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적인 자연현상과 미시적인 입자세계를 연결지어 주는 통계역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를 한 사람들 중에는 맥스웰, 볼츠만, 아인슈타인, 깁스 등을 대표적으로 손꼽을 수 있으나 특히 기체이론과 비가역현상의 이해를 위한 기틀을 마련한 사람으로는 볼츠만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볼츠만 (Ludwig E. Boltzmann, 1844-1906)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궁정신하로 일하던 부친의 2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시절에 가정교사에 의한 교육을 받다가 린츠로 이사가면서 김나지움에 입학하였고 후에 비엔나 대학에 들어가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였으며 186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미 25세에 그라쯔 대학의 수리물리학 담당의 정교수가 되었으며 그 후로 비엔나대학, 뮤니히대학, 라이프찌히대학 등에서도 교편생활을 하였다.
그는 자연과학 이외에도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많은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당대의 과학적, 철학적 사상의 흐름에 역행하여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1906년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계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우선 그의 대표적인 업적을 살펴보면 첫째로, 볼츠만 인자로 불리우는 분배법칙을 들 수 있다. 이 법칙은 종래의 분자들의 속도에 관한 맥스웰의 분배법칙을 확장시켜 외적인 힘의 작용을 함께 고려하여 얻은 것으로 분자들의 에너지가 주로 절대온도와 볼츠만 상수의 곱으로 주어지는 열적인 에너지 근처에 분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 볼츠만 인자는 현재의 거의 모든 통계역학적 계산에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둘째로는, 1872년에 발표된 볼츠만 방정식으로 이는 분자들의 속도에 대한 분포함수의 시간적 변화를 알 수 있는 운반 방정식이다.
그 이전에는 먼저 기체분자들이 평형상테에 도달해 있다고 가정하고 문제를 풀었으나 볼츠만은 그러한 가정을 배제하고 처음에 비평형상태에 있는 기체가 어떻게 평형상태로 변화해 가는가 하는 점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 볼츠만 방정식은 비선형 적분 미분 방정식으로 완전한 해를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나 특별한 경우에 대하여 볼츠만은 해를 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평형상태에서의 맥스웰 분포함수에 해당된다. 원래가 이 방정식을 유도하는 과정이 어떤 체계적인 방법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비상한 물리적인 통찰력에 의하여 유도된 것인만큼 그 해법 또한 쉽지 않으며 볼츠만이 특수해를 구한 후 근 40여년이 지난 후에야 그보다 좀더 일반적인 해를 구하는 방법이 겨우 개발된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 볼츠만 방정식은 직접 그 해를 구하지 못하여도 간접적으로 매우 유용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며 볼츠만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열역학 제2법칙의 역학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였다. 종래의 열역학 법칙들은 경험에 의하여 기술된 현상학적인 법칙들로서 아무런 역학적인 근거를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그 중에도 비가역 현상을 설명하는 제2법칙은 무질서도를 나타내는 엔트로피라는 양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볼츠만은 그의 방정식으로부터 엔트로피에 음의 부호를 붙인 양에 해당되는 H 라는 함수가 만족시키는 H-정리라는 것을 유도하였다. 이 정리에 의하면 비평형계에 대해서는 H 함수가 언제나 감소한다는 것이며 이는 바로 부호만 바꾸면 열역학 제2법칙의 우주의 엔트로피는 자발적인 과정에 대하여 항상 증가한다는 것과 대등한 것이 된다.
이 정리는 동시에 볼츠만 방정식에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일방적인 방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론은 당시에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가장 격렬한 논쟁의 촛점은 가역성과 회귀성에 대한 문제들이었다. 로슈미트에 의하여 점화된 비가역성에 대한 논쟁은 시간의 흐름의 방향을 바꾸면 원래의 결과를 나타내는 고전역학의 기본적인 운동방정식의 원리에서 유도된 비가역적인 볼츠만 방정식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볼츠만의 답변은 확률적인 개념을 활용하여 H 함수가 감소하는 확률이 훨씬 큰 것이며 실질적으로는 H 함수가 증가하는 확률도 있기는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답변은 반대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였고 볼츠만은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자기 이론을 연마하였으나 결국은 그의 제자들인 에렌페스트와 스몰루코프스키 등에 의하여 훗날 볼츠만 방장식의 통계적인 성질이 완전히 밝혀지면서 그 논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또하나의 커다란 논쟁은 고전역학에서 잘 알려진 포앙카레의 회귀정리에서 비롯되었다. 이 정리에 의하면 유한한 체적안에 갇혀있는 어떠한 역학적 계이던 궁극적으로 원래의 상태에 무한히 가깝게 다시 돌아온다고 하는 것이다. 이 정리에 근거를 두고 체르멜로는 볼츠만의 H-정리를 맹렬히 공박하였다. 즉 H 함수가 평형상태의 값으로 진화되어가서 일단 평형상태가 되면 그 값에서 머무른다고 하는 것은 고전역학의 회귀정리에 어긋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볼츠만은 물리적으로 흥미를 가질 수 있는 계에 대해서는 회귀에 필요한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볼츠만은 간단한 계에 대하여 그 회귀시간을 계산해 보였는데 실로 어처구니 없는 천문학적으로 긴 시간이었다.
셋째로 중요한 볼츠만의 업적으로는 열적인 평형상태에 있는 계에 대하여 열역학적인 성질을 구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 방법은 비엔나에 있는 그의 기념비에 아로새겨진 유명한 엔트로피와 확률간의 관계식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엔트로피는 계의 주어진 거시적인 상태에 해당되는 가능한 모든 미시적인 상태의 수의 대수를 취한 양에 비례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 관계식은 모든 미시적인 상태들의 사전확률이 같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이 가정을 보완하기 위하여 볼츠만은 에르고드 가정이라고 하는 것을 도입하였다. 이 가정에 의하면 하나의 계가 궁극적으로 모든 가능한 미시적인 상태들을 두루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볼츠만의 에르고드 가정은 후일 여러 수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어 수정된 형태로 발전되어 통계역학의 가장 핵심적인 근본을 파헤치는 근대 에르고드 이론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볼츠만의 커다란 업적들은 당시에는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오히려 극심한 반론을 불러 일으켜 볼츠만은 끝까지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였고 때로는 극도의 우울증과 비관에 사로잡혀 당시의 과학계, 특히 구라파 대륙의 독어유통지역에서 소외당한채 불우한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 볼츠만을 불우하게 만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19세기 초까지 대체로 받아들여지던 원자론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점차로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고 있었으며 또한 그동안 정립되어 온 뉴턴의 고전역학이 허점을 보이기 시작하며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때는 아직 양자론이 탄생하기 이전으로 다원자분자로 구성된 기체의 비열이 이론적인 계산과 실험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점이나 볼츠만 방정식에서 비롯된 가역성과 회귀성에 관한 논쟁등은 모두 원자모형의 허구성과 이를 역학적으로 해결하려는 접근방식의 오류에서 기인한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과학자들의 견해였다.
실로 볼츠만의 방정식이 강력한 반론을 불러일으킨 것도 기술적인 측면에서라기 보다는 저변에 깔린 원자 개념과 역학적인 방법의 도입에 대한 철학적인 반발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마하는 원자의 실존을 믿지 않고 있었으며 과학의 기본적인 목표는 자연현상을 기술하기 위한 "사고의 경제"를 이루는 것이지 가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원자모형등으로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사람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외적인 세계가 과학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마하, 오스트발트, 헬름홀츠 등에 의하여 주장되고 유행되던 당시의 구라파대륙의 과학철학적인 사상은 경험에 의한 현상학적인 접근방식이었다. 그들은 원자론에 근거를 둔 역학적인 접근방식을 과학적인 물질주의로 보고 이를 맹렬히 공박하였던 것이다. 볼츠만의 철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우선 그가 물리학자로서 그 분야의 연구에서 상당한 업적을 성취한 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자신의 이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당시의 사조가 순수철학의 이상주의가 과학의 영역에 침범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그는 오히려 과학자로서 순수철학의 사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게 된 것이다.
일찌기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철저히 신봉하며 외적세계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실존주의를 주장하였고 후에는 과학적인 물질주의를 표방하였다. 그는 존재와 의식과의 관계를 다루는 인식론에 과한여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믈질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이상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불에 대한 반응을 예로 들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불에 대한 반응을 보이고 있으므로 그들의 감각도 우리의 것과 같다고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즉, 주관적인 이상주의에 의하여 사고하는 주체에만 부여된 독립성을 배제함으로써 우리의 사고방식을 오히려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단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하고나면 한걸음 더나아가서 비생명체의 객관적인 존재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물리학의 이론의 본질과 발전과정에 대하여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론이란 순수한 지적인 내부상으로 보고, 이론의 목적은 우리 자신 내부에 존재하는 외적인 세계의 상을 구현하여 우리의 모든 생각과 실험을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진정한 이론가는 가능한데까지는 복잡한 수식을 사용하지 않고도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리학 이론의 발전과정을 그는 연속적으로 변천되어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불연속적인 도약에 의한 발전이며 언제나 논리적으로 가장 간결한 길을 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어떤 이론이 오래동안 발전해오며 어떤 범주의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다 하여도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서 종래의 이론과 모순되는 경우에 사람들은 매우 다른 새로운 각도에서 이론을 찾게되고 종래의 이론을 고수하는 사람들과의 투쟁을 벌이게 되며 마침내 새로운 이론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렇다고 새로운 이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고 종래의 이론에도 그 나름대로의 유용성이 있으며 새로운 이론 역시 더욱 유용한 이론에 밀려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철학적인 뒷받침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강력한 원자론의 지지자로서 또한 많은 논쟁을 겪게된 것이다. 후에 양자론의 대두와 패랭의 유명한 브라운 운동에 관한 실험을 통하여 원자의 실체가 명백하게 증명되어 끝내는 마하자신까지도 원자론을 믿게되었으나 당시에는 거센 시대적 사조에 밀려 볼츠만 자신은 많은 좌절감과 어떤 위기의식까지도 느낀것 같았다.
즉 그의 기체 이론이 영원히 사장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우가 1898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인 <기체이론에 관한 강의> 제2부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제 그의 서문의 일부를 잠시 살펴보자.
"나의 견해로는 만일 기체이론이 이에 대한 일시적인 적개심으로 인하여 잠시라도 망각속에 팽개쳐 진다면 이는 과학을 위하여 커다란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 나는 시대적인 사조에 거역하여 발버둥치는 미약한 일개인에 지나지 않으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는 기여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즉, 이 기체이론이 다시 부활하게 될 때 너무 많은 내용이 재발견되어야만 할 필요가 없게 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 책에 가장 어렵고 잘못 이해하기 쉬운 부분들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재하는 바이다." |
이와 같은 불굴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평생업적인 기체이론이 당시의 과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함에 대한 실망과 가계에 전래되어온 지병의 악화등이 그의 자살을 촉진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양자론의 확립과 패랭의 실험을 통하여 원자론의 정당성은 확고하게 입증되었고 또한 스몰루코프스키, 아인슈타인, 깁스 등에 의하여 근대 통계역학의 기초가 다져지면서 그의 업적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가 확립되었다. 이제는 볼츠만 방정식이 희박한 기체나 플라스마의 여러가지 비가역적인 성질들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잘 밝혀져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볼츠만 방정식을 확장시켜 농축기체나 심지어는 액체상태에 관한 성질을 규명하는데에도 이용되고 있다.
출처 :http://147.46.41.146/%7Edar2002/essay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