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歲時風俗 - 2 정월에서-유월까지
김 평 일
예로부터 우리 명절은 철 따라 끊임이 없었다. 정월 설날, 대보름, 3월 삼짓날, 4월 초파일, 5월 단오, 6월 유두, 7월 칠석, 8월 한가위, 9월 중양, 10월 상달, 11월 동지로 해서 달달이 명절이 이어졌다.
새해가 시작 되면서 첫 명절인 설날, 수표교 근처 청계천변 연날리기 줄끊기는 대보름에 이르러 끝마친다는 사실등 [설날]이야기는 전편에서 서술 했기에 음력 정월 14일에서 15일 사이의 밤에 절정을 이루는 정월의 또하나의 명절 대보름 풍속부터 이야기의 실머리를 시작 해야 겠다.
대보름날 인상적인 풍속으로는 [돌팔매 쌈]이 유명하다. 고구려때 만들어졌다는 돌팔매 쌈은 용맹성을 기르는 놀이로써 인명이 상하는 경우가 허다 했는데 이를 편전(便戰), 또는 석전(石戰)이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편전은 주로 고개, 또는 개울을 경계로 하는 동네와 동네사이의 집단 싸움으로 만리재(만리동 고개), 우수재(후암동 고개), 무당개울(동대문밖), 녹개천(마포)에서 특히 대대적으로 행하여 졌다고 한다. 왜놈 강점기에 금지되어 없어진 풍속이라고 하지만 필자가 어렸을적만 해도 지금의 중앙대학교가 올라 앉은 산등성이를 경계로 흑석동 1동 2동 사이에서 꼬마들의 격렬한 돌팔매 쌈에 참가 했다가 영광의 머리통 흉터와 추억을 갖고 있다. 이를 생각해 보면 공식적으로 일본인들이 금지 시킨지 40년 이상 지나도록 어린이들에게는 그 유풍이 이어졌었으니 편전 풍속에 대한 은근한 향수를 금할수 없다. 서울의 젊은이들이 요즘처럼 문약(文弱)하고 개인위주(個人爲主)의 모습으로 바뀐 요즘 세태에 편전 풍속을 부활시킨다면 얼마나 호응을 해올까.
또 하나의 특색있는 대보름 행사는 답교놀이 이다. 자기 나이만큼 다리를 밟고 거닐면 그 해 다리병이 나지 않는다는 답교놀이는 광통교(광교) 수표교등 서울의 중심지역의 다리에서 시작하여 전 서울 장안으로 번지고 살곶이 다리로 해서 한강 건너 몽촌 송파 돌마리(석촌동:백제 고분군이기에 돌이 많다)로 건너가 유명한 [송파답교놀이]로 발전 하였다.
다리를 밟기위해 인파가 몰리고 혼잡하니 남녀가 유별치 못하고 양반 상민이 뒤섞여 풍속이 문란할 것을 염려하여 시차를 두고 다리를 밟으니 양반은 14일밤, 상민은 15일밤, 아녀자는 16일 밤으로 나눠 다리를 밟았다. 이래서 답교놀이는 대보름 전후 3일간 벌어졌었고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농악대가 답교하는 세시놀이가 생겼으며 농악대의 서울 거리순회는 요즈음도 간혹 볼수 있는 풍속이다.
대보름에는 어둔밤에 맟춰 불놀이를 하였다. 동네사이에 횃불로 대진(對陣)하는 [횃불쌈]이 있었고, 50,60년대까지만 하여도 깡통에 불씨를 넣고 줄을 매달아 빙글 빙글 돌리는 불놀이가 볼만 했었다. 아녀자들은 바깥 출입이 어려워 시작 했다는,-- 이웃집 담넘어 얼굴 보이기 놀이인---, 널뛰기가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에 이르도록 널리 행해졌다. 아녀자들은 대보름 밤의 둥근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기도 하고, 달을 바라보고 심 호흡을 하므로써 달의 음기를 마셔서 양생(養生)의 법을 길렀다고 한다.
대보름밤의 풍속 중에 아직까지 잘 보존된 풍속은 먹는풍속,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귀가 밝으라고 술을 마시는데 이것을 [귀밝기술] 이라고 한다. 대보름밤 정확히 15일 새벽에 까먹는 부럼은 --일년 열두달 무사태평하고 부스럼하나 나지 맙소서--라고 주문(呪文)을 외고 깨어먹는 굳은 열매들로 날밤,은행,호도,잣 등이 그 것인데, 제 나이 만큼 깨물어야 한다. 요즘에는 땅콩이 중요 부럼으로 등장 했다. 조선시대에는 부럼을 깨물으면 이와 잇몸이 튼튼해진다고 믿었다. 치주조직을 적당히 자극 하므로써 잇몸이 튼튼 해 질수 있으므로 우리 치과계와 유관한 풍속 이다. 부럼을 먹을 뿐 아니라 아홉가지 나물에 오곡밥을 해먹는 풍속은 겨우내 운동부족으로 거북한 소화기 계통,특히 장을 청소하는 colon fiber로써 매우 좋은 섭생풍속이라고 할수 있다. 나물은 주로 무채,취,가지,호박오가리,마른고추닢,고사리,도라지,고구마순,시래기등등이며 오곡밥에는 찹쌀,팥,콩,차조,수수 등이며 대보름이 얼마 요즘, 대보름을 준비하는 주부들을 위해 경동시장에서 대대적으로 부럼, 나물, 오곡을 팔고 있다.
이외에도 사대부집에서는 종경도(從卿圖)놀이라는 벼슬놀이를 하였으며 마을 대항, 또는 남녀대항 줄 다리기도 있었다고 한다. 줄다리기에서 부녀자가 이기면 풍년이 드는데 장가안든 총각은 남자가 아닌 어린이 이므로 힘좋은 총각들이 부녀자쪽에서 잡아당기니 번번히 부녀자가 승리 했었다. 지금 껏 남아 있어서 사랑받는 정월중에 대중적인 놀이로는 윷놀이를 빼어 놓을 수 없다.
명절이 없는 2월은 1일날 대청소를 하였다. 초가집에 우글거리는 노래기를 쫒기 위하여 대청소 후에 향랑각씨속거천리(香螂閣氏速去千里)라는 부적을 붙였다. 2월에는 일꾼의 날(奴婢日)을 두어 노비를 쉬도록 했으니 요즘 메이데이라고하면 노동부에서 뭐라고 할까?! 음력 2월 6일,12일은 날씨와 별자리를 보고 농사일을 점치는 날 인데 곧 시작할 농사일을 계획 하였다.
제비가 되돌아온다는 삼월 삼짓날이 되면 두견화전(杜鵑花煎)을 만들어삼삼오오 짝하여 꽃놀이를 하였다. 꽃놀이 장소로는 살구꽃이 좋은 필운대(인왕산의 옛이름이 필운산, 필운대는 현재의 배화여고 뒤라고함), 복숭아꽃이 좋은 북둔(성북2동 북쪽), 버들놀이가 유명한 흥인지문(동대문)밖이 다고 한다. 삼월중에는 한식날이 성묘하되 개사초(改沙草: 겨울난 묘를 보수함)가 주된 일이였다.
사월이되면 초파일 배불숭유의 유교정책이 조선 시대의 정책이지만, 우리 민중에 뿌리 깊은 석가탄일은 부동의 명절, 집집마다 불을 켜달고, 그 밑에서 물장구(태평고)를 치거나 풍악을 울렸으며 불놀이, 딱총 쏘기를 하였다고 한다. 음식으로는 느티나무잎을 넣은 시루떡과 검정콩을 먹었다. 절에서는 등을 휘황찬란하게 달고 여러가지 행사를 하니 이를 석존제(釋尊祭)라 하였다.
오월이 되면 팔월 추석 한가위와 쌍벽을 이루는 민족의 대 명절 단오(端午)를 빠뜨릴 수 없다. 오행사상의 동양철학에서 5 라는 숫자는 양기가 꽉 찬 기수로써 음력 5월5일인 단오는 5자 2개가 겹쳐 양기가 일년중 가장 충만한 날이라고 한다(양력으로 하지에 가깝다). 수릿날이라고도 하고 천중절(天中節)이라고도 하며 조상님들께 차례도 지냈다. 북한 지방에서는 추석보다 단오를 더 큰 명절로 여기도록 큰 명절이었는데 일본 강점이후 명절의 위상을 잃어 버렸다. 민족 정기를 되찾는 의미에서 설날과 단오, 추석 3대명절은 어떻게든 제대로 복권 시켜야 한다.
단오절은 젊은이들의 축제 였다. 젊은 여자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사귀(邪鬼)를 쫓는 창포잠(菖蒲簪:창포뿌리로 만든비녀)에 붉고 푸른 옷으로 단장하는 단오 빔으로 곱게 단장 하고, 하늘 저 끝까지 그네를 뛰어 훨 훨 나르고, 젊은 남자들은 씨름으로 동네 장사를 뽑았으니 아름다움과 힘이 넘치는 젊음의 축제일 이었다.
이날 먹는 단오 떡이 유명한데 우리나라에 널려 자생하는 수리치(戌衣翠), 또는 개치라고 불리우는 들풀의 연한 잎을 취하여 절구로 찧어 쌀가루와 썪어 쪄서 둥글게 빚어 먹는데 이를 단오절 수리떡이라고 했다. 수리떡을 먹으면 수복(壽福)을 누린다고 하고 수리치 잎은 말려서 담배 대용으로도 피우고 비벼 말리면 부싯돌의 불댕기는 솜으로 씌었다고 한다.
단오절, 궁중에서는 공조(工曹)에서 부채를 만들어 백관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를 단오 부채라 하였다. 이를 받은 대신들은 부채에 금강산 일만 이천봉을 그리던지 도화(桃花) 호접(胡蝶) 부용(芙蓉) 백로(白鷺)등을 그려 솜씨를 뽐냈다. 대신들에게는 단오첩(帖)이라는 축시를 지어 궁중의 기둥에 걸도록 하였고, 악기(惡氣)를 몰아내는 부적, 단오부(端午符)를 문위에 붙쳤다.
6월이 오면 유월 유두(流頭)날이 명절이다 음력 6월 15일, 신라풍속에 의하면 이날 동쪽으로 흐르는 냇물에 머리를 감으면 불길한 일들이 냇물에 떠내려 간다고 하였다. 선비들은 이 날 술과 안주를 갖고 산이나 개천에서 놀이를 하였는데 이를 유두연(流頭宴)이라고 하였다.
유둣날에는 유두면(麵)이라고 하는 국수와 밀가루, 팥, 깨,꿀을 재료로 만든 연병(連餠)이라는 밀가루떡, 수단(水團), 건단(乾團)이라는 찹쌀가루떡을 만들어 수박등 여름 햇과일과 함께 조상에 제사를 올렸는데 이를 유두천신(流頭薦新)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풍년을 기원하는 농신제(農神祭)도 드렸다. 액을 쫒기 위해 밀가루를 구슬처럼 만들어 오색으로 물들여 3개를 포개어 문기둥에 매달아 놓았었다고 한다.
유둣날을 전후로 초복을 맞으니 복 더위를 다스리기 위해 개장(狗醬)을 먹었다. 개고기는 몸을 서늘하게 하기에 더운여름의 보신에 좋아 후일 보신탕으로 불리게 되었다.
농번기의 절정이면서 삼복의 찌는 더워가 끔찍한 음력 유월중에는 마을 전체가 농사의 마지막 힘을 들이기 위하여 공동작업하는 [두레]일이 있었다. 한집에 한명씩 동원 되어 협동심을 보이는 좋은 풍속이다. 두레는 동네 어른이 통솔 하고 동기(洞旗)인 농기(農旗)를 휘날리며 농악을 울리고 농부가를 합창하며 하는 공동작업이다. 두레 수입은 공동분배 하고 여분은 동네공공시설, 교육자금등으로 썼다고 한다. 일이 끝나면 풍년을 기약하는 술, 노래, 농악의 잔치가 벌어지는데 나이 어린이가 어른농부가 되는 의식으로 먹는 술인 [꽁뱅이 술]을 이 날 나눠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