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으로 설득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수필을 ‘교술문학’이라고 한다. ‘교술’론은 수필을 곧잘 곤경에 빠뜨린다. 교술이라는 말에는 ‘비문학성’이라는 속성을 전제하고 있다. 문장적 특성에서 볼 때도 교술적인 기술법에서는 묘사보다는 설명적 진술이 기본이다. 내 개인의 생각으로는 설명적 진술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교술성 때문이라고 본다.
수필작가가 이야기를 만들면서 조급해한다. 독자들이 나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뜻(의미)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조급함이 설명하도록 만든다. 내게 보내온 동인지 한 권을 뽑아들고 ‘설명조 문장’을 찾아 보았다.
“응병시약(應病施藥)이란 결국 병에 따라 각각 다른 처방과 치료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인문학이라는 매개체가 바로 환자와 의사 사이의 소통을 위한 징검다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욱일기 디자인이 생활 속에서 은밀하게 침투되는 것을 모르고 지나쳤다고도 할 수 있지만(설명이다.) 이렇게 백주대로 상에서 깃발을 휘드르는데”
흔히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장은 설득조 진술이다.
“그들의 사랑을 행복이라는 단어로 포장한 폭력성이 죄책감 없이 합리화되어 간다. 누군가에게는 힘든 삶에 치유의 묘약이었을 사랑의 행복론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상처를 입는다.”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목마른 사막을 지나거나 험난한 정글을 지나려면 길동무 없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길동무와 천천히 보폭을 맞추면서 걷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생의 속도를 알맞게 걷는 길은 환자만의 과제가 아니기에 더욱 힘든 것일까.”
일반적으로 수필 문장에서 설명조 내지 의견의 피력은 교술성이 수필의 정의에서 없어지지 않는 한에서는 거의 숙명적이랄 수 있다.
위의 문장이 함의하는 뜻울,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려는 것이다. 교시성이 강한 문장이라고 하겠다. 설명조이고, 설득을 하는 문장이다. 이것은 주제를 전달해야 하는 수필의 속성상 필요악인지도 모른다. 주제가 전달되게 하는, 즉 소통이 일어나게 하는 방법으로 수필에서는 설득의 방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설득에는 논리성이 수반한다. 그러나 소통은 논리성이나 객관성을 뛰어 넘는다. 소통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말고, 상대(독자)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인 이상은 더더욱 필요하다. 결국 소통은 나의 의사를 전하려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이다.
수필쓰기를 하게 되면 .나의 주장과 상대의 의견이 갈등을 일으킨다.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을 수필이라는 글쓰기의 틀에 짜 맞추어서 이야기로 엮어서 답을 찾아야 한다. 수필쓰기 과정에서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정보를 논리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기 보다는 어떤 맥락 속에 실어서 전해주어야 한다.(이야기에 담아서 전해주어라는 뜻이다.)
작가도, 독자도 상대의 마음을 잘 이해하여서 소통이 쉽게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맥락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나는 맥락을 이야기라고 전제 한다. 이야기를 만들어서 정보를 담아 전달해야 한다. 이야기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이야기로 만들어서) 전하는 것이 수필이다.
냉장고를 선전할 때, ‘고객분께서는 사실 때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꼼꼼이 살펴 본 후에 사도록 합시다.’라고 했다면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기 때문에 수긍을 한다. 그러나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 한다.’라고 할 때는 설득 이전에 감정적인 소통이 일어난다.
상대에게 내가 의도하는 것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논리적인 설명이 더 유효갈까.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유효할까.
물론, 내장고를 살 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수필은 논리저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고,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