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나온 암탉
2부 / 닭장을 나오다
잎싹은 마당을 바라볼 때가 그래도 행복했다. 오리들이 떼지어 돌아다니고,
개가 오리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장난치는 걸 보는 재미가 모이를 쪼아 먹는 일보다 나았다.
잎싹은 눈을 감고 마당을 자유롭게 오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둥우리에서 따뜻하게 알을 품고 있는 모습, 수탉과 밭에 나가는 모습, 오리들을 따라가는 것도 상상했지만, 한숨을 쉬며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소용없는 것이야.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야.’
잎싹은 또 알을 낳지 못했다. 사흘째, 나흘째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했다. 이제는 거의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이었으니까.
"폐계야. 그만 닭장에서 꺼내야겠는걸."
닷새나 허탕을 치던 날, 주인 여자가 퉁명스레 말했다. 죽은 듯이 잠만 자던 잎싹에게도 그 말이 들렸다.
‘꺼낸다고? 닭장에서?’
그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다. '폐계'가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꺼낸다는 말에 갑자기 온몸에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잎싹은 간신히 머리를 들고 물을 조금 찍어 먹었다.
그 이튿날도 알을 낳지 못했다. 잎싹은 더 이상 몸속에서 알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약간의 물과 모이를 먹어 두었다.
'이제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야. 알을 품고 병아리를 키워야지. 난 그럴 수 있어. 마당에 나가면...’
잎싹은 벅찬 흥분으로 기다렸다. 수탉과 어울려 밭에 가고, 땅을 후벼 파는 상상에 잠까지 설쳤다.
알을 낳지 못한 지 이레째, 양계장 문이 열리고 주인 부부가 빈 수레를 밀고 들어왔다. 기운이 없어서 똑바로 서지는 못했지만 잎싹의 정신은 다른 어떤 날보다 또렷했다.
"이제 나간다. 닭장에서! 꼬꼬꼬."
아주 오랜만에 잎싹은 목청을 돋워 보았다. 닭장에 갇힌 뒤로 가장 특별한 날이 온 것이다. 아카시아꽃 향기가 유난히 기분 좋게 코에 스몄다.
"아쉬운 대로 고기값은 받을 수 있겠지요?"
"글쎄, 병든 것 같은데......"
주인 남녀가 잎싹을 두고 말을 주고받았다. 잎싹은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드디어 마당에서 살게 됐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을 뿐이다. 남자가 닭장에서 잎싹을 꺼냈다. 날갯죽지를 꽉 움켜쥐고 아주 간단하게. 일 년이나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닭장에서.
“털썩!”
잎싹은 외바퀴 수레에 던져졌다. 병들지 않았지만 이미 반항하거나 푸덕거릴 정도의 힘조차 없었다. 정신 차리고 목을 세웠지만, 비실거리는 닭들이 같이 실리는 바람에 잎싹은 그만 밑에 깔리고 말았다.
늙은 암탉들은 닭장에서 꺼내져 다른 철망에 한꺼번에 갇혔다. 알을 못 낳지만 건강했기 때문이다. 늙은 암탉들은 모두 트럭에 실렸고 곧 양계장을 떠났다. 그러나 잎싹은 그대로 외바퀴 수레에 있었다. 곧 죽을 것만 같은 암탉들에게 짓눌린 채로, 마지막에 던져진 암탉이 잎싹의 머리마저 덮어 버렸다.
잎싹은 갑갑하게 눌려도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쩌려는 걸까? 왠지 불안해 시끄러운 암탉들 소리가 점점 작게 들리더니 나중에는 들리 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눈꺼풀이 저절로 감겼다.
‘폐계라는 게 이런 건가?’
'설마, 이렇게 죽는 건 아닐 테지.' 용기를 내려고 해도 점점 무서워졌다. 나중에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슬픔이 밀려 올라왔다.
'이렇게 죽다니, 아직은 그럴 수 없어. 마당으로 가고 싶어!'
어떻게든 수레에서 빠져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수많은 암탉이 포개져 있어서 뼈가 바스러지는 듯했다. 잎싹은 꽃이 한창인 아카시아나무를 생각했다. 초록색 잎사귀와 꽃향기, 마당 식구들의 즐거운 모습도 떠올렸다.
‘나한테는 소망이 있었어. 알을 품어서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 암탉으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바람인데, 끝내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죽는구나.’
정신이 가물가물해질수록 잎싹은 상상에 빠져 둥우리에서 따뜻하게 알을 품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언제나 알을 품고 싶었지, 꼭 한 번만이라도. 나만의 알, 내가 속삭이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아기. 절대로 너를 혼자 두지 않아. 아가야, 알을 깨렴. 너를 보고 싶어. 무서워하지 마라...'
마침내 잎싹은 자신이 정말 알을 품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미소를 머금은 채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잎싹은 몸이 흠뻑 젖은 채 눈을 떴다.
'어디에 있는 거지? 내가 죽지 않았나 봐.’
으슬으슬 추웠다. 잎싹은 정신을 차린 뒤에도 몸을 추스릴 수가 없었다. 깃털을 부르르 떨면 좀 나을 것 같았지만 그럴 기운이 없었다. 그런데 머리 위쪽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렸을 때에야 비로소 잎싹은 알아들었다.
"거기, 너 말이야. 들리니?"
잎싹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지독한 냄새가 났을 뿐 주변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멀쩡하잖아. 그럴 줄 알았어! 일어서! 걸어 보라고!"
"안 돼, 너무 힘들어."
잎싹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둑한 산등성이의 나무들과 둑 위에 자라 있는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곳 어디쯤에서 소리가 났다.
"넌 안 죽었어. 빨리 일어나라니까. 서둘러 달아나!“
잎싹은 날개를 움직여 보았다. 다리도 쭉 뻗어 보고 목도 흔들었다. 기운이 없을 뿐 모두 정상이었다.
비척비척 일어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두 발짝, 그러다 우뚝 멈추었다.
"맙소사, 이게 다 뭐야"
잎싹은 놀란 나머지 털썩 주저앉았다. 주변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들, 잎싹이 밟고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은 암탉들이었다. 그 곳은 죽은 닭을 버리는 구덩이였다.
"난 아직 살아 있는데, 이럴 수가!"
잎싹은 벌떡 일어나서 자기도 모르게 꼬꼬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다녀도 구덩이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디서나 암탉의 시체가 밟혔다. 끔찍하고 소름끼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뭘 하는 거야?"
구명이 밖에서 또 소리가 났다. 그러나 잎싹은 듣지 못하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꼬꼬거리기만 했다.
"어떡하지? 어쩌면 좋아!”
"그러다 큰일난다!"
"난 죽지 않았는데, 멀쩡한데.”
"저걸 봐. 널 노리고 있어!"
“몰라, 몰라. 어쩌면 좋아!"
"그러니까 달아나! 널 노리는 게 안 보이니? 멍청한 닭아! 저 눈이 널 보고 있다니까!"
마치 호통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잎싹은 그제서야 소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소리가 나는 반대쪽의 풀숲에서 날쌘 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그것의 두 눈빛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는 사실도. 그게 뭔지는 몰라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있으면 당하고 말 거야"
잎싹은 구덩이 밖의 소리에 마음이 쏠렸다.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섬뜩한 눈빛보다는 믿음이 갔다.
"어쩌면 수탉인지도 몰라."
생각지도 않은 말이 툭 나왔다. 어둠 속에서 용감하게 소리칠 만한 인물은 수탉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잎싹은 목소리를 따라 구덩이 끝으로 갔다. 그 곳은 구덩이 벽이 낮아서 쉽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다행이야."
침착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잎싹은 젖은 몸을 부르르 떨며 앞에 있는 친구를 보았다. 마당 식구인 청둥오리였다. 오리 가족과 달리 초록색과 갈색 깃털이 난 청둥오리. 오리 가족이 무리지어 갈 때 언제나 맨 끄트머리에서 따라가는데다 잘 어울리지도 못하던 외톨이. 그 외톨이 도움을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마당 식구를 가까이 보고 있으니까 닭장을 나왔다는 게 실감났다.
"고마워, 날 도와 줬구나!"
잎싹은 닭장을 나온데다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고마워할 건 없어. 저 녀석을 그냥 봐줄 수 없었을 뿐이니까. 녀석이 누군가를 산 채로 잡아가는 걸 보면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거든."
"저 녀석이 누구야?"
"족제비!
청둥오리는 족제비라는 말을 할 때 목덜미 깃털을 치르르 떨었다. 잎싹도 덩달아 몸을 떨었다. 저쪽 멀리서 족제비가 우뚝 서서 잎싹을 노려보고 있었다. 훼방꾼과 놓친 먹이에게 몹시 화난 모양이었다.
"돌아가. 이제 살았으니까."
"어, 어디로 가지?"
청둥오리가 뒤뚱거리며 걸어갔지만, 잎싹은 머뭇거렸다.
청둥오리는 잎싹을 데려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함께 마당으로 가고 싶은데 돌아가라니.
"닭장에는 다시 안 갈 거야. 이제 겨우 나왔는걸. 나는 폐계라고!"
"페계? 그게 뭐니?"
"글쎄, 아마 닭장을 나와도 좋다는 말일 거야."
"아무튼 여기 있는 건 위험해. 어디로든 가란 말이야. 난 너무 늦었어.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텐데."
청둥오리는 피곤해서 뒤뚱뒤뚱 걸어갔다. 잎싹은 족제비를 슬쩍 돌아보고 얼른 청둥오리를 따라갔다.
"구덩이에 내가 있는 걸 어떻게 알았니?"
"저수지에서 오는 길에 족제비가 얼씬거리는 걸 보았어. 그건 구덩이에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암탉이 있다는 뜻이거든. 난 알아. 그 못된 녀석"
청둥오리가 다시 목덜미 깃털을 떨었다.
“녀석은 언제나 살아 있는 먹이를 찾아다닌단 말이야. 보통 내기가 아니거든. 게다가 아주 크지. 다른 녀석보다 훨씬 더. 그래서 자기가 대단하다는 걸 보여 주려고 못되게 구는 거라고. 너처럼 아직 살아 있는 암탉은 좋은 사냥감이지. 가끔씩 있는 일이야. 넌 운이 좋았어."
"그래, 난 운이 좋았어. 네 덕분이야."
잎싹은 청둥오리를 바싹 따라갔다. 좋은 사냥감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저절로 깃털이 곤두셨다.
"하하하. 너 같은 암탉은 처음이야, 아우성치기를 참 잘 했어. 팔팔한 사냥감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족제비도 고민이 컸을 거다.”
청둥오리가 유쾌하게 웃으며 구덩이 쪽을 보았다. 족제비가 아직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잎싹은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청둥오리는 당당했다.
"언젠가는 또 만나겠지. 저 녀석은 포기하지 않아."
"그, 그러니?”
“아마 거기서 살아 나온 암탉은 네가 처음일 거야."
"난 죽은 게 아니었어."
잎싹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청둥오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앞서 갔다.
잎싹과 청둥오리는 아카시아나무 아래를 지나서 마당으로 갔다.
"어디로 갈 거니?"
청둥오리가 물었다. 잎싹은 또 머뭇거렸다.
"저. 나는 말이지, 닭장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어.”
"그 말은 아까도 했잖아."
"그, 그래. 아까도 했지." 잎싹은 청둥오리가 도와주기를 바라며 말했다.
"저, 나를 데려가 줄 수는 없니?"
"어디로? 헛간으로?”
청둥오리는 매우 난처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잎 싹의 처지가 안됐는지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다.
"사실은 나도 나그네라서. 하지만 뭐, 너도 암탉이니까."
청둥오리는 잎싹을 데리고 마당 식구들의 보금자리인 헛간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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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연을 만나 알을 품을수도 있겠네요
3부가 기다려 집니다 ♡
네, 알을 품어 부화합니다.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