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권근과 지리학자들에 의해 1402년에 작성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현존하는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로 통한다.
당시의 지도가 임진왜란을 기화로 일본이 훔쳐간 원본인지는 몰라도 근자에 일본의 대학에 의해 지도의 지명이 복원된것으로 전해온다,그러나 조선초와 명초에 작성된 이 지도는 원나라의 세계성과 지리지식이 흡수된것으로 사서류에 기록된 원나라와 고려,조선의 지명 위치가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조선이 작성한 이 지도와 명나라가 작성한 지도상에 장성의 동단위치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으며 동시대 명나라가 제작한 지도에 명의 영토가 고려와 조선의 고유영토라 인식되어온 요녕성 일부에 표기 되어있고 반대로 明의 영토로 알고 있는 산동지방 주위에는 명나라 주군현 표기가 없이 조선의 영토와 같은 색으로 표기되어있다.
명초기 명태종(영락제)이 변량에서 북경(현북경이 아닌 원대도 부근)으로 천도 이후 건주여진이 명나라의 회유에 의해 영토를 들고 귀부함에 따라 朝鮮의 영토에 살고있던 그들의 땅이 조선의 영토에서 명의 관할지역으로 바뀐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던 원나라 초기이자 고려후기 고려의 이연령과 홍복원 홍다구가 원에 귀부하면서 들어다 바친 서경을 포함한 100여개의 성을 잃어버리고 엤고려의 동쪽지방만 자치 해야했던 영토의 중심지가 개원임을 확인하고 당시의 고려장성이 후에 유조변으로 청나라가 발흥했다던 성경지역의 상징적 보호와 조-청간의 충돌 buffer zone으로 남겨두어야만 했던 봉금지역으로 넓은 만주를 잃어버리게 된 불행의 도화선이 되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지도1> 고려시대 압록은 백하, 원시대 압록강 표기가 현 압록강인가 하는것이다.
원나라의 동부영역을 그린지도에서 요양,함평,동녕로의 위치는 당시 압록강 서쪽이나 장성의 동단과 비교해서 위치를 보면 만주지역이 아닌것으로 보인다.

지도2> 산동에는 조선영토표식이 요녕일부에는 명지역 표식이 되어있음을 본다.
혼일강리도에서 지역들을 보면 명나라의 지역은 주군현이 붉은색으로 표기 되어있는 반면에 조선의 지역은 한양을 제외하곤 붉은색으로 표기되지 않았는데 산동지방도 조선의 지역과 색상이 같다. 이는 결국 조선은 산동지방을 조선의 영역으로 인식했던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조선초 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을 지나 개원 근방에서 끝나는데 그 지방을 함평로라 기록하고있다, 결국 이지방을 지나는 장성은 금과 고려를 구분하였던 고려장성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상한점은 이 지역에 붉은색의 명나라 주군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보게된다. 이를 해석하자면 명초기 명태종(영락제)의 북경(현북경이 아닌 원대도지역)으로 천도 이후 건주여진이 명나라의 회유정책에 의해 영토를 들고 귀부함에 따라 조선의 영토에 살고있던 그들의 땅이 조선의 영토에서 명의 영토로 바뀐것으로 추정된다.

지도3> 명나라지도에는 고려의 수도로 주정되는 개원 철령 삼만위 등만이 명의 영토로 그려져있다.
그러나 후대 한-중사가들은 만주 전지역이 명나라에게 소속된것으로 침소봉대 하고 있고 조선의 영토가 현 압록강 이남으로 정해진것으로 오도하고 있으니 우리로선 상실감이 크다 하겠다.

지도4> 조선 (혼일강리도) 부분확대- 분명히 표기된 원나라 지명 대녕,광령,함평로.
원사지리지
鹹平府 (함평로)
古朝鮮地,箕子所封,漢屬樂浪郡,後高麗侵有其地。唐滅高麗,置安東都護以統之,繼為渤海大氏所據。遼平渤海,以其地多險隘,建城以居流民,號鹹州安東軍,領縣曰鹹平。金升鹹平府,領平郭、安東、新興、慶雲、清安、歸仁六縣,兵亂皆廢。元初因之,隸開元路,後復割出,隸遼東宣慰司。
함평부,
옛 조선지다.(중략)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통치하다.이어 발해 대씨가 머무르다.요가 발해를 평정할 때 그땅을 험하고 협소해 성을 쌓고 유민이 기거하다.함주 안동군 현이름은 함평이라 하다.평곽,안동,신흥,경운,청안,귀인 6현을 다스리다. 전쟁시 전부 폐하다. 원초에 이것으로 인하여 개원로에 속하게 하고 후에 다시 나누어 요동선위사에 속하게 하다. (14c만해도 이미 하북 고조선지에서 동진한 개념을 갖고 있었다 볼수있다)

지도5> 지도3인 명지도라는 것도 조선지도와 장성경계가 달라 청나라 시대에 그려진것 아닌가하는 의심을 지울수없다.
조선을 침략한 후대의 청나라 대청광여도(17세기)에는 한술 더떠 더나아가 동북단까지 장성으로 그려놓았다. 아래의 청나라 유조변장과 별로 다른것이 없음을 알수있다.

지도5> 중국장성도
역사적으로 조선의 큰 실책은 조선초 삼만위등 만주에 거주하는 여진을 관리하지 못해 건주여진이 명나라에 귀부함으로서 그 지역이 조선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고 명나라가 임진란 이전 혹은 이후에 요동으로 치고 들어오게 하는 시기적으로 임진란 이후 참전의 댓가로 명에게 영토할양(?)의 빌미를 주게 되었거나 후대의 조선의 국력이 약해져 청나라의 침략을 제어하지 못해 현 압록강 이남으로 쪼그라들게 되는 역사적 불운을 맞게 된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운영자 심제글.
조선사 302번글 명나라 <수동일기> 참조요망.
첫댓글 조선의 기록에 삼만위가 영흥땅에 있다고 합니다. 즉 조선관할이었다는 거죠 명사에도 올량합에게 대녕땅을 뺏겼다고 나오고 명나라도 땅을 많이 뺏겼습니다. 지들 수도가 몽골군에 포위된적도 있으니 말입니다.명나라가 다시 강해진 것은 만력제때입니다. 이 당시에 명나라가 베이징인근 여진족을 통제하게 됩니다. 물론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곧바로 통제불가상태로 빠지죠 임진왜란때 왜군의 기록에 여진및 올량합이 조선군과 함께 싸웠고 청나라의 기록에 청이 올량합을 공격하자 조선군이 구원병을 보내었다는 것을 보면 임진왜란과 그 직후 얼마떄까지는 거의 북방의 여진족은 조선관할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