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누리길(고양)14코스
2024 2/4 일요일 | 고양오선누리길 14코스 | | 9:30- 15= 9:15 | 북한산입구08:30, 핼주산행입구17:30 |
자연을 통하여
고마움을 배우고
떨어지는 낙엽을 통하여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그리고 결실을 통하여
삶이 영글어 가는 법을 배운다.
.
교통정보
북한산성입구로 오실 경우
마을버스 077B
일반버스 34, 704, 8772
행주산성입구로 오실 경우
일반버스 9707, 1082, 870, 921
고양누리14코스 바람누리길은 누리코스 마지막이면서 가장 긴 코스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행주 방향으로 걸어가며 고양누리길 이정표를 만났고
이정표에서 행주신성(바람 누리길)방향은 계속 직진으로 표시가 되어있다.
이정표의 빙향으로 가는데 누리길을 걸으며 자주 보이던 리본이 안 보인다.
그 자리에서 살짝 검색해보니
아까 이정표기 있던 곳에서 고양누리길2코스 방향으로 가다가
14코스와 나누어지는 것 같다.
산을 오르내리는 나의
산책은
산이라는 책을 읽는 일이다
손과 발과 가슴이 흥건히 땀으로 젖고
높은 머리에 이슬과 안개와 구름의 관(冠)을 쓰는
색다른 독서 경험이다
구파팔역2변출구에서 704번 버스에 승차하여 북한산성입구에
도착하여
버스가 오던 길을 되돌아가
창릉천(덕수천)
사곡교 입구에서 보이는 북한산과 창봉산의 모습이다.
북한산의 백운대를 비롯한 중요봉우리와 함께 북한산성의
성곽과 대서문 등도 조망할 수 있다.
창릉천의 옛 이름은 덕수천이라고도 했으며
창릉천의 일부지역은 창릉천의 옛 이름은 덕수천이라고 했으며
창릉천의 일부지역은 창담천이라 부르기도 했다.
창릉천은 북한산 백운대 부근에서 발원하여 사기막과
고양시 덕양구의 동시를 관통하여 한강하는 유입되는 하천이다.
고양시에서 발원하여 고양시의 한강으로 들어가는
가장 큰 하천으로 유명하다.
고양바람누리길
~북한산성입구 하차 ~ 신호 건너편에 흥국사 입구로 들어선다
[댜중교통] 갈 때 구파팔 2번출구에 704번스로 북산산성입구 버스정류장
올 때 행주산입구버스장류장(9707번)좌행좌석 직행버스를 타고 당산역에 정차
사랑교회
어마어마하게 교회를 멋 번이고 쳐다보며
종교란 것이 하느님이란 것이 무엇이
관대이라 크고 호화롭게 꼭 지어야만 한다면
그게 믿음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지 답답한 일이다
성경책에는 노천예배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비가 오거나 뜨거운 사막에서 군중들과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장막교회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 아니 더냐.
물론 구약에서 몇몇 왕들이 지은 궁전은 예외로 한다
결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불위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기에.........
그리움이 그리움을 풀고
고독이 고독을 풀고
슬픔은 슬픔을 풀고
아픔이 아픔을 푸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을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있는 사차원의 세계에서
모든 고통을 털어 내고
포기할 수 없는 사랑과 꿈을 풀어 종탑에 걸어 두고
온몸으로 사차원의 종을 칠 수 있는
14바람누리길(고양) 강매석교, 행주산성 방향으로
이정표대로 진입한다
초가
볏짚, 밀짚, 갈대 등으로 지붕을 엮어 만든 집. 선사시대에
본격적인 집의 형태가 생겨날 때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주로
서민들이 짓고 살았던 주택 형태이다.
한자 표기가 '초가'(草家)이므로 '초가집'은 잘못된
표현처럼 보일 수 있으나, '집'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의미상 중복되는 말을 더하여 사용한 것이다.
고양바람누리길 마지막 14코스다.
여유로이 살지 못하는 초급한 나그네.
탐욕으로 가득 찬 어리석음 노루처럼 달리네.
푸르른 잎도 시들어 떨어지듯
모두 사라져 본향으로 떠나가거늘.
고사목
또 어떤 생명체가 이곳에서 자라라고 있을까요?
고시되어 안타까움이 있기도 하지만
또 다른 생명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앞으로 많은 이들이
주목받은 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환경적 요인으로 지연발생적으로 고시된 고사목이
또 다는 풍경을 지아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춥다는 생각보다는 앞으로 더욱더
오래도록 바람누리길 일부로 남아 주길 기대해 본다.
고양과 서울
싸릿말 이야기
고양누리길
일제 강점기, 서울지역의 대부분은 고양군이 관할지역이다
당시 지도를 보면 그 경계가 고양군 뚝도면 잠실리(현재 잠실)를
비롯해고양군 용강면 여의도리(현제 여의도) 등
강남 일부지역도 포함되었다
1973년, 고양군 신도면의 구파발리, 진관내리, 진관외가
마지막으로 이 일대는 은평 뉴타운이 개발되었다.
싸릿마고는 다라 건너의 자연 촌락 이름이 지축동 싸릿말어서 부쳐진 명칭이다.
바람에 훌쩍대는 마른 갈대
먼지가 일어나 눈을 뜰 수 없구나.
싹트는 봄날이 그리운 나그네
세월의 덧없음을 이제야 깨닫다.
창릉천 자전거길 안내도
물의 겸손
시냇물 되어
여울 따라 흐르면
동맹이도
거친 나뭇가지도 만나지
훼기라니 돌아
쉼없이 흐르다 보면
바다에 이르지 않을까?
바다로 부르고 싶어
14코스 바람 누리길
권율장군과 의병장 밥할머니
나의 생은 내일을 기다리다가
모든 일이 덧없이 흘러갔으니
이전의 푸르른 꿈들이
어느새 백발이 되었구나
고양바람누리길
나는
물이 흐르는
소리를
사랑한다.
건반악기
소리보다
더 맑은
소리이기 때문이다.
창릉천 건너편의 테크노밸리 건물이 있는 곳에스템프함이있다고했으니
장검다리를 건너간다. 여기 갈림길에서 2코스로 가지만
14코스는 ‘바람누리길’은 왼쪽으로
건다는 이정표를 만난다.
은하교건너기 전의 이정표대로가면 길이
이정표대로 가면 안되고 은하교룰 건너야한다는 ..
창릉천 건너편의 테크노밸리 건물이 있는 곳에
스템프 함이 있다고 헀으니 징검다리를 건너간다.
스탬프
창릉천변에 숨어 있는 삼송테크노벨리 뒤 ''인증스탬프"
삼송역 부근에서 여기 찾느라... 시간이 걸렸다.
창릉천 덕수원
고양누리길
창릉천 종주의 옛 아름은 덕수 천이었다. 고려시대
학자이며 문인인 묵은 이색(李穡)선생이 이곳에서
지은 시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제목: 고양덕원에서
성문을 나서니 전부터 비가 물동이로 쏟아지더니
성문을 나서니 날씨를 분간하기 여려다. 예전에는
흥이 나면 빗속에서도 절간을 찾았는데 오늘은 시름이
길어 여관에서 빗소리를 듣는다.
담 밖에 사나운 우례에, 샘에는 물이 떨어지고 처마에 가득 찬 기운
나무위에 구름이 된다고 한다. 남북으로 잦은 나그네길
깨지지 않은 건 반은 나의 아버지, 반은 임금을
위해서다.
고가 아래로 지나가다.
산행할 때마다 사진을 가지고 풍경을 촬영한다.
사진이
거짓말을 하진 않지만
좋은 사진은
말을 한다.
가노라면 쉬는 걸 잊어버리고
쉬노라면 가는 걸 잊어버리고,
뒤에 오던 사람들 내 앞을 가네.
가는 곳 서로 다른데
다툴 것 뭐 있는가?
“글이란 읽으면 읽을수록 사리를 판단하는 눈이 밝아진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도 총명 해진다.
흔히 독서를 부귀나 공명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독서의 진정한 즐거움을 모르는 속된 무리다.
구름
산등성이 너머로
스치듯 지나쳐도
언덕 저 멀리
길 따라 떠나가도
누구일까?
알려지지 않았다.
바람으로 흘러가
나무 사이 부딪치고
물속에 제 얼굴 비쳐도
구름에게 아무도
말 걸지 않았다.
누구나 사연은 있잖아요.
자유로운 대로
상상하는 대로
구름은 흥미로운 이야기
실어 나르는데
지평선 너머에
내 마음 구름에 닿기까지
자유롭게
끝없이 따라가 보면
구름이 알아줄 거야
나와 같은 동족이라는 걸.
세계문화유산
창릉과 창릉천 이야기
고양누리길
이곳에서 동쪽 앵 봉(매 봉)아래에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서오릉 창릉이 있다.
창릉은 창릉천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창릉천, 창릉교 등 여러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청릉은 조선조 8대 예종과 인손왕후 한씨의 무덤이다.
나는 카메라를 어깨에 걸치고 풍경을 촬영한다.
카메라
바다와
하늘
산을
몸 안에 지니고 다니는 너는
통 큰 우주의
신비인가?
혹은 조물주인가?
강인한 정신력과 투절한 삶의 질서와 알맞은 활동과 적당한 휴식,
그리고 자연과의 친화가 검소와 음식임에도 내 일상을 별탈없이 지켜주고 있다.
나는 내 육신에 고마워하면서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강매석교 및 행주산상 이정표 대로 진입한다.
강고산입구 이정표
▲강매 석교
강매석교를 건넌다,
강매석교 - 향토문화재 제33호
이 다리는 강매동 강고산 마을 창릉천 위에 있다.
본래 이 석교는 고양의 일산, 지도, 송포 지역 등
한강연안의 서부 지역 사람들이 서울을 오가던
교통로로 이용된 곳이다.
이 다리를 이용해 각종 농사물, 땔감, 등을
현천동, 수색, 모래내를 거쳐
서울 염촌교에 내다 팔았던 것이다.
현재 다리의 구조는 네모진 돌기둥
18개로 교각을 만들고 위에 교판석을 깐 모양이다.
또 교각과 교각사이에는 6개의 교판석이 2열로 놓여 있다.
다리의 전체적인 모양은 길게 북-남쪽으로 이어져
약간의 곡선을 이루며 매우 견고하고
세밀하게 구축되어 있다. 또 각부재에 사용된 석재는 크고 장대하며
여러 각도를 이용하여 매우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다리에 관한 기록은 1755년 영조 연간에 발간된
이석희 편[고양군지]에 보이는데 당시에는 해포교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이는 해포교는 오늘날의 석교가 아닌 목교였다.
석교 중간부분에는 ‘강매리교 경신신조’라 음각된 다리
건립 년대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1920년데 새로 다리를 신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다리에 관한 보다 자세내용은 다리 옆에
오석으로 만든 비석에 기록하였으나
6.25당시에 총격으로 일부 훼손된 후 현재는 도로에 묻혀
그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이 강매리 석교는 축조년대에 있어
과히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조선조 전통적인
교량축조 방법의 맥을 잇고 있으며
현존하는 고양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라는 의미에서
그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