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人生, Lifetimes)
최용현(수필가)
한 사람의 인생 행보가 현대사의 주요사건들을 관통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미국의 ‘포레스트 검프’(1994년)나 중국의 ‘인생’(1994년), 우리나라의 ‘국제시장’(2014년) 등이다. 세 편 모두 20세기 중반에 청,장년기를 보낸 남자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다루고 있다. 중국영화 ‘인생’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름처럼 복 많고 귀한 부잣집 아들 복귀(福貴, 갈우 扮)는 매일 도박장에 드나들며 가산을 탕진하더니, 드디어 남은 저택 한 채마저 도박장 주인에게 털리고 만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급사하고 임신한 아내(공리 扮)는 어린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린다. 복귀는 허름한 집을 얻어 몸져누운 홀어머니를 모셔다놓고 길거리에서 장사를 시작하지만 입에 풀칠도 못할 지경이다.
집 나갔던 아내가 1년 만에 아들을 낳아 돌아온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복귀는 도박장 주인을 찾아가서 전에 도박장에서 재미로 즐기던 그림자인형극 세트를 얻어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간다.
1940년대, 국공내전이 벌어지고, 복귀는 그림자인형극 공연을 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장개석의 국민군에 끌려간다. 7년 동안 국민군을 따라다니던 중 패색이 짙어지자 부대원들은 모두 도망가고, 복귀와 춘성(곽도 扮)은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군의 포로가 된다. 공산군에 입대한 복귀는 부대에서 그림자인형극 공연을 하면서 지내다가 전쟁이 끝나자 전역확인서를 받아 고향 집으로 돌아온다.
8년 만에 집에 오니 홀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내와 딸, 아들이 반겨주는데, 딸은 열병을 앓아 귀도 어둡고 벙어리가 되어있었다. 공산통치가 시작되고, 복귀의 저택을 가져간 도박장 주인은 반동분자로 몰려 총살당한다. 복귀는 도박으로 저택을 잃지 않았으면 내가 총살당했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1950년대, 대약진운동이 시작되면서 국민총동원령이 내려졌다. 부녀자와 어린아이도 철강생산증대운동에 동원되어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아이들은 너무 힘들어서 낮에 아무데서나 쓰러져 잠들곤 했다. 위원장이 학교를 방문하는 날, 복귀는 늦잠 자는 아들을 깨워서 학교에 보냈는데, 위원장이 몰고 온 지프차가 후진하다가 담장을 들이받는 바람에 담장 밑에서 잠든 아들이 깔려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복귀는 아들을 땅에 묻으며 ‘여태 편히 잠든 날이 없으니 이제 푹 자거라.’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아들의 무덤으로 조문(弔問) 온 위원장이 공교롭게도 전에 국민군에서 함께 살아남아 공산군의 포로가 된 전우(戰友) 춘성이었다. 복귀의 아내가 ‘여기 왜 왔느냐, 내 아들을 살려내라.’며 춘성을 쫓아낸다.
1960년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다. 과거의 잔재는 모두 없애버리라는 당의 지시가 내려지고, 복귀는 그림자인형극 소품을 모두 불태운다. 성년이 된 벙어리 딸은 절름발이인 노동 감독관에게 시집간다. 딸 결혼 축하차 춘성이 집으로 찾아온다. 그는 자본주의자로 몰려 곧 숙청당할 위기에 놓여있었다. 춘성이 ‘어제 아내가 자살했다. 나도 곧 죽을 것이다.’면서 전 재산을 담은 통장을 건넨다. 복귀는 돌아가는 춘성에게 통장을 돌려주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견뎌내길 바란다.’고 격려한다.
복귀의 딸이 병원에서 아들을 낳고, 출혈이 멈추지 않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지만, 처치(處置)해줄 의사가 없어서 숨지고 만다. 감옥에서 3일을 굶은 노(老) 의사를 사위가 급히 데려왔으나 복귀가 사온 왕찐빵 7개를 먹고 급체로 쓰러지는 바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문화대혁명 때 수많은 지식인들이 자본주의를 신봉한다는 비판을 받아 처형되었는데, 의사들은 모두 감옥에 가있었던 것이다.
1970년대, 에필로그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된 복귀 부부는 딸이 남기고 간 손자 만두와 함께 살아간다. 어느 날, 복귀 부부는 아들과 딸이 나란히 묻혀있는 묘지에 사위와 만두를 데리고 가서 만두의 커가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을 묘지 앞에 늘어놓는다.
집으로 돌아온 복귀는 만두에게 사준 병아리들을 비어있는 그림자인형극 소품 통에 넣어주며 ‘병아리들이 자라면 거위가 되고, 거위가 자라면 양이 되고, 양이 자라면 소가 되지. 소가 자랄 때면 만두 너도 다 컸을 거야. 그때쯤이면 너는 기차도 타고, 행복하게 살 거야.’ 하고 말한다. 복귀 부부가 집에서 사위, 만두와 함께 둘러앉아 오손도손 식사를 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러닝 타임 125분.
‘인생’은 ‘허삼관매혈기’로 우리에게 알려진 위화(余華)의 소설을 바탕으로 거장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소설의 원제목은 살아간다는 의미인 ‘활착(活着)’이다. 주인공 복귀가 굴곡진 현대사의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월남파병과 파독광부 등을 기억하는 우리에게도 눈물겨운 감동을 주고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그림자인형극은 줄에 매단 인형을 각본에 맞춰 손으로 조작하여 인형의 그림자를 스크린에 비추면서 육성과 연주(演奏)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공연예술이다. 그림자인형극은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고달픈 일상을 잊게 하거나,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 그 속에는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다. 인생은 희로애락이 담겨져 있는 그림자인형극에 다름 아니다.
영화 ‘인생’에는 현대 중국의 흑역사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중국 상영이 금지되었고, 장예모 감독과 주인공인 갈우와 공리에게는 5년간 영화 연출 및 출연 금지조치가 내려졌다. 그러나 이 영화가 1994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장예모) 및 남우주연상(갈우)을 수상하고, 골든 글로브와 영국아카데미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면서 예술성까지 평가받게 되자, 이 조치는 바로 해제되었다. 영화는 1990년대 말에 풀려서 비디오와 CD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