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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라!
(누가복음 15:11-32)
[ 서론 ]
여러분은 일상에서 언제 기쁨을 누리십니까? 많은 이들이 의무와 책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릴 때 기뻐합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될 때! 퇴근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칭얼대던 아기가 잠들고 “육퇴”, 즉 “육아 퇴근”을 할 때! 우리는 기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의무와 책임을 완벽히 감당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 될 때도 있습니다. 모든 과목에서 1등급, A+ 성적을 받기! 직장에서 요구하는 것을 완벽하게 해내기! 육아 전문가가 말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아이를 기르기! 하지만 나만큼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용납받을 때, 우리에게는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 두 가지 삶의 방식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책임 없는 쾌락”, “기쁨 없는 책임”입니다. 책임에서 벗어나서 쾌락을 누리는 것, 또는 기쁨 없이 그저 책임을 다하는 데에만 몰두하는 것! 우리는 이 양극단 사이 적당한 지점을 찾아서, “워라밸”, 일과 여가의 균형을 맞추고는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이 양극단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둘째 아들은 책임 없는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왔던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가까이 나아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환대하셨습니다.
이와 반대로 첫째 아들은 기쁨 없이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했지만, 기쁨 대신 교만과 분노가 가득했던 사람들이지요.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환대하며 함께 식사하시자, 그들은 수군거리며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아버지를 통해, 양극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기쁨과 책임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비유를 살펴보며 네 가지로 말씀을 듣겠습니다. 먼저, 두 아들의 모습을 통해 기쁨이나 책임을 추구하는 잘못된 방식 두 가지를 듣겠습니다. 이어서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기쁨과 책임을 추구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듣겠습니다. 마지막에는 적용으로,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우리의 기쁨과 책임에 대해 들읍시다.
[ 책임 없는 쾌락 ]
첫째, 기쁨을 추구하는 잘못된 방식은, 책임 없는 쾌락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즉,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야지만 쾌락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둘째 아들은 지금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유산은 언제 나눠 줍니까? 부모의 임종 전에 나눠 줍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아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까지 도저히 기다리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돌아가시거나, 아니라면 제 몫이나 미리 주시지요.”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하거나,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큰아들과 작은아들 모두에게 살림을 나눠줍니다. 이 당시 장남은 전체 유산의 2/3를 받았고, 나머지 아들들이 1/3을 나눠 받았습니다. 이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둘밖에 없었으니, 둘째 아들은 재산의 1/3을 받았습니다.
13절을 보시면 며칠 지나지 않아서, 둘째 아들은 재물을 다 모아서 먼 나라로 떠나버립니다. “먼 나라”는 이방입니다. 지켜야 할 율법도 없고, 책임져야 할 가족도 없는 곳이지요.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낭비합니다. 30절에 나오듯이, 둘째 아들은 창녀들에게 돈을 쓰며 쾌락을 좇아 살았습니다. 결국, 14절에서 재산을 모조리 다 써버리지요. 무려 가족 재산의 1/3을 모두 날려버립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 흉년이 들어서 궁핍해지기 시작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아직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붙여 살다”라는 말은 “고용되다”라는 뜻입니다. “(먼지가 신발에) 묻다”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마 10:14). 다른 데서는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다, 연합하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마 19:5; 고전 6:16).
둘째 아들은 지금, 이방인에게 먼지처럼 붙어살려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자기 몸을 맡기듯이, 이방인과 연합하여 그에게 자기를 맡기려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이방인은 그 지역의 부자이거나, 둘째 아들과 평소 친분이 있던 사이였겠지요.
하지만 곧 그가 둘째 아들이 붙여 살기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15절 뒷부분을 보십시오. 그는 둘째 아들을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합니다. 돼지는 이스라엘 사람이 키우지도, 먹지도 말아야 할 부정한 가축이었지요. 그런데도 그는 둘째 아들에게 돼지 치는 일을 시킵니다.
충분한 보수를 주지도 않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둘째 아들은 돼지 먹이로 쓰이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합니다. 이방인처럼 살려다가 돼지처럼, 아니, 돼지만도 못한 삶을 삽니다. 그런데 이 돼지 먹이마저도, 둘째 아들에게 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가난한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머물던 곳에 그런 율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율법이 있어도 잘 지켜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곳에서 둘째 아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복지 순위에서 가장 뒤로 밀렸겠지요.
이런 비참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의지해야 할 참된 대상을 떠올립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관대한 분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아버지의 아들인 자신은, 타지에 와서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이제 그는 아버지가 허락하신다면 품꾼이라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책임 없는 쾌락’을 추구하는 이들이 겪는 비참함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의무, 교회의 가르침과 지도를 무거운 짐으로만 여기곤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불편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쏙 빼고 위로가 되는 말, 야망과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말, 내 선택을 합리화해 주는 말만 골라 듣지는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책임 없는 쾌락을 추구한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시간과 힘과 감정을 쓰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도 편하고 유용한 것만을 취합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과 상황은 회피하겠지요.
이런 일이 반복되면, 우리 삶은 빈곤해집니다. 삶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것을 이겨낼 힘이 길러지지 않아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가벼운 관계만 맺어왔기에, 자기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도와주는 친구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둘째 아들이 의지했던 이방인은 그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럴 의지가 없었거나, 능력이 없었거나, 둘 다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정말로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책임과 의무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타국에 가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기는커녕, 평생 부정하게 여겨왔을 돼지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책임 없는 관계 속에서, 진정한 자기다움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책임 없는 쾌락은 우리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를 책임지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그분은 모든 것을 가진 넉넉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관대한 분이십니다. 배은망덕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는 우리마저도 환대하십니다. 그분의 넉넉함과 관대함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듣겠습니다.
[ 기쁨 없는 책임 ]
두 번째로, 책임을 추구하는 잘못된 방식은 기쁨 없는 책임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즉, 그저 의무감만으로 책임을 지며 사는 것이지요.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기뻐하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엽니다. 이 당시, 살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으면 온 마을이 축제를 열 수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을 위해 떠들썩한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때 마침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옵니다. 25절에 나오는 “밭”은 15절에 나오는 “들”과 같은 말입니다. 둘째 아들이 타국에서 돼지를 치던 곳이지요. 맏아들은 품꾼들과 함께 열심히 일하고 돌아오는 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집 가까이에 오자, 악기와 노래, 춤추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맏아들이 한 종을 불러내어서 무슨 일인지 묻습니다. 26절의 “물었다”라는 말은 여러 번, 구체적으로 질문했다는 뜻입니다. 종의 대답이 27절에 요약되어 나옵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이 말을 들은 맏아들은 28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집으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집 밖으로 나와서, 맏아들에게 들어오라고 권합니다. 이에 맏아들은 참았던 울분을 토해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먼저 자기가 얼마나 아버지를 섬기는 데 최선을 다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얼마나 책임감 있게 일했으면, “명을 어김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맏아들이 한 말 중에 “섬기다”라는 표현은 “종 노릇 하다”, “종처럼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즉, 맏아들은 아들로서 아버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의무감만으로 책임을 졌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받는 아들이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하는 종으로 여겼습니다.
게다가 맏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면서 한 번도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섬기는 일보다, 친구들과 맛난 음식을 먹는 것을 더 바라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한 번도 자기에게 염소 새끼라도 잡아서 잔치를 열어 주지 않았다며 울분을 토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맏아들은 둘째 아들이 얼마나 무책임하며 방탕했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둘째 아들을 잔치를 베푼 아버지마저도 정죄하며 다그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맏아들을 타이르지요. 31절입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무슨 말입니까? 맏아들은 이미 12절에서 둘째 아들과 같이 자기 몫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가졌던 재산의 2/3가 그의 것이 되었지요. 그런데도 맏아들은 자신이 이미 누리고 있는 아들의 신분, 아버지께 받은 많은 재산과 특권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종으로 여기며 전혀 기쁨 없이 책임을 질 뿐이었습니다.
맏아들의 말들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우리말 성경에서 맏아들은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헬라어 성경을 보면, 맏아들은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한글로 그렇게 번역되었을 뿐입니다. 동생을 가리킬 때도 30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아들” 영어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This son of yours” 여기서 맏아들에게 “아버지”나 “동생” 등 가족의 언어로 불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범적으로 살아왔던 맏아들은, 방탕한 동생이 환대받자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가 책임졌던 모든 일은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서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에게 가족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과 거래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기보다, 아버지에게 충성한 대가로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기쁨 없는 책임’에 몰두하는 사람의 비참함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규칙적으로 시간을 내서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후 교리문답 공부도 빠지지 않고, 영상을 통해서라도 새벽기도회와 금요기도회에 참여하실지도 모릅니다. 많은 분들이 가정과 학교와 회사에서 모범적으로 살기를 힘쓰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멈춰서서, 정직하게 이 질문에 답해 봅시다. “그렇게 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십니까? 하나님을 기뻐하기보다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우리의 기도 생활입니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는다면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을 멀리하는 중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기도를 계속하더라도 문제일 수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던 것이 원하는 때에 주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께 이렇게 화를 내지는 않으십니까? “제가 그만큼 순종했으면, 적어도 이 정도 기도는 들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또는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이렇게 따지지는 않습니까? “제가 그렇게 모범적으로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납니까?!”
내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어낼 만큼의 일을 했으니, 당연히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거래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맏아들과 같은지를 판단하는 또 다른 기준이 있습니다. 남들과 자신을 계속 비교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수준을 비교하며, 나보다 모범적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낀다면 우리는 맏아들과 같습니다. 우리가 행한 무언가가 우리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우월감과 열등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또, 예배와 각종 모임에 자꾸 빠지는 다른 사람들, 나만큼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혼잣말이 나오지는 않습니까? “누구는 좋아서 하는 줄 아나?” 예! 좋아서 해야 합니다.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신 하나님, 우리에게 할 일을 맡겨 주신 하나님을 사랑해서, 감사함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맏아들처럼 우월감이나 열등감, 분노에 휩싸입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아직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이루어낸 무언가, 가진 무언가로 여러분 자신의 가치를 매긴다면, 결국에는 우월감이나 열등감, 배신감과 분노에 삼켜질 것입니다. 정해진 규칙을 잘 지키고 모범적으로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면, 삶에 문제가 닥치거나 악인들이 잘 되는 상황에 좌절할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책임을 적게 지는 이들을 미워하며 분노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모범적으로 살든지 그렇지 않든지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과 방탕함뿐만 아니라, 선행과 모범적인 삶까지도 회개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우리의 회개마저도 회개해야 합니다. 순수하지 못한 모든 동기를 회개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회개를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종”이 아니라 “아들”로 불러주십니다.
[ 책임지는 기쁨 ]
자, 여기까지 기쁨과 책임을 추구하는 잘못된 방식에 대해 들었습니다. 이제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쁨과 책임을 추구하시는지 들읍시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책임을 지심으로써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시기에 책임을 지시고, 책임을 지심으로 기쁨을 넘치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소위 “돌아온 탕자 비유”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아들은 둘째뿐만이 아니지요. 첫째는 몸은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떠나 있었습니다. 오늘 비유의 핵심은 잃어버린 아들들 자체가 아닙니다. 그 아들들을 되찾기 위해 책임을 지는 아버지, 아들들을 기뻐하는 아버지가 비유의 핵심입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보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위해 사랑을 쏟아붓습니다. 12, 30절에서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자기 “살림”을 주었다고 합니다. “살림”이라는 말은 원래 “생명”을 뜻합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내어주는 마음으로 아들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직 건강한데도 불구하고 아들을 위해 자기를 죽은 사람처럼 여기며 재산을 나누어 주었지요.
왜 그랬습니까? 아들들을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떠나자 그 아들이 죽은 것 같은 상실을 겪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자 그가 부활한 것처럼 기뻐합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처럼 책임을 내팽개치거나, 맏아들처럼 아들들을 이용하며 거래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어떠하든지 주도적으로 나서서 아들들을 환대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저 멀리 둘째 아들이 비쩍 마른 몸으로, 허름한 옷을 입고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돌아오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단번에 그 아들을 알아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매일매일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멀리서도 바로 그를 알아보고 측은히 여깁니다. 내장이 아플 만큼 사랑과 안타까움이 끓어오릅니다. 그리고 달립니다. 적어도 중년, 노년의 덕망 있는 어른이 달려갑니다.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아들의 목 위에 떨어질 만큼 그를 와락 안고 입을 맞춥니다.
가족을 버리고 재산을 탕진해서 가족에게 망신을 준 저 배은망덕한 아들! 어리석고 못난 저 아들을 그저 사랑합니다. 이 아들은 돌아오기 전에 아버지에게 할 말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말은 아버지의 사랑에 가로막힙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를 끌어안고 입맞추는 사랑에 말을 꺼내지도 못합니다.
잠시 후에 준비한 말을 꺼내지만 미처 다 하지도 못하고 또 가로막힙니다. 아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자기를 품꾼의 하나로 여겨주시기를 요청하려고 했지만, 그 말은 꺼내지도 못합니다. 아버지가 곧장 종들을 시켜서 아들을 환대했기 때문이지요.
22절에는 중요한 단어가 하나 빠져 있습니다. 아들을 만난 후에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얼른”, “빨리”, “어서”입니다. 이 말을 넣어서 읽으면 이렇습니다. “얼른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옷과 반지와 신발을 주는 것은, 지위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관대한 분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관대한 아버지인 줄은 몰랐습니다. 19절 끝에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의 “보소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키는 데 많이 쓰입니다.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할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품꾼으로 보지 않고, 사랑받는 존귀한 아들로 되돌려놓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을 되찾는 데에도 주도적으로 나섭니다. 맏아들은 집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화가 나서 들어오지도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 행동 역시 잔치의 주최자인 아버지를 욕보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맏아들을 찾아 먼저 집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권하지요. 여기서 권한다는 말은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는 행동입니다. 아버지는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먼저 나서서 아들을 부드럽게 타이릅니다.
맏아들의 대답에서 그가 아버지를 이용하며 거래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지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도 부르지 않았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애정을 담아, 31절에서 그를 “얘”, “아이야”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거래나 이용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사랑하는 아들로 대했습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맏아들은 동생 역시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아들”, “This son of yours”라고 불렀을 뿐이지요. 하지만 32절에서 아버지는 동생을 “이 네 동생”이라고 부르며, 맏아들에게 가족의 언어를 회복시켜 줍니다. 그리고 동생의 귀환을 함께 즐거워하자고 초대합니다. “마땅하다”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의미가 담긴 강한 표현입니다. 아버지는 주도적으로 나서서, 관대한 사랑으로 두 아들과 가족을 되찾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하나님을 떠납니다. 하나님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도, 그저 무거운 짐처럼 여기지요. 또, 하나님의 말씀을 형식적으로 열심히 지키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용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사랑을 쏟아부으십니다. 둘째 아들이 어떤 말도 꺼내기 전에 아버지가 그를 끌어안았듯이,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두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모두 아시고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은 동생과 아버지를 향해 분노했습니다. 동생이 다시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려면, 맏아들이 받은 유산의 1/3을 그에게 떼어 주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기 위해서 맏아들은 아버지처럼 동생을 책임지며 희생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되찾기 위해 먼저 나서셨을 뿐만 아니라, 그 독생자이신 성자께서도 희생을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죄에는 대가가 따르고, 용서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먼 길을 달려가서 아들을 맞이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저 높은 하늘에서 이 낮은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9:1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첫째 아들은 동생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아들로서 누리는 자기 이익이 침해되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시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 기꺼이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 대신 죄의 비참함을 모두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내어주어 우리를 살리시고, 아버지께로 인도하셨습니다.
책임질 필요가 없는 대상인 우리, 하나님을 떠나고 이용하기만 하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책임을 지셨습니다. 필요 이상의 책임을 지시며, 쾌락 이상의 기쁨을 누리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에베소서 1:3-6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 결론 – 동참하는 기쁨 ]
말씀을 맺으며 적용점을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방법 세 가지입니다.
첫째, 회개와 예배입니다. 정직하게 회개합시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짐처럼 여기며 무시했던 죄를 회개합시다. 교회와 일상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았던 우리의 이중적인 삶을 회개합시다. 또한 우리의 선행과 순종에 깔린 순수하지 못한 동기를 회개합시다. 하나님을 이용하며, 하나님께 빚을 지우려고 했던 우리의 위선을 회개합시다.
회개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이미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환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어낼 심산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예배합시다.
둘째,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웃들을 환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환대받은 이들이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은 이웃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먼저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환대합시다. 교회에 처음 왔거나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형제자매들을 살핍시다. 정착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정서적 & 물질적 필요는 없는지 먼저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또한 내 책임이 아닌 일들을 마치 내 책임인 것처럼 여기며 형제자매, 교회의 필요를 살핍시다. “누군가는 알아서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책임질 누군가를 찾기보다,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형제자매답게 먼저 나서서 책임을 집시다. 나아가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 먼저 나서서 책임을 집시다. 모두가 꺼리는 일을 똑같이 계산하며 피하기보다, 조금씩 나의 몫 이상을 해나가실 바랍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럴 만한 힘과 사랑과 용기가 없다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닮아 기꺼이 나의 것을 나누며 사랑할 수 있게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녀를 더욱 지혜롭고 관대하게 양육할 수 있는 힘을 구하십시오. 청년, 청소년,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도 부모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직장인 여러분, 모두가 꺼리는 직장의 그 사람을 품고 도울 수 있는 힘과 사랑을 구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합시다.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은 잃어버린 자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때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하고도 큰 선물은 복음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에게 무언가를 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 죄에서 구원하고 영생을 주는 일, 삶의 의미를 주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 열심히 규칙을 지키고 모범적으로 살면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이들! 이들 모두에게,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전합시다. 그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을 증언합시다.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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