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서정주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현대문학』 137호, 1966.5)
[어휘풀이]
-즈믄 : 천(千)의 옛말
[작품해설]
3음보 율조의 5행 한 문장으로 된 이 시는 짧은 형식 속에 인간의 본질과 의미라는 무게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일체의 설명을 배제하고 고도의 상징적 수법을 구사함으로써 강렬한 언어적 긴장을 이루고 있는 차원 높은 시가 되었다. 싸늘하면서도 유리같이 투명한 ‘동천(冬天)’에 초승달이 떠 있고, 그 한 편에 한 마리 ‘매서운 새’가 날고 있는 것이 이 시의 전부이다. 이 시는 화자의 행위를 타나내는 1~3행까지의 전반부와 그에 대한 반응, 즉 새의 행위로 나타나는 반응인 4~5행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행의 ‘고운 눈썹’은 초승달을 의미한다. 이 초승달이 화자의 마음속에서 천 년 동안 맑게 씻긴 것임을 고려한다면, ‘눈썹’은 곧 사랑의 표상이다. 2행의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는 행위는 지금까지 겪어온 온갖 모순과 갈등을 투명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3행의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는 절대적 경지로 비약하려는 행위로, 보다 가치 있는 삶ㅇ르 지향하는 화자의 태도를 반영한다. 4행의 ‘매서운 새’는 공격적 특성을 환기하는 시어로 차가운 겨울 밤하늘과 어울려 그 ‘매서움’이 배가된다. 그러나 ‘매서운 새’는 달과 조화를 이룸으러써 5행의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는 유순함으로 나타난다. 결국 새는 달을 공격하지 않는, ‘매서움’으로소의 특성이 나타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동지섣달의 밤하늘을 날며 ‘시늉하며 비끼어 가’는 ‘매서운 새’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시의 평면적 의미는 ‘내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임의 고운 눈썹을 천 년 동안 마음속에 아로새겨 하늘에 옮기어 놓았더니, 동지섣달 하늘을 나는 매서운 새가 눈썹의 절대적 가치를 알고 비끼어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운 눈썹’인 초승달이 ‘즈믄 밤의 꿈’으로 이어지는 것은 초승달이 여러 차례의 변신을 통해 최종 단계인 ‘만월’에 다다르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초승달은 화자가 염원하는 동경과 구도의 상징물로서, 그가 추구하는 어떤 절대적 가치를 ‘임’(절대적 대상) → ‘초승달(미완성의 상태) → ’만월‘(완전한 영원의 세계)의 순서로 전개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매서운 새;는 ‘만월’인 영원의 세계를 동경하는 인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매서운 새’가 현실 세계인 ‘동천’에 존재하며 끈질기게 영원의 세계인 ‘만월’에 접근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시늉하며 비끼어’ 가는 한계에 부딪치고 말 뿐이다. 이렇게 이 시는 절제된 시와 짧은 형식을 통해 절대적 가치에 대한 외경(畏敬)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작가소개]
서정주(徐廷柱)
미당(未堂), 궁발(窮髮)
1915년 전라북도 고창 출생
1929년 중앙고보 입학
1931년 고창고보에 편입학, 자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
시 전문 동인지 『시인부락』 창간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시분과 위원장직을 맡음
1950년 종군 위문단 결성
1954년 예술원 종신 위원으로 추천되어 문학분과 위원장 역임
1955년 자유문학상 수상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2000년 사망
시집 : 『화사집』(1941), 『귀촉도』(1948), 『흑호반』(1953), 『서정주시선』(1956), 『신라초』 (1961), 『동천』(1969), 『서정주문학전집』(1972), 『국화옆에서』(1975), 『질마재 신화』 (1975), 『떠돌이의 시』(1976),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1982), 『미당서정주시선집』 (1983), 『안 잊히는 일들』(1983), 『노래』(1984), 『시와 시인의 말』(1986), 『이런 나
라를 아시나요』(1987), 『팔할이 바람』(1988), 『연꽃 만나고 가는 사람아』(1989), 『피
는 꽃』(1991),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민들레꽃』(1994), 『미당시전집』(1994), 『견우의 노래』(1997),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