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감은 교장 승진이 코 앞일 것이다. 내가 태장고 교장 어려운 시절 3학년 부장을 맡아 힘든 일을 잘 해 주었고 다음 해에는 법정 주임이 없을 때 명목상 지역사회 부장을 맡겨 내 가외의 일인 중등교장협의회 회장일과 국어과 연구회 회장일, (다만 중등 교육장협의회 일은 맡기지 않았다.) 등을 맡겨 상당히 고생을 하였고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정남중 교감 시절에는 나에게 강의도 맡겨주고 동탄의 학교에서는 모의 사정관도 초빙해 주고 여하튼 많은 도움을 준 분이다. 게다가 자기 친구 제주도 분을 소개해 주어서 그 분의 펜션에 덕을 보기도 하였다. 국어과 회장 시절에는 총무로 참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래서 난 그 상가에 꼭 문상을 가야한다. 마침 가는 분이 있어 차편을 예약하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화를 보내기로 하였다. 인터넷은 참 편리해서 그 상가 부근의 꽃집에 조화를 주문하여 배달시켰다.
그래도 조문단은 5시 넘어 동탄에서 출발하기로 약속이 되어 실제로 6시 거의 다 되어 동탄을 출발 영광으로 향하였다. 3시간 정도 걸려 영광에 도착하니 입구에 장례식장이 3곳이 넘는다. 웬 장례식장이 이리 많나? 우리는 영광 종합병원 장례식장인데.
사실 이제는 상례가 장례식장이 생겨서 결혼식처럼 장례식장을 사용하고 있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장례식의 풍경은 달랐다. 아파트가 지금처럼 모두의 생활공간이 아닐 때, 초상이 나면 아파트에서 장례를 치렀다. 관이 곤돌라를 타고 내리긴 일쑤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은 보통 문상객 맞이 장례 장소였다. 아파트 집안은 초 만원. 보통은 이웃집도 빌려 주곤 했다. 그건 그래도 잠시의 현대. 내 어렸을 때의 장례식.
난 5살 때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5살의 기억이 온전할까만 난 그때 우리 아버지 돌아 가실 때의 기억의 편린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우리 형님들이 아버지 약을 지으러 약국을 다녔다든가 의원이 침을 놓으려 왔다든가 하는 기억은 없다. 하지만 새로 지은 집에 이사를 왔을 때 아버지가 업어 주셨던 기억, 게다가 아버지가 이제 돌아 가실 때 쯤 되어 내가 왜 그리 극성스럽게 울어 대었던지. 난 지금도 그때 그 어린 내가 왜 그리 극성맞게 울어 대었던지 기억한다. 어둠이 무서웠다. 그때 내 울음은 이 말과 함께였다. 불 꺼. 불꺼. 왜 그리 불을 끄라고 했을까? 불 켜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업고 컴컴한 울타리 쪽으로 데려 가셨다. 그러면 나는 울음을 그치고. 하도 울어 대니 병석에 누워, 지금 생각하면 돌아가시기 직전인 아버지가 나를 품에 꼭 안으셨다. 그러면 나는 영문 모를 두려움에 울음을 그쳤던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는 돌아 가셨다.
난 지금 아버지의 돌아가심을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때의 장례풍경을 말하는 것이다. 여하튼 5-6살 먹은 아이의 기억이 온전하겠는가. 여하튼 아버지의 장례와 다른 사람들의 장례풍경이 오버랩되어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다. 우선 초혼이다.
지붕에 올라 북향하여 왼손으로 동정을 잡고 망자의 이름을 3번 부른다. 서북 쪽으로 내려와 죽은 자의 가슴에 얹는다. 그런데 이 초혼의 기억은 아마도 우리 아버지의 장례 기억이 아니라 우리 동네 다른 사람의 기억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너무 어렸으므로.
그 다음의 수시 과정은 사실 아버지 때의 기억 보다는 어머니 돌아 가셨을 때의 과정이 더 생생하다. 수시는 눈,코,입,귀, 두발, 수염, 손발을 덮고 병풍으로 가린다.
그 외 소렴이나 입명정, 대렴, 입관, 성복례 등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상여 나가기 전날 대떠리인가 재떠리인가 하는 상여를 만들어 빈 상여로 상여 나가는 연습을 하던 장면은 선명하다. 내 어릴 적에는 화토불 피워 놓고 상여가 집안을 들락날락 하던 장면이 떠 오른다. 초상집의 화토불은 여러 기억이 겹친다. 내 어릴 적에야 당연히 커다란 나무를 베어다 화토불로 썼다. 그 서슬퍼렇게 단속하던 산림이지만 초상집은 좀 예외였다. 그래서 커다란 통나무가 밤새 초상집 마당을 밝혔다. 화토불 피울 나무를 베러 장정들이 나서기도 했다. 얼마 지나서는 그 화토불이 연탄을 쌓아 올린 연탄불로 바뀌었고 아파트가 보급되면서는 그마저 사라지고 이제는 예식장이 되었다.
초상 날 아침 발인제를 지낸다. 발인제 후에 오는 문상객들을 위한 절차도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그 당시 문상객들은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을 했다. 상제들의 머리맡은 짚이다. 그것은 자식을 낳을 때 짚 자리위에 낳아 주셨음을 잊지 않기 위함이란 의미란다. 상제들은 당연히 곡을 했고. 얼마나 심하면 곡비를 쓴 일도 있다니까. 상제는 지팡이를, 아버지상에는 대나무, 어머니 상에는 버드나무를 썼다. 그것도 허리에 잘 닿도록. 고통을 느끼게. 묘소를 만들고는 영정을 들고 꼭 같은 길로 곡을 하며 내려 온다. 지청을 만들고 시묘살이를 하지는 않지만 지청에 영정을 모시고 꼭 아침 저녁 메를 올리고 초하루, 보름에는 상식을 올린다. 그것을 삭망 차례라고 하여 소홀함이 없도록 한다. 초우, 재우, 삼우를 지내고 삼년상을 치를 때 만 일년이 되면 소상을 치른다. 그리고 만 2년이 되면 그 때는 3년상이다. 대상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지금으로 말하면 잔치 같은 의식을 치른다. 아 나는 여러 상례가 오버랩 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의 그 짙은 기침 소리와 나를 꼭 안아주시던 그 무서움, 그리고 돌아가시던 날 밤, 그토록 울어대던 내 울음 소리, 소상, 대상을 치르던 내 형들과 누님의 모습, 초혼의 광경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이제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상례의 절차들도. 하기야 내 죽음이 어디서 무슨 의미를 가지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