부터 옥봉의 강가에도 시체가 가득했다. 성이 함락된 후 도망가 숨어 있던 서예원은 붙잡혀 참수되었으며 그의 목은 소금에 절여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예원의 목을 김시민의 수급인 줄 알았다. 처절한 역사의 기억을 간직한 진주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
계사순의단(癸巳殉義檀)은 제1차 진주성 전투(1592)와 계사년인 1593년의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순국한 7만 군관민의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진주시민의 소망을 담아 문화공보부와 진주시가 1986년 12월에 착공하여 1987년에 12월에 준공한 제단이다.
국난 극복의 표상인 계사순의단은 촉석루 옆에 있으며, 제단의 크기는 가로 18미터, 세로 24미터, 높이 3.6미터이다. 3단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단 위에 높이 3.5미터, 가로 9.7미터의 대첩비를 세웠다.
- 진주국립박물관 -
1980년 10월 기공식을 가진 뒤 1984년 11월 일곱 번째의 국립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진주는 임진왜란의 최대 격전지인 진주성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촉석루·쌍충사적비 등 많은 임진왜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들의 과학적인 보존과 전시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1996년부터 본격적인 전시 체제를 개편하여 1998년 1월 15일 기존의 가야 문화 위주의 박물관에서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다. 국립 박물관 중 최초의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새롭게 태어난 진주박물관은 종전의 가야 박물관으로서의 지역적인 면모를 갖고 있는 박물관에서, 역사의 한 주제를 폭넓게 전시하는 전문 박물관으로 특성화되었다. 임진왜란에 관련된 학술 연구·조사 및 특별 기획전을 활성화함으로써 지역 문화 창달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 음식 문화 탐방 : 진주냉면의 유래 및 시식 -
▶진주냉면의 유래
《동국세시기(1849)》에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냉면이며, 우리나라의 3대 냉면으로 진주냉면, 함흥냉면, 평양냉면있으며, 진주냉면은 조선시대의 진주지역의 양반가와 기방에서 한량들이 기생들과 어울려 질펀하게 술판을 벌인 후 선주후면(先酒後麵)의 식사법에 따라 입가심으로 즐겨먹던 고급 음식이었다.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의 민족전통(1994)》의 식생활 풍습 부분에서도 ‘냉면 중 제일로 여기는 것은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녁의 풍요로운 식재료와 결합하여 만들어진 진주냉면은 당시 현지를 찾은 고관대작과 일본관료, 지주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고 전해지며, 화려한 교방문화와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진주냉면의 특징
경상남도 진주의 향토음식이다. 진주 냉면의 특징은 소의 사골을 이용해 육수를 달이지 않고 고급 멸치에 속하는 죽방 멸치 또는 디포리와 바지락, 건홍합, 건황태, 문어, 표고버섯 등으로 해물장국을 만들어 육수를 만든다는 점이다. 또 벌겋게 달군 무쇠막대를 끓는 육수에 반복해서 담가 비린 맛을 제거한 후 15일간 저온숙성 시켜 깊은 맛을 낸다. 다른 냉면과 달리 잘 익은 배추김치를 다져 넣고 쇠고기 우둔살에 계란을 입혀 부쳐 낸 쇠고기육전과 지단 등 여러 가지 고명이 얹어 모양새가 매우 화려하다.
- 진주댐 역사 및 자연 풍광 감상 -
남강댐은 1926년부터 낙동강 개수 계획으로 선정된 거점의 댐이었습니다. 최초의 댐은 1934년에 완료되었지만, 낙동강의 홍수가 피해가 커지자 1936년, 1949년 공사를 시행하였고, 이 공사는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완성되지 못하고 1962년에 이르러서야 다목적댐으로 착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끝에 완성된 남강댐의 모습에서 자부심이 느껴지지 않나요? 현재 남강댐은 이후 다양한 보수 공사를 거쳐 낙동강을 든든히 지지하고 있는 댐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 남명 조식의 선비정신이 살아있는 덕천서원과 남명기념관 -
남명 조식 선생은 산청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다. 태어난 곳은 이웃한 합천군 삼가면 토동이지만, 61세에 산청군 덕산으로 옮겨와 산천재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72세이던 1572년 2월 산천재에서 운명했다. 11년간 지역 사람으로 살면서 이곳에 묻혔다. 남명 조식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청에 내려와 후진을 양성하던 산천재와 선생이 심었다는 남명매, 산청에 자리한 남명조식 유적지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천재다. 조식선생이 61세 때인 1561년 산청군 덕산으로 내려와 산천재를 지었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으로 1818년에 고쳐 지었다. 산천재에서 갈고 닦은 학문을 제자들에게 전수하다 1572년 2월 8일 72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운명하게 된다. 산천재는 현판이 2개나 달려있다. 전서체는 조윤형의 글씨이고, 해서체는 이익회의 글씨다. 이중 전서체 글씨가 멀리서도 잘 보이게 매달려 있다. 그림을 그려놓은 듯한 회화적인 필체가 돋보인다. 뫼 산(山)자는 조식 선생이 바라보던 지리산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 생명력이 넘친다. 산천재 앞에 자라는 매화나무는 선생이 산천재가 완성되던 1561년에 직접 심었다고 전해온다. 수령이 450년이 넘은 매화나무로 남명매라 불린다. 정당매, 원정매와 함께 산청 3매로 불리는데, 매화가 만개하는 3월 말이 되면 짙은 매향을 맡으려는 수많은 탐매객이 찾아든다. 산천재와 그 앞에서 자라는 수령 450년생 매화나무 남명매 수령 450년생 매화나무는 남명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온다, 매화나무는 높이가 5.5m에 이르고, 나무가 가지를 펼치고 있는 수관폭이 5m나 된다. 나무는 밑에서 3개의 줄기로 갈라져 자란다. 매화에 대한 선생의 애정은 직접 지은 시 ‘설매’를 통해 잘 느낄 수 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니 홀로 지내기 어려운데, 새벽부터 날 샐 때까지 눈까지 내렸구나
선비집은 오래도록 외롭고 쓸쓸했는데, 매화가 피어나니 다시 맑은 기운 솟아나네
▶ 남명 조식의 선비정신이 살아있는 남명기념관
남명 조식은 25세때 원나라 선비인 노재 허형의 '모든 일은 낱낱이 살피어 물질을 쫓아갈 것은 아니다' 라는 말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이후 학문 연구에 더욱 열중하였다고 한다. 남명선생의 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실행에 중점을 두어 직절하고 의리있는 꿋꿋한 선비정신이다. 선생의 학문은 경의학으로 알고서 올바르게 실행해야 한다는 점을 중시하였다. 둘째는 자기의 맡은 직분에 충실할 것과 백성과 선비가 나라의 근본이라고 했다. 몇 차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정치하는 도리만 설명하고는 번번이 돌아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남명선생이 지니고 다니던 성성자는 두 개의 작은 쇠방울로 옷고름에 매달고 다니던 것이다. 성(煋)은 깨달음이니 스스로 경계하여 방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이다. 경의검은 선생이 늘 지니고 다니던 장도이다.
▶남명 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덕천서원과 세심정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선생이 돌아가신 4년 후인 1576년 문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후 덕천서원은 몇 차례 수난을 당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2년 중건하였다. 1609년 영의정으로 추대되며 크게 확장되지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5년 철거되는 운명에 처한다. 지금의 건물은 1926년 복원된 것이다.
덕천서원 입구에는 우뚝 솟은 은행나무가 있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덕천서원이 세워질 때 심었다고 전해오는 나무로 수령은 450년이 넘는다. 나무의 높이는 18m에 이르며, 둘레는 4.5m로 어른 세 사람이 안아야 할 만큼 웅장한 자태를 뽐낸다. 11월 초순 경 황금빛으로 물든 풍경이 특히 장관이다. 은행나무를 한 차례 올려다본 후 홍살문을 지나 서원으로 들어선다. 정문에 들어서면 교육공간으로 쓰이는 경의당과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재, 서재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 배롱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7월 말에서 9월 중순 사이 목백일홍꽃이 만개했을 때 서원 전체를 밝게 비춘다. 경의당 뒤쪽으로 사당인 숭덕사에 남명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두 차례 향례를 올리고, 선생을 추모하는 남명제를 지낸다. 수령 450년생 은행나무가 자라는 도로 건너편에는 정자 세심정이 세워져 있다. 덕천 강변에 세워져 바람을 느끼며 쉬어가기에 좋다. 세심정은 덕천서원 맞은 편 덕천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 대원사 사찰의 역사 및 불교 문화 -
한국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이다. 548년(진흥왕 9)연기(緣起)가 창건하여 평원사(平原寺)라 하였다. 그 뒤 폐사가 되었던 것을 1685년(숙종 11)운권(雲捲)이 옛터에 절을 짓고 대원암(大源庵)이라 하였으며, 1890년(고종 27)구봉(九峰)이 낡은 건물을 중건하고 서쪽에 조사영당(祖師影堂), 동쪽에 방장실(方丈室)과 강당을 짓고 대원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3년 12월 화재로 소실되자 주지 영태(永泰) 등 50여 명이 16,000원의 시주를 얻어, 1917년 전(殿)·누(樓)·당(堂)·각(閣)과 요사채 등 12동 184칸의 건물을 중건하였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공비들의 약탈 방화로 소실된 뒤 8년 동안 폐허가 되었으나, 1955년 승려 법일(法一)이 다시 중창한 뒤 비구니선원(比丘尼禪院)을 개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의 선원은 석남사(石南寺)·견성암(見性庵)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손꼽힌다.
- 문익점 선생의 면화 시배지 및 목화박물관 탐방 -
원나라에 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문익점은 1364년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 장인인 정천익과 씨앗을 나누어 목면나무의 재배를 시험재배 하였다. 그는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7년에는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나누어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였고 정천익은 호승(원나라스님)인 홍원에게서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워 10년이 되지 않아서 나라 전체에 목면 재배와 무명이 보급되었다. 고려말은 물론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문익점은 중국에서 목면을 가져와 직조를 가르쳐 백성들을 크게 이롭게 했다며 높이 숭앙되었다. 목화의 원산지는 아프리카 남부, 인도, 인도네시아, 안데스 산맥 북북 등 여러 설이 있으나 인도라는 설이 지배적이고, 인도에서는 기원전 3천 년경에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목화는 면화, 미영, 미면 등으로도 불리는데, 온대 지방에서는 아욱과에 속하는 일년생 초본식물이지만 열대지방에서는 다년생 목본식물이다. 높이도 우리나라에서는 90cm내외로 자라지만, 열대지방에서는 180~210cm까지 자라기도 한다. 목화는 4월 하순에서 5월 중순에 씨를 뿌리면, 7월 하순에서 8월 하순에 걸쳐 꽃이 피는데 처음엔 하얗지만 점차 붉어진다. 꽃이 지고 난 뒤에는 천도복숭아 모양의 진한 녹색 다래가 열리고 다래가 익어 벌어지면 면화가 되는데, 너덧 조각으로 터진 열매속에 쥐똥같이 까만 씨앗이 포근한 솜과 함께 엉켜있다. 9월 상순부터 이 열매를 수확한다. 목화의 섬유는 주로 면사, 면직물, 이불솜, 옷솜, 탈지면 등으로 쓰이면, 열매는 기름을 짜 식용유나 마가린 등의 제조에 쓰인다. 깻묵은 사료, 비료로 이용하고, 목화대는 제지용 펄프 원료나 땔감으로 쓰이기도 한다. 개화기가 길어 화훼 관상용으로도 좋다.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문익점 면화시배지]에서는 한여름이면 넓은 목화잎 사이에 보송보송 맺힌 하얀 꽃잎이 수더분한 새댁처럼 웃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한의학의 산실 동의보감촌 탐방 -
▶지리산 물의 근원지 <동의폭포 앞>
예로부터 사람들은 ‘ 물이 건강의 근본임을 알고 병이 나면 정갈한 물을 마셔 몸안의 찌꺼기를 씻어내고 그래도 병이 낫지 않으면 비로소 약을 썼다 ’고 한다. 동의보감에서도 ‘ 사람에 따라 몸이 살찌고 마른 것이라든가 수명이 길고 짧음은 마시는 물에 원인이 있다 ’ 고 물의 중요성을 강조했듯이 지리산 자락에서 발원한 동의폭포수는 지리산의 정기와 약초의 기운이 가미된 치료와 치유에 사용되었고, 동식물의 귀중한 생명수로 이용된 생명과 건강의 근원이다.
▶백두대간이 멈추는 산맥, 지리산 <불로문 앞 매표 대기공간>
지리산은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이며,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고 해서 ‘ 지리산’ 이라 불리어 왔다, 백두산의 기와 맥이 반도를 타고 내려와 이곳까지 이어졌다는 뜻에서 ‘ 두류산’ 이라고 불리워 지기도 하고, 불가에서 깨달음을 얻은 높은 스님의 처소를 가리키는 ‘ 방장’ 의 깊은 의미를 빌어 ‘ 방장산’ 이라고도 하였다. 수많은 동식물과 사람들에게 삶터를 제공해 주는 생명의 산으로 ‘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원정대를 보냈다’ 는 약초의 보고이며, 성모상이 있는 신령스러운 어머니의 산이다.
▶산청약초관
지리산은 1,000여종의 약초가 자생하는 한방약초의 보고이다. 산청약초관에는 지리산에서 자생하는 약용수 50여종과 약초 100여종의 실물을 수집, 표본 식재하였으며, 지리산 천왕봉과 황매산의 축소 모형도 설치하였다. 약초관에는 다섯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오장(오방색)에 효능이 있는 약초를 전시・연출하였는데, 간장(녹색)공간에는 느릅나무, 다래나무, 삼백초, 천궁 등을, 심장(적색)공간에는 익모초, 부처손, 산마늘, 머위 등으로 연출하였다. 비장(황색)공간에는 구릿대, 기린초, 인진쑥, 황기 등으로, 폐장(백색)공간에는 잔대, 도라지, 독활, 인동덩쿨을 식재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신장(흑색)공간에는 강할, 질경이, 삼지구엽초, 오갈피 등을 식재・전시하였다. 특히, 100년 이상의 수령을 가진 매화, 모과, 다래, 산머루, 구기자, 느릅나무를 수집, 자연석과 함께 전시하여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왕산과 필봉산, 구형왕릉 이야기 <풍차 올라가는 길>
왕이 오른 산이라 하여 아직도 신성시되고 있는 왕산(王山)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릉의 타원형 돌무덤이 있는 산으로 태왕산(泰王山)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붓 끝을 닮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필봉산((筆峯山)은 백두대간의 기가 한 곳에 모인 동의보감촌의 왕산을 보좌하는 문사로서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가야의 마지막 임금이자 신라 김유신의 증조부인 구형왕은 532년 국운이 다한 가락국을 신라 법흥왕에게 넘겨주고 죄책감으로 돌무덤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설이 있는데, 구형왕릉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7단 돌무덤(적석총)으로 무덤 아래에는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덕양전이 있다.
▶세계 최대의 침, 곰・호랑이 조형물 <침 조형물 앞>
한방테마공원의 초입에 한방의 기본요소인 침 조형물이 있다.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산청군 소재)의 높이가 1915m로 이를 상징화하기 위해 100분의 1 크기인 19.15m로 조성하였는데, 이는 ‘세계 최대의 침 조형물’이다.
곰과 호랑이 조형물은 마늘과 쑥이라는 약초를 최초로 섭취한 동물로서 한의약이 우리 민족의 탄생과 함께 해온 역사성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이 또한 세계 최대의 웅장한 조형물이다.
▶산청 구형왕릉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
- 함안 상림숲 산책길 힐링 걷기 -
천연기념물 제154호. 면적 205,842㎡. 함양읍의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渭川)가를 따라서 조림한 호안림이다. 이 숲은 신라 진성여왕 때 최치원(崔致遠)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조림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위천은 함양읍의 중앙을 흐르며 매년 홍수의 피해가 심했으므로, 최치원은 농민을 동원하여 둑을 쌓고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지금의 숲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숲을 대관림(大館林)이라고 이름지어 잘 보호하여서 홍수의 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에 대홍수에 의해서 둑의 중간이 파괴되고 지금의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다. 상림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의 하나인데, 현재는 풍치림의 구실도 하고 있다.
소나무·측백나무·노간주나무 등의 나자식물(裸子植物: 겉씨식물)을 비롯하여 임관(林冠: 숲이 나뭇잎의 종류나 나이에 따라 층을 이루고 있는 모양)의 상층을 만들고 있는 수종은 개서어나무·까치박달·밤나무·굴참나무·신갈나무·갈참나무·상수리나무·졸참나무·갈졸참나무·떡갈나무·참느릅나무·느티나무·잔털벚나무·벚나무·야광나무·아카시아·다름나무·회화나무·쉬나무·고로쇠나무·좁은단풍나무·신나무·은백양·감나무·고나무·말채나무·물푸레나무·이팝나무·참오동·물갬나무 등이 있다. 밑층은 개암나무·백동백나무·좀깨잎나무·꾸지뽕나무·산뽕나무·고랑나무·국수나무·살딸나무·복사나무·윤노리나무·콩배나무·지귀나무·조록싸리·풀싸리·참싸리·싸리·산초·사람주나무·붉나무·개옻나무·고추나무·화살나무·회잎나무·보리수나무·키버들·능수버들·갯버들·진달래·산수유나무·노린재나무·쪽동백나무·쥐똥나무·작살나무·누리장나무·병꽃나무·백당나무 및 덜꿩나무 등이 차지한다. 이들 숲에 멍석딸기·복분자딸기·찔레꽃·칡·노박덩굴·새머루·왕머루·개머루·가마귀머루·담쟁이덩굴·인동덩굴·계요등·청가시덩굴 및 청미래덩굴이 엉켜 있고, 때로는 박태기나무·배롱나무·탱자나무 및 오죽 등의 관상수도 있다.
첫댓글 임흥준 교장선생님께서 작성하신 문화탐방 계획을 저가 올렸습니다.
너무나 상세하게 안내해주신 교장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글을 올리면서 몰랐던 것도 알 수도 있었습니다.
많은 회원님들께서 문화탐방에 참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무총장님의 안내로합니다
거움으로
임교장의 탐방계획서
몇번씩 댕긴 곳이지만
함께하는
여정길의 행복으로
참여해야지요
늘 행복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