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에서 울다> / 문 인 수
동강은 대뜸 말문을 막는다
어이없다. 참 여러굽이 말문을 막는다.
가슴 한 복판을 뻐개며 비스듬히 빠져나가는
저기 내려 꽃 피고 싶은 기슭이 너무 많다.
몸이 먼 곳,
인생이 저렇듯 아름다울 수 있었겠으나
어떤 죄가 모르고 자꾸 버렸으리라.
늙은 사내는 엎드려 산 첩첩 울고
물길은 산에 막히지 않고 간다
Ⅰ.
봄꽃은 따뜻한 남쪽으로부터 북쪽을 향해 피고, 가을꽃은 해가 짧은 북쪽에서부터 먼저 핀다 하였던가? 영월 땅을 향해 거슬러 올라갈수록 길 위에, 산 위에 꽃들의 향기가 짙어지는 것 같고, 그 자태가 아름답다.
작년 양양 울트라에 이어 올해도, 좋다야 이 아름다운 가을날에 다시 또 동강 울트라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백두대간 심산계곡에서 흐르기 시작하는 물줄기로 물빛 곱게 흐르는 동강에서의 여행은 또 어떨까.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 위에 서게 되면, 바람이 또 내게 무엇을 가르쳐 줄까?
처음 본 영월이였지만, 눈에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영화 라디오 스타에서 보았던 화면 덕분일까, 강과 산이 주는 풍경 때문일까, 첫인상이 좋은 곳이다. 읍내의 유서 깊은 식당에서 더덕주 한잔에 곤드레 밥으로 저녁을 먹고 나오니 주위는 어두워졌다. 출발지인 청령포에 가기 전 낙화암에 들렸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이곳으로 유배될 때 따라왔던, 궁녀와 궁노가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층암절벽에서 꽃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이다.
당시 세조의 정권찬탈로 정의도, 도의도, 명분도 사라진 세상이였지만, 사육신이 있었고,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주검을 모셔 장사 지내준 영월 호장 엄흥도가 있었고, 죽음으로 의리를 지킨 이름 모를 민초들이 있었으니,
우리는 세상을, 삶을, 사람에게서 배우고, 어둠 속에서 유장하게 흐르는 저 동강, 자연으로부터 깨닫는다.
Ⅱ.
청령포,등 뒤로 산들이 얼키설키 쌓였고, 나머지 삼면은 깊고 푸른 강으로 둘러 쌓인 곳, 천혜의 유배지가 이제는 사람 많은 관광지로 변해 버렸다.
아직, 여명이 밝지 않은 이른 새벽, 웅성웅성, 오늘 온종일 달리려는 사람들로 청령포는 일찍 잠이 깨었다.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는 것 같다. 출발이다. 날선 하현달이 사그러들며 골짝계곡마다 안개 피어오른다. 많은 이야기가 필요없다. 그저 묵묵히 홀로 세상을 구경하며 바람 불면 흔들리고,비 내리면 비 맞고,폭풍우 몰아치면 몸무림 치면 그만이다.
잠시 달려, 장릉 삼거리에서 단종을 만났다. 할아버지 세종을 닮아 학문을 좋아하며, 제왕의 근기를 가졌던 당돌한 소년, 단지 어린 나이가 죄였고, 그 고독한 운명이 죄였기에 이곳 영월까지 유배를 오게 된 단종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단종과의 만남은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선돌, 소나기재 정상을 거쳐, 유배 가는 도중 서러운 마음에 지는 서산의 해를 바라보고 절을 하였다는 배일치(拜日峙)재 정상에 이르기까지도 계속 되었다.
배일치재 정상에서 얻은 사과 한쪽을 먹으며 계속 달려 나가니, 선암마을(한반도 지형) 입구가 보이고, 직벽의 산과 바투 붙어 흐르는 강이 이어진다. 바람이 선들 부니 하얗게 배 뒤집은 나뭇잎들이 은빛을 발하며 일제히 흔들리고, 물빛 고운 강물의 울음소리 처연하다. 물길은 풀려나는가 싶더니만, 금세 또 깊숙이 갇히고 만다. 그렇게 섧게 돌고 도는 강물에서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를 만났다.
왕비에서 서인으로, 종국에는 뒷방 늙은이가 되기까지 그녀의 삶은 사랑이었고, 사랑은 삶이었으며, 삶은 치욕이면서 복수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어이 살아내라는 생명의 준엄한 명령을 좇아 살아간 정순왕후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이야기를 생각하며, 영원을 향해 계속 달음박질이다.
Ⅲ.
오후가 되니, 햇볕이 제법 따갑다. 자연히 몸도 처진다. 오전만 해도 산이 좋아, 강도 좋아, 무릉도원 들어가는 기분이더니만, 이제는 골짝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조금 겁도 난다. 들어갔다간 다시 나오지 못할 것 같다.
오전의 나와 오후의 나는 다른 사람일까? 그렇지만, 어쩌랴, 가야 하는 길, 갈 수 밖에 없는 길, 길 위에서 길을 찾을 수 밖에....
수많은 다리들을(영월에는 교량들이 참으로 많다) 건너고, 높고 낮은 언덕과 고개들을 지나면서,계곡 물에 발도 담그기도 하고,세상과 한발 비켜서, 해 왔던 일들을 다 벗어버리고, 지난 간 날들을 잠시 잊어버리고 산 숲속에 들어가 나무들이 수런대는 소리도 들으며 잠시 쉬어 보기도 한다.
그리고, 달리다 말고, 5억년 전에 생긴 하부 고생대 지층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를 한참동안 쳐다보면서, 상념과 감상의 주억거림으로 잠시 길 위에 선다.
낯선 시간 속에서 한발 비켜서 있는 존재 마냥 마치 성벽을 쌓아놓은 듯한 지질구조이며, 영월군의 국가지정 문화재중 가장 늦게 지정된 유형문화재이란다. 5억년이란 영겁의 세월동안 저 땅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냈을까?
5년 전의 일도 기억이 잘나지 않는데, 5억년이라니.......
갑자기 달리기가 어려워져, 공연히 전화를 하며 외부와 기웃거려 본다.
Ⅳ.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 드려고 하니, 나른한 오후의 달리기도 끝이다.
구체적 원인이 없는 막막함을 떨쳐버리고 고통의 원천을 자신의 내면에 간직한 채 이제 빨리 돌아가려 한다.
길고 어려운 분덕재를 넘고, 별마로 천문대 봉래산을 넘으며, 어두워진 검은 강물과 함께 달린다. 울음을 참아내는 힘과, 빡빡한 삶과, 그 막막함과 함께 달려 나간다.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돌아다니려는, 길 없는 길을 내려는 나의 꿈이 아플지라도....,
하늘이,땅이,강이,나에게로 오고, 내가 그들 속으로 들어가려는 한 달리기는 계속 되어야겠다. 몸이 곧 길이니까......
첫댓글 동강 250리 길을 같이한, 카우,마세야 즐거웠다. 그리고 부산서 같이 올라가서 즐거운 마라닉을 한 영우야, 고마웠다. 늘 행복한 달리기 되어라.
참 좋은 마라톤 여행ㅇ을 하였네
영월동강울트라 처음으로 달려본 길이지만 주변경치를 즐기면서 달릴수있는 멋진곳에서 만나 즐거웠다..내년에 다시한번 하자.
잘 읽었다....나도 영월땅을 한번 방문하고싶어 동강울트라 신청할려다 전국체전 성화봉송일과 겹쳐 하지 못했다. 내년에는 꼭 한번 참석해 보리라 다짐해 본다......
몸이 곧 길이다..... 맘에 와 닿는다. 열심히 달리면서 좋은 후기를 늘 올려주는 여전한 인생에게 감사한다.
부드러운 바람 결같은 글 이구만,이 글잡이 마음이 소롯이 담겨 있네...
언제나처럼 여전히 그길을 멋드러지게 그려놓아서 항상 가보고 싶은느낌을 주는후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