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는 한국 해군 창설 80주년과 국방일보 창간 61주년에 대해 비중 있게 보도했다. 초계정 하나 없이 불과 30명으로 출범한 우리 해군은 80년의 세월을 거쳐 핵잠수함을 건조하기까지 성장했다. 또 군 기관지인 국방일보는 당초 정치공작에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복합 콘텐츠로 변화했다. 한국 현대사와 군사의 관계를 5분 동안 복습한다.
◇ 초계정도 없던 해군의 발전사
우리 해군이 2025년 11월 11일 창건 80주년을 맞았다. 12일 헤드라인은 이를 전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서울 시내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창설 당시 제대로 된 전투함 한 척 없던 우리 해군은 오늘날 이지스 구축함과 3000t급 잠수함, P-8 해상초계기 등 첨단 전력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이 해양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축전을 보냈다.
핵잠수함을 건조·보유하기까지 한 한국 해군의 이야기는 1945년 8월 21일 해방 직후 혼란기에 시작된다.
독립운동가이자 독일 상선 사관이었던 손원일(KSS-2의 1번함으로 명명)이 서울에 해사대 사무실을 개설한 것이 맹아다. 30명의 대원으로 발족했지만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고, 식량이나 피복의 조달조차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11월 1일에는 미군정청과의 절충을 거쳐 해안 경비대의 조직 편성에 노를 저었고, 같은 달 11일에 70명의 대원과 함께 「해방병단」을 창설했다. 여기에 한국 해군의 원류가 생겨났다.
이후 일본해 군 경비부가 있던 진해로 옮겨 1948년 한국 정부 수립과 함께 한국 해군으로 정식 출범했다. 흥미로운 것은 육해공군 중 가장 일찍 창설되면서 일본해군 출신 인사들의 영향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상선사관을 중심으로 한 민간인이 주도했기 때문에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됐다.
한국 해군은 92년 독일에서 잠수함을 도입해 국내 생산체제를 확립, 2000년대 들어 대양해군을 내세웠고 현재는 AIP 탑재 잠수함과 이지스 구축함 등 227척의 함정을 보유해 해군력 순위에서 8위에 오를 정도로 성장했다. 외양해군(블루워터네이비) 지향의 배경에는 독일 상선사관으로 세계를 누빈 손원일의 DNA가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 군대에 대한 정치 공작에서 기원한 국방일보
본 연재로 워치하고 있는 한국군의 기관지 「국방일보」가 창간 61주년을 맞이했다. 1964년 전우라는 이름으로 산성을 낸 이 신문은 광복군 출신과 한반도 분단이라는 특수한 지정학적 상황이 빚어낸 필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국방일보의 기원은 한국군의 정훈제도에 있다. 정훈이란 정치공작의 준말로 뿌리는 17년 러시아 혁명에서 비롯된 정치장교제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치장교 제도는 중국 국민당군을 거쳐 1940년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 광복군으로 전파됐다.
광복군 초대 참모장인 이범석은 나중에 한국의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서 정치장교 제도를 한국군에 도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군 고문단으로부터 비민주적이라며 강력한 반발을 받아 타협의 산물로 정훈국이 설치됐다. 소련군과 같은 감시·통제 기능은 갖지 않고 정신교육·홍보·문화활동으로 제한됐다.
그리고 64년 11월 16일 「정훈」 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지로 「전우」가 창간되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친필 휘호를 보낸 것을 보면 중요한 프로젝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임무는 명확하며 장병 정신교육을 통해 올바른 군인정신, 국가관, 안보관을 함양하고 적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정신적 대비를 확립하는 데 있었다. 이 신문이 북한군 기관지 조선인민군과 마찬가지로 체제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병사들의 전의를 유지하는 선전선동의 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왜 한국은 이런 사상 프로파간다적 기관지를 필요로 했을까.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같은 언어, 같은 문화를 가진 민족이 총구를 겨누는 상황에서 왜 싸우느냐는 대의 제시는 사활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61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정훈은 공보정훈으로 개칭됐고 국방일보는 지면에 그치지 않고 유튜브 인스타그램 AI 콘텐츠로 진화했다. 과거의 정치선전색은 거의 사라지고 공보정훈병과 장병들은 자신을 언론홍보직으로 자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