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에게 술 이야기를 빼놓을 수 있을까. 고전 속에는 술과 관련된 일화가 유독 많다. 고전의 주인공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신다.
임금이 사는 대궐에서도 관리들이 이른 새벽부터 음주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조선의 대문호 서거정(1420∼1488)가 쓴 <필원잡기>에 따르면, 사간원(국왕의 행위를 비판하고 관리를 탄핵하던 오늘날 언론과 같은 기능의 기관) 관리들이 하루 종일 술독에 빠져 살았다.
사간원은 업무가 과중하지 않아 술마시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것이다. 술은 식전부터 제공됐다. 숙직한 관원이 일어나기 무섭게 잡무 보는 서리들이 아침인사를 하면서 술상을 올린다. 안주는 약과였고 잔은 거위 알처럼 컸다. 관원들이 모두 출근한 후에도 과일상을 차려놓고 종일 술을 마셔댔다. 요즘 사람들이 커피나 차를 수시로 들듯이 사간원 관리들은 술을 마셨던 것이다. 사간원은 금주령이 내려져도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이를 오히려 술마시는 거슬 큰 자랑으로 여겼다.< 필원잡기>는 조선 초 조운흘이 이런 세태를 꼬집어 "한잔 한 잔 다시 한 잔(一杯一杯復一杯), 대사간이 춘풍 앞에서 졸도하도다(大諫醉倒春風前)"라고 시를 썼다고 소개한다. 서거정은 "내가 대사간(사간원의 우두머리)이 되고서 과일상을 폐지했지만 서리들의 아침인사상은 전과 다름없었다"고 탄식했다.
이에 반해 같은 대간에 속하는 사헌부(관리의 부정부패를 처벌하는 검찰기능의 기관)는 송사나 옥사를 심리판결하는 일로 격무에 시달렸다. 사헌부는 일 속에 파묻혀 살았을 뿐만 아니라 사무 처리 또한 엄정해야 해 몸가짐이 철저했다. 하인들도 주인과 행동거지가 같았다. 사간원 관원은 붉은 옷을 입은 하인을, 사헌부 관원은 검은 옷을 입은 하인을 앞세웠다. 주인처럼 한껏 취한 사간원 관원의 하인들은 사헌부 관원의 하인들에게 "재미없이 술도 못 마셔 얼굴빛도 검고 옷도 검구나"하며 놀렸다고 <필원잡기>는 말한다.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도 관리들의 상습적 음주행태를 비판하면서 "관청에 있는 자는 조반(早飯·아침 먹기 전에 드는 식사), 조반(朝飯), 주반(晝飯)을 먹으며 술은 때를 가리지 않고 먹는다. ..(중략).. 술이 깨어 있는 날이 없으니 이렇게 하여 병을 얻어 폐인이 되는 사람도 헤아릴 수 없다"고 개탄한다.
조선시대 여러 왕들도 술을 즐겼다. 제9대 왕 성종(재위 1469∼1494·1457~1494)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애주가였다. 조선 중기의 문신 차천로(1556~1615)의 <오산설림초고>에 따르면, 성종은 주로 독한 소주를 마셨다. 그런 성종은 술로 인한 비사가 많았다. 성종은 커다란 옥잔을 늘 곁에 두고 술을 마셨다. 임금이 거나하게 취하면 신하에게도 옥 술잔에 술을 부어 주었다.
어느날에는 한 종친과 술을 마시면서 평소처럼 옥술잔에다 마시라고 명했다. 그런데 이 종친은 술을 들이킨 뒤 옥잔을 옷소매에 넣고 춤을 추다가 거짓으로 땅에 엎어져 깨뜨려 버렸다. 술을 과하게 많이 마시는 임금에게 술을 경계하고 멀리할 것을 권고하려는 의도였다. 성종은 종친의 속내를 파악했던지 그를 처벌하지는 않았다. 술을 좋아했던 성종은 그러나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술을 소통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조선후기 서얼출신 문인인 성대중(1732~1809)의 <청성잡기>에 따르면, 충무공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뒤로 날마다 포구의 백성들을 불러놓고 술과 음식을 마련해 대접했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충무공을 두려워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웃으면서 서슴없이 농담까지 하게 됐다. 대화 내용은 모두 고기를 잡고 조개를 캐면서 지나 다닌 바닷길에 관한 것들이었다. 충무공이 해전에서 연전연승했지만 전라좌수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순신은 수군으로서의 경력이 거의 없었다. 술자리를 통해 백성들과 소통하면서 남해 앞바다를 손바닥 보듯 알게 된 것이다.
<청성잡기>는 "`어느 곳은 물이 소용돌이쳐서 들어가면 배가 뒤집힌다. 어느 여울은 암초가 숨어 있어 반드시 배가 부서진다`는 말을 공이 일일이 기억했다가 다음 날 아침 직접 나가 조사했다"며 "왜군과 전투를 하면서 번번이 적들을 이런 험지로 유인했는데 그 때마다 왜선이 여지없이 부서져 힘들여 싸우지 않고도 승리했다. 우암 송시열은 장수는 물론 재상들도 그처럼 해야 한다고 했다"고 전한다.
조선의 존재를 유럽에 처음 알린 <하멜표류기>의 저자 하멜(1630~1692)이 제주도에 표류해 조선인을 첫 대면하는 장면에서도 술이 등장한다. "처음에 우리는 목에 둘러 쳐진 쇠사슬 때문에 실망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원주민(조선병사들)에 대한 신뢰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령관(대정현감 권극중)은 우리에게 아락술을 한 잔 씩 부어주었던 것이다." 아락(arrack)은 아랍어 땀에서 유래했으며 증류주를 말한다. 여기서는 소주를 뜻한다.
조선사람들은 음식도 나눠줬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하멜 일행도 포도주를 전달했다. "우리는 자진해서 군대사령관에게 포도주와 선장의 은술잔을 내주었다. 호의를 나타내는 동시에 잘 봐 달라는 일종의 뇌물이기도 했다. 이것이 통했다. 포도주 맛이 좋았던지 그들은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으며 나중에는 대단히 기분이 좋아져 우리에게 아주 친근한 태도를 보이며 배웅해 주기까지 하였다."
조선후기 문인 이학규(1770~1835)의 <낙하생집>은 소주로 인해 인생을 망친 경상도원수를 언급한다. "소주는 노주(露酒)다. 원나라 때 처음 들어왔다. ..(중략).. 김진을 경상도원수로 삼았더니 경상도 기생을 많이 모아 무리와 밤낮으로 소주를 마셨다. 김진이 소주를 좋아하니 군중에서 `소주도(燒酒徒·소주를 마시는 술꾼)`라 불렀다. 왜구가 마산을 쳐서 불태웠지만 사람들이 소주도를 앞세워 왜구를 공격하라며 움직이지 않았다." 김진은 고려 우왕 2년(1376) 경상도원수가 됐으며 왜구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죄로 처벌받아 창녕과 가덕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세조때 문신 홍일휴(1412~1464)는 술로 인해 죽었다. 시를 잘 지었고 중국어에 능통해 여러 차례 북경을 왕래했으며 벼슬은 종2품 중추원 부사까지 올랐다. 그는 인물이 출중했지만 지저분했다. 세조가 그의 용모를 두고 "이 사람은 깨끗하지 못하다"고 놀리기까지 했다. 명나라에 선위사로 파견돼 가던 도중 홍주(홍성)에서 과음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다음은 <용재총화>의 내용이다.
"중추 홍일휴는 용모가 웅위하고 조그만 일이라도 거리끼지 않았다. 성질이 깨끗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항상 얼굴을 씻지 아니하고 머리를 빗지 아니하며 음식도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았다.
..(중략).. 일찍이 사신이 되어 남방으로 갔다가 하룻저녁에 여러 말의 술을 마시고 그만 죽었다. 김수온이 애도의 글을 지어 술을 중히 여기고 인생은 한 털만큼 가볍게 여겼다고 하였다."
탈무드는 "술은 악마의 선물"이라고 했다. 고금을 막론하고 지나친 음주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