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名' 제대로 알고 부르게 가르쳐야!
― 正祖大王 ‘李祘’은 正:祖大:王 ‘李:祘:(省:)’ ―
李銓文
前 朝鮮日報 編輯委員 / 本聯合會 指導委員
戊:子年 한가위 茶禮 飮福床을 물리고 TV를 켜니, 珍品名品 鑑定시간마침 算:가지(셈하는 막대기)가 등장하여 잘못 부르고 있는 正祖임금 御諱 ‘李祘’의 誤謬를 바로잡을 契機로 삼게 했다.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난 思悼世子의 아들 正祖大王은 御諱가 ‘산:가지(筭:算:)’ 뜻인 ‘祘’이 아니라, ‘살필 省’의 音과 뜻을 일컫는 ‘祘(省:)’인 것이다.
典據로는 正宗(高宗이 光武帝가 되고 太祖와 4代를 推尊하며 正祖로 추존)이 奎章閣을 설치하고, 當身이 만든 『御定奎章全韻』과 『全韻玉篇』에 ‘祘:(省:)’으로 싣고, 글자 ‘위[ ]아래’를 에워 御諱임을 표시했다.
正祖의 御諱가 ‘헤아리거나’, ‘셈하는’ 자질구레한 글자일 수는 없는 점도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겠다.
太祖 李成桂는 登極하고 나서 改名아닌 改諱하여 ‘李旦’으로 御諱를 삼으니, 國號 朝鮮과 아침 ‘旦’자의 해돋이 기상이 그럴싸했다. 이로부터 새해 ‘元旦’이라 쓸 때에도 忌諱하여 元朝라 일컬었다. 歷代 君王중에 太宗 李芳遠 端宗 弘暐 말고는 모두 僻字로 御諱를 짓고 외자 이름을 썼다.
王朝時代에는 御諱를 입에 담아 일컬을 수도 없음은 물론 글을 짓는 文字 속에 자칫 어휘를 넣었다가는 생명이 위태로웠다, 세월이 바뀌어 MBC連續劇 제목으로 ‘李祘’이란 틀린 御諱로 2007년 9월 17일부터 2008년 6월 16일까지 옹근 9개월 동안 ‘살필 省(성)’자 뜻인 李祘:(성, 省)을 틀리게 李祘(산, 算)으로 일컬었다. 그 동안 演出 이병훈, 劇本 김이영 77회 동안 제대로 된 玉篇이나 傳統있는 우리말사전-國語辭典 人名辭典 歷史事典을 한번이라도 살펴보았더라면 이 같은 큰 失手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산 정조 대왕』이란 책을 내놓으면서 저자 이상각은 “조선의 이노베이터”라는 副題에다 “MBC 드라마 <이산>의 주인공”을 앞세우면서, “이 한 권으로 정조대왕의 모든 것을 읽는다!”고 했다. 한 드라마나 책에서 帝王을 새로운 각도로 照明하는 野心作이라면, 더 더구나 임금의 呼稱을 祖宗의 廟號(太祖나 世宗처럼)를 쓰지 않고 忌諱해 오던 御諱를 부르기로 作心했다면, 그 임금의 ‘이름’은 제대로 상고하여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역대 군왕의 御諱에 얽힌 사연 몇 대목을 詳考해 본다.
太祖 李成桂는 登極하면서 改名하여 ‘旦(단)’이란 외자를 御諱로 삼았다. 날일 ‘日’에 地平線 ‘ㅡ’을 더하여 ‘이른 아침’을 뜻하게 했다. 이로부터 ‘설날 아침’을 元旦이라 써놓고 元朝로 읽는 風習이 舊韓末까지 아니 20世紀 후반까지도 남아있었다.
文宗의 御諱는 珦:(玉이름 향:)인데 이를 忌諱해야할 일이 생겼다. 高麗末 큰 儒學者로 忠烈王과 公主를 扈:從(호:종)하여 元나라에 使臣으로 갔다가 『朱子全書』를 베껴 써서 돌아와 東國 최초의 朱子學者로 指稱된 安珦을 云謂할 적에 犯:諱(범휘)하는 不敬을 범하는 우려가 대두되었다. 安 ‘珦’의 初名이 安 ‘裕’였다 하여 最初로 順興의 紹修書院을 賜額받을 적에도 犯諱를 모면했음직하다.
世祖의 御諱도 ●(옥이름 유)이고, 세종대왕 아들 大君 8名과 王子君 8명 모두 16명이 ‘구슬玉’의 이름자를 썼다.
歷代(朝鮮) 임금 중 외자 아닌 御諱를 가졌던 君主는, 太宗 李‘芳遠’과, 그의 仲氏 定宗 李‘芳果(初名)’와, 魯山君으로 降封되었다가 復位된 端宗 ‘弘暐:(환하게 빛날 위:)’ 三位 뿐이다.
李芳遠은 王子難을 일으켜 太祖 李成桂(旦)의 面前에서 막내 同生 芳蕃 芳碩을 撲殺(박살)하고, 咸興差使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父子相剋을 못 막아 王道開國의 名分에 먹칠을 했다. ‘太(定)太世(文端)世’의 業報가 燕山主의 放逸함과 士禍와 黨爭에다 잇단 遺孤와 庸主가 百姓을 塗炭에 빠뜨렸다.
太祖 어휘 아침 旦:은 ‘밤이 샘’의 뜻도 담겨, 前朝 高麗의 그늘을 말끔히 걷어내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날 日’자에 딸린 글자를 御諱로 쓴 歷代임금이 많았다.
德宗(推尊)은 어휘를 暐:(빛날 위:), 睿:宗은 晄:(밝을 황: 晃동)형제는 단명하여 형은 20세에 世子로 登極도 못하고 죽었고, 동생 睿宗은 在位 1年에 昇遐하여 조카 端宗을 내몬 世祖의 두 아들은 모두 短命했다.
成宗은 ‘꺽을 折’ 아래 ‘계집女’인 娎(기쁠 혈)字인 특이한 御諱를 가졌다. 親兄인 月山大君을 제치고 養家동생 齊安大君은 어리다며 13세에 登極한 成宗은 7년간 할머니(世祖 妃) 貞熹王后의 垂簾聽政을 받았다. 親政을 시작한 成宗은 할머니(王大妃), 친어머니(仁粹大妃), 양어머니(安順王后)의 세 어른을 받들어야 했다. 웃전에서 관심을 가지는 후궁들을 골고루 어거해야 하는 와중에서 元子(燕山君)를 낳은 王后가 龍顔에 傷處를 낸 사건으로 빚은 廢妃尹氏 사건은 훗날 士禍로 번지는 ‘女難’을 胚胎했다.
中宗은 御諱를 懌(기쁠 열), 동생에게 쫓겨난 燕山主는 이름이 漋(융)으로 모두 ‘마음 心변’이었다. 朴元宗이 그 누이가 月山大君 夫人이었는데, 燕山主한 테 더럽힘을 당한 悲劇의 含嫌과 虐政 등을 이유로 反正을 일으켰다.
이때 燕山主가 江華의 謫所에서 죽어도 明나라에 訃音도 전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中國 使臣이 上王안부를 묻자 唐惶해서, 上王(燕山)이 風疾있었고, 世子와 王子는 없었다고 말을 맞추었다. 더군다나 中宗이 昇遐하자 廟號를 정할 적에 中宗이 아닌 ‘~祖’를 올리자고 의논도 있었다. 동생이 형의 뒤를 이었는데 ‘有功’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여, ‘有德’에 맞는 ‘中宗’으로 정했다. 中宗反正의 저울대는 이랬다.
仁宗은 岵:‘(산 이름 호), 明宗은 峘(작은 산이 큰 산보다 높을 환)으로 字典에 한 어휘 풀이를 ’小山高於大山‘ 처럼 긴 경우는 드물 뿐더러 그 뜻 또한 심상찮아 女傑(?) 文定王后의 입김이 느껴지는 듯하다. 登極 8개월만에 喪主노릇을 심하게 하다가 繼母의 시달림에 聖君의 자질을 못 펼치고 夭折했다.
文定王后 치맛바람 20년간의 明宗治世는 小山이 大山보다 높았던 한 시절이었다. 외아들 順懷世子가 夭折하자 明宗은 歎息해 마지않기를 “내 집에서 어찌 大統을 이으랴!”며 탄식해 마지않았으니, 스스로 母后의 政事干與 실정을 막지 못한 탄식이었으리라. 이로부터 이른바 嫡統 王統이 끊겨, 조카를 양자로 들이니 宣祖였다.
宣祖는 어휘를 昖(해 다닐 연), 景宗은 呁(날빛 균), 英祖는 昑:(밝을 금:)이었는데, 모두 밝은 빛을 상징했다. 宣祖는 壬辰倭亂에 播遷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景宗은 장희빈의 아들로 후사가 없었고, 英祖는 최장수 君主로 아들은 思悼世子, 손자는 李祘:(성)이었다.
翼宗의 이름은 旲(햇빛 대), 憲宗의 이름은 奐:(클 환, 빛날 환), 哲宗 이름은 昪:(날빛 변:), 高宗 이름은 凞(밝을 희)이나, 모두 환하고 빛나지 못했다. 翼宗은 世子로 代理聽政할 적 微行길에 글 읽는 朴珪壽를 만나 크게 重用하리라 마음먹었으나 登極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憲宗은 後嗣없이 短命했으며, 哲宗은 ‘江幻令’으로 政事는 모르고 酒色 10년에 허물어진다.
正宗 이름은 두 글자를 竝立 시켰고, ‘祘(성, 省)’과 ‘祘(산, 算)’처럼 二音 一字의 稀貴한 御諱라 그 治積과 學文이 帝王중에 으뜸자리에 서겠지만 그 波瀾萬丈한 生涯 또한 예사롭지 않았음에랴.
(僻字御諱 仁祖, 孝宗. 顯宗, 肅宗은 컴퓨터 漢字變換 부실로 뒤로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