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타 요네자와 6 - 옛 요네자와성 공원을 보고 우에스기 백작 저택을 구경하다!
2022년 11월 3일 야마가타현(山形) 요네자와 よねざわ 米沢(미택)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
후에 절을 지나 옛날 요네자와성 을 찾아가니 요네자와성은 무느져 폐허가 되었고
그 자리는 공원이 조성 되었는데..... 공원 남쪽에 자리한 우에스기 박물관 으로 들어갑니다.
요네자와 는 에도 도쿠가와 막부시절에 요네자와번 이었으니 번주는 우에스기씨로 여기만 해도
우에스기박물관, 우에스기 기념관, 우에스기 백작 저택에 우에스기 신사 가
있고 저 너머에 우에스기가 묘소가 있는지라 이 도시는 온통 우에스기씨의 유적으로 가득합니다.
우에스기 박물관 을 구경하고는 나와 공원을 거닐면서 보니 나무들을 빨갛게 단풍 이 든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운데.... 우에스기씨 동상 뒤쪽에 자리한 전쟁 위령비 까지 천천히 걸어서 살펴 봅니다.
그러고는 다시 반대편으로 걸어 우에스기 백작저 (上彬伯爵邸) 로 들어가서 구경하는데.... 옛날 백작
의 대저택 에는 집들도 예쁘지만 정원과 연못까지 볼만한데 지금은 요리집 으로 바뀌었습니다.
백작(伯爵) 이라고 하면 그 원조는 중국 이니.... 천자나 제후의 방계 혈족 들이 분가를
이룬 소종(小宗) 의 수장들이 사용하는 칭호로, 천자나 제후의 종친들만
사용할 수 있는 특별 칭호였지만..... 이후 세습이 이뤄지면서 백작 으로 통칭 했습니다.
이 가운데 천자의 소종은 후(侯) 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세력과 함께 천승지국(千乘之國) 으로
표현되는 번방(藩邦) 의 범주에 포함되었고, 그 군주들은 방백(方伯) 으로 표현되기도
했으며 춘추시대에 들어서는 회맹을 주도할수 있는 강력한 명분이 있는 신분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전국(戰國)시대에 들어 소국들이 다른 제후국에 합병되어 멸망하고, 제후들이 왕(王) 을 자칭
하면서 후(侯)를 책봉 하기 시작하자 소멸된 칭호가 되었지만, 유학자들이 주나라 때
사용된 칭호들을 작위와 그 서열로 정의하면서 백(伯)을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으로 이어지는 오등작의 하나로 기록한 덕에 청나라까지 작위 등급으로 쓰이게 됩니다.
유럽에서는 얼(Earl)과 카운트(Count), 그라프(Graf) 가 백작 으로 번역되는데, 로마 제국 당시 황제의 고위
행정관을 지칭하는 코메스 (Comes largitionum) 에서 유래되었으니 코메스는 특정한 관료 직위라기
보다는 관료직 자체를 가르키는 말로 동고트 왕국과 서고트 왕국의 관직 명 앞에 코메스가 들어가 있습니다.
유럽의 백작(Count) 은 프랑크 왕국의 지방행정관 겸 판사 를 로마 처럼 코메스 라고 부른 데서 시작
하니.... 고대 로마의 지역 단위 Pagus 는 프랑크 왕국 하에서 주(gau) 로 전환되었고, 각
주에는 행정관으로 백작 (Count; Graf) 이 파견되었으며, 백작의 관할권은 County 라고 불렀습니다.
변경 군사 요충지의 특수행정구역인 변경주 (March; Mark) 를 담당하는 변경백 과 국내 주요 거점의
궁정(Pfalz) 일대를 관리하는 궁정백 이 파생되었으니 왕에게 고용된 비세습적 관료였으나....
자손에게 직위를 세습시키는데 성공했고 영주화 되니 봉건체제가 시작되면서 백작은
공작에게 귀속 되었으나, 몇몇 백작은 다수의 주(Gau) 를 흡수하면서 독자적 세력을 지니게 됩니다.
본디 자유 영주였던 남작 들은 이러한 행정관 백작의 관할령 안에 강제로 편입 되었고, 작위별
위계가 생겨나면서 백작은 남작과 주교령, 도시들을 포함하는 규모의 작위가
되었는데 토호, 소지주 등 유력자들이 스스로 성을 쌓거나 남의 성을 탈취하고 백작 의
반열에 오르기도 하였는데..... 남프랑스에서는 기존 제후들이 고전할 수준으로 성장합니다.
일본에서는 1603년 에도 도쿠가와 막부 가 성립되면서 260여년간 도쿠가와씨의 통치아래 일본
전국은 270개의 번 으로 나뉘어져 막부의 감독을 받는 번주가 통치하다가.....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함대가 침입해 함포 외교로 일본을 강제로 개항 을 하면서 서구 세력이 들어옵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존왕양이론자 들이 실권이 없던 천황(일왕) 을 받들고는 1868년에 조슈번(야마구치),
사쓰마번(가고시마), 히젠번(사가) 과 시코쿠의 도사번(고치) 무사들이 궐기해서 무진전쟁
반란 을 일으켜 2년에 걸친 전쟁 끝에 북해도 하코다테까지 진격해 막부를 멸하고 메이지유신 을 이룹니다.
존왕양이파는 서구에 문호개방을 반대 해서 일어났지만 조슈번이 미,영,프, 네델란드 4국 함대와 전쟁 을
하고 사쓰만 번도 영국 해군과 가고시마에서 해전 을 치루었으며 또 1868년 무진전쟁에서 영국제
신무기를 도입해 막부군과 전쟁을 치르면서 서양무기의 우수성을 깨닫고 서구 문명을 도입 하기로 합니다.
메이지 정부가 서구식으로 근대화 를 시작하면서 일본 봉건제도를 타파 하니 먼저 사무라이
들이 길에서 칼 2자루를 차는 것을 금지 하고, 군대는 국민개병제도를 도입하며
폐번치현 으로 기존의 번을 폐지하면서 사무라이들은 실업자 가 됐지만 번주들
에게는 천황(일왕)이 귀족으로 대우해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및 남작 칭호를 내린 것입니다.
조슈번 (야마구치) 에서는 수십년간 막부와 투쟁하면서 1기 지도자들이 거의 다 죽고 기도 다카요시
와 이토 히로부미에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등이 지도자가 되었으니,
초대 총리등 4차례 총리를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 가 처음에는 백작위 를 받았는데 여기
요네자와번은 작은 번임에도 불구하고 우에스기 가문의 후예라 같은 백작위 를 받은 것입니다.
우에스기씨의 시조 우에스기 겐신 은 가이국의 다케다 신겐 과 시나노(나가노현)에서 10년 세월 동안 다섯차례
나 전투를 벌이는데, 저 나가노현은 2차대전때 일본군이 도쿄에서 물러나면 대본영 을 세울려고 했으니....
박형준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이 쓴 “日 ‘마쓰시로 대본영’ 이 세계유산에 더 적합하다” 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2020년 8월이었다. 일본 도쿄의 살인적인 무더위를 피해 1998년 겨울 올림픽 이 열렸던
나가노현으로 여름 휴가 를 떠났다. 숙소에 도착해 지도를 받아보니
승용차로 5분 거리에 ‘마쓰시로 대본영 (전쟁 때 일본군 최고지휘부)’ 지하호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일본 군부는 ‘본토 결전’ 을 준비하면서 도쿄의 주요 시설을 옮기기
위해 나가노에 땅굴을 파 지하호 를 만들었다. 도쿄의 대본영과 정부 기관, 왕실 등을
옮기고자 했다. 총 길이 10km 지하호 건설에 조선인 노동자 7000여명(추정) 이 강제로 동원됐다.
‘섬뜩한 이곳을 일본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들 에게 보여줘도 되나….’ 고민되긴 했지만 역사의 현장을 모른
척할 순 없었다. 다음 날 지하호를 찾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입구에 심어진 무궁화꽃
이었다 .‘모금을 통해 (조선인) 희생자 고향의 무궁화와 개나리 를 심었습니다. 소중하게 다뤄
주세요’ 란 안내문도 있었다. 바로 옆에는 ‘조선인 희생자 추도평화기념비’ 가 세워져 있었다. 의외였다.
더 놀란 것은 나가노시가 세운 안내판 문구였다. “노동자로 많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강제로
동원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아름다운 일본’ 을
외치며 가해(加害) 역사 지우기 에 한창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안내판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결정적 역할을 한 이는 나가노 현지의 일반 시민들 이었다. 나가노슌에이고교 학생들 은 1985년 미군과 일본군
이 참혹한 전쟁을 벌인 오키나와로 수학여행 을 다녀온 것을 계기로 고향에 있는 지하호를 주목 했다.
학생들은 1986년 ‘고향연구반’ 이란 클럽을 만들어 나가노시 측에 지하호 공개 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결국
시는 1990년 지하호 일부를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학생들은 주말이면 지하호 개요,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
등을 설명하는 자원봉사 를 한다. 참혹한 기억을 계승하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를 주장하고 있다.
나가노현 단기대학 교수였던 시오이리 다카시 (鹽入隆) 씨는 1991년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해
모금 운동 을 시작했다.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4년뒤 추도비 를 설립했다.
비문에는 ‘식민지였기에 조선에서 강제연행돼 식량 부족, 낙석 사고,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하는 일이 많았다’ 며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이들은 기념비 건립후 매년 추도식 을 열고 있다.
2년도 더 지난 기억이 떠오른 것은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 광산’ 때문이다. 니가타현과 사도시 측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금(金) 을 생산한 귀중한 유산” 이라며 세계 문화유산 등재 를 추진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때 조선인 노동자 최소 1411명이 강제동원 됐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유네스코
는 세계문화유산 등재 원칙 중 하나로 ‘완전한 역사(full history) 반영’ 을 들고 있는데....
사도 광산은 그 기준을 충족한다고 보기 힘들다. 2월 1일까지 일본 정부가 추천 여부를 최종 판단한다.
“일본인의 역사 인식 은 아시아 국가로부터 자주 문제시 된다. 일본 정부가 과거의
침략, 가해의 역사 를 충분히 검증해 사죄할 것은 사죄하고,
전후 보상을 성실하게 했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기자의 주장이 아니다.
일본인으로 구성된 시민단체 ‘마쓰시로 대본영 추도비를 지키는 모임’ 이 2019년 1월 발행
한 팸플릿 첫 페이지에 넣은 문구 다. 불편한 과거에 눈감지 않는 일본 정부의
판단을 기대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공원을 걸어서 드디어 우에스기 신사 로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