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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일, 금천문(金川門)에 이르러, 곡왕(谷王) 혜(橞), 이경륭 등이 문을 열고 왕을 받아들이니, 도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 날, 왕이 여러 장수들를 나누고 명하여 도성 및 황성을 지키도록 하고, 돌아와 용강(龍江)에 주둔하면서, 영을 내면 군민을 안무했다. 크게 수색하여 제태, 황자징, 방효유 등 50여인을 붙잡고, 그 성명을 방에 걸어 간신(奸臣)이라 하였다.─ 명사(明史) 성조본기(成祖本紀) |
정난의변 | |||
날짜 | |||
1399년 8월 6일 ~ 1402년 7월 13일 | |||
장소 | |||
중국 화북(華北), 화동(璜)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정난군 | 황제군 | |
지휘관 | 주체 주고치 주고후 요광효 장옥† 구복 주능 담연† 고성 정화 | 주윤문 경병문 이경륭 성용 평안 철현 하복 오걸 서휘조 | |
병력 | 수만 | 경병문 : 30만 (실제 지휘 13만) 이경륭 : 50만 성용 : 부정확 | |
피해 규모 | 불명 | 불명 | |
결과 | |||
남경 함락, 정난군의 승리 | |||
기타 | |||
건문제의 실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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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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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문제(建文帝) |
헤제(惠帝=견문제)가 황태손이었을 때, 일찍이 동각문(東角門)에 앉아 황자징에게 이르길 "여러 왕들이 (나의) 존속(尊屬)인데다 중무장 병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법을 많이 저지르니, 어찌해야 하는가?" 라 하니, 대답하길 "여러 왕들의 호위병들은 고작 스스로 지키기에만 족할 뿐이며, 만일 변란이 일어나더라도, 육사(六師=중앙군)에 임하신다면 누가 능히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한의 오초칠국은 강하지 않았던게 아니지만, 끝내는 패망하여 멸망했습니다. 대소(大小)와 강양(強弱)의 세력이 같지 않으니, 순역(順逆)의 이치도 서로 다를 것입니다."라 했다. 황태손이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명사(明史) 황자징(黃子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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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징(黃子澄) |
"조정에 올바른 신하가 없고, 안에 간악한 자가 있다면, 친왕은 곧 병사를 훈련시켜 명을 기다려라. 천자는 제왕에게 밀조하여 진병(鎮兵)을 통솔해 이를 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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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 - 1400년 당시의 전황 |
대명호철공사(大明湖铁公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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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 1401년 당시의 전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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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년 2월 - 1401년 10월 당시의 전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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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군의 남진 루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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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明成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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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최후의 한방! 영락제는 확실히 용감한 무인이었군요...
저렇게 왕들을 치다말면 뭔 소용이냐? 안 칠거면 철저하게 그냥 놔두고 칠거면 인정사정 보지말고 빨리 일을 끝내야지
근데 영락제하고 건륭제의 시대에는 어떤 변화가 있어서 영락제는 몽골의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해서 못잡고 건륭제는 몽골을 아작을 낸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