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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는 남쪽으로 눌려 있습니다. 중국 쪽에서 찌그러들고 그만큼 한반도로 삐져들었습니다. |
[신당서]에는 발해국의 압록강을 거슬러 동북으로 600 여리에 구도현성(九都縣城)이 있고,
또 2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고국이 있다고 하였다. 구도현성은 거의 환도성입니다.
그러기에 압록강변 집안이 무조건 환도성이라는 단세포적 발상이 고구려 역사를 찌그러뜨려 왔습니다.
그때 압록강이 거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압록강을 먼저 똑바로 찾아야 하는데 아래글들을 보면 압록강이 요하(遼河)입니다.
압록강이 요하인 증거들
1)[원사지리지]<동령로>(현재 대동강 평양에 설치한 관청)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 평양성이자, 장안성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낙랑 땅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뽑아버리니(拔平壤), 즉, 결론은 지금 대동강 평양은 고구려의 옛 평양이 아니며, 고대 압록수는 현재 대동강 평양에서 서북으로 천리니 2)[삼국유사]에서 고국원왕은 안시성(安市城)으로 천도했고 이는 환도성이었다고 했다. 또 안시는 요수 북쪽이며 요수는 다른말로 압록이라고도 불렀다고 기록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지리지>에서도 안시성이 환도성이다.
4) 연개소문 차자로서 대막리지였던 [천남산 묘지문]에서는 "한성을 지키지 못해 왕의 신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 라고 적었다.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
이제 [신당서]의 압록강인 요하를 600리 거슬러 올라가 구도현성, 즉 고구려 환도성을 찾는다.
철령시 최진보 관음각 산성이 고구려 환도성, 즉 안시성인 증거들 1) 다음은 [신당서]<도리기>에 나오는 지리 설명이다. 2) 이에 대해 [요사]<지리지> 기록은 다음과 같다. 桓州 高麗中都城 故縣 三 桓都 神鄕 淇水縣, 高麗王於此 國人謂之新國 剏立宮闕 五世孫剑 宮室焚蕩.
3) 이 환주, 구도성 위치는 철령시 20km 동남쪽, 범하(汎河) 북쪽의 최진보 관음각산성(성둘레 7000M 석성)과, 범하의 남쪽 청룡산성(성둘레 4000M) 일대다. 범하의 중국 발음은 환(fan)하다. 즉 환도성에는 환하가 흐른다. 지금도. (아래 지도 참조) 4) 범하 아래 청룡산성 토성은 산상왕이 세우고, 위나라 장수 무구검(毋丘儉)에게 도륙 당해 불내성(不耐城)이라고 불린 환도성이다. <무구검전>에 불내성을 파훼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밭으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실제로 범하 강물을 끌어들였다. 그래서 다시 도읍할 수 없어서 동천왕은 평양성을 세웠다. (아래 지도 참조)
6) 위쪽 최진보 관음각산성, 즉 안시성은 그 북쪽에 당태종이 전장을 내려보던 당왕영산(唐王營山)이 서북에 있고, 산성의 동남에는 고구려후원군이 진을 친 고려영(高麗營)이 있다. [철령현지](鐵嶺縣志)에 소개되어 있다.
7) 발해 환주의 3현은 환도(桓都), 신향(神鄕) 기수(淇水) 3현이다. 환도현은 범하 북쪽 관음각 산성이 되고, 신향현은 범하 남쪽 청룡산성 일대가 되며 기수(淇水)현은 개원시(開原市)가 된다. 8) 환주에서 200리 거리의 신주(神州)는 [요사지리지]에서 고려고국(故國)이며 발해 압록부 서경성(西京城)이다.
고구려 고국이라하면 고국(故國)에 묻힌 신대왕(新大王) 고국천왕, 고국원왕, 고국양왕이 있었다.
그런데 이 수성왕 묘지석은 동천왕, 중천왕 교서 갈석과 같이 나타났다.
세 교서 갈석이 같이 나타났으므로 단 안시성과 국내성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환도성이 불내성이긴 하지만 환도성이 국내성은 아니다.
수성왕의 뒤를 이은 신대왕의 장자 발기가 비류수에 살았고, 신대왕은 국내 위나암성에 도읍했다. 그러나 고국천왕 때에 요동왕 공손강이 쳐들어오고 다시 산상왕 때에 발기의 난이 있었는데 이때 산상왕의 승리는 요동국을 크게 밀쳐낸 것이고 그래서 다시 환도성에 도읍하였다.
bc.107년에 세운 1차 현도성은 옥저(沃低)에 있었다.
9) 발해 신주 신록현(神鹿縣)은 서풍현 자리인데 서풍 이전 이름이 도록현(圖鹿縣)이었다. 압록에서 유래한다.
10) 서풍현 낙선향(樂善鄕)에서는 철검이 껴묻힌 고분 70개와 고구려 초기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11) 동천왕이 비류수에서 이기고도 양맥에서 위나라 무구검에게 패하여
12) 요나라 건국초에 망해버린 발해 압록부의 기병들이 반란하여 압록강에서 유격작전을 하였다.
14) 이제까지 발해 압록부 환주, 환도성 등으로 치부해온 집안성(集安)은
15) 집안의 산성이 약 6700m의 성둘레를 가졌다. 그 부근에서 가장 크다. 16) 요나라는 안시성민들을 빼서 요양 남쪽 탕지보로 옮겨 철주(鐵州)라 불렀고,
결론적은 집안은 북옥저였고, 고주몽 때부터 고구려에 복속했으며
따라서 동천왕이 지은 평양성, 후에 고국원왕이 증축한 평양성은 |
유리왕의 국내위나암성 | ||
고주몽은 홀본에서 즉위하고 눌현에 자리잡았는데 그곳은 황룡국이었다. 유리왕의 국내성 천도전에 지은 황조가의 배경이 양곡(凉谷)의 성인데, 고구려 국내성도 웅직일 수 없는 고대 유물로 보아서 오늘날의 양천(凉泉) 성자산성이다. 그의 중국인 처는 국내위나암 건국전에 일이고 건국후 골구천의 여자가 시기했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 수도가 동서 이궁이었다는 것도 현재 성자산산성에 맞는다. 이 국내위나암 시기에 유물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개원시(開原市) 서풍현(西豊縣) 낙선향(樂善鄕)의 70개 고분에서는 철기시대의 철검 70개가 발굴되었다.
그외 금은과 청동으로 된 야수문 패식이 수없이 나왔는데 이는 바로 고구려 국내성 시기와 일치하는 유물이다. 여기서의 야수문 형식은 육가자로부터 전래된 것이고, 뒤이어서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때에 신라로 도망간 고구려 피난민을 통하여 신라 수도 경주에까지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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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서경 압록부가 고려고국이었는데 고대 압록강에 있었고 압록강구로부터 700여리인 곳이다. [삼국유사]에서도 고대 압록강은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랴호허강 북쪽이라 하였다. 또한 고탐의 [도리기]에서 보면 발해 중경성으로부터 400리 거리니, 발해 중경성을 앞장에서 설명한 장춘시 관성자로 보면 바로 개원시 서풍현 양천 성자산성이 발해 서경성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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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서풍현 고분군은 시대적으로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3세기까지로서 고구려 국내성 시대와 일치한다. 거기다가 그 시기에 서풍현 고분군보다 번성한 문물이 발굴되는 곳이 없으니 고구려 국내 위나암성 고분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이 서풍현 고분군을 처음 발견한 1950 년대에는 흉노족 고분이라고 이름 부쳤다가 70 년대에는 선비족 고분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90 년대에는 부여족 고분으로 이름을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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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은 개마(蓋馬)를 정벌하였고, 구다(句茶; 今 長春市 九臺)가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 개마는 개원시로 추정된다. 구대는 요원시 동북쪽에 있었다. 동개마, 즉 연변자치구 일대는 고구려 6대왕 태조대왕 때에 정벌되었다.
뒤이어 매구곡(買溝谷)이 스스로 고구려에 항복하였는데, 훗날 동천왕(東川王)이 관구검(毌丘儉)에 쫓겨서 도망한 옥저의 매구곡으로서 환12국중의 매구여(買句餘)라고 추정된다. 오늘날의 매하구(梅河口)와 관련되어 그 남쪽 매하(梅河), 유하(柳河), 통하(統河) 부근에 매구여가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가 옥저(沃沮)를 지나다가 낙랑왕(樂浪王) 최리(催理)를 만나 사위가 되고 뒤에 낙랑을 쳐서 없앴다. 이 옥저의 낙랑국은 철령시 최진보산성(鐵嶺市 催陣堡山城)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대무신왕 27년, 서기 44년에 한나라 광무제에 의해 살수(薩水)까지 이르는 침략이 다시 있었다. 이후로 살수 이남은 한나라에 다시 속한 것인데, 후한의 낙랑군이 다시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살수는 혼하(渾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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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대왕의 고구려 확장
모본왕(慕本王) 2년(서기 49년)에 고구려는 중국에 반격을 가하였다. [삼국사기]와 [후한서]가 똑같이 기록한 사실로서, 고구려 모본왕(慕本王)이 북평(北平; 今 唐山), 어양(漁陽; 今 北京市), 상곡(上谷; 今 昌平)은 물론 산서성 태원(太原)까지 습격하였다. 그후 고구려는 태조대왕(太祖大王)을 거치면서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수비하였는데 요서 10성은 [조대기(朝代記)]에 의하면 안시성, 건안성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는 요서군의 안시성, 건안성이며, 요동군의 안시성, 고구려 안시성과는 상관이 없다. 이런 형국에서 광무제 때 살수 이남에 설치한 한나라 군현은 허리가 끊어져서 더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후로 오환족(吳桓族; 越喜)과 선비족(鮮卑族)이 연속적으로 북경을 쟁탈한다. 태조대왕은 동옥저를 쳐서 동으로는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 살수(薩水)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동해바다에 진출하였고 책성에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왜 태조대왕이 남쪽으로 살수(薩水; 今 北沙河)까지밖에 못 내려갔는지 의문이 들 것이나, 이는 백제, 한예(韓穢; 桓仁 烏女山城)의 북방 진출로 이해할 수 있다. 모본왕의 북경 침략 때에 고구려는 예맥(濊貊)과 연합하였다. 예맥은 부여와 함께 선비족과 접경 지역에 있었는데, 혼하의 남동쪽 한예로 고려된다. 한예는 광개토왕 비문에 나온다. 뒷날 태조대왕 때에는 예맥과 함께 마한(馬韓)이 고구려의 중국 정벌 전쟁에 참여하는데 이 마한은 백제다. 한편 태조대왕은 남해(南海)에 다녀온 기록이 있는데 남해는 요하 하구로 추정된다. 따라서 혼하의 남쪽 요양에서 본계, 안산, 개주시까지 요동반도 해안은 백제의 영역으로 추정되고, 혼하의 남동쪽은 한예의 영역으로 추정되며 혼하의 북쪽은 고구려 땅인 것이다. 태조대왕의 연호가 [조대기]에서 융무(隆武)로 기록되었는데 고구려의 다물 이후로 두번째 연호 기록이다. |
태조대왕 69년, 서기 121년에 한나라 유주자사 풍환(馮 忄奐 ), 요동태수 채풍(蔡諷), 현도태수 요광(姚光) 등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예맥의 거수(渠首)를 죽였다. 즉 살수 이남에 한나라군이 다시 들어온 것이다. 예맥은 요동의 동쪽으로서, 부여와 이웃이라고 <선비전(鮮卑傳)>에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원소전(袁紹傳)>에도 마찬가지로 기록되었다.
그해 겨울 다시 고구려는 현도군성을 포위하는데 태조대왕이 마한, 예맥과 더불어 친정(親征)을 나가 현도군을 공략하다가 부여(夫餘)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만다. 시라무렌 북쪽의 부여는, 중국군을 응원한 것이다. 태조대왕은 이어서 요동성(遼東城; 두번째 요동성은 대릉하의 의현이다.)을 치다가, 마찬가지로 부여의 배후 공략으로 실패하였다. 여기서 태조대왕이 동원한 마한족(馬韓族)은 살수 이남의 백제군이다.
공손탁(公孫度)이 현도태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먼저 부산적(富山敵)을 치기 위해 고구려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 부산적은 시라무렌 상류에 있는 부여인데 태조대왕 이래로 고구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몇년후 173년에는 공손탁이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이때 고구려 장수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처음에는 국경의 들판을 청소(淸掃)하고 후퇴하다가 좌원(坐原; 구려하 동쪽)에서 한나라군을 대파하여 하나도 살려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대릉하까지 진출했던 고구려가 공손탁에게 밀려나서 후퇴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공손탁은 부여국이 선비와 고구려 사이에서 위태하다고 보아서, 공손씨의 핏줄인 여자(公孫度 宗女)를 시집보내어 부여의 위상을 높여주었는데 이는 고구려를 견제한 것이다. 또한 대방고지(帶方故地; 今 蓋州)에 진출해 있던 백제 지방왕인 대방왕 구이왕(仇台王)를 만나서 자신의 딸을 처로 주고 대방왕(帶方王)으로 인증(?)하였다.
공손탁은 부여와 백제를 배경으로 소위 요동후(遼東侯) 평주목(平州牧; 河北城 盧龍縣)으로 등극하였다. 공손탁은 스스로 요동왕이라 하였으나, 위나라에서는 영령향후(永寧鄕侯)라고 깎아불러서 공손탁을 화나게 하였는데, 공손탁은 영령향후에 관한 인수(印綬)를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이 영령향은 북경시 서북쪽 연경(延京) 동쪽의 영령현(永寧縣)으로 추정된다. 평주목을 자처한 공손탁의 양평성은 이때까지도 노룡양평성이었다. 이후에 공손탁은 전한의 요동 양평성을 점령하여 거주하였을 것이며, 탁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즉위하여서도 양평후로 불리었고 강의 동생 공손공(公孫恭)을 영령후로 봉했다. 강(康)이 죽고 공손공이 즉위하자 위나라는 공손공을 평곽후라고 하였다. 즉 평곽(平廓; 今 盤錦市 大溝邦子)에서 즉위하여 지낸 것이다. 강의 아들 공손연(公孫淵)이 공손공을 몰아내고 즉위하자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하였고 그가 위나라에게 토멸당한 곳은 하얼투(哈爾套)의 탑영자고성인 양평성이다. [진서(晉書)]에서 공손연(公孫淵)을 토벌나간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마선(司馬宣)은 병졸을 이끌고 나아가 고죽(孤竹: 今 河北省 昌黎縣)을 지나 갈석(碣石: 今 河北省 昌黎縣)을 넘어 요수(遼水; 今 羊臟河)에 이르렀다. 공손연은 수만의 보기병으로 요대(遼隊; 今 阜新)에서 막았는데 강 건너편에 남북으로 칠십리의 진을 쳤다. 이 곳을 돌아서 사마선(司馬宣)은 양평을 포위하였다. [자치통감]에서는 수산에 진을 쳤다. 별똥이 날아와서 수산 북쪽, 양평 동남에 떨어졌다. 사마선은 애걸하는 공손연의 항복을 받지 않고 공손연이 성을 나와 남쪽을 뚫고 달아나려 하자 체포하여 양수(梁水)위에서 목을 베었다.” 여기서 수산은 바로 고구려 요동성을 칠 때에 수양제가 주둔한 곳이다. 한편 별똥이 떨어진 곳은 창무시 서북쪽 성화(星火)라는 곳이다. 서기 180년에 고구려에 변란이 있었다. 신대왕(新大王)이 죽고 둘째 아들이 고국천왕(故國川王)으로 등극하자 첫째 왕자 발기(拔奇)가 왕위계승을 못하여 소노가(消奴加: 今 鐵法市)와 함께 각기 3만의 무리로서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에게 투항하였다. [삼국지]<공손탁전>에서는 그가 고구려를 정벌하고, 요동군(遼東郡)을 요서군(遼西郡)과 중요군(中遼郡)으로 나누어 통치하며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데 서기 190년의 일이다.
공손탁(公孫度)의 뒤를 이어 194년에 그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요동왕이 되었다. 196년에는 대방군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후 서기 197년, 고국천왕(故國川王)의 동생인 산상왕(山上王) 즉위년에 산상왕의 맏형인 발기(拔奇) 왕자가 고구려 왕위를 빼앗기 위해서 한나라 요동군 공손강의 군사를 빌려서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에서는 이웃나라의 군사를 빌려 왕위를 찾는 것이 흔한 일이었고, 또 진(晉)나라 팔왕의 난 때에도 반란군이 흉노군까지 동원하였으니 중국 풍속으로는 흔한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찌기 없던 일이다. 즉 발기는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권욕 때문에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었다. 다행히 산상왕의 아우 계수(罽須)가 맞아 싸워 이겨서 발기를 배천(裴川)에서 죽였다. 이때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서는 산상왕이 낙랑군과 현도군을 멸망시켰다고 하는데 바로 요하를 건너와서 무순시에 설치되어 있던 공손강(公孫康)의 낙랑군을 오늘날의 요하 서쪽으로 다시 몰아낸 것이다. [요사지리지]에서 무순시에 공손탁(공손강의 오기)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197년에 천산산맥 서쪽과 동쪽을 갈라서 서쪽 평원은 낙랑군으로 그 동남쪽은 대방군으로 분할 통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년에 사라졌는데 기록만 영원히 남아서 한사군이 망령처럼 한국사를 지배한다.
서기 238년 위나라가 요동왕을 멸망시키고, 이때 고구려가 도왔는데 위나라는 거꾸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무구검의 환도성 침략이다. 이때 고구려는 왕부터 살신성인의 자세로 국란을 극복했다. 이때 백제가 낙랑서현을 공격하여 무구검을 낙랑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대신에 백제는 요양시까지 진출해 올라와 있었다고 보인다. 소위 대방 백제가 탄생한 것이다.
서기 290년, 선비족 전연국은 부여를 멸망시키고 343년에는 고구려 환도성을 쳤고 346년에는 백제의 대방성을 쳤다. 전연국은 370년까지 기세 등등하여 고구려는 오늘날의 압록강 집안으로 천도하였고 선비족을 향해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백제의 반격으로 고구려 평양성(환인 오녀산성)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한다. 이후 광개토왕이 만주를 통일하여 고구려 땅으로 만든다. |
광개토왕 비문과 고구려의 팽창
광개토왕(廣開土王)은 그의 비문에서 한반도 땅에 고구려 영토를 획득한 최초의 고구려왕인 것을 나타낸다. 고구려 지명과 관계된 부분만을 골라 해석하는데 두 번에 걸친 백제 정벌과 왜국 원정이 있었고 기타 부여고지인 두만강변, 숙신고지인 길림정벌에 대한 기사가 있다. 단 비문의 모든 글자가 해독되지는 않으므로 보이지 않거나 확실치 않은 글자는 []를 치고 그 안에 추정 글자를 놓고 해석하였다.
1절. 을미년 비려 정벌과 유주자사 진묘
(乙未年 稗麗 征伐, 幽州刺史 鎭墓)
영락5년 395년에 태왕은 비려국이 쉬지 않고 (침범하므로)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토벌을 나가, 부산, 부산을 돌아 염수 위에 있는 근거지를 깨트리고, 여섯 개의 대부락과 칠백 개의 마을을 쳐부수고 빼앗은 소와 말, 양들은 그 수를 셀 수가 없이 많았다.
태왕은 거기서 군사를 돌려 환국하셨다. 이때, 태왕은 [망]평도를 지나기 위해 동쪽으로 오는 길은, [유]성, 력성, 북풍성 등을 거쳤다. 대왕은 미리 사냥을 준비하여 국경도 둘러보시고 사냥도 하면서 돌아오셨다.
永樂五年 歲在 乙未 王 以稗麗 不息[侵犯] 躬率 往討
回富山 負山 至鹽水上 破其丘, 部落六, 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 旋駕 因過 [望]平道, 東來, 柳城, 力城, 北豊. 王備 獵游 觀土境 田獵而還
1. 비려와 염수
영락 5년은 395년으로서, 선비(鮮卑)족 모용씨의 후연국(後燕)이 중산(中山; 今 河北省 定州, 保定市 南)에 근거하여, 고구려의 서부를 침탈하였다. 광개토왕은 즉위하던 해인 391년의 백제, 거란 정벌 이후에 선비족의 연나라 소탕이 당면 과제였다.
모용외(慕容廆)는 부신시에 있던 불열국을 쳐서 자몽지야를 얻었고, 청하문구(淸河門區) 오룡패향(烏龍壩鄕)에 대극성(大棘城)을 건설하여 수도로 두었었고, 모용황(皝)은 화룡성(和龍城; 조양시)에 수도를 두었었고, 357년에 모용준(儁)은 중산(中山)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업성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370년 부견의 전진국에게 전연이 멸망했다.
386(384?)년에 황의 아들 모용수(垂)도 중산(中山)에서 후연(後燕)을 세워 황제가 되었으나 위나라에게 밀려서 화룡성(和龍城;하북성 청룡현)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396년에는 모용보(寶)가 모용수의 뒤를 이었으나 3년만에 살해되어 모용성(盛)이 이었고 모용성도 2년만에 죽었다. 이 뒤에 399년에는 모용희(熙)가 이었고 407년에는 모용운(雲)이 뒤를 이었다. 모용운은 모용황이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킬 때 고구려에서 끌려간 고씨(高氏)의 후예로서 고운(高雲)이라고도 하며 광개토왕과 한 종족의 교분을 맺었다.
한편 395년은 모용수와 위(北魏)나라 태조(太祖)간에 산서성과 하북성에서 전쟁이 치열하였다. 이 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선비족 모용씨의 배후 근거지를 쳤던 것이 된다.
비려(稗麗)는 이전에 기록이 없지만 [신당서지리지] 중에 거란의 필려주(匹黎州)로 추정하며, 거란족 이전에는 선비족들이 살던 곳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비려는 곧 선비족에 대한 고구려식 이름이다.
광개토왕은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우회하였다. 부산(富山)은 요동왕 공손탁이 정벌을 나가 복속시킨 곳이며 고구려도 공손탁을 도와서 참전하였다. 파림좌기 천산으로 고려된다.
오늘날 염수(鹽水)는 서요하 상류다. 따라서 광개토왕은 [삼국사기] 기록에 있는 391년 거란 정벌을 단행하여 서요하(西遼河) 상류를 정벌하고 돌아왔다.
2. 유주자사 진묘(幽州刺史 鎭墓)
서기 408년, 광개토왕(廣開土王) 18년에 평양 덕흥리에 묻힌 유주자사 진(鎭)묘에서 이 지역의 태수들이 모두 고구려 유주자사 진에게 복속한 것이 확인된다.
평양 덕흥리 고분의 벽화와 묵서 기록에 의하면, 광개토왕 때에 고구려 유주자사를 지내고 돌아와 서기 408년에 평양에 묻힌 광개토왕의 신하 진(鎭)은 고구려의 유주자사로 재임할 때에 치소가 계성(薊城; 今 北京市---현재의 天津市 薊縣은 당시 遼西郡 無終縣이었다.)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벽화에서는 오늘날의 산서성, 하북성이 다 소속된 연군태수, 범양내사, 어양태수, 상곡태수, 광령태수, 대군내사, 북평태수, 요서태수, 창려태수, 요동태수, 현도태수, 낙랑태수, 대방태수 등 13군 태수가 복속하여 문안하는 그림이 남아 있다. 즉 광개토왕의 생존시, 혹은 그 이전(370-384년, 후연 멸망후, 북위국 성립 이전)에 한때 고구려 영토의 서쪽 경계는 중국의 북경을 넘어 훨씬 서쪽에 위치한 태원을 중심으로 산서성(山西省)에까지 이르렀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묵서의 원문이다.
[][]군 신도현 도향(경) 감리 ([][]郡 信都縣 都鄕(敬) 甘里)
석가문불제자 [][]씨 진 (釋加文佛弟子 [][]氏 鎭)
사위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仕位 建威將軍 國小大兄 左將軍)
용양장군 요동태수 (龍讓將軍 遼東太守)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 진 (使持節 東夷校尉 幽州刺使 鎭)
연 칠십칠 훙 언이 영락 십팔년 (年 七十七 薨 焉以 永樂 十八年)
태세재 무신 십이월 신유삭 (太歲 在 戊申 十二月 辛酉朔)
을유성천이 옥궤 주공상지 (乙酉成 遷移 玉櫃 周公相地)
공자택일 문제선시---이하 생략 (孔子擇日 文帝選時------下略)
유주자사 진은 331년생이다. 신도(信都)는 [진서]에서 장락국(長樂國) 또는 안평군(安平郡)의 현으로서 위치는 하북성 형수지구 조강(棗强) 부근이었다. 장락군 신도현 유지로서 진(鎭)은 불교제자였는데 성은 복성(複姓)이나 알 수 없다.
그는 고구려 요동태수겸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을 제수하였고, 다시 용양장군 겸 요동태수를 지내고 그후 사지절 유주자사로 임명되었다. 그가 77세로 타계하자 이 해가 광개토왕의 영락 18년 즉 408년, 무신년이었는데 이때 그는 대동강에 봉지를 받아서 살았기 때문에 그곳에 묻힐 수가 있었다. 그 해 12월에 25일에 천장을 하여 안치하였다.
이후 생략한 묘비문 구절은, 당시 백제, 고구려의 풍습으로서 사자를 위한 묘지로서 주나라 문공의 눈으로 명당을 고르고, 공자의 지혜로 택일을 하고 또 무왕(戊王)의 도력으로 시간을 골라 안장하여 7대 자손까지 부귀를 누리고 후손의 지위는 후왕(侯王)에 이르도록 기원하는 내용이 있다.
당시 벽화 그림에 나타난 고구려 유주자사에 속했던 13군 태수의 위치는 후연(後燕) 시대와 북위(北魏) 시대의 군현 위치로 보아서 다음과 같이 비정된다.
연군태수는 북경시를 통할한다. 유주자사의 위치이다.
범양내사는 하북성 탁군(郡) 등지를 다스렸다.
어양태수는 북경광역시내 동쪽 통현(通縣)에 있었다.
상곡태수는 북경시 북쪽 연경(延京;居庸關)과 서북쪽의 적성(赤城; 治所)을 다스렸다.
광령태수는 하북성 탁록(鹿)을 다스렸다.
대군내사는 광창(廣昌), 평서(平舒; 北魏 屬 上谷郡). 부성(富城)등을 다스렸다. 부성(富城)은 적성 북쪽 부산(富山)으로 추정된다.
북평태수는 당산시 옥전(玉田)을 다스렸다. 서무성(徐無城;서우여 번한성)이 중심이다.
요서태수는 진황도시 노룡현의 동쪽, 무령현의 서쪽에 치소가 있었다고 한다.
창려태수는 조양시(朝陽市)를 다스렸다.
요동태수는 요녕성 금주시 수중현(綏中縣)을 다스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도태수는 [자치통감]에서 노룡과 유성 사이에 두었다는 3차 현도군이다. 객좌현 인근이다.
낙랑이 본래의 요양시(遼陽市)라면 고구려 유주자사에 속하지 않는다. 진(晉)나라 때에는 진황도시 노룡현 서쪽에 낙랑군 조선현을 두고 수성현은 갈석산에 두었다. 즉 진황도시 창려(昌黎)에 낙랑태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방태수는 대방산이 있었던 진황도시 북쪽 청룡현(靑龍縣)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고구려인 진의 유주자사로서의 북경 통치시대를 추정하는 일이 시급하다.
먼저 벽화에서 보면 유주자사 진은 331년에 태어나 결코 젊지 않은 나이, 30대 이후에 부임하여 13군 태수의 하례를 받았고 또 광개토왕 비문의 치적에 유주에 관한 글이 전혀 없음으로서 360년에서 광개토왕이 태자로 책봉받은 385년 이전으로 축소할 수 있다. 태자로서의 공적도 비문에 기록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자치통감]과 [진서]에서 저들이 누락시켰을 시기를 추정하면 369년 11월경부터 370년 11월 사이로 추정한다. 물론 이때 두 책에서 고구려의 유주 침략 기사는 없다.
그러나 370년 전진황제 부견이 전연을 멸국시킬 때에 상황을 보면 업성의 함락일은 11월 7일이었다. 북문이 뚫리자 연나라 폐황제와 태부 모용평은 업성에서 도망쳤으나 진나라 장수 곽경이 추격하여서 며칠후에 동북쪽 고양군에서 폐황제만 사로잡았다.
그런데 11월 6일에 모용평의 아들인 모용환이 업성 동쪽 양평에서 용성으로 도망쳤다.
곽경은 11월 10일(?)이나 되어서 고양에서 출군하여 얼마후 용성에 이르렀다. 물론 목적은 모용평과 모용환 부자를 추격한 것이다. 이 용성을 진황도시 청룡현으로 보는데 적어도 닷새는 소모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곽경이 용성까지 추격하여 진주한 것은 11월 15일 이후 20일 사이다.
곽경이 추격하여 용성에 이르자 용성에는 진동장군 모용량이 있었을 것인데 용성으로 피난해 들어갔던 모용환이 모용량을 암살하고 그 군사들을 합쳐셔 요동으로 향했다.
모용평은 모용환보다 하루 늦게 출발하여 모용환보다 먼저 고구려로 도망갔는데 고구려가 그를 붙잡아 도로 전진에 보냈다.
모용환은 용성에서 요동으로 가다가 그를 거부하는 요동태수 한조와 평주에서 싸웠고 곽경이 추격하여 모용환을 잡아 죽였다.
이때 제(諸州;여러주)와 육이(六夷)가 진나라에 항복하였다.
이어서 부견황제는 왕맹을 기주(업성)목사으로 봉하고 업성에 진주하게 하고 곽경을 유주자사로 봉하고 계성(북경)에 진주하도록 하였다. 부견황제가 곽경의 보고를 받고 또 11월에 명을 내렸다면 곽경의 용성 싸움은 11월 15일에서 25일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 경계는 도대체 연나라 업성에서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었을까? 북경에 고구려 유주자사가 나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요동태수 한조는 분명 고구려로 도망가는 모용평을 잡지 못했다. 모용평은 요동으로 간 것이 아니라 업성에서 곧바로 북쪽을 향하여 고구려 유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모용환보다 하루 늦게 출발했어도 모용환보다 먼저 고구려에 들어갔고 모용환이 채 요동에 가기도 전에 모용평이 고구려에서 전진으로 송환되어 올 수 있었다.
고구려 유주자사는 유주로 온 모용평을 잡아서 고구려왕(고국원왕; 한달전 10월에 백제 침략으로 전사하였다.)의 허가 없이 즉시 모용평을 진나라에 받침으로서 진나라와 화친을 하고 안전하게 철군한 것은 아니겠는가?
11월 말에 전진에 항복한 육이(六夷)는 바로 유주까지 내려와 있던 고구려등이 아닌가?
368년 연나라를 지키던 지주인 태재 모용각이 죽었고 369년 6월 동진 대사마 환온의 연나라 공격으로 7월 모용위 연황제가 위기에 처하였고 태부 모용평은 용성으로 도망가자고 말했다. 이때 황숙인 모용수가 9월에 동진군을 대파하였다. 그러나 10월 모용수가 업성에 개선하였는데 모용평이 그를 죽이려고 모략을 했고 이를 안 모용수는 홀로 탈출하여 진나라 부견에게로 망명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다시 동진에서 연나라로 출전했고 370년 1월에는 전진 부견황제도 연나라를 치러 출전했다. 모용령은 1월에 진나라 군대로서 연나라를 치러 출병했다가 반란을 일으켰고 5월에는 용성에 가서 연나라 진동장군 발해왕 모용량을 쳤는데 오히려 모용령이 패해서 죽었다.
이때 용성의 모용량이나 요동태수 한조는 연나라 신하였을 수도 있고 혹은 고구려 신하였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막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존재해야 할 연나라 유주자사, 연나라가 동진에게 위협받을 때 구원해야할 유주자사가 당시 369년과 370년의 기록에 없다.
그러면 연나라 평주 용성과 요동을 놔 둔채로 고구려가 연나라 유주 북경을 공략하여 가지는 일은 가능한가?
그 해답이 바로 위에 있다. 광개토왕의 북경 공격로인 거란도를 따라서 고구려가 요동을 거치지 않고 북경(유주)을 점령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용평은 연나라 업성에서 곧바로 북진하여 고구려의 유주자사에게로 향했고 모용환은 동북진하여서 용성으로 갔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나라 곽경이 용성에 이르러서 모용환을 잡기도 전에, 모용환과 요동태수 한조의 싸움으로 고구려와의 요동로가 막힌 상황에서 모용평이 고구려 유주로부터 진나라로 송환되는 것이다.
전진은 곽경을 보내어 용성부터 차지하고 며칠후 곽경을 유주자사로 내보내 370년 11월말에 유주자사를 둔다.
고구려는 왜 저항하지 않고 유주를 내주었을까 싶지만 바로 이 시점이 백제 근구수왕자의 침공으로 인하여 집안평양성의 고국원왕이 전사한 시점이다. 이미 370년 10월(삼국사기는 광개토왕 비문에 비해 1년 늦다. 또한 삼국사기의 환도성 함락시기인 343년이 자치통감에서는 342년이다.) 고국원왕이 전사하였다. 따라서 국왕을 잃고 유주에 고립된 고구려군은 전진과 화친하고 유주를 내주고 철군하였을 것이다.
384년 고국양왕(故國壤王)은 군사 4만명으로 후연(後燕)을 쳤다. 당시 모용수의 신하로서 용성(龍城)에 주둔했던 대방왕 모용좌(佐)가 구원한 요동, 현도 2군을 빼았았다.
3. 광개토왕의 귀로(歸路)
인과 [망]평도 동래(因過 [望]平道 東來)는 “대왕이 망평도를 지나기 위해” 라고 해석되는데, [望]는 본래 글씨체에 입각한 필자의 독특한 해독(解讀)이다. 망평은 유하의 남쪽 흑산현 부근이었다.
무명성은 유성(柳城)으로 추정된다. 앞 글자의 우변이 비슷하게 해독된다. 유성은 오늘날의 조양(朝陽)인데 조양에서는 395년 후연(後燕) 모용수의 창려(昌黎; 昌黎郡의 治所가 今 朝陽)태수였던 최휼(崔遹)이 사망하여 조양시 남쪽에 묻혀 묘비로 남아 있다. 다만 사망 날짜는 기록이 없는데 광개토왕이 395년 선비 정벌을 마치고 회군하면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요동국 역성(力城)은 신창과 평곽의 사이에 소개되는데 훗날의 여라수착(汝羅守捉)으로도 추정된다.
북풍성(北豊城)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장수왕편과 [북위서]<풍발전(馮跋傳)> [남사]<고구려전>에 기록이 있는데 위치는 불명이다. 위 기록들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후연(後燕)을 세운 풍발(馮跋)의 동생인 연왕 풍홍(馮弘, 馮文通)은 436년 북위의 공격을 받자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시 풍홍은 430년대 영구(營邱; 今 北票), 요동(遼東; 秦皇島市 盧龍), 성주(成周; 今 錦州市 班吉塔鎭), 낙랑(樂浪; 義縣 大楡樹堡鎭), 대방(帶方; 今 義縣 北磚城子), 현토(玄ꟙ; 今 錦西市 綏中縣) 등 6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위나라는 풍홍을 쳐서 위에 열거한 6군 사람들중 3만명을 유주(북경시)로 이주시켰다.
고구려는 북연의 수도인 용성(龍城; 今 河北省 靑龍縣)에 북위군보다 먼저 입성하여 연왕 풍홍을 구원하여 요동군 평곽현(平郭; 今 盤錦市 大溝邦子)에 거주토록 하였는데, 풍홍이 고구려 사신 앞에서 천자를 칭하므로 장수왕은 풍홍의 수족을 제압하여 인질로 삼고 풍홍을 북풍성으로 보내었다.
풍홍은 다시 송나라 문제에게 표를 올려 맞아주기를 원하므로 문제(文帝)는 왕백구와 조차흥 등을 보내었다. 438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풍홍을 남쪽(송나라)으로 보내기 싫어서 손수, 고구 등의 장수를 파견하여 풍홍을 죽였다. 그러자 왕백구가 손수를 사로잡고 고구를 죽이고 도망왔다. 장수왕(長壽王)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왕백구를 사형시키라고 요구하므로 문제는 거역하지 못해서 왕백구 등을 (송나라) 감옥에 가두었다가 훗날 석방하였다.
이 북풍은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이면서 남쪽의 송나라로부터 왕백구가 인솔한 해군이 바다 건너 도착하였다고 보이는 지점이다. 만일 중국측의 주장처럼 집안성과 요양성의 사이에 북풍성이 있었으면 위와 같이 풍홍이 독립을 시도할 수도 없고, 또한 송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와서 고구려 사람을 죽이고 도망가는 일이 벌어질 수 없다.
현재로서 비문의 환국로를 유성(柳城)--> 대유수보(大楡樹堡) --->(의무려산)--->북풍(北豊)--->망평(흑산현)으로 보면 오늘날의 북진(北鎭)이 당시 북풍성 위치로 추정된다.
2절. 병신년 백제 정벌(丙申年 百濟征伐)
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국이어서 조공을 하여왔다.
그러나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신라와 백제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 백제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으니 5년 후 병신년에 광개토왕이 백제군사를 쳤다.
倭 以辛卯年 來渡海破 百殘[加羅]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 率水軍 討滅 殘國軍[][]
영락6년 396년에 태왕은 친히 백제를 토벌하여 먼저 1)일팔성, 2)구모로성, 3)약모로성, 4)간궁리성, 5)[모수성] 6)각미성, 7)모로성, 8)미사성, 9)고사조성, 10)아단성, 11)고리성, 12)[어]리성 13)잡미성, 14)오리성, 15)구모성, 16)고수야라성 17)[수추성] 18)[농매성] 19)분이야라성, 20)탕성, 21)[파노성] 22)[나단성], 23)두노성, 24)비성 25)비리성 26)미추성, 27)야리성, 28) 대산한성, 29)소가성, 30)돈발성, 31)[백제국성] 32)루매성, 33)산나성, 34)[]루성, 35)세성, 36)모루성, 37)우루성, 38)소적성, 39)연루성, 40)석지리성, 41)암문지성, 42)임성, 43)[사조성] 44)[잡진성] 45)[객두성] 46)취추성, 47)[취자]성 48)고모루성, 49)윤노성, 50)관노성, 51)삼양성, 52)[미성] 53)[고모야라성] 54)구천성 등을 쳐서 빼앗았다.
[][]以六年丙申 王躬 率水軍 討利 殘國軍
[][]首攻取 壹八城, 臼模盧城, 若模盧城, 幹弓利城, [牟水]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古舍蔦城, 阿旦城, 古利城, [於]利城, 雜彌城, 奧利城, 勾牟城, 古須耶羅城, [須鄒城] [農賣城], 分而耶羅城, 湯城, [巴奴城], [那旦城], 豆奴城, 沸[城], [比]利城, 彌鄒城, 也利城, 大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百殘國城], 婁賣城, 散那城, [州]婁城, 細城, 牟婁城, 亏婁城, 蘇赤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至城, 林城, [舍蔦城],[雜珍城],[客頭城], 就鄒城, [就咨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彡穰城, [味城],[古模耶]羅城, 仇天城,
고구려군이 이미 백제 왕성을 점령하였으나, 백제왕은 탈출하여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태왕이 진노하여 아리수를 건너고, 장수를 보내어 백제 임시수도인 성횡(악성)을 핍박하니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남녀 천명과 세포 천필을 태왕에게 바치고 백제왕은 이제부터 영원히 변방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제왕을 아량으로 용서하여 “앞서는 어리석었지만 차후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새기도록 하였다. 이때 백제의 오십팔 성과 칠백의 부락을 빼앗고 백제 장군인 백제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인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王旣破]其國城 殘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 城橫[岳城][百殘]便國城
而殘主因逼獻[上] 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삼국사기]에서 광개토왕(廣開土王)은 391년 5월에 즉위하고, 7월에 백제로부터 석현(石峴) 등 10여 성을 빼앗고 한수(漢水) 북쪽을 유린하였으며, 이어서 10월에 관미성(關彌城)을 빼앗았다.
여기서 한수(漢水; 今 大洞江)는 대동강이다. 이어서 391년 10월에는 백제 관미성을 정벌하였는데, 관미성(關彌城)은 대련시(大連市) 북쪽 금주시 대흑산산성(金州市 大黑山山城)이다.
[삼국사기]에서 광개토왕이 백제 관미성 해안에 수군(水軍)으로 일곱 군데에 상륙하였다고 하였다. 광개토왕은 관미성의 동쪽 장하시(庄河市)까지 가서 군대를 돌렸으므로 장하시 선성산성(旋城山城)이 남아 있다. 장하시 동쪽 수암현은 5년 후인 병신년에 정벌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의 관미성 침략으로 백제의 타격이 컸다.
그런데 이 해에 광개토왕에게 패전한 백제는 여러모로 내우외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조카 아신왕(阿薪王)을 내쫓았던 진사왕(辰斯王)은 왜국왕이 된 형왕 침류왕의 원조겸 보복으로 인하여 살해되었고, 대신에 침류의 원자인 아신왕(阿莘王)이 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
왜국왕 침류의 지원으로 아신왕은 관미성을 회복하려고 애를 썼다. 관미성을 빼앗긴 바로 다음해 392년, 아신왕(阿莘王)은 왜군까지 동원하여 관미성에 백제 군대를 보냈으나 군량이 끊어져 돌아오고 있다.
이는 백제군 역시 해군력으로서 해상으로 관미성을 수복하기 위해 공격하였기 때문에 군량을 수송하는 데에 무리가 있어서 장기전을 치르지 못하고 철수한 것으로 고려된다.
당시 관미성을 친 백제군의 목적은 관미성을 거점으로 그 북쪽의 석현(石峴)등 5성을 수복하자는 것이었다. 백제 석현성은 개주시 청석령산성으로서 구이왕의 수도로 추정된다.
394년에는 백제 아신왕(阿莘王)은 수곡성(水谷城; 咸鏡南道 永興郡)을 공격했지만 고구려가 수비하여 승리하였다.
395년 가을 8월에 백제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좌장 진무(眞武)가 패수(浿水) 청천강으로 진격하였는데 이는 집안 평양을 치러 올라가는 길이다.
그러나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직접 패수 청천강에서 막아 백제군의 포로만 8000명이었다고 전한다.
다시 같은해 11월에 재차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백제 아신왕이 한수(大洞江, 寧遠郡)를 지나서 청목령, 즉 청천강 희천(熙川)까지 진격하였다가 기상이 나빠서 한수로 회군하여 한산성에 돌아왔는데, 아신왕은 청목성을 수복하지 못했고 돌아온 것이다. 한산성은 평양안학궁으로 추정된다.
당시 청천강 상류의 희천군 청목성이 고구려의 동남쪽 경계가 된다.
북쪽 경계는 일팔성인 봉성현, 팔곤성인 관수진이다. (단 팔곤성이 곧 곤팔성으로서 현재의 봉황산성일 수 있다. 백제의 팔곤성이 고구려 곤팔성을 거쳐 일팔성, 일면성으로 변천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북쪽 경계는 수암현으로서 당시 약모로성(若慕盧城)이다. 발해 약홀주(若忽州)로 추정되는 곳이다.
386년 말갈이 넘은 백제 관미령은 북청군(北靑郡)이며 390년에 말갈군이 함락시킨 적현성은 훨씬 남쪽의 고원군(高原郡)이며 이곳이 고구려말갈과의 동쪽 경계이다.
신묘년 391년 왜국이 백제와 신라를 복속시켰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왜왕은 백제왕에 아들을 세우고 돌아간 침류왕이었고 동생인 진사왕을 백제왕에서 폐하고 침류왕 자신의 아들인 아신왕을 세움으로서 백제가 왜국에 복속했다는 기록이 가능하다. 아신왕의 관미성 공격은 왜군을 동원하였으므로 고구려는 백제가 왜국과 결탁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영락6년 396년에 고구려군은 백제를 토벌하여 먼저 백제 58성을 쳐서 빼앗았다.
앞에서 본 단동시 수암, 봉성, 관전 등에서 전쟁을 시작하여 황해도 사리원까지 진격해 내려왔다. 이 도중에 고구려군이 이미 백제 왕성인 평양 안학궁을 점령하였으나, 백제왕은 탈출하여 항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굴욕적으로 강화하였다.
3절. <광개토왕 비문>의 백제 지명(丙申年 百濟征伐)
396년에 아신왕(阿莘王)은 왜국에 태자 전지(腆支)를 인질로 보냈다고 하는데 왜국왕으로부터 군대를 얻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해에 광개토왕(廣開土王)의 고구려군은 백제를 크게 정벌하였으나 [삼국사기]<백제본기>나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아무런 기록이 없다.
여기에 실린 광개토왕(廣開土王)의 공취 성들이 백제의 성인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의 전설에 봉황성은 영락태왕의 백팔성의 하나라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고려하여야 한다. [만주지리풍속지]에서 봉황산성은 “영락대왕의 백팔성의 하나”이라는 기록이 있다. 영락대왕은 바로 광개토왕(廣開土王)이며 광개토왕은 위 기록에서 백제의 오십팔성을 공취하였다. 반면에 백팔성은 <광개토왕비문>에서 광개토왕이 처음 공격한 일팔성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즉 고대의 일팔성이 백팔성으로, 다시 백팔성의 하나로 와전되어 전해진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정벌한 백제 58성에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을 첫 번째로 포함시켜야 한다.
1번 일팔성(壹八城)은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鳳凰山城)으로 추정한다. 현재는 일면성(一面城)이라고도 한다. 성둘레는 30여리에 이르는 대성이다.<지도 4 참조>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쌓은 관방의 최북단인 팔곤성(八坤城)과 관련하여 그 서쪽의 봉황산성을 역시 관방성의 하나로서 일팔성으로 추정한다. 팔곤성은 팔하천(八河川)이라고도 부른 요동반도 단동시 애양현(靉陽縣) 관수진(灌水鎭)의 고대보산성(高臺堡山城)으로 추정된다. 곤은 관과 고대모음 아래아“”로서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백제 팔곤성을 고구려에서는 곤팔성이라고 고쳐불렀는데 역시 백제 관방인 팔일성도 일팔성으로 고쳐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백제 관방이나 국경에 팔(八)자가 들어가는 일이 많다. 따라서 일팔성은 봉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한다. 봉황성은 고구려 연개소문의 고향이라고도 전하는데 연개소문에 이르러 현재 규모로 커졌을 것이다.
2번 구모로성(臼模盧城)은 수암현 동북쪽 황화전(岫巖縣 黃花甸)의 노성구산성(老城溝山城)이다. 성둘레는 약 3리이다. 대양수(大洋水)의 동쪽 가지에 있는데, 동쪽 가지 계곡을 구곡(九谷)이라 하며 이는 구곡(舊谷)의 변형이다. 부근의 송수구산성(松樹溝山城)은 성둘레가 5리인데 고구려 때 쌓은 것으로 고려된다.
3번 약모로성(若模盧城)은 수암현 서남쪽 전영향(前營鄕) 마권자산성(馬圈子山城)으로 추정하며 성둘레는 1314M이다. 발해 문왕 때의 약홀주(若忽州)로 추정한다.
여기까지 3성은 압록강 북쪽에 있고 이후 성들은 압록강 남쪽에 있다.
4번 간궁리성(幹弓利城)은 의주시 동남쪽 20리에 있었던 전문령(箭門嶺)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간궁리성의 간궁(幹弓)을 뒤집으면 궁간(弓幹)이 되는데 평안북도 의주 동쪽 삼림(森林)에서는 활의 재료가 되는 궁간목(弓幹木)을 생산하였다. 궁간은 활대를 말하며 전문령의 전(箭)은 화살을 말하여 서로 유사점이 있다.
이 전문령고성은 의주 동남 20십리에 있던 토성으로서 백제 초기 토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성둘레는 무려 11600척(4000M)으로서 대성이며 62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전문령고성의 현재 위치는 의주시 동남쪽 송산동(松山洞), 대문리(大門里) 부근이 된다.
송산동은 금강산과 횡금산 사이에 위치하여 있는데 금강산(金剛山;524M)은 조선시대 송산(松山)이었다. 반면에 횡금산(橫琴山;407M)은 궁한산(弓韓山), 궁간산(弓幹山)으로부터 비롯된 이름으로 추정된다. 한편 궁간목은 청천강 이북에서 주로 생산된다.
간궁리 토성은 의주를 통할하던 백제 대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번 무명성([][][])은 모수성(牟水城)으로 추정하며 의주 서남쪽 백마산성(白馬山城)이다. 현재는 고구려성으로 분류되는데 백제가 먼저 쌓은 것이다. 백마산성은 토성(土城)으로서 내성 둘레가 2590M이고, 외성 둘레는 2430M인데 외성은 조선시대에 세웠다.
다음은 두비압령한(豆比鴨嶺韓)으로서 피현군(枇縣郡) 용골산성의 위치인데 고구려군은 모수(牟水; 三橋川)를 건너지 않고 동쪽으로 갔다.
6번 각미성(閣彌城)은 천마군(天馬郡) 각구봉(角拘峰) 남쪽 고영삭진(古寧朔鎭)으로 추정한다. 토성 유지(土城 遺地)가 있었다.
7번 모로성(牟盧城)은 천마군 식송진(植松鎭)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문곡산(門谷山) 아래인데 모로를 문곡으로 바꾼 것이 된다.
8번 미사성(彌沙城)은 천마군 서고성(西古城)터로 추정한다. 서고성은 승암산 아래인데 미사(彌沙)가 사미로 뒤바뀌었다. 사미(沙彌)는 20세 이하의 어린 남자 승(僧)을 의미하므로, 다시 현재의 승암산(僧巖山)으로 말이 바뀌었다.
9번 고사조성(古舍蔦城)은 선천군 동림성(東林城)으로 추정된다. 석축과 토축이 함께 있으며 그 둘레는 17560척이다. 고선주성(古宣州城)이었다. 사조가 축약되어 선주(宣州)로 되었다. 수묘인을 바친 사조성(舍蔦城)은 철산군(鐵山郡)으로 추정한다.
10번 아단성(阿旦城)은 선천군(宣川郡) 고읍성(古邑城)으로 추정한다. 선천군 고읍성은 1856척의 석성이다. 아래에 대원산(大圓山)이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아단성은 없고 아차성(阿且城)만 두 번 나온다. 책계왕이 고구려를 막기 위해 위례성, 사성 등과 함께 쌓았고,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끌려가서 죽은 곳이다. 고구려의 기록이 아단성이지만 본래가 백제 아차성의 오기(誤記)로 추정한다.
아단성과 함께 수묘인을 공출한 잡진성(雜珍城)은 선천군 검산성(劒山城)으로 추정된다.
11번 고리성(古利城)은 곽산군(郭山郡) 읍성이다. 곽산성, 또는 능한산성(凌漢山城)이라고도 하였다. 석성으로서 성둘레는 6913척이다. 곽산군(郭山郡)은 고려시대 장리현(長利縣)이었던 기록이 있다.
12번 무명성([]利城)은 어리성(於利城)으로 추정한다. 능한산성이 당어령(堂於嶺)에 있으므로 그 아래는 어리성으로 추정하였다. 정주군(定州郡) 서주리(西州里)에 위치한 성동산성(城洞山城)으로서 성둘레는 30000척에 달하는 토석성(土石城)이다.
13번 잡미성(雜彌城)은 정주군 남쪽 제석산(帝釋山)에 위치한 성둘레 7000척의 육지고성(育地古城)이다. 정주군 오산리(五山里)에 있으며 현재는 익주성(益州城)이라고 한다.
육지성이 익주성으로 변한 것이다. 이 산성은 고구려 때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백제 고성도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동쪽은 운전군(雲田郡) 봉두산성(鳳頭山城), 즉 구모객두성(句牟客頭)성인데 고구려군은 이를 지나지 않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14번 오리성(奧利城)은 구성군 오봉면 조양리 고성지(古城池)로 추정한다.
태천군을 흐르는 오지천천(烏知遷川)과 관련하여 해석한다. 즉 대장군 탁이 번한에서, 중국인 기자 번한을 피해 바다를 건너 이주하여 월지국을 세워 마한의 왕이 되었던 기록이 있으므로 오리성은 월지국과 관련되는 것이다.
구성군 남쪽 30리에 고성지(古城池)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본래의 월지국 오리성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위치는 오봉면 조양리이다.
구성군 기룡리(氣龍里)에 니성(泥城)이 있다. 그 부근 지명에 “어미 역(驛)”과 “엄교(嚴橋)” 등이 있는데 어머니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는 수묘인을 바친 오리성의 후신으로 추정한다. 즉 구성군 오봉면의 오리성이 기룡리에 옮겨져 새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의 방언이 오마니이다.
15번 구모성(勾牟城)은 구성군(龜城郡) 서부 리구산(犁邱山) 리구리(犁邱里)과 연관되어 현재의 구성읍 서쪽 3리에 있었다는 구성군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읍성은 12335척이며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구성군, 태천군, 정주군, 운전군, 운산군 일대는 마한(馬韓)이 성립하기 이전부터 환12국의 하나인 구모객두한국(句牟客頭韓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모는 일본말(백제어)로 구름이고 한자로 운(雲)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운전군(雲田郡), 운산군, 구성군이 된 것이다. 운전군내의 서쪽 목우산(牧牛山; 416M)은 구모산을 뒤집은 이름이다. 또한 수묘인을 공출한 구모객두성(句牟客頭城)은 운전군 가산리 봉두산성(鳳頭山城)으로 추정한다. 봉두산성은 석성이며 성둘레는 9067척이다.
구모객두는 환12국의 하나인 구모액국(句牟額國)의 후신으로 추정된다. 혹은 구모객두의 기록이 옳고 [단군세기]가 환12국의 이름을 옮겨적으면서 구모액국으로 기록하였을 수도 있다. 고구려군이 구성군으로 올라가서 구모객두성을 빗겨갔기 때문에 구모객두는 함락되지 않았고 나중에 항복하여 수묘인을 바치게 되었다. 구성군의 리구산, 리구리도 구모산, 모구산의 변형이다.
16번 고수야라성(古須耶羅城)은 대관군(大舘郡)의 읍성 위치에 있던 대삭주성(大朔州城)으로 추정된다. 성둘레는 4615척의 석성이었다. 초기 해석자들은 고수야라성이 많았고, 후기 해석자들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을 많이 주장하는데 수묘인 공출성에 고모야라성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성이다.
17번 무명성(頁[][])은 수묘인을 바친 수추성(須鄒城)으로 추정하며 대관군 수동면(水洞面) 용성리(龍城里) 위치로 추정된다. 첫 글자에 분명 혈(頁)자가 보이며, 수(須)자일 개연성이 높으므로 공출 기록이 있는 수추성으로 추정한다.
18번 무명성([][][])은 수묘인을 바친 농매성(農賣城)으로 추정한다. 태천군 서쪽에 농오리산성(籠吾里山城)이 남아 있는데 석축으로서 성둘레는 4369척이다.
19번 분이야라성(分而耶羅城)은 두 강역을 나누는 성으로 추정한다.
태천(泰川)의 동쪽, 퇴라산 고성(退羅山 古城)으로 추정한다. 성둘레는 6674척이다. 퇴라산은 지령산(地靈山;300M)로 바뀌었다.
20번 무명성([]성)은 탕성(湯城)으로 추정하며 창성군(昌城郡) 당아산성(當峩山城)으로 추정한다. 현재 우변만 보인다.
21번 무명성([][]城)은 박천군(博川郡) 박릉성(博陵城) 위치로 추정된다. 두노성(豆奴城)과 상대되는 팥노성(巴奴城)으로 추정한다.
수묘인을 바친 삼양성(彡壤城)은 영변군(寧邊郡) 고성면(古城面) 고성(古城)인 고무성(古撫城)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군은, 구룡강을 건너 삼양성, 윤노성, 관노성 등을 치지 않고, 청천강을 건너서 남행하였다.
22번 무명성([][][])은 우운봉 등이 나단성(那旦城)으로 해독하였다. 나단성은 나라의 끝 경계에 부쳐지는 이름이다. 기준의 금마마한의 북쪽 경계였거나 낙랑마한의 북쪽 경계였을 거승로 추정된다. 안주읍 고성은 석성으로서 6050척이었다.
23번 두노성(豆奴城)은 문덕군 대니면 마두산(馬豆山,536M)의 서쪽 일대로 고려한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에 주둔한 마읍산(馬邑山)도 이곳이다. 고려 때에 안술진(安戌鎭, 혹은 安仁鎭)이라고 쌓은 해변토성(海邊土城)의 위치로 보며, 당시에 성둘레가 2490척이다. 위치는 연호면 인흥리(燕湖面 仁興里)로 추정된다. 신라가 당나라와 싸워 이기고 건설한 패강진의 처음 위치도 본래 이곳으로 추정된다.
24번 비성(沸城)은 숙천군(肅川郡) 고읍성으로 추정한다. 성둘레는 4050척의 토성이다.
25번 무명성([]利城)은 비리성(比利城)으로 추정한다.
숙천군(肅川郡)의 접무봉(蝶舞峰 340M) 남쪽, 호전성(虎田城)이다. 숙천읍 동쪽 20리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호전성은 토성으로서 성둘레는 9710척이다.
비리는 피리로 읽어서 한자어로 호적(胡笛)으로 바뀌어 다시 호전성(虎田城)으로 바뀌었다. 호전성의 산봉우리는 역시 피리봉을 바꾼 호적봉에서 호접봉(胡蝶峰)이라고 바뀌어서 다시 오늘날의 접무봉(蝶舞峰)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현재의 접무봉과 접무봉 기슭 아래 호전성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말이지만 둘 다 한자어 호적(胡笛), 즉 우리말 피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면 관계가 있는 것이다.
26번 미추성(彌鄒城)은 평원군 영유현 위치의 태조산 남쪽 미두산성(米豆山城)으로 추정하였다. 미두산성은 토성으로서 둘레는 4380척이다.
둘레가 1820척이 되는 고소토성(古小土城)이 영유현 자리에 있었는데 온조(溫祚) 도래 당시의 미추홀이고, 미추산성은 비류의 후예들이 도래하여 지어진 산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산(泰祖山;281M)은 백제 태조 동명왕을 의미하는 것이다.
27번 야리성(也利城)은 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추정한다. 평성시 어중리(御重里)에 있다. 성둘레는 5KM이며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 대성이다.
내성이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내성이 백제 성으로 추정된다. 아리, 또는 야리는 다 알을 어원으로 하며 어머니를 의미한다. 미추성이 바라보이는 자모산성은 <백제본기>의 부아악(負兒岳)으로 추정하는데, 부아악의 뜻은 아이를 없은 자애로운 어머니 산이다.
28번 대산 한성(大山韓城)은 평성시 서쪽 청룡산(靑龍山,559M) 산성으로 추정한다. 청룡산성(靑龍山城)은 성둘레가 약 5KM의 석성이다. 청룡산성(靑龍山城)이 위치한 지명은 평성군 상차리(上次里)로서 상차리는 즉 윗 차례의 의미가 있는데 바로 온조(溫祚)의 하북 위례성(河北尉禮城)로 추정된다.
상차리의 또다른 이름은 오리동(오리洞)으로서 역시 위례의 흔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소서노가 세우고 비류가 물려받은 어하라(於瑕羅)로부터 독립하여 배를 타고 떠나온 온조가 미추성도 쌓고 뒤에 위례성(尉禮城)을 쌓았다. 즉 미추성, 자모성, 위례성은 모두 온조의 성이다.
그런데 [비문]에서 위례성을 대산 한성이라고 하였으므로 위례성, 즉 오늘날의 청룡산성(靑龍山城)은 대산 한성이라는 별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근초고왕의 수도였던 대성산성은 한산성이나 대시한성(大始漢城)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황해도 평산의 하남위례성은 대곡 한성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청룡산성(靑龍山城) 남쪽 은좌봉(殷座峰,377M)도 백제시조 온조봉(溫祖峰)이 본래의 어원으로 추정된다.
29번 소가성(掃加城)은 평성시 소사산(蘇射山, 354M)과 관련된 성으로 추정하는데 그 북쪽에 니성(泥城)이라는 성둘레 1250척의 작은 토성이 있었다.
30번 돈발성(敦拔城)은 한자를 풀어서 발이 족(足)으로 바뀌었다고 보면, 대성산성 북쪽의 대동군 자족면(紫足面)이 된다. 돈(敦)이 돈(豚), 시(豕), 시(柴), 자(紫)로 바뀌는 과정을 추정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대성산성 동북쪽 산사면에 대성산성과는 다른 토성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토성은 둘레가 5160척이라고 하였다.
이 토성의 위치가 바로 자족면(紫足面)이며, 백제가 쌓은 토성으로서 돈발성으로 추정된다. 즉 대성산성의 전신이다. 현재의 대성산성은 석축으로서 둘레는 9.2KM에 이른다. 평양성을 제외하면 가장 크다. 고구려 말기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대성산(264M) 아래에는 이미 단군 시대에 대시전(大始殿)을 건설한 기록이 [한단고기]에 있다.
31번은 오늘날의 평양 동쪽 안학궁(安鶴宮)이다. <비문>의 기록은 4자성으로서 남거한성(南居韓城), 백제국성(百殘國城), 또는 대시한성(大始韓城)으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근초고왕 이래 백제 수도인 한산성이다.
안학궁은 자체에 해자(垓字)를 파서 방어선을 가지고 있지만 사방으로 위성 체계가 이루어져서 동쪽에는 고방산성, 서쪽에는 청암동토성, 남쪽에는 청호동산성, 북쪽 대성산에는 돈발성이 있어서 안학궁이 보호되었으니 소위 오방성(五方城)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광개토왕 비문> 기록에서,---백제국성(其國城)은 이미 함락되었으나---, 백제왕이 도망하여 임시 수도, 즉 편국성(便國城, 城橫岳城)에서 계속 항전하였다고 추정된다.
고구려에서 평양성을 쌓을 때에도 한성(漢城)이라고 불렀다. 백제 한산성인 대성산성에서 서쪽으로 새로 평양성을 쌓고 고구려는 한성이라고 했던 것이다. 뒷날에 남평양이 되었다.
현재의 평양성은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획되어 건설되었는데 외성은 수나라 대의 양식을 따랐다고 하는 바, 광개토왕(廣開土王) 이후에 건설된 것이다. 내성, 북성은 조선시대 건설되었다고 한다.
32번 루매성(婁賣城)은 청암동 토성으로 추정한다. 노성(魯城)이라고도 하였다.
33번 산나성(散那城)은 고방산 산성(高坊山 山城)으로 추정한다. 성둘레는 4KM이다. 고방산 산성은 단군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성인지도 알 수 없다.
34번 []婁城은 백제 초기의 한산 책성이었던 청호동 산성(淸湖洞山城)으로 추정한다.
1981년에 안학궁 남쪽의 청호동 산성에서 대동강을 남쪽으로 건너는 목교(木橋)가 발굴되었는데 그 너비는 9M, 길이는 375M에 이른다. 북한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인들이 쌓았다고도 전하는 평양(남평양)의 다리가 이것이라고 비정하였다.
35번 세성(細城)은 평양시 삼석구역 손자산(孫子山, 356M) 남쪽 삼성리(三成里)로 추정한다. 고성은 알 수 없다.
36번 모루성(牟婁城)은 평성시(平城市) 한왕리(漢王里)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37번 우루성(亏婁城)은 첫자가 희미하지만 대개 우루성으로 해석한다.
우륵지(亏勒池)가 있던 평원군 노지면 대주리(大州里)로 추정한다. 우륵지는 거문고를 타는 가야인 우륵이 왔던 곳이 아니라 우루지(亏婁池)의 와전으로 추정된다. 우루지에 고성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38번 소적성(蘇赤城)은 증산군(甑山郡) 함종면(咸從面) 고읍성으로 추정한다. 석성이며 성둘레는 4334척이다. 산성도 있는데 역시 석축이며 2246척이다.
39번 연루성(燕婁城)은 조선시대에 연성(連城)이라고도 했던 용강군 황룡산성(黃龍山城)으로 추정한다.
황룡산성은 오석산(烏石山; 566M)을 중심으로 쌓은 성둘레 6620M의 대성인데 그 전신으로서 서쪽의 어을동 토성이 백제성으로 추정된다. 이 황룡산성의 이름은 황룡국과 아무 관련이 없다. 고구려 서쪽의 황룡성 이름이 여기에 느닷없이 부쳐질 수는 없으며 오로지 백제 연루성인데 조선시대 국사가들이 잘못 붙인 것이다. 그들은 고구려 안시성이라고도 했다. 황룡산성은 고구려성일 수도 있는데 그 서쪽의 어을동토성(於乙洞土城)은 성둘레 1212척의 토성으로서 평산군 신사비가 발견된 곳이다.
40번 석지리성(析支利城)은 용강군(龍岡郡) 삼화읍 고성(三和邑 古城)으로 추정한다.
토축이며 성둘레는 4630척이다.
41번 암문지성(巖門至城)은 평안남도 용강군 암성면(巖城面)이다. 암성리(巖城里)가 남아 있다. 고성은 알 수 없다.
42번 임성(林城)은 평안북도 염주군(鹽州郡) 성림성(城林城)으로 추정한다.
43번 무명성([][][])은 수묘인을 공출한 사조성(舍蔦城)으로 추정한다. 철산군(鐵山郡)이다. 철산군 고읍성이 아닌 고철주성(古鐵州城)은 철산븡 북쪽 35리에 있었으며 성둘레는 10500척이고 토축과 석축이 혼합되어 있다.
44번 무명성([][][])은 잡진성(雜珍城)으로 추정되며 그 위치는 선천군(宣川郡) 검산성(劒山城)이다.
45번 무명성([][][])은 객두성(客頭城)으로 추정되며 그 위치는 운전군(雲田郡) 봉두산성이다. 봉두산성(鳳頭山城)은 석성이며 성둘레는 9067척인데 신도현성이라고도 하였다.
환웅시대 환12국의 하나인 구모액국(句牟額國)의 후신으로 추정된다. 혹은 구모객두의 기록이 옳고 [단군세기]가 환12국의 이름을 옮겨적으면서 구모액국으로 기록하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자리에는 객두성으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군이 정주군에서 구성군으로 올라가서 구모객두성을 빗겨갔다.
46번 취추성(就鄒城)은 무학산(舞鶴山) 남쪽 강서군 고읍성으로 추정한다.
47번 무명성([][]城)은 취자성(就咨城)으로 추정한다. 추정되는 위치는 대동군(大同郡) 은적리(隱跡里)이다. 은적은 취자, 자취를 바꾼 흔적을 갈음하는 말이다.
취자성은 대보산(大寶山)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8번 고모루성(古牟婁城)은 모루성의 전신으로 추정하며 평양시 만경대구역 궁골동으로 추정한다.
49번 윤노성(閏奴城)은 윤(閏)이 운(雲)을 거쳐 영변군 북쪽 운산(雲山)으로 되었다. 운산의 백벽산성(白碧山城)으로 추정한다. 석성이며 1569척이다. 함흥의 백운산성과 구별하여 백벽산성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50번 관노성(貫奴城)은 현재의 운산읍에 있던 직동토성(直洞土城)으로 추정한다. 성둘레는 6099척이었다.
51번 삼양성(彡穰城)은 영변군 고성면고성(古城面古城)으로 추정되는데 고무성(古撫城)이라고도 하였다. 토성(土城)으로서 성둘레는 5947척이었다.
고무성은 모성(慕城)에서 비롯되며 서쪽 남산(南山)까지도 모한(慕韓) 즉 마한(馬韓)의 성지이다. 남산(南山)에 삼일신고(三一神誥)의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52번 무명성([][])은 미성(味城)으로 추정한다. 영변군 약산성(藥山城)으로 추정한다. 영변읍 고성은 철옹성으로서 4성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성둘레 1KM의 약산성(藥山城) 고성으로 추정한다. 영변은 밀운(密雲)성이라고도 하였었다.
53번 무명성([][][]羅城)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으로 추정한다.
개천읍 남쪽 고사산산성(姑射山山城)으로 추정되며 석축이고 성둘레는 36761척이다. 이는 고구려성으로 보기 어려운데 고구려는 방위적으로 여기에 성을 쌓을 이유가 없고 백제는 고구려를 막기 위해서 쌓아야 한다. 백제 북한산성으로도 추정된다.
54번 구천성(仇天城)은 순천시 은산(殷山)이다. 북쪽 천성산(天聖山)이 구천성(仇天城)이 된 것이다.
구천성은 은산의 고읍성으로 추정되는데 토성이며 성둘레는 5168척이고 우물 9개와 연못 3개가 있었다. 천성산 꼭대기에 고구려,백제 시조 동명왕의 마적(馬跡)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온조왕의 마적과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초기 온조왕이 쌓은 구천책(狗川柵)도 이곳이다.
그런데 이 정벌전에서 광개토왕(廣開土王)은 58성을 먼저 취했다고 하였는데 위에 소개된 것은 54성에 그치고 있다. 즉 4성이 기록되지 않았다. 이 4성은 대동강 남쪽이었는데 아신왕이 곧 수복하여서, 장수왕 3년에는 고구려성이 아니었으므로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횡악성(橫岳城)으로 가는 길은 사성(蛇城), 홀골성(忽骨城) 등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기록은 있었어도 해독할 수 없는 5번, 12번, 17번, 18번, 20번, 21번, 22번, 31번 ,34번, 43번, 44번, 45번, 47번, 52번, 53번 무명성 등의 숙제가 남아 있다.
즉 15성의 이름이 모호하고 5성은 기록되지 않았으니, 합쳐서 20성의 이름이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숙제를 풀기 위해 광개토왕릉에 수묘인을 보낸 한예국의 여러성 이름과 앞에서 밝혀낸 정벌 기록성과 서로 일치하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를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광개토왕릉 수묘인 공출은 백제의 다음 36성에서 있었다.
1)한예 사수성(韓穢 沙水城) 2)모루성(牟婁城) 3)두비압령한(豆比鴨嶺韓) 4)구모객두(句牟客頭) 5)구저한(求底韓) 6)사조성한예(舍蔦城韓穢) 7)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8)막고성(莫古城) 9)객현한(客賢韓) 10)아단성(阿旦城) 11)잡진성(雜珍城) 12)파노성한(巴奴城韓) 13)구모로성(臼模盧城) 14)약모로성(若模盧城) 15)모수성(牟水城) 16)간궁리성(幹弓利城) 17)미추성(彌鄒城) 18)야리성(也利城) 19)두노성(豆奴城) 20)오리성(奧利城) 21)수추성(須鄒城) 22)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 23)대산한성(大山韓城) 24)농매성(農賣城) 25)윤노성(閏奴城) 26)고모루성(古牟婁城) 27)탕성(湯城) 28)미성(味城) 29)취자성(就咨城) 30)삼양성(彡穰城) 31)산나성(散那城) 32)나단성(那旦城) 33)구모성(勾牟城) 34)어리성(於利城) 35)비리성(比利城) 36)세성(細城)
여기서 16성은 이미 밝혀진 53성의 기록 중에 있으며, 다음의 20성만 기록에 아예 없거나 기록이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중 위치가 한반도로서 다음의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유추되는 것이 11성이다.
1)모수성(牟水城); 의주시 백마산성 =5번 무명성
2)어리성(於利城); 정주군 서주리 고성 =12번 무명성
3)수추성(須鄒城); 대관군 수동면 용성 =17번 무명성
4)농매성(農賣城); 태천군 농오리산성 =18번 무명성
5)탕성(湯城); 창성군 당아산성 =20번 무명성
6)파노성한(巴奴城韓); 박천군 박릉성 =21번 무명성
7)나단성(那旦城); 안주 고성 =22번 무명성
8)남거한성(南居韓城);안학궁 =31번 무명성
9) 사조성(舍蔦城); 철산군 고철주성 =43번 무명성
10) 잡진성(雜珍城); 선천군 검산성 =44번 무명성
11) 구모객두(句牟客頭); 운전현 봉두산성 =45번 무명성
남아있는 무명성은 34>47>52>53>번 무명성 3성인데 이중에 53번은 라(羅)로 끝나므로 6자의 빈 자리의 짝을 이루기 위해 외자성인 미성을 대입한다.
12)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영변군 고무성 =53번 무명성
13) 미성(味城); 개천군 장환성? =52번 무명성
34번 무영성은 “[]루성”이라서 남아있는 어떤 성이름도 들어갈 수 없다.
한편 46번 취추성에 이어지는 47번 무명성은 취자성(就咨城)일 것으로 추정한다.
나머지 수묘인 공출성들에서도 대략적인 위치를 비정하면 다음과 같다.
14) 두비압령한(豆比鴨嶺韓); 피현 용골산성
두비압령한은 천두산과 압록강 사이로 보면 피현군이 된다. 피현의 용골산성이나 걸망성 등은 고구려의 성이라서 당시 기록에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광개토왕 당시는 단지 대부락으로서 공출했었던 것이다.
15)객현한(客賢韓)은 계관산(鷄冠山)이 있는 와방점시(瓦房店市) 안파진(安波鎭), 험탕진(險湯鎭) 부근으로 추정한다. 환12국의 하나이다. 쌍탑진(雙塔鎭) 남쪽 토성자(土城子)로 고려한다.
396년이 아니라 391년의 공취성이다. 객현한은 계산현처럼 발음된다.
16)막고성(莫古城)
[한서지리지] 낙랑군 전막현으로 추정한다. 요동반도 장하시(庄河市) 선성산성(旋城山城)으로 추정된다. 둘레는 1300M이다.
여기가 광개토왕이 391년에 비려 정벌을 마치고 회군(回軍), 즉 선가(旋駕)한 곳이라서 선성산성이 되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따라서 막고성은 391년의 정벌성이기 때문에 396년의 58성 기록에는 없을 수 있다.
17) 구저한(求底韓)은 발음이 기저(旗底)와 비슷하므로 기간저(旗杆底)로도 기록된 와방점시로 추정한다. 간(杆)은 구저한의 한(韓)과 통용되는 것이다.
19) 한예 사수성(韓穢 沙水城)은 요동반도 남동해안 벽류하(碧流河) 하구의 성자단(城子旦)으로 추정된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군은 본계소시 부근에서 출정하여, 봉성현을 치고 수암현을 친 다음에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와 평안남도를 쳐내려가서 대동강을 경계로 진격을 멈추었다. 이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정복 전쟁의 결과로 백제는 대동강 이북땅을 고구려에 내주었다.
아신왕은 396년 7월 대동강 한수 남쪽에서 열병하였는데 광개토왕의 정벌 이후로 추정된다. 또한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아신왕은 397년 한산의 북책까지 올라가다가 돌아왔는데 이는 대동강을 따라서 한산안학궁의 동북쪽에 있는 순천시 은산(殷山)까지 올라갔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개로왕이 사성을 수리하고 사성의 북쪽 숭산(崇山)까지 방죽을 쌓았는데 이 숭산도 순천시 은산의 숭화산이다. 즉 당시 고구려 백제의 경계가 남쪽으로 대동강이며 동북쪽으로도 대동강의 가지인 영원군 성룡강(成龍江)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수왕(長壽王)은 바로 평양까지 와서 사냥을 즐겼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장수왕 2년 사천(蛇川; 대동강)의 나들이 기록이다.
4절. 경자년 일본 정벌
1. 왜구의 신라 침공
영락9년에서 10년까지의 [삼국사기] 기록은 연나라의 모용희가 고구려 신성, 남소성을 친 기록밖에 없는데 <광개토왕 비문> 기록에는 일본 원정 기록이 있다.
영락9년 399년에 백제가 서약을 배반하고 왜적과 사통하였다.
태왕이 (수도 동황성에서) 하평양에 가서 신라의 사자를 만나니 사자가 태왕께 말씀올리기를
“왜인들이 신라에 가득하여 신라의 영지를 파궤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태왕의 신하이니 태왕의 적절한 조치를 기다립니다.”하였다.
태왕은 신라가 충성함을 치하하고 태왕의 사자를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九年 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 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其國忠誠[]遣使還告以[][]
당시의 하평양성은 오늘날의 대동강 평양성으로서 [한단고기]에서는 신라와 백제 왕을 장수왕이 남평양성으로 불러서 국경을 정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상평양성은 광개토왕의 평양성으로서 집안성이 된다.
2. 광개토왕 비문의 일본 정벌
영락10년 400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종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 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국의 발성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이후 고구려 본토 출신 안라인 사람으로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 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태왕 위로)[][][]其國忠誠[]遣使還告以[][]
十年庚子 敎遣 步騎五萬往 求 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 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
[][][][][] [][][][][] [][][][][][][][]
盡[](=更)隋來 安羅人 戌兵[][][][][]其[][][][][][][]言
[][][][][] [][][][][] [][][][][] [][][][][][]辭[][][][][]
[][][][][][][]潰 [][][][]安羅人戌兵
여기서 [한단고기]의 기록을 보면 이 영락 10년, 서기 400년 경자년에 광개토왕은 일본 정벌을 단행하였다. 다음은 [한단고기]에서 일본에 관한 두 부분의 기록이다.
임나는 대마도의 서북계에 있다. 북으로 바다가 있고 수도는 국미성이라고 한다. 동서에 각기 부락이 있어 혹은 조공하고 혹은 반역하였다. 뒤에 대마도의 두 섬은 임나에 복속하였다. 이후로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예부터 구주와 대마는 삼한(三韓)이 나누어 다스리던 곳으로 왜인들이 거주하지 않았다. 임나도 셋으로 나뉘어 삼가라 라고 하였는데 가라는 수도를 말한다.
이후 삼가라의 우두머리들이 서로 싸우니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는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했다.
영락 10년에 삼가라는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이후 바다와 육지의 왜인들은 임나가 다스리는 십국에 속하여 연정을 하였으며 고구려의 직할이었으니 고구려 제왕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任那者本在對馬島西北界北沮海有治曰國尾城 東西各有墟落或貢或叛
後對馬二島遂爲 任那所制 故自是任那乃對馬全稱也
自古 仇州對馬 乃三韓分治之地也本非倭人世居地 任那又分爲三加羅 所謂 加羅者 首邑之稱也
自是 三汗相爭 世久不鮮 佐護加羅屬新羅,仁位加羅屬高句麗 鷄知加羅屬百濟是也
永樂十年 三加羅盡歸我 自是海陸諸倭 愁統於任那分治十國 號爲聯政 然直轄 於高句麗 非烈帝所命不得自專也
일본에는 이국 혹은 이세라는 나라가 있어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어서 일향국이라고도 하였다.
이후로 축자 동쪽은 왜에 속했고 동남쪽은 안라에 속했는데 안라는 고구려 본토의 홀본 사람들이다. 북에는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소속되었고 고구려에 조공하였다.
日本舊有伊國亦曰伊勢 與倭同隣 伊都國在筑紫亦卽日向國也
自是以東屬於倭 其南東屬於安羅本忽本本人也
北有阿蘇山 安羅 後入任那 與高句麗早己定親
세 기록에서 광개토왕(廣開土王) 때 경자년의 일본 정벌 기사를 확인할 수 있고, 또한 고구려 본토 출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살던 안라인(安羅人)들이 임나를 통제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일본서기]의 윤공천황과 그의 아들, 안강천황, 웅략천황을 가리킨다.
즉 고구려 후예인 안라인이 임나(任那)를 다스리고 임나는 일본을 십국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것이다.
임나(任那)가라는 대마도(對馬島)를 지칭한다. 그러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대마도와 구주(九州)와 한반도 남부 해안국을 포함하여 10국을 다스린 것이다. 축자(筑紫), 일향(日向), 다라(多羅) 등이다.
아소산(阿蘇山)을 경계로 북쪽에는 왜국(倭國; 百濟 侯國)이 남쪽에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성장한 안라국(安羅國)이 임나 10국의 하나로서 자리하였던 것이다. 임나 십국 중의 일국이 대마도 임나가라(인위가라)가 되며, 따라서 임나는 때때로 대마도를 가리키고 때로는 임나 10국이 있던 규슈(九州)와 한반도 남부를 말한다.
즉 고구려군은 대마도에 주둔하고 규슈에서는 안라국이 고구려를 대신하였다.
안라국이 본래 홀본인(忽本人)이라고 하였는데 홀본은 비류수가 있는 중국의 사평시 서쪽 쌍료현 땅이다.
이 홀본인들은 고구려인 협보(陜父)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에서 다파라국을 세웠다고 전한다. 다파라국 위치와 안라국의 위치는 같다.
소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존재는 틀림없는 사실로 추정된다. 개성부는 개성에 있고 한성부는 한성에 있듯이 일본부는 당연히 일본에 있는 것이고 임나일본부는 묶어서 고구려의 일본 통치 기구였다.
<비문>에 의하면 400년에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왜군을 추격하여 대마도를 점령하는데 이때 대마도에 고구려의 일본 통제를 위한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었으나 그 기간은 오래지 못할 것이다. 이 임나일본부 체제는 고구려의 직할체제였는데, 뒤에 이어지는 404년, 왜백제 연합군의 고구려 침공으로 인하여 일본 땅에 고구려가 직할 국가를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 고구려는 대신에 413년경에 위성국가를 성립시켜서 윤공천황(允恭天皇)을 내세워 대리 통치 체제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5절. 백제, 왜국 연합군의 고구려 침공
1. 비문의 백제, 왜국 연합군의 고구려 침공
영락14년 404년 갑진년에 이르러, 왜국이 반역하여 배를 타고 와서 대방땅을 침범하여 [][][][][], 석성 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十四年甲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率[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위 문장에서 평양성이 나오고 왕당군이 나오는 것은 적군이 평양성을 침범해와서 고구려 왕도수비군인 왕당군과 맞서 싸웠다는 것으로 추정이 된다.
<광개토왕 비문> 중의 대방계는 오늘날의 영구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대방군의 해안이라고 할 수 있는 열구현(列口縣)이 될 것이다. 또한 석성은 구이왕의 도성이었던 개주시 청석령산성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왜구 등이 침입한 대방계는 태자하 입구가 되고 태자하를 거슬러 집안 평양성을 공격하는 상륙 지점이 된다.
당시 백제 아신왕(阿莘王)은 왜국 응신왕(應神王)의 조카였으므로, 404년에 고구려 침략을 위하여 연합군을 편성하여 연선(連船)하였고 보인다.
따라서 연선 앞에는 위(爲)가 타당하고 연선 뒤에는 백제군(百殘軍)이 가능하며, 솔(率) 앞에는 왜적의 대장으로 왜장(倭將)이 들어가고 왜장이 수군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렀다는 뜻으로서 (倭將率水軍至平穰)이 타당하다.
뒤에는 왜군 선봉의 의미로서 왜구선(倭寇先)으로 추정한다. 이 기록에 백제군이 먼저 토멸되지 않은 것은 왜구가 선봉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왕의 수도 방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직할군 왕당(王幢)에 의해서 연합군은 허리가 잘리고 격퇴되었는데 무수히 많은 왜군이 죽었다는 기록이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전쟁에서 백제 아신왕이 참전하여 전사하였던지 백제는 전지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2. 정미년 3차 백제 정벌
영락17년 407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와 (수군을 보내어 백제를 징벌하였다. 육군과 수군이 협력하여) 격파하고 갑옷 일만개와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뺏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과 루성, []가성,[][][][][][], 나[]성 등을 쳤다.
十七年丁未 敎遣 步騎 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 鎖鉀 一萬餘 領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 []佳城,[][][][][][], 那[]城,
위 기록 중에 백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백제성인 사구성, 나단성 등으로 미루어 보아 백제 침공 기사가 된다. 합전은 왜국과 백제 연합군과의 싸움보다는 고구려 수군과 육군의 수륙 양동 작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앞에서 고구려군은 396년의 이차 백제 정벌을 통하여 대동강 이북의 백제 땅을 점유하였었다. 그러나 404년 백제 아신왕(阿莘王) 때에 집안 평양성 침공을 통하여 백제는 다시 압록강 유역까지의 백제 강토를 수복하였을 것이다.
이에 고구려군은 407년에 다시 정벌 군대를 일으켰으니, 앞서 2차 정벌전에서 점령했던 대동강 북부를 다시 뺏은 것이다.
이후 백제는 반격하지 못하다가 비유왕 말년에 이르러 다시 북진하여 평양한산성을 되찾고 개로왕은 청천강 상류에 청목책성을 설치하고 국세를 회복하다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에게 개로왕이 죽음을 당하고 황해도까지 빼앗겨 북백제(北百濟)는 멸망하였다.
그후 백제 동성왕과 무령왕에 의해 압록강까지 다시 수복하였다가 성왕(聖王) 7년에 다시 고구려 안장왕에게 황해도 예성강 앞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6절. 숙신 정벌과 동부여 정벌
1. 무술년 숙신 정벌
영락8년 398년에 원수를 보내어 숙신의 터전을 돌아보게 하였는데, 가태라곡과 남녀 삼백명의 포로를 얻어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숙신도 조공하고 고구려를 섬겼다.
八年戊戌 敎遣 偏師 觀 肅愼土谷
因偏抄得 莫[]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來朝貢[]事.
금나라가 상경을 두었던 하얼빈 아성에는 숙신고성이 있다고 전해오고 있는데 이 부근의 분릉수 부근을 가섭원이라고 부르며 동부여가 이주하여 살았었다. 또한 발해 때에는 길림시의 동단산, 서단산이 숙신고지였고 또한 영안현 동경성 부근에도 숙신성이 있었다.
그 이전에 관구검 기공비에서는 숙신남계가 집안(集安)현이었다.
또한 함경도에도 숙신고성이 남아있다. 이는 함흥 낙랑 문화를 의미할 수도 있다.
<비문>의 숙신토곡은은 흑룡강성 영안현의 동경성 부근으로, 막[]라(莫[]羅)는 모란강 지역, 가태라곡은 목단강 하류 가목사(佳木斯) 일대로 추정한다.
2. 경술년 동부여 정벌
영락20년 410년에 동부여가 본래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도중에 배반하여 조공하지 않으므로 태왕이 직접 정벌을 나가 여성에 이르렀더니 여성국의 해왕이 항복하므로 태왕은 용서하고 돌아왔다.
또한 고구려를 존경하여 관리를 보내어 항복한 자들이 있었으니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등이다. 이 원정에서 64성과 1400부락을 깨트렸다.
二十年庚戌 東夫餘 舊是 鄒牟王 屬民 中叛 不貢
王躬率 往討軍到餘城 而餘城國駭[][][][][][][][][]
王恩普[]於是旋還
又其 慕化 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椯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 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
동부여가 고구려의 속국이 된 것은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쳐서 대소왕을 살해한 이후이다. 압로의 지명은 압록강을 연상시키는데 지금의 길림시, 장춘시를 지나는 송화강도 압록강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
뒤에 사신을 보낸 여러 압로국들은 바로 이 압록강(今 松花江) 유역국가로 해석하며, 여성(餘城)은 훈춘시 삼가자진 비우성, 즉 부여성으로 추정한다.
7절. [광개토왕 비문] 전체 해석
옛적에 시조이신 추모왕이 고구려 나라를 열었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모후는 하백의 따님이셨다.
추모왕은 알에서 태어나 세상에 내려오시니 성덕이 높았다.
惟昔 始祖 鄒牟王之 創基也
出自 北夫餘 天帝之子 母 河伯女郞
剖卵 降世 生而 有聖[德]
추모왕은 (모후의 명을 받아 동부여를) 떠났다.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에 이르렀다.
추모왕은 나루터에서 말하였다.
“나는 황천의 아들이오,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으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배를 만들어 띄워라.”
자라가 듣고 즉시 갈대배 만들어 건너게 해주어 추모왕이 강물을 건넜다.
[][][][]命駕
巡行南下路 由夫餘奄利大水
王 臨津言曰 我是 皇天之子 母 河伯女郞 鄒牟王 爲我 連葭
浮鼈應聲 卽 爲連葭 浮鼈 然後 造渡
엄리대수(奄利大水)는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에 엄호수, 엄사수 등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개사수라고도 했는데 고대에는 개사수, 고구려 후기에는 엄리대수라 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광개토왕 비문>에 가장 신빙성을 두고 해석하면 엄리대수는 발음이 얀리, 즉 얄리수로서 얄루강이라는 압록강의 어원이다. 예전의 아리수, 압록하이던 오늘날의 동요하를 말한다.
[한단고기]<북부여기>에서는 유일하게 분릉수(岔凌水)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송화강의 지류로서 하얼빈, 쌍성의 남쪽이며 농안(農安)의 동쪽이다. 그러나 동부여가 가섭원 또는 분릉하에 세워졌다는 [한단고기]<가섭원부여기>에 의하면 가섭원의 중심이 분릉수이기 때문에 온당하지 않다.
반면에 <가섭원부여기>도 엄리대수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광개토왕 비문>에서 고주몽이 태어난 곳은 북부여로 기록하고 엄리대수는 부여 영역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즉 동부여에서 태어난 고주몽을 북부여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였으니 북부여와 동부여가 모호한 것이다.
이는 북부여가 두 번을 동천하였는데 첫 번째 고두막한의 졸본부여에 쫓겨서 동천한 가섭원(길림시, 농안)의 동부여는 그대로 북부여라고 부르고, 대무신왕에 의해 거의 멸국하여 훈춘으로 동천한 동부여를 장수왕 시대에 동부여로 규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주몽이 처음에 졸본부여를 계승하여 철법시에서 고구려왕이 된 것과 졸본부여에서 물러나와 쌍료현에서 구려를 세운 것을 구분하여 고려하면, 분릉수와 엄리대수가 각각 해당할 수 있는데 동부여를 도망쳐 나올 때는 서남진하여 분릉수를 건너고, 졸본부여를 떠나올 때는 동진하여 엄리대수를 건넌 것으로 고려할 수도 있다.
비류곡에 이르러 홀본의 서성, 산상에 성을 지어 도읍을 삼았다.
그러나 불락한 때에 황룡이 왕을 맞으러 내려왔다.
추모왕은 홀본 동쪽 산 위에서 용머리에 올라타고 승천하였다.
於沸流谷 忽本西城 山上而 建都 焉
不樂 世位 因遣 黃龍 來下 迎王
王於 忽本東岡 履龍首 昇天
추모왕이 정했던 세자 유리왕은 도덕정치로서 다스려 나라를 흥하게 하였다.
대무신왕은 뒤를 이어 더욱 번성하게 하였다.
顧命 世子 儒留王 以道 興治
大朱留王 紹乘基業
주류왕의 십칠세손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 호태왕은 18세에 즉위하여
연호를 영락이라 정했다.
태왕의 은택이 세상에 두루 미치고 그 위엄은 사해에 떨쳤고
악을 제거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고
업적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오곡이 풍족하였다.
태왕은 39세에 붕어하셔서 떠나시게 되었다.
414년 9월29일에 산릉을 완성하여 옮기시게 되었다.
왕릉위에 비석을 세워 태왕의 훈적을 새겨 두니 이를 후세에게 전하는 바 아래와 같다.
[傳]至 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 永樂
太王 恩澤[] 皇天 威武 橫被四海
掃除[][]庶寧
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三十有九 宴駕 棄國
以甲寅年 九月二十九日 乙酉, 遷就 山陵
於[](=陵)立碑 銘記 勳積 以示 後世 焉其詞曰
<광개토왕 비문>에서 대무신왕의 17세손, 즉 고구려 19대왕 광개토왕(廣開土王)은 二九세에 즉위하였다. 그런데 二九세는 29세가 아니고 18세이다. 흔히 하는 말로서 이팔(二八) 청춘이 16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서도 광개토왕은 18세에 즉위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광개토왕 비문>의 기록 방식도 십단위 숫자에서 중간의 십을 생략하지 않고 있으니 실제 29는 이십구, 혹은 이십유구로 표시하여야 맞다.
[호태왕]은 고유명사다. [신찬성씨록]에 호태왕이 2번 나오므로 고유명사임을 알수 있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을미년(395년)이 영락 5년, 병신년(396년)이 영락 6년이었다는 기록에 의하면 그의 즉위년도는 391년 신묘년이 된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그는 재위 22년에 붕어하였는데 겨울 10월이라고 하였다. 역시 <광개토왕 비문> 기록에서도 18세에 등극하여 39세에 붕어하였으므로 그의 재위 기간은 22년으로 일치한다.
그런데 그가 붕어한 39세가 되는 해는 412년이 된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는 광개토왕의 즉위년도가 392년으로, 붕어년도는 413년으로 각기 1년씩 뒤로 미루어져 있다. 이는 장수왕(長壽王)의 즉위년도까지 1년 늦추어 놓았고 그 이후 장수왕의 붕어년도부터 다시 맞는다. 이는 결국 장수왕의 재위가 1년 짧게 잡혔기 때문이다.
장수왕(長壽王)은 491년 붕어하였는데 이 해는 장수왕의 재위 79년이 아니고 재위 80년이 맞다. 이때는 장수왕의 세번째 연호(年號)였던 연가(延嘉) 19년인데 장수왕 62년째에 세워진 연호로서, 이를 61년째에 세워진 연호로 착각하면 재위 79년으로 잘못 기록할 수가 있다.
<광개토왕 비문> 기록에 의하면 414년이 되는 갑인년 9월29일에 광개토왕릉이 완성되었고 그날 천장(遷葬)하였다.
갑인년은 장수왕(長壽王) 즉위 3년이 되는 해이다. 414년 9월29일, 즉 갑인년 갑술월 을유일은 필경 음양오행에 의한 길일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408년에 만들어진 평양 고구려 유주자사 진묘 묵서에서 장지와 장례 날짜, 하관 시간을 고르는 당시의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영락5년 395년에 태왕은 비려국이 쉬지 않고 (침범하므로)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토벌을 나가, 부산, 부산을 돌아 염수 위에 있는 근거지를 깨트리고, 여섯 개의 대부락과 칠백 개의 마을을 쳐부수고 빼앗은 소와 말, 양들은 그 수를 셀 수가 없이 많았다.
태왕은 거기서 군사를 돌려 환국하시었다.
이때, 태왕은 [망]평도를 지나기 위해 동쪽으로 오는 길은, [유]성, 력성, 북풍성 등을 거쳤다. 대왕은 미리 사냥을 준비하여 국경도 둘러보시고 사냥도 하면서 돌아오셨다.
永樂五年 歲在 乙未 王 以稗麗 不息[侵犯] 躬率 往討
回富山 負山 至鹽水上 破其丘, 部落六, 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 旋駕 因過 [望]平道, 東來, [柳]城, 力城, 北豊
王備 獵游 觀土境 田獵而還
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국이어서 조공을 하여왔다.
그러나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신라와 백제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 백제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으니 5년 후 병신년에 광개토왕이 백제군사를 쳤다.
倭 以辛卯年 來渡海破 百殘[加羅]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 率水軍 討滅 殘國軍[][]
영락6년 396년에 태왕은 친히 백제를 토벌하여 먼저 1)일팔성, 2)구모로성, 3)약모로성, 4)간궁리성, 5)[모수성] 6)각미성, 7)모로성, 8)미사성, 9)고사조성, 10)아단성, 11)고리성, 12)[어]리성 13)잡미성, 14)오리성, 15)구모성, 16)고수야라성 17)[수추성] 18)[농매성] 19)분이야라성, 20)탕성, 21)[파노성] 22)[나단성], 23)두노성, 24)비성 25)비리성 26)미추성, 27)야리성, 28) 대산한성, 29)소가성, 30)돈발성, 31)[백제국성] 32)루매성, 33)산나성, 34)[]루성, 35)세성, 36)모루성, 37)우루성, 38)소적성, 39)연루성, 40)석지리성, 41)암문지성, 42)임성, 43)[사조성] 44)[잡진성] 45)[객두성] 46)취추성, 47)[취자]성 48)고모루성, 49)윤노성, 50)관노성, 51)삼양성, 52)[미성] 53)[고모야라성] 54)구천성 등을 쳐서 빼앗았다.
[][]以六年丙申 王躬 率水軍 討利 殘國軍
[][]首攻取 壹八城, 臼模盧城, 若模盧城, 幹弓利城, [牟水]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古舍蔦城, 阿旦城, 古利城, [於]利城, 雜彌城, 奧利城, 勾牟城, 古須耶羅城, [須鄒城] [農賣城], 分而耶羅城, 湯城, [巴奴城], [那旦城], 豆奴城, 沸[城], [比]利城, 彌鄒城, 也利城, 大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百殘國城], 婁賣城, 散那城, [州]婁城, 細城, 牟婁城, 亏婁城, 蘇赤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至城, 林城, [舍蔦城],[雜珍城],[客頭城], 就鄒城, [就咨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彡穰城, [味城],[古模耶]羅城, 仇天城,
고구려군이 이미 백제 왕성을 점령하였으나, 백제왕은 탈출하여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태왕이 진노하여 아리수를 건너고, 장수를 보내어 백제 임시수도인 성횡(악성)을 핍박하니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남녀 천명과 세포 천필을 태왕에게 바치고 백제왕은 이제부터 영원히 변방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제왕을 아량으로 용서하여 “앞서는 어리석었지만 차후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새기도록 하였다. 이때 백제의 오십팔 성과 칠백의 부락을 빼앗고 백제 장군인 백제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인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王旣破]其國城 殘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 城橫[岳城][百殘]便國城
而殘主因逼獻[上] 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영락8년 398년에 원수를 보내어 숙신의 터전을 돌아보게 하였는데, 가태라곡과 남녀 삼백명의 포로를 얻어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숙신도 조공하고 고구려를 섬겼다.
八年戊戌 敎遣 偏師 觀 肅愼土谷 因偏抄得 莫[]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來朝貢[]事.
영락9년 399년에 백제가 서약을 배반하고 왜적과 사통하였다.
태왕이 (수도 동황성에서) 하평양에 가서 신라의 사자를 만나니 사자가 태왕께 말씀올리기를
“왜인들이 신라에 가득하여 신라의 영지를 파궤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태왕의 신하이니 태왕의 적절한 조치를 기다립니다.”하였다.
태왕은 신라가 충성함을 치하하고 태왕의 사자를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 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其國忠誠[]遣使還告以[][]
영락10년 400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국의 발성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이후 고구려 본토 출신 안라인 사람으로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往 求 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 戌兵[]
(=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 [][][][][] [][][][][] [][][][][][][][]
盡[](=更)隋來 安羅人 戌兵[][][][][]其[][][][][][][]言[][][][][]
[][][][][] [][][][][] [][][][][][]辭[][][][][] [][][][][][][]潰
[][][][]安羅人戌兵
아직 신라왕이 직접 고구려 도성을 찾아와 태왕을 알현하지 않아 불러들였다. 국강상광개토경평호태왕 앞에 영원한 신하로서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다.
昔 新羅 寐錦 未有身來, [][][]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新羅 寐錦
[][]僕勾[][][][]朝貢
신라 매금은 문맥상으로 신라왕의 호칭이 된다. 석(昔)씨일 가능성이 있다.
<광개토왕 비문> 중에서 백제나 신라에는 왕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고 백잔주(百殘主)로 폄하하고 신라 매금으로 폄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록이 [한단고기]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기록에도 나온다.
신라의 매금과 백제 어하라와 남평양에서 만나서 조공의 양과 국경 수비군의 수를 정하였다.
又與 新羅 寐錦 百濟 於瑕羅 會于 南平壤 約定 納貢 戌兵之數.
백제왕을 어하라라고 부른 것은 고주몽이 소서노를 책립하여 부른 것이 최초 기록이다. 또한 중국의 [북사] 등에서도 백제는 자기들의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른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백제 어라하와 상대되는 신라 매금은 신라왕의 호칭인데 신라 자체의 왕호인 마립간의 변형이라고 추정한다. 반대로 당시 신라 왕호가 이사금이었는데 고구려가 매금이라 부른 이후에 마립간으로 변경하였을 수도 있다.
영락14년 404년 갑진년에 이르러, 왜국이 반역하여 배를 타고 와서 대방땅을 침범하여 [][][][][], 석성 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十四年甲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率[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영락17년 407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와 (수군을 보내어 백제를 징벌하였다. 육군과 수군이 협력하여) 격파하고 갑옷 일만개와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뺏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과 루성 나[]성 등을 다시 빼앗았다.
十七年丁未 敎遣 步騎 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 鎖鉀 一萬餘 領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 []佳城,[][][][][][], 那[]城,
영락20년 410년에 동부여가 본래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도중에 배반하여 조공하지 않으므로 태왕이 직접 정벌을 나가 여성에 이르렀더니 여성국의 해왕이 항복하므로 태왕은 용서하고 돌아왔다.
또한 고구려를 존경하여 관리를 보내어 항복한 자들이 있었으니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등이다. 이 원정에서 64성과 1400부락을 깨트렸다.
二十年庚戌 東夫餘 舊是 鄒牟王 屬民 中叛 不貢
王躬率 往討軍到餘城 而餘城國駭[][][][][][][][][]
王恩普[]於是旋還
又其 慕化 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木耑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
태왕의 묘를 지키는 수묘인가구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매구여민 국연2가 간연 3가, 동해매 국연3가 간연 5가, 돈성민 간연4가, 간성 간연1가, 비리성 간연2가, 평양성민 국연1가 간연10가, 배루인 국연1가 간연 43가, 양곡 간연2가, 안부련 간연22가, 개곡 간연3가, 신성 간연3가, 남소성 국연 1가,
守墓人烟戶, 賣句余民 國烟二 看烟三, 東海賈 國烟三 看烟五, 敦城民 四家爲看烟, 干城 一家爲看烟, 碑利城 二家爲國烟, 平穰城民 國烟一家 看烟十, [車]連 二家爲看烟, 俳蔞人國烟一 看烟四十三, 梁谷 二家爲看烟, []城 二家爲看烟, 安夫連 二十二家爲看烟, 改谷 三家爲看烟, 新城 三家爲看烟, 南蘇城 一家爲國烟.
새로온 수묘인은 다음과 같다. 한예사수성 국연1가 간연1가, 모루성 간연2가, 두비압령한 간연5가, 구모객두 간연2가, 구저한 간연1가, 사조성한예 국연3가 간연21가, 고모야라성 간연1가, 막고성 국연1가 간연3가, 객현한 간연1가, 아단성-잡진성 합쳐서 간연 10가, 파노성한 간연9가, 구모로성 간연4가, 약모로성 간연2가, 모수성 간연3가, 간궁리성 국연2가 간연3가, 미추성 국연1가 간연 7가, 야리성 간연3가, 두노성 국연1가 간연2가, 오리성 국연2가 간연8가, 수추성 국연2가 간연5가, 백제남거한 국연1가 간연5가, 대산 한성 간연6가, 농매성 국연1가 간연7가, 윤노성 국연1가 간연 22가, 고모루성 국연2가 간연 8가, 탕성 국연1가 간연8가, 미성 간연6가, 취자성 간연5가, 삼양성 간연24가, 산나성 국연1가, 나단성 간연1가, 구모성 간연1가, 어리성 간연8가, 비리성 간연3가, 세성 간연3가.
新來 韓穢沙水城 國烟一 看烟一, 牟婁城 二家爲看烟, 豆比鴨嶺韓 五家爲看烟, 句牟客頭 二家爲看烟, 求底韓 一家爲看烟, 舍蔦城韓穢 國烟三 看烟二十一, 古模耶羅城 一家爲看烟, 莫古城 國烟一 看烟三, 客賢韓 一家爲看烟, 阿旦城, 雜珍城 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 九家爲看烟, 臼模盧城 四家爲看烟, 若模盧城 二家爲看烟, 牟水城 三家爲看烟, 幹弓利城 國烟二 看烟三, 彌鄒城 國烟一 看烟[][][][]七, 也利城 三家爲看烟, 豆奴城 國烟一 看烟二, 奧利城 國烟二 看烟八, 須鄒城 國烟二 看烟五, 百殘南居韓 國烟一 看烟五, 大山韓城 六家爲看烟, 農賣城 國烟一 看烟七, 閏奴城 國烟一 看烟二十二, 古牟婁城 國烟二 看烟八, 湯城 國烟一 看烟八, 味城 六家爲看烟, 就咨城 五家爲看烟, 彡穰城 二十四家爲看烟, 散那城 一家爲國烟, 那旦城 一家爲看烟, 勾牟城 一家爲看烟, 於利城 八家爲看烟, 比利城 三家爲看烟, 細城 三家爲看烟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살아계실 제에 말씀을 내리시기를 “선조왕께서 단지 원근의 고구려구민으로서 묘를 지키고 가꾸게 하셨다. 나는 고구려 구민이 고생할 까 염려한다. 내가 죽은 후에 수묘인을 정할 때에는 내가 몸소 다닌 각 부락에서 다 오라고 하지 말고, 한예인들로 수묘를 하도록 준비하라.”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存時 敎言 祖王先王 但敎 取 遠近舊民 守墓 洒掃 吾慮 舊民 轉當 羸劣, 若 吾 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 吾躬巡所 略來 韓穢 令備 洒掃.
유언이 이와 같으니 오늘 이대로 하여서 한예 각성에 명령을 내려서 220가를 뽑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고구려식 제사법을 모를 것을 염려하여 고구려 구민 110가를 다시 뽑아 배치하니 수묘호는 국연이 30가요, 간연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이다.
言敎如此 是以如敎 令 取 韓穢 二百二十家
慮 其不知法 卽 復取 舊民 一百十家 合 新舊守墓戶 國烟三十 看烟三百 都合三百三十家
선조왕 이래로 왕릉 위에 석비를 세우지 않아서 수묘인 연호를 설치하여 관리하는데 착오가 있어 왔다.
따라서 국강상광개초경평안호태왕은 선조왕릉에 비석을 세우고 그 수묘인연호를 새겨 착오가 없도록 하고 수묘인 제도를 제도화 하였다.
이후로는 수묘인들이 논밭을 서로 팔고 사는 일이 다시 없어야 한다. 논밭이 많을 경우도 남는 것을 팔 수 없다. 법을 어기고 팔고사는 사람은 형벌에 처한다. 이러한 법에 따라서 왕릉을 지켜라.
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 差錯
唯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盡爲祖先王墓上立碑
銘其 烟戶 不令 差錯 又制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扌亶買 其有
違令賣者刑之買人 制令守墓之.
수묘인 연호(烟戶)는 고구려 땅에서 국연 10가와 간연 100가 도합 110가, 백제 땅에서는 국연 20가와 간연 200가, 도합 220가가 공출되었으며 합쳐서 국연 30가와 간연 300가이다.
연호(烟戶)라는 말뜻에 대하여 흔히 고대의 호구조사법(戶口調査法)으로 생각해 왔다. 굴뚝 위로 연기 나는 집 수를 세어 상주 인구를 계산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하지만 옛사람들을 그토록 단순하고 어리석은 사람들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 시대에도 발로 걸어다니면서 인구를 조사할 인력은 충분히 있었다. 즉 현대와 다른 것은 조사에 소요되는 시간 문제이지 제도가 문제일 수는 없는 것이다.
즉 고대의 생활과 현대의 생활의 차이는 풍습과, 과학적 문명의 이기를 다루는 생활 능력에서 찾아야 할 것이지 단순하게 고대인의 우매함과 현대인의 현명함에서 찾으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다. 따라서 비록 현대인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일지라도 고대인도 할 수 있는 작업을 가지고 고대인이기 때문에 결코 할 수 없는 작업으로 제한하는 사고는 지양되어야 마땅한 것인데 그 중에 하나가 호구 조사이다.
[한단고기] 북부여 해모수 편에서 연호법이 등장한다. 해모수는 즉위후 2년째인 계해년 3월16일에 하늘에 제사지내고 연호법을 세우고 오부족을 나누어 지키게 하며 병사들을 자급토록하여 외환을 방비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癸亥二年 是歲 三月十六日 祭天 設 烟戶法 分置 五加之兵 屯田 自給 以備不虞
여기서 3월 16일은 발해 시대에까지 이어진 우리 민족 고유의 제천의 날로서 가을, 겨울의 영고나 동맹과 대비되는 봄철의 제천 행사로 그 기원은 단군 왕검의 승천일과 관련이 있다. 10월 3일은 환웅의 신시 개천절이다.
또한 둔전을 두어 다섯 곳의 군사적 요충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고구려의 오부족 전통과 마찬가지로 단군 시대 이래로 나라의 강역을 오부로 나누어 통치하는 것은 한민족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천 행사 후에 연호법을 세웠다는 것은 결코 나라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호구법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앞에서 본 <광개토왕 비문>에서 수묘인 연호(守墓人 烟戶)와 관련지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연호법이란 신정일치(神政一致)의 나라에서, 하늘이나 조상, 성군의 제사를 하루도 끊이지 않기 위해서 신도(神都)나 혹은 신시(神市), 또는 신산(神山), 신묘(神墓) 등에 상주하여 특별히 제사만을 관리하는 집들을 설치하는 법으로서 고려되어 지는 것이다.
먼저 도착한 수묘인의 출신 지명은 아래와 같이 추정한다. 이들 성은 고구려의 구토(舊土)이며, 그중에 간성이 한반도의 강계일 때에 백제가 압록강 서안을 장악했어도 북쪽의 한반도 산간 지방은 본래 고구려 땅이었다고 추정된다.
1.매구여(賣句余民)는 길림의 매하구(梅河溝)로 추정한다.
2.동해가(東海賈)는 두만강 하류로 추정한다.
3.돈성(敦城)은 이세적의 표에서 신성주(新城州)라고 하였지만 이는 후대에 옮겨온 것이고 길림시 돈화현(敦化縣)으로 추정한다.
4.간성(干城)은 평안북도 간성군이다.
5.비리성(碑利城)은 여러 비리성이 있지만 무순시 부근으로 추정한다.
6.평양성(平穰城民)은 본계시로 추정한다.
7.[]련([]連)의 미해독 글자는 거(車)로 추정하며 요양시 대안평으로 추정한다.
8.배루인(俳蔞人)은 알 수 없다.
9.양곡(梁谷)은 강평현으로 추정한다.
10.[]성은 알 수 없다.
11.안부련(安夫連)은 안시성의 옛이름으로 추정된다. 해성의 영성자 산성이다.
12.개곡(改谷)은 알 수 없다.
13.신성(新城)은 창도현 팔면성(八面城)으로 추정한다.
14.남소성(南蘇城)은 쌍료현 나목사(那木斯)로 추정된다.
광개토왕이 빼앗은 백제 땅에서 온 수묘인, 즉 한예 여러성의 지명은 3절에 자세하다.
고구려 수도의 변천
1. 고주몽의 홀본서성 쌍료현 동명향
2. 고주몽의 홀본동강(부여성) 공주령시 회덕진
3. 유리왕의 국내위나암성 서풍현 양천진
4. 수성왕의 환도성 철령시 최진보 남성
5. 신대왕의 위나암성 서풍현 양천진
6. 산상왕의 환도성 철령시 최진보 북성
7. 동천왕의 평양성 환인현 오녀산성
8. 고국원왕의 동황성 집안시 산성
9. 장수왕의 평양성 요양시 동경릉(노양산)
10. 평원왕의 장안성 요양시 구성
11. 보장왕의 한성 평양시
1절. 장수왕 평양성 [원사지리지] 동령로(東寧路) 소개문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살았으나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훼손하니, 고구려는 동쪽으로 천도하여 압록수의 동남쪽으로 천여리를 옮겨갔고 여기는 예전의 평양이 아니다. 本 高麗 平壤城, 亦曰 長安城. 其王 高連 是居 平壤城, 唐征 高麗 拔平壤, 其國東徒, 在 鴨淥水之 東南 千餘里, 非 平壤之舊.” 위 기록에서 원나라 동령로는 대동강 평양에 설치되었는데, 그 대동강의 평양이 장수왕(長壽王) 이래로 고구려 왕이 살던 평양성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역사에서 평양에 최초로 살기 시작한 분은 동천왕인데, [원사]가 말하는 평양성은 장수왕(長壽王)이 최초로 살기 시작한 평양성으로서, 환인현 오녀산성이었던 동천왕의 평양성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가 평양성을 침범했고 그 평양성은 장수왕의 평양성이었던 것을 윗글에서 알 수 있다. 평원왕의 장안성이 비록 가까운 곳이나 윗글에 언급되자 않았다.
특히 위에 언급한 압록수 동남 1000여리도, 대요하로부터 대동강 평양성까지를 1000리로 볼 수 있다. 안동도호부가 있던 심양시 도의(道義)와 대동강 평양까지는 [신당서지리지]에서 800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시대는 당나라 시대보다도 리(里)의 거리가 짧았던 것을 [요사지리지]로서 알 수 있다. 대동강으로부터 서북으로 1000여리 떨어진 당시의 압록강은 오늘날의 대요하이다. [요사지리지] 동경요양부 서문에 다음 기록이 있다. “원위 태무 때에 장수왕(長壽王)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평양성에 보내었는 바, 바로 이곳 동경 요양부(요령성 전체를 말함)였다. 당나라 고종은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元魏 太武 遣使 至 其所 居 平壤城, 遼 東京 本此. 唐高宗 平高麗 於此 置 安東都護府.
위 문장에서 위(魏)나라에서 고구려에 사자가 파견되어 온 것은 장수왕(長壽王) 23년의 일이고, 그보다 8년전인 장수왕 15년, 서기 426년에 장수왕은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따라서 위나라 사자가 다녀간 장수왕(長壽王)의 평양성은 오늘날의 요동반도 중심인 요양성(遼 東京 本此) 가까이에 있었다는 기록인 것이다.
요양시 서쪽에 장수왕(長壽王)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데 고려방(高麗方)이라고 한다. 그들이 과연 고구려 왕실 계통인지는 우리나라 횡성 고씨(橫城 高氏; 寶臧王의 後孫)와의 상호비교를 통하여 거의 맞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수왕(長壽王) 후손들이 모여살게 된 계기는 요나라 풍습에서 볼 수 있다. 요나라는 왕이 죽으면 그 후손들에게 식읍을 주어 모여살면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즉 왕위를 계승한 장수왕의 장손인 문자왕을 제외한 장수왕의 아들들이 모여 산 곳이 오늘날의 고려방을 이룬 것이다. 물론 그들은 현재의 고려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현재의 고려방으로 강제 이주하였을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고 전한다. 이 고려방은 발해 현덕부의 장령현(長寧縣)이었는데 역시 장수왕과 관계되었을 수 있다. [주서(周書)]와 [북사(北史)]에서 고구려 평양성은 동서(東西)가 6리이고 패수(浿水)에 임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서 고구려 평양성의 서쪽 대보산(大寶山)에 영탑사(靈塔寺)가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평양성의 서쪽은 확실치 않으나, 대보산은 [요사지리지]에서 귀덕주 기록에 있는데 귀덕주는 바로 무순시(撫順市)로 비정되었다. [삼국유사]의 평양성 대보산도 시기적으로 현재의 평양성이 아니다. 물론 현재의 대동강 평양성의 서쪽에도 대보산이 있다. 이는 고구려가 642년에 대동강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가져간 이름이다.
헌편 [요사지리지] 초주 암연현 기록이다. “요주는 발해 초주였다. 동북으로 이백리 거리에 해주가 있다. 발해는 5현을 두었는데 초산, 초령, 사천, 첨산, 암연현 등이다. 요나라는 하나로 통합하여 암연현이라고 하였는데 고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에 있고 동쪽으로는 신라와 접했다. 耀州: 渤海 椒州. 古 五縣. 椒山, 貂嶺, 斯泉, 尖山, 巖淵. 統一縣. 巖淵縣. 東界 新羅, 故平壤城 在縣 西南.” 암연현은 암주성(岩州城) 혹은 연주산성(燕州山城)이라고 했던 요양시 동북방 60리 석성이다. 이 서남쪽에 장수왕이 도읍했던 고평양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장수왕의 평양성은 요양시 동경릉 위치다.
요양시 동북방 노양(魯陽)산 동경릉(평양 안학궁에도 노양산이 있다...한원에 노양산이 나온다.)
[수서]<우문술> 편에 기록된 전황에 따르면 우문술의 육군은 압록강(鴨淥江; 今 大遼河) 서쪽에 모였다가 동진하여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 30리 지점에 육박하였다. 수나라 30만 육군은 군량이 떨어져 평양성을 치지 못하고 후퇴하다가, 살수에서 을지문덕의 기습을 받아 궤멸하였다. 살아남은 기천명의 수나라군은 하루밤낮을 걸어 압록강을 건너 수양제가 기다리던 고구려 요동성, 즉 창무시에 이르렀다. 당시 평양성은 평원왕의 장안성이어야 하며, 살수는 현재의 혼하이다. 무순시 동쪽에 살이쑤(薩爾湖)도 있다. 살이(薩爾)는 두 글자이지만 우리말로 한단어인 “살”의 발음을 내는 글이다. 무순시 부근의 살수로부터 대요수를 건너 창무시 요동성까지는 100여리여서 하루밤낮에 뛰어갈 수도 있을 것이나, 기존의 학설에 의해 청천강에서 요양시까지 600여리를 하룻밤에 도망쳤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불가능한 것이다.
2절. 대동강 평양성은 고구려의 한성 고구려 남평양성은 현재 평양시에 있는 고구려성이다. 평양성 성벽에 새겨진 각자에 의하면 이 평양성의 고구려 이름은 한성(漢城)이었다. 평양성벽 각자는 일부 남아 있고 일부는 기록만 전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구려 남평양성이 고구려 한성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제1석부터 5석까지는 발견 순서이며 생성 순서가 아니다.
제1석(1766년 발견) 기축년 5월 28일 여기서 서쪽으로 11리는 소형(관직) 상부와 약모리가 만들었다. 己丑年五月二十八日 始役 西向 十一里 小兄 相夫 若侔利 造作
제2석(1855년) 기유년 3월21일에 여기서부터 아래로 내려가 동향으로 12리를 쌓았는데 물구소형(관직) 배수와 백두가 맡아 끝내었다. 己酉年三月二十一日 自此 下向 東十二里 物苟 小兄 俳須 百頭 作節矣
제3석(1855년) 기축년 3월21일에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내려가면서 내중 백두와 상위사 이장이 맡아 끝내었다. 己丑年三月二十一日 自此 下向[西][十]二里 內中 白頭 上位使 爾丈 作節矣
제5석(1964년) 괘루개부소형(관직) 가군은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상[]리까지 돌아 성벽을 []척 높이로 쌓아올렸다. 卦婁盖部 小兄 加群 自此 東廻 上[]里 []尺 治
5석은 평양 내성 정해문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이는 외성과의 경계로서 중앙문이다. 5석에는 간지가 없는데 앞줄에 있던 것이 망실되었다. 제4석(1913년) 병술 12월 중에 한성(漢城)이 함락되어 후부(지명) 소형(관직) 문달(이름)은 여기서 공사를 중단하고 서북쪽으로 물을 건너갔다. 丙戌十二月中 漢城下 後部小兄 文達 節 自此 西北行 涉之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4석이다. 4석은 내성의 대동강 강가 성벽 장경문에서 발견되었다. 성벽은 대동강을 따라서 동북과 서남 방향으로 이어졌고 서북쪽으로는 성벽을 쌓지 않았다. 이 4석에서 한성하(漢城下)는 고구려의 한성(漢城)인 평양성이 함락(下)된 기록으로 본다. 기존에는 한성 하후부(漢城下後部)라는 행정지명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전부, 후부, 상부, 하부 등은 있어도 하후부는 기록에 없다. 한성은 바로 비문이 발견된 오늘날의 평양성에 대한 당시의 고구려 이름이고 백제 한산성 지역이기도 한 것이다. 백제 한산성은 근초고왕의 한산성으로서 평양 동쪽의 안학궁이 보다 정확한 위치다. 고구려 말기의 삼경은 평양성(무순시), 국내성(요원시), 한성인데 그중의 한성이 오늘날의 대동강 평양성이다. 대동강의 평양 외성은 평원왕(平原王)이 수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여 전국적으로 성곽을 수축하던 시기인 586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426년에 장수왕(長壽王)이 대동강 평양에 천도하였다는 우리 국사는 희극적인 비극이다. 고구려의 한성, 즉 남평양성 천도는 언제였는지 명확한 기록이 없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642년에 있었던 연개소문의 반정 때에 영류왕(榮留王)이 송양(松壤)으로 도망쳤는데, 송양은 오늘날의 평양 동쪽 강동군의 고지명이다. 영류왕은 송양에서 조서를 내려 대신을 모아 연개소문에게 반격하려다가 실패하고 죽었다. 따라서 이 영류왕 시해 사건 전의 고구려 수도는 이미 오늘날의 평양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45년 당나라 침공 당시의 고구려 수도가 오늘날의 평양인데, 당시 안시성을 놔두고 오골성(烏骨城; 今 龍骨山城)으로 돌아 고구려 수도 평양을 치자고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645년 이전에 대동강 남평양으로 천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고구려의 천리장성 축조 사업 시작년도인 영류왕 14년(서기 631년)까지도 고구려의 수도는 장안성이었다. 왜냐하면 천리장성을 쌓는데 나라의 수도 동북쪽의 부여성(夫餘城; 今 彰武市=遼東城= 拂涅國城)에서 서남쪽의 바다까지 쌓고 있기 때문이다. 즉 천리장성이 당시 수도 장안성의 남쪽까지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제까지 추정해온 천산산맥을 중심으로 한 천리장성은 고구려 국토의 상당 부분을 바깥으로 하고 있으므로 잘못 비정된 것이다. 부여성은 장춘시에 있었고 천리장성 흔적도 발견되었다. 영류왕의 한성 남평양 천도는 642년으로 추정한다. 여기서 낙양의 천남생(泉男生) 묘지석과 천남산(泉男山) 묘지석에 주목한다. 천남생 묘지석에서 그의 출생지는 요동군 평양성이라고 하였다. 천남생의 아들 천헌성(泉獻誠)의 묘지석에서는 출생지는 소맥지향(小貊之鄕)이다. 천남산 묘지석에서는 668년 고구려 국성 함락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한성(漢城)을 지키지 않고-한성을 지킬 수 없으니- 맥궁과 고시를 가지고 와서 당(唐)에 바쳤다. 즉 당에 함락당한 평양성은 고구려 삼도성의 하나인 한성이었다.
3절. 고구려 수도의 변천(高句麗 首都 變遷) 고구려는 우리나라의 뿌리인 단군 조선을 이어서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만리장성 이북의 대륙을 통치했던 거대 국가로서 역사도 상당히 길었다. 고구려의 역사가 길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서는 700년의 역사이고 중국의 [신당서(新唐書)] 등에서는 900년의 역사 국가로 기술되어 있으므로 절대적인 통치기간이 단순히 산술적으로만 길었다는 뜻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보아서도 고구려와 국경을 맞댄 중국 대륙에서는 전한(前漢), 후한(後漢), 삼국시대, 진(晉), 동진(東晉) 등의 오호십육국(五湖十六國)시대, 수(隋)나라, 당(唐)나라 시대를 거치며 수십 왕조가 별똥별처럼 명멸하였는데, 그에 반하여 만리 장성 이북에 우뚝 선 고구려의 역사는 더욱 빛나는 것이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구려의 강역에 대하여 먼저 생각할 것은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700년 동안 고정된 국경선(현재의 랴오허강을 말함)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국경선의 변동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도대체가 몇백년 동안 한 나라의 국경이 고정 불변하였다는 것은 역사의 상식과 동떨어진 것이다. 역사는 흐르는 것이고 변하는 것인데, 고구려에 성군(聖君)이 나거나, 중국이 혼란하면 고구려의 국경은 만리장성 아래로도 내려가고 반대로 고구려에 발기(拔奇) 같은 역적이 반란을 일으켜 중국인을 내지로 끌어들이면 랴오허강까지 중국인이 북진하였던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니 고구려가 끝내 쇠국기에 접어들어 한반도까지 중국인이 진출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 역사의 시련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고구려 망국 시점을 기준으로 한 이제까지의 고구려 강역 연구나 수도 연구는 참으로 비참한 것이다. 우리측의 고구려 자료는 유실되고 대신 중국측의 왜곡된 자료로 채워진 것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국사 교과서를 통해서 배워 알고 있는 고구려의 수도는 아래와 같은데 믿을 것이 하나도 없다. 1. 고주몽의 졸본부: 위치 미상 (최근 환인현 오녀산성으로 추정하나 오류이다.) 2. 유리왕의 국내성, 환도성: 길림성 집안현 3. 장수왕의 평양성: 평안남도 평양
국사 교과서의 토대가 되었던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의거하여 고구려의 수도 이름을 고찰하고, 현재 우리나라와 북한, 중국 학계가 비정한 고구려 도성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1.고주몽의 비류수 졸본성: 최근에 요령성 환인 오녀산성 추정중 2.유리왕의 위나암성: 길림성 집안 3.산상왕의 환도성 길림성 집안 4.동천왕의 평양성 길림성 집안 5.고국원왕의 평양동황성 길림성 집안 6.장수왕의 평양성 대동강 평양 안학궁 7.평원왕의 장안성 대동강 평양성
[삼국사기]의 기록은 정사(正史)에 가깝지만 정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고구려의 정사가 될 수 있으려면 고구려의 땅에서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발해)가 고구려의 자료를 가지고 기술해야 고구려 정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고구려를 뒤이은 나라가 아니고 500년 이상을 건너 뛴 고려 시대에 고구려 땅의 한귀퉁이였던 변경 지방에서 고구려 역사를 서술하였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그 결과 고구려의 주요 지명이나 수도의 위치가 마치 달나라에서 관찰한 기록처럼 모호해진 것이다. 즉 고구려가 망한지 500년 뒤에 고구려 땅의 귀퉁이인, 한반도의 개성에서 쓰여진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한계인 것이다. 반면에 고구려의 중심 강역이었던 요동반도의 중심인 오늘날의 요양에 동경 요양부를 설치하고 나라를 경영했던 거란족의 요나라 기록은 [삼국사기]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어도 크게 다르다. 우선 [삼국지위지동이전]<예전(濊傳)>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무려 40세를 전한 역사국가로 적고 있다. 요나라도 이를 빼먹지 않았다. “동경 요양부(오늘날 북경의 동쪽에 있는 난하의 서쪽부터 요동 반도 전체와 길림성 일대 및 흑룡강 유역을 가리킴)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朝鮮之地)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석방하여 기자가 살던 곳인데 팔조(八條)의 가르침으로 예의를 숭상하고 농상(農商)을 장려하고, 대문을 닫지 않아도 도둑이 들지 않았다. 사십여세(四十餘世)를 전했다.” [요사지리지]는 놀랍게도 기자 조선을 사십여세를 전한 유구한 역사의 나라로 적고 있는데 발해가 단 12세를 전한 200여년의 국가인데 비하여 상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이 기자(箕子)는 결코 사십여세를 전하지 않았으니 단군 조선 시대에 한 변방인 번한국가에 망명해 왔다가 번한왕이 되어서 기준에 이르기까지 단 6세를 전했다는 것이다. 기자의 청동기 유물이 요령성 조양시 객좌현에서 발굴되는데 반가운 일이다. 번한의 수도가 바로 객좌현으로 비정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사지리지]가 말한 사십여세를 전한 본래의 기자조선은 [단기고사(檀奇古史)]가 전하는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를 가리키는데, [한단고기(桓檀古記)]<번한세가>에 나오는 후기 번한조선을 가리킨다.
아무튼 이러한 단군 시대의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 역사나 고구려 역사의 서두에서 단지 신인(神人) 왕검 한분의 신화(神話)로서 치부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단군 조선의 중심강역인 요동반도에서 고려의 중심인 개성이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그 실체와 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단군 조선의 중심강역을 차지한 요나라는 간략하게나마 그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단군세기]는 단군 시대 역사로서는 절대적인 기록이고, 고구려나 발해 역사를 통찰해 보는 데에서 필수적이다. 또한 최근에 북한에서 발굴한 강동군 대박산의 단군릉도 [한단고기]가 아니면 그 근거를 찾지 못할 것이다. [한단고기]에서는 5세 단군 구을(丘乙)이 16년을 재위하다가 서기전 2084년경 7월에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송양(松壤) 에 이르러 병을 얻어 돌아가시니 대박산(大博山)에 장사지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단군릉이 발굴된 대박산의 행정구역인 평안남도 강동현의 옛이름이 바로 송양군이다. [한단고기]에 대하여 아직까지 우리나라 역사가들의 정밀한 연구가 뒷받침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도 그 서술된 역사 중심 강역이 한반도가 아닌 만주 중심이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단고기]<고구려 본기>에서는 북부여(北夫餘)를 세운 해모수(解牟漱)가 고구려의 시조로 모셔져 있는데 이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차자(次子)인 고진(高辰)의 손자 불리지(弗離支)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해모수를 시조로 계산하는 고구려 역사가 당나라에서 계산한 900년 역사의 고구려가 되기도 한다. 고주몽의 장자인 유리왕(琉璃王)이 고구려를 잇고 유리왕의 이복 동생 온조(溫祚)가 따로 백제를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로, 해모수의 장자(長子) 모수리(慕漱離) 계열은 해부루에게 이어져 동부여가 되고 해모수의 차자 고진의 계열이 훗날 고주몽의 고구려가 된 것이다. 이 사이에 제 3의 인물인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동명국(東明國, 卒本夫餘)을 세우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 되어서 해모수의 북부여를 끊었다가 다시 고주몽에게 왕통을 넘기게 되었는데, 이 동명국의 수도가 졸본부여이고 고주몽은 고두막한의 손녀사위로서 졸본부여의 단군에 즉위하였지만 물러나 다시 구려국을 세워 눌현(訥見; 今 西豊縣)에 천도한 것이 추가된다. [한단고기]에만 있는 고두막한 동명왕에 대한 기록은 이제까지 모르던 부분인데, 고주몽의 시호가 역시 동명성왕이어서 고두막한 동명왕과 동일인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고두막한의 손녀 사위가 고주몽이므로 서로 다른 인물이다. 이제까지 살펴 본 모든 책들의 기록을 하나도 빼지 않고 종합하면 고구려 시대의 수도 변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고주몽의 홀본서성 쌍료현 동명향 2. 고주몽의 홀본동강(부여성) 공주령시 회덕진 3. 유리왕의 국내위나암성 서풍현 양천진 4. 수성왕의 환도성 철령시 최진보 남성 5. 신대왕의 위나암성 서풍현 양천진 6. 산상왕의 환도성 철령시 최진보 북성 7. 동천왕의 평양성 환인현 오녀산성 8. 고국원왕의 동황성 집안시 산성 10. 평원왕의 장안성 요양시 구성 11. 보장왕의 한성 평양시 고구려 도성이 있었던 고성이 미처 다 확인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서 고구려성을 연구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로 어느 위치에 어느 성이 있어야 한다는 가정을 세우고, 부근의 고성들을 탐사하면서 고구려성을 추려내어 비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이러한 작업은 중국에서도 현재도 계속되고 있으며, 결코 이제까지 밝혀진 고구려성이 전부가 아니다. 현재는 고구려 성의 절반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필자가 추정한 여러 고구려 도성에 대하여 절반 정도만 확실한 성터가 고증될 수 있는 형편이지만, 중국이 개방되기 전에는 어림없던 일로서 그나마도 다행한 것이다. 5절. 고구려 5부족(高句麗 五部族) 고구려에는 5부족이 있었는데,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이다. 처음에는 서부(西部)인 소노부(消奴部)가 고구려의 왕을 했다는데, 비류수에 도읍했던 고주몽 계를 의미한다. 계루부(桂婁部)는 내부 황부라고도 했는데 유리왕계로서 철령시 일대로 추정된다. 관노부(灌奴部)는 관수(灌水)와 관련되어야 하는데 [신당서]에서는 고구려 남부라고 하였고 절노부(絶奴部)는 고구려 북부라고 하였는데 북부여다. 6절, 고구려 천리장성
중국 장춘시의 장춘역사 소개 고적편에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早在公元618年,高句丽为了抵御唐朝的征讨,修建了北方千里长城。长城为土垒成,高三米,宽三米,北起农安,南至辽宁的营口,长达千余里,称为千里长城。在农安县靠山乡南部仍可看到这条长城。 618년 고구려는 당나라에 대항하여 천리장성을 완성했고 장성은 높이 3m 너비 3m 였으며 북으로는 농안현 고산향에서 시작하여 영구시까지 천여리에 이르렀다.(삼국유사에서는 부여성에서 남해까지)
7절. 당나라의 고구려 치주(安東都護府 高句麗 治州) 현재 신당서 지리지가 말한 고구려 23주를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충 어떤 곳에 있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옆에는 참고가 될 발해 지역을 표시하여 2장 발해의 땅에서 찾아보도록 한다. 9 도독부(都督府) 신성주(新城州) 법고현 사가자 팔호산성 요성주(遼城州) 신민시 공주둔 가물주(哥勿州) 부신시 북쪽 신개하 위락주(衛樂州) 요양시(遼陽市) 발해 장락현(常樂縣) 사리주(舍利州) 거소주(去素州) 복주(復州) 발해 남해부(南海府) 월희주(越喜州) 송원시 건안현(松原市 乾安縣) 발해 회주(懷州) 거단주(去旦州) 장하시 성자단(庄河市城子旦) 발해 남해부 건안주(建安州) 반금시 대구방자(盤錦市 大溝邦子) 14주. 남소주(南蘇州) 쌍료현 나목사(雙遼縣那木斯) 발해 정주(鄭州) 개모주(蓋牟州) 법고현 엽무대 발해 진주(辰州) 대나주(大那州) 창암주(倉巖州) 창도현 발해 환주(桓州) 기수현 마미주(磨米州) 심양시 신성자구(沈陽市新城子區) 발해 정주(定州) 모미현(慕美縣) 적리주(積利州) 단동시(丹東市) 발해 약홀주(若忽州) 여산주(黎山州) 금주시 여양(錦州市閭陽) 발해 탕주(湯州) 연진주(延津州) 백성시 통유현(白城市通楡縣) 발해 회원부 목저주(木底州) 법고현 섭무대(法庫縣葉武臺) 발해 목저주(木底州) 안시주(安市州) 철령시 환도성 발해 환주 제북주(諸北州) 금주시 의현(錦州市義縣) 발해 장령부 하주(河州) 식리주(識利州) 와방점시 득리사(瓦房店得利寺) 발해 남해부 불열주(拂涅州) 흑산현(黑山縣) 발해 흑주(黑州) 배한주(拜漢州) 평양(平壤)
***이세적의 표(表)에 나타난 압록강의 남북 성
1>압록강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11성 북부여성(北夫餘城--- 本 助利非書) 흑룡강 하얼빈 서북쪽 조원(肇原) ; 절성(節城---本 蕪子忽) ; 풍부성(豊夫城--本 肖巴忽) ; 신성주(新城州--本 仇次忽, 惑云 敦城) ; 법고현 사가자 팔호산성 조성(䄻城---本 波尸忽) ; 대두산성(大豆山城-- 本 非達忽) ; 요동성주(遼東城州---本 烏列忽) ; 신민시 공주둔 옥성주(屋城州) ; 공주령시 오악고성. 백석성(白石城) ; 창무시 다벌악주(多伐嶽州) ; 안시성(安市城 舊 安寸忽) ;철령시 환도성 2>압록강 이북의 항복한 11성 양암성(椋嵒城) ;서풍현 양천진(凉泉) 성자산산성 목저성(木底城) ; 수구성(藪口城) ; 남소성(南蘇城) ;쌍료현 나목사(那木斯) 감물주성(甘勿州城 本 甘勿伊忽) ; 능전곡성(凌田谷城) ; 심악성(心岳城--本 居尸[]) ; 국내주(國內 惑云 不耐, 尉那嵒城) ; 설부루성(屑夫婁城--本 肖利巴利忽) 오악성(杇岳城 本 骨尸[]) ; 자목성(橴木城) ; 객좌현 인근(수나라 12술)
3>압록강 이북의 도망한 7성 연성(鈆城--本 乃勿忽) ; 면악성(面岳城) ; 아악성(牙岳城 本 皆尸[]忽) ; 취악성(鷲岳城 本 甘彌忽) ; 적리성(積利城 本 赤里忽) ;단동시(丹東市) 목은성(木銀城 本 召尸忽) ; 이산성(ꝃ山城 本 加尸達忽) ;
4>압록강 이북의 정복 3성 혈성(穴城 本 甲忽) ;수암성? 은성(銀城 本 折忽) ;철령시 사성(似城 本 史忽) ; 8절. 고구려의 연호 추정(高句麗의 年號 推定) 고구려의 연호는 <광개토왕 비문>에 의해서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있다. 현재 북한이 연구하여 발표한 고구려의 연호는 아래와 같은데 필자는 [한단고기]를 추가하였다. 추정 연호의 뒤에는 각각의 근거를 제시하였다. 1. 북한이 주장하는 고구려 연호 시기 연호 이름; 근거 소수림왕 2년 372-374년 건시(建始); 추정 소수림왕 4년 374-377년 태령(太寧); 집안성벽 명와 광개토왕 1년 391-412년 영락(永樂); 광개토왕 비문 장수왕 2년 413-419년 연가(延嘉); 연가명 금동여래상 장수왕 39년 451-472년 연수(延壽); 서봉총 은합우 장수왕 60년 472-479년 건흥(建興); 건흥명 금동불상 문자명왕 17년 508-511년 백선(白亙); 곡산군 경(景)4년 불상 양원왕 14년 544-546년 태화(太和); 신포시 금동판 평원왕 7년 565-571년 영강(永康); 영강명 불상광배 2. 필자가 추정하는 고구려 연호 시기 연호이름; 근거 추모왕 31년 BC28-AD6년 다물(多勿); [한단고기] 태조대왕 1년 53-146년 융무(隆武); [한단고기] 고국양왕 1년 384-387년 태녕(太寧); 집안성벽 명와 광개토왕 1년 391-412년 영락(永樂); 광개토왕 비문 장수왕 1년 412-426년 건흥(建興); [한단고기],건흥명 불상(북한과 전후가 바뀜) 장수왕 40년 451-472년 연수(延壽); 서봉총 은합우(북한과 같음) 장수왕 61년 472-479년 연가(延嘉); 연가명 금동여래상 문자명왕 1년 480-518년 명치(明治); [한단고기] 안장왕 원년 518-529년 ??? 영강(永康); 영강 7년 세갑(甲) 불상광배 안원왕 529-544년 (영화(永和); 안악고분 영화 13년=543년) 건무(建武); 건무 16년 신천군 명전 양원왕 원년 544-546년 태화(太和); 신포시 태화 3년 금동판(북한과 같음) 평원왕 원년 559-596년 태덕(太德); [한단고기] 영양왕 원년 590-618년 홍무(弘武); [한단고기] 영류왕 원년 618-624년 영강(永康); 영강 7년 세갑(甲) 불상광배 (건무(建武); 건무 16년 신천군 명전) 626-642년 함화(咸和); 함화 10년 을미(乙未,635) 신천군 명전 보장왕 원년 642-668년 개화(開化); [한단고기] 신포시 금동판(新浦市 金銅版) 1988년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 절터에서 금동판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었다. 태화3년 세차 병인 2월 26일 갑술삭 太和三年 歲次 丙寅 二月 二十六日 甲戌朔 이는 546년 2월 26일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로 보면 양원왕 2년이다. 그러나 광개토왕 비문이 [삼국사기] 기록이 1년 늦은 것을 가르쳐 주었듯이 이 신포시 금동판은 양원왕의 즉위가 1년 빠른 544년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건흥명 금동불상 광배(建興銘 金銅佛像 光背) 충청북도 중원군 노은면에서 발견된 불상의 광배에 건흥이라는 연호가 기록되어 있다. 건흥5년 세재 병진 建興五年 歲在 丙辰 불제자 청신녀 상 부아암 佛弟子 淸信女 上 部兒庵 조 석가문상[] 造 釋迦文像[] 원 생생세세 치불문 願生生世世値佛聞 법일절 중생동 차원 法一切衆生同此願 불교가 한반도에 도입된 4세기 이후에 중국에는 건흥이라는 연호가 없었다. 또한 고구려나 백제 왕 즉위 5년의 병진년은 고구려 장수왕이 유일하다. 게다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즉위 연호가 건흥(建興)이라고 [한단고기]에 적혀 있기까지 하다. 따라서 광개토왕이 412년 10월에 돌아가셔서 장수왕은 그 해 412년에 즉위 연호를 세웠다는 것이 확실시되는 것이며, 이에 따르면 고구려 건흥 5년은 병진년 416년이 된다. 중원군에서는 <중원고구려비>도 발견되었다. 연수명 은합우(延壽銘 銀盒盂) 신라 서봉총에서 발굴된 은합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연수원년태세재신 삼월중 延壽元年 太歲在辛 三月中 태왕경조합우 삼근 太王 敬造合木于 三斤 연수원년태세재묘 삼월중 延壽元年 太歲在卯 三月中 태왕경조합우 용삼근육량 太王 敬造合木于 用三斤六兩 여기서 연수(延壽) 원년은 신묘년이다. 중국의 연수라는 연호는 신묘년이 없다. 본문 중의 태왕은 거의 고구려왕의 호칭이 틀림없으며 그것도 광개토왕 이후의 고구려 왕이다. 451년 신묘년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40년이다. 신라 눌지왕 35년이며 눌지왕은 458년에 붕어하였다. 눌지왕 34년에 신라와 고구려의 충돌 및 교류가 있었다. 장수왕(長壽王)은 412년 즉위하여 건흥(建興)으로 연호를 세웠지만, 장수왕 40년에 연수로 개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수왕 39년 신라가 고구려 변방의 장수를 죽여서 전면전의 위기가 있었는데 신라가 고구려에 사죄하여 위기를 넘겼다. 511년 신묘년은 고구려 문자왕 20년이자 신라 지증왕 12년인데 지증왕은 514년에 붕어하였다. 문자왕은 명치로 즉위 연호를 세웠다고 하나 20년에는 개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511년은 백제 무령왕 11년으로서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571년 신묘년은 고구려 평원왕 13년이자 신라 진흥왕 32년이며 진흥왕 연호 대창(大昌) 4년이고, 진흥왕은 576년에 붕어하였다. 그러나 진흥왕은 일찌기 549년에 고구려성 도살성을 빼앗아 서로 교류하기 어렵다. 631년은 고구려 영류왕 14년이고 신라 진평왕 53년으로 진평왕은 632년에 붕어하였는데 이 무렵, 612년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였고 신라는 그 틈에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며 양국간의 교류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연수원년은 장수왕(長壽王) 40년 신묘년으로 추정한다. 이 무렵에 고구려에서 장수왕을 위한 진상품으로 은합우를 만들었으나 신라왕에게 하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서봉총은 신라 눌지왕묘일 것이다. 연가명 금동여래상(延嘉銘 金銅如來像) 연가(延嘉)라는 연호를 기록한 금동여래상은 경상북도 의령군에서 출토되었으며 그 명문은 다음과 같다. 연가 7년 세재 기미 고려국 延嘉七年 歲在 己未 高麗國 낙량동사주 경 제자승 연 樂良 東寺主 敬 弟子僧 演 사도 40인 師徒 四十人 공조 현겁천불 류포 共造 賢劫千佛 流布 제29 인현의불 第二十九 因現義佛 차구 초영소 공양 此丘 招穎所 供養 이 연가(延嘉) 7년 기미년은 고구려에 불교가 도입되어 민간에 퍼진 서기 400년 이후로 고려하지만 고구려 왕 즉위 7년 중에는 기미년이 없다. 장수왕(長壽王) 68년, 479년 기미년으로 추정한다. 539년은 안원왕 9년인데 7년의 연호가 되기에는 부적절하다. 599년은 고구려 영양왕 때인데 [한단고기]<고구려 본기>에서 살수대첩을 홍무(弘武) 23년이라고 하였으니 영양왕의 연호는 홍무 이외에 없었다. 영강명 금동불상(永康銘 金銅佛像) 평양시 평천리에서 출토된 금동불상에 영강(永康)이라는 연호가 표시되어 있다. 영강7년 세차 갑 위망모 조 미륵존상 永康七年 歲次 甲 爲亡母 造 彌勒尊像 복원령망자신승각 자씨 삼회지초 福願令 亡者神 昇覺 玆氏三會之初 오무생념구경필과 제약유죄우원시소멸 悟无生念 究竟必果 堤若有罪 右願時 消滅 수희자 등동 차원 隨喜者 等同 此願 중국의 영강(永康) 연호는 서기 300년 단 일년뿐이었다. 북한에서는 영강을 고구려 연호로서 평원왕 7년으로 주장하나 [한단고기]에서 평원왕의 즉위연호는 태덕(太德)이다. 불교가 도입된 4세기 이후로 백제왕 혹은 고구려왕 즉위 7년에 갑해인 경우는 고구려 영류왕 7년이 있는데 624년 갑신년이다. 따라서 영류왕의 즉위 연호는 영강으로 추정한다.
함화 10년 명전 황해도 신천군에서 출토된 함화(咸和) 10년의 명전(銘磚)이 있다. 함화 10년 태세 을미 손씨조 咸和 十年 大歲乙未 孫氏造 중국 동진(東晋)의 성제 연호 함화 10년은 335년으로서 역시 을미년이다. 그러나 백제 땅에서는 칠지도나 근구수왕의 함령을 보면 379년까지도 태세를 기록하지 않았다. 395년은 아신왕(阿莘王) 5년이라 불가하고, 455년 개로왕 2년이라서 불가하다. 백제 무령왕이나 창왕 등은 연호가 없었던 사실이 무령왕묘와 사리불탑으로 증명된다. 따라서 함화는 고구려 연호로 추정되는데 515년은 백제 무령왕이 평안도까지 장악하여 고구려 연호 발굴이 불가능하다. 575년은 고구려 평원왕의 태덕(大德) 연호(559년 이후)를 이은 평원왕 후반부 연호로서 가능하지만 559년에 등극한 평원왕이 7년만인 566년에 별 이유없이 개원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 반면에 635년 을미년은 영류왕이 당나라 역서를 수입하여 고구려에 적용한 해가 626년이 되므로서, 역법으로 바꾸는 것을 계기로 개원하였을 수 있다. 따라서 함화는 영류왕의 즉위 연호 영강에 이어지는 후기 연호(626-642)로 추정한다. |
첫댓글 고구려에 관한 이토록 방대한 자료는 어디서 구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때문에 관심이 생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