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서일지(2024.07.04~07.25)*
<7월 9일 화요일>
신과 여성
신과 삶, 신과 인간 개인, 신과 여성은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대등한 관계인가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닥터지바고》
1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
그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어느 무더운 여름날
대학 교정을 무심히 걷던 청년은
어디로 갔을까
가난한 아버지가 맞춰준
감색 양복과 검정색 구두를 늘씬하게 차려입고
세상을 기쁘게 활보하던 환희에 찬 청춘
그 여름 새벽의 찬 이슬
끊임없이 눈 맞추던 여학생들, 여자들, 여자들
책은 언제나 눈부신 선물이었고
세계는 긴 모험과 탐험을 예정했다
결국 우리는 넓은 바다로 떠났고
숱한 현실의 격랑과 거친 파도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연어처럼
허연 머리를 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여름 장마에 집 안이 눅눅하고
아내와 나는 묵묵히
아침을 먹고 머리를 감는다
이제 시간은 어디로 흐를까
먹먹한 마음에 창이란 창
모두 열어놓는다
2
-유라는 깊이 사유했고, 글쓰기에도 매우 뛰어났다. 아직 김나지야 학생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경험하고 숙고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들을, 보이지 않는 화약고처럼 장치해 둘 수 있는 산문이나 전기를 쓰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런 책을 쓰기에는 아직 어렸기에, 그 대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가장 위대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화가가 평생 스케치를 하듯.
(《닥터 지바고》, 제3장 <스벤티츠키 집에서의 크리스마스 축제> 중에서)
삶에서 인간은 무엇이든 준비할 수 있을 때 준비해야 한다. 삶은 항상 가변성을 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삶에 대한 열정이 있는 한 계속된다. 그것은 우주의 한 섭리로서 인간 마음대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울 수 없는 것처럼 그 자체가 진리일 수도 있다. 불교에서조차 ‘제행무상’이라고 하지 않는가.
학생시절의 유라의 생각 한 조각에서 우리는 자연의 보편적 현상이자 진리이기도 한 개화(開花), 즉, 세계가 열리는 시간을 유추할 수 있다. 인생에서의 봄이라고 해도 좋은, 그 봄은 인간 각자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 제각각일 수 있다. 결혼, 졸업, 출산, 사업, 승진, 출세 등등. 그런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기대하는 아름답고 축복스러운 날을 위해 뭔가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 중 하나에 주인공 유라는 시 쓰기를 선택한다. 자신의 내부에 쌓이는 젊은 날 폭발적인 열정을 자신의 아름다운 봄이 펼쳐지는 시간을 위해 시로서 쌓아놓았다가 한 번에 터뜨리겠다는 의미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의미로서 시간과 열정을 허수룩하게 낭비하지 않겠다는,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담아들을 지혜이기도 하다.
3
때때로 번갈아가며 이런 저런 책-김혜순, 소강석, 개그맨 양세형 등의 각 시인의 시집, 개그맨 전유성의 개그가 담긴 수필, 중남미 역사 등등-을 읽고 있지만, 그래도 영향력이 탁월한 책은 《닥터 지바고》다. 종교, 역사, 철학, 예술, 정치 등 여러 다양한 부분에 대한 작가의 오랜 통찰과 폭넓은 지성이 섬세하게 작품 곳곳에 드러나 읽는 흥미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제9장 <다시 바르이키노>를 읽는 중인데, 작품의 대단원을 향해 한참 달리는 중이다.
잠시 정리해보자면, 유라(지바고)의 아내 토냐가 혁명이후로 불거진 러시아 내부의 정치적문제로 그녀의 가족이 국외로 추방당하면서 행방이 묘연한 남편에게 남긴 편지를 통해 우리는 두 명의 여주인공(토냐와 라라)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그토록 가혹했고 비참했던 우랄을 떠나기 전에, 저는 아주 잠깐이지만, 라리사 표도로브나와 알고 지냈어요. 제가 괴로울 때, 항상 곁에 있어주고, 해산할 때도 도와주어서, 그분께 감사를 드려요. 사실 그분은 정말 훌륭한 분이지만, 솔직히 말한다면 저와는 다른 분이었어요. 저는 인생을 단순하게 살며 올바른 길을 찾으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분은 인생을 복잡하게 살아가고, 바른 길에서 벗어나려고 태어난 것 같더군요.
(제13장 <조각상이 있는 건물 맞은편> 중에서)
그렇다고 해서 라라가 비천한 여성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라라는 오히려 사랑에 있어서는 토냐보다 더 섬세하고 깊은 애정을 가진 여성이다. 다만 작품 속 내용을 통해 추정해 볼 때 라라의 미모가 출중하여 꽤 높은 지성의 소유자인 유라(지바고)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자신의 아내에게 돌아가려던 발길을 자신에게 돌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라라는 토냐의 출산을 돕고 그녀의 편지를 유라에게 전달할 정도로 어떤 의미에서는 당당한 사랑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유라의 생명의 위기 때마다 그의 병상 곁을 지키며 헌신적인 간호를 펼치는 모습을 보노라면 진정 라라가 유라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토냐는 남편 유라가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졌음을 어렴풋이 눈치를 챘음에도 그를 믿고 언제까지나 두 아이의 아빠로서 그의 빈자리를 믿음으로서 지키며 기다리겠다는, 헌신과 희생의 면모를 보여주는 아름답고 이지적인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 후, 살아가는 내내, 나는 그때 당신이 내 가슴속에 켜놓은 그 매혹적인 불빛을, 그리고 그 이후 나의 전 존재 속으로 퍼져 나가, 당신을 통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인식하는 열쇠가 되어주고, 서서히 사라져 간 빛과 희미해져 간 소리를 규명하고 이름 지으려고 수없이 시도하곤 했었소.
(제14장 <다시 바르이키노에서> 중에서)
유라가 라라와 함께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인텔리라는 신분이 노출됨에 따라 위협을 느끼고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려고 모색하는 숨 가쁜 과정에서, 지난 시절 자신 안에 새겨진 라라의 첫사랑(짝사랑)을 떠올리며 고백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라라는 이미 유라가 토냐와 결혼하기 전에 상당할 정도로 유라의 정신적 세계와 사상의 바다에 깊은 영향을 주었음이 드러난다.
이를 통해 지금껏 전개된 이야기를 돌아보면 토냐와 라라는 유라에게 있어서 종교(도덕)와 예술(철학, 문학)로 양분되는 각각의 세계에서 그 절대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셋의 삼각관계가 당대 러시아를 포함한 세계의 역사적 소용돌이 안에서 운명처럼 펼쳐지는 까닭에 개인적 이기주의나 질투, 탐욕 등의 어떤 가치 판단도 유보되고, 작품의 대단원까지 결과를 알 수 없는 탓에 더 이상의 평가는 여기서 멈추어야 할 것 같다.
4
진정성 있는 글쓰기
-진주현 교수의 《발굴하는 직업》
지은이는 전쟁 중 사망한 군인들의 유해들에서 죽은 군인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에게 돌려주는 게 주된 업무인 ‘법의인류학’이라는 생소한 분야에서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이제는 하와이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정도로 경험과 실력을 쌓은 여성이다.
이 책 《발굴하는 직업》의 서문은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 장부터 펼쳐지는 글에는 그녀의 학업과 다소 다른 분야에서 경험하게 되는 보편적인 직장생활의 어려움과 그 극복과정, 그리고 직업이 전사자의 발굴된 유해를 통해 신원을 확인하는 일인 만큼, 전쟁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고 어느 순간 6·25와 같은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녀의 일터는 하와이에 있는 미 국방성 산하의 전쟁에서 실종된 군인의 유해를 발굴하고 신원을 확인한 뒤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일이다. 그녀는 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4년을 제외하고는 어린 시절과 유학시절 이후부터 줄곧 외국에서 자라고 살아온 터라 돌이켜 보면 한국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 그런데 이제 미 국방성 산하 기관에서 전쟁 유해 발굴과 신원확인 작업에 참여하면서 6·25 당시 청진에서 흥남을 거쳐 피난 내려온 조부모부터 해서 그녀의 오랜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고 있다.
그녀는 신원을 확인한 유해를 그들의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지만, 아마도 이 일을 통해 자신의 영혼도 과거를 반추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려보내고, 돌아간다는 진지한 성격의 업(業)이라는 점에서 글이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진정성이 돋보이며 책에 어느 순간 몰입되어 열심히 읽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