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인 이즈미르에는 그다지 핫한 관광지가 없나보다 했는데, 호메로스 펜션의 쾌활한 아줌마는 이즈미르에 가면 아고라 야외 박물관을 꼭 가보라고 권했다. 에페스와는 디퍼런트하다는 말을 여러 번 강조하면서.
1월 17일
셀축에서 이즈미르는 가깝다. 버스 타고 1시간 20분 만에 오토가르에 도착했는데 대도시답게 오토가르가 굉장히 크다. 시내로 가기 위해 오토가르 한 쪽에 돌무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찾아가다가 작은 버스들이 보이는 바로 앞에서 삐끼에게 잡혔다. 어디 가요? 셰히르 메르케지. 시내 어디? 숙소 밀집 구역 근처에 바스마네라는 기차역이 있는 게 생각나서 바스마네라고 대답했더니, 반가워하며 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근처에 서 있는 승용차를 가리킨다. 저거 타면 돼. 우린 택시 안 타, 돌무쉬 탈 거야. 이게 돌무쉬야, 택시 돌무쉬. 정식 택시는 아닌데 손님이 모이면 출발하는 일종의 셔틀인 모양이다. 두 명에 15리라. 네 명이 탔으니 합이 30리라인데, 나중에 미터택시를 타고 바스마네에서 오토가르까지 가보니 35리라가 나오더라. 뭔가 계산이 안 맞아. 계산이 이상한 일이 또 있었다. 삐끼 아저씨가 돌무쉬 택시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앉아 있으라면서 어떤 가게 앞에 내 놓은 의자를 권하길래 앉았더니 커피 마실거냐 차 마실거냐 친절하게 물어온다. 공짠 줄 알고 차 한잔 달라고 했더니 일어날 때 차값을 달라고 하네? 이 아저씨 본업은 삐끼가 아니고 음료수 장사였던 것.
바스마네 로터리에서 내려 호텔 밀집 지역을 더듬어 점찍어 두었던 오을락치오을루 호텔을 찾아 가보니. 생각 외로 크고 번쩍거리는 고급 숙소다. 방값이 250리라라는 게 부당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일단 말은 해 봐야지. 우린 구글에서 최저가 145리라라고 보고 왔는데요? 그 방은 이너뷰 inner view에요. 이너뷰가 뭘까? 안내를 받아 올라가 보니 창문이 건물 내부(의 사각형 수직 공간)로 향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나무랄 데 없이 좋은 방이다. 오케이.
길가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여기서 저녁도 먹고 다음날 저녁도 먹었다. 소고기찜, 양고기 백숙, 쾨프테, 켈레파차 등 모든 음식이 맛있었다. 식당 이름은 도아네르)
아고라를 향하여 직진. 호텔 근처는 현대적인 거리인데 구글 지도를 따라 들어간 바로 건너편 동네는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는 오래되고 좁은 골목길이다.
넓은 마당이 보이고 한 쪽에는 길게 늘어선 열주들이 있으니 저기가 아고라 맞겠지? 근데 에페스와는 다르다더니 별 거 없잖아? 입장료 12리라도 아까운데 그냥 밖에서 보고 말자. 옆지기의 불평을 달래며 일단 돈을 내고 들어가 봤는데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아치 형태의 지하상가 유적을 발견하고서 둘이 쾌재를 불렀다, 야! 정말 디퍼런트 맞네!
다음 목적지는 이즈미르가 다 내려다 보인다는 카디페칼레 성곽. 다시 골목길을 더듬어 꼭대기까지 올라가긴 했는데, 생각했던 명승지는 아니다. 근처가 철거 중이거나 철거 예정인 빈민가라서 경치가 예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손을 벌리고 달려드는 거지 소녀들이 너무 불편했다.
(1876년에 프랑스 회사 Regie Generale가 지었다는 바스마네 기차역)
도심에 있는 이 큰 공원은 2013년에 이즈미르 인터내셔널 페어가 열렸던 곳이라고 한다. 가구 전기 전자 식품 등을 주제로 한 국제 박람회였다는데, 2020년에는 이즈미르에서 정식(? 8년마다 열리는, 우리나라 대전과 여수에서 열렸던 것과 같은) 엑스포가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공원 안에는 전시관 외에 체육관과 공연장 놀이공원 등이 있어서 시민들의 휴식 및 문화 공간 역할을 잘 하고 있는 듯하다.
(아이 러브 이즈미르 인터내셔널 페어)
(갑자기 나타난 한국 학생들이 떠들썩하게 왔다갔다하며 사진을 찍길래 뭔가 봤더니 광장 가운데에 큰 지구본이 있다. 바스마네 역 근처에 있는 이 로터리의 이름은 '9월 9일 광장'이다. 공원의 이쪽 입구 이름도 '9월 9일 문'. 근데 왜 9월 9일이지?)
1월 18일
빈민가를 피해서 큰 길로만 걸어서 바닷가에 있는 오래된 광장인 코낙 광장을 찾아갔다. 터키 지폐에도 나온다는 유명한 시계탑도 보고 (시계탑은 1901년 프랑스의 레이본드 페레가 지었고, 시계는 독일 황제 빌헬름2세의 선물이었다고 한다.) 독립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첫번째 총알' 조각상도 보고, 해변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근처 상가에서 쇼핑도 하고,
(코낙 광장에 있는 앙증맞은 자미. 사원이 꼭 커야 맛이냐?)
(1919년 5월 15일 그리스 점령군을 향해 첫번째 총알을 쏘고 순국했다는 기자 하싼 타신의 동상)
(터키인들의 낚시 사랑이 대단한 것 같다.)
광장 근처에서 점심을 (이스켄데르 케밥을 맛있게) 먹고 찾아간 다음 목적지는 고고학 박물관. 그런데 바로 옆에 민속 박물관도 있다.
(맛보기 조각상들부터 심상치가 않다.)
(이즈미르 고고학 박물관에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다. 특히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상들)
(민속 박물관은 건물 외양이 멋들어졌지만 막상 구경거리는 많지 않았다. 4층 건물 중 한 층에만 전통 복식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입장료는 없음)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물어물어 찾아간 아산쇠르(엘리베이터라는 말인데, 1905년에 유대인 부호가 설치했다는 유서깊은 엘리베이터다. 바닷가 저지대와 산비탈 고지대를 잇는 직통로), 난간에도 그 옆 까페에도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오늘 날씨가 썩 좋지는 않아서 최고의 전망은 아니다. 날씨가 받쳐줬으면 일몰 시간까지 기다려 보려고 했는데......
아산쇠르 까페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문득 낮에 신발을 사면서 뭔가 계산이 이상했다는 생각이 들어 얘기를 했더니 옆지기님이 적극적으로 다시 가보자고 한다. 그러면 한참 걸어가야 하는데? 걸어가지 뭐. 신발 가게로 돌아가서 확인해 보니 계산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왕 온 김에(?) 그 가게에서 가방을 하나 사시고 근처 다른 가게에서 선글라스를 새로 쇼핑하심.
1월 19일
숙박을 하루 연장하고 베르가마 (페르가몬) 유적지를 다녀오기로 했다. 페르가몬은 기원전 7세기에 세워진 도시로 알렉산더 사후에 크게 번성했던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였다고 한다. 당시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필적하는 장서 20만권의 대도서관이 있었을 정도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히포크라테스가 활동했던 세계 최초의 종합병원인 아스클레피온 유적지도 유명하다.
오토가르 가는 버스를 타려고 큰길 건너 버스 정류장을 찾아갔는데 근처에 카르트 파는 곳이 안 보인다. 주변 사람들에게 카르트 파는 곳을 물어보니 한 아저씨가 우리에게 어딜 가냐고 되묻는다. 오토가르 간다고 하니 그럼 카르트 살 필요 없다며 그냥 기다리라고 한다. 현금 승차도 되나? 얼마 후에 그 아저씨를 따라 버스에 오르니 아저씨가 자기 카르트로 우리 요금까지 찍어 준다. 테셰퀴르 에데림. 고맙다고 인사하며 돈을 건넸지만 한사코 거절하신다. 카르트 찍어 주고 돈을 받아도 우리가 고마울 상황이지만 이 아저씨는 첨부터 돈을 안 받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럼 더더욱 고맙지요. 시내 버스비도 없는 가난한 여행자는 아니지만, 생면부지 외국인에게 베푸는 순수한 호의가 정말 따뜻하게 느껴졌다.
오토가르에서 베르가마 행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운전기사가 알려준 방향으로 걸어가니 커다란 건축물이 나온다. 레드 바실리카? 로마 시대에 지어진 사원이라는데 사도 요한이 언급한 버가모 교회가 이곳이었다는 설도 있다. 슬쩍 보고 나서 케이블카를 타러 고고씽.
그런데 웬일인지 케이블카는 모두 멈춰 있고 주차장에는 택시 20여 대가 줄을 지어 서있다. 기껏 케이블카를 만들어 놓고 왜 운행을 안 하는 거야? 공사중이라고는 하는데 공사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뭔가 찜찜한 기분으로 왕복 40리라에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베르가마 유적지는 높은 산 위에 있는데 걸어서 올라갈 만한 곳은 아니다.)
(택시를 타고 올라가서 입장권-35리라-을 끊자마자 우리를 따라다니며 안내?를 자청한 견공. 산 아래로 제법 아름다운 호수가 보이는데 가끔씩 비가 뿌리는 흐린 날씨가 야속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에 있으니 석상의 주인은 하드리아누스겠지? 트라야누스 신전이라고도 하니 혹시 트라야누스인가? 정답은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였던 아탈루스 장군이란다. 그나마 이것은 복제품. 그럼 진품은 어디에? 진품은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단다. 그 박물관에는 이곳에서 통째로 뜯어가서 조립해 놓은 제우스 신전도 있다고.)
(독일로 뜯어갈 수 없었던 유적들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간이 늦어서 아스클레피온 유적은 포기하고 베르가마 작은 식당에서 아주 늦은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 덕분에 저녁은 빵과 음료로 때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