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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 이승하 블로그
영화평론가 김주동 씨가 쓴 『속 신과 악마의 동화』(예문관, 1979)에 실려 있는 것이다.
도시파의 뉴 로망 로버트 드 니로
김주동(영화평론가)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는 1943년 8월 17일에 뉴욕의 로우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태어났다. 당시 세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으나 다행히 전쟁의 종착지점이 보이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해 2월, 일본군은 카달카날에서 철수했고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에 항복했다. 그리하여 7월에는 영미 연합군이 시칠리아 섬에 상륙할 수 있었다. 무솔리니가 마침내 실각했다. 이탈리아에 이어 독일과 일본도 항복의 순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당시 미국 영화계는 국민의 사기 앙양 차원에서 전쟁영화를 양산하고 있었지만 그와 함께 스릴 영화, 심리 드라마, 뮤지컬 코미디, 액션 영화 등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1943년에 <카사블랑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퀴리 부인> <영원한 처녀> 등의 명작이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에 뒤늦게 뛰어든 미국은 참전 초기에는 일본과 독일의 파상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서서히 기운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자원과 물자가 풍족하여 전쟁이 지속될수록 기운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드 니로의 아버지는 가톨릭계 이탈리아인의 외아들로, 증조부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왔다. 증조부는 미국에 와서 아일랜드계의 여성과 결혼했는데 드 니로의 아버지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컸다고 한다.
드 니로의 아버지는 이 지방의 미국여성과 결혼했는데 직업이 따로 없었고, 상징파 화풍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전쟁통에 그림이 팔릴 리가 없었다. 즉,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이었던 것이다. 드 니로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는 매일처럼 작은 아틀리에에 틀어박혀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버지는 저도 그림을 그리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캔버스만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어머니가 나가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제게 그림 재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난이 지겨웠고, 그림에 대한 흥미는 자연히 잃어버렸습니다.”
1945년, 드 니로가 만 2세였을 때 부모는 이혼을 하고 말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맡겨졌지만 간혹 아버지한테 가서 지내기도 했다. 어머니는 드 니로를 바르게 키우려고 무진 애를 썼다.
1953년, 열 살이 된 드 니로는 배우가 될 결심을 했다. 어머니의 반대로 잠시 단념을 했지만 꿈을 버릴 수는 없어 계속 영화관 앞을 서성거렸다. 어머니는 아들이 갈망하니까 뉴욕의 드라마틱 워크숍에 다니게 했다. 여기서 아역배우로 발탁되어 영화계로 가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드 니로는 아직 몸도 마음도 너무 어렸다. 몇 개월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드 니로에게 공부는 너무나 지겨운 것이었다.
중학교에 가서도 빈둥빈둥 놀다가 나쁜 친구들을 사귀게 된 드 니로는 어느새 불량청소년이 되어 있었다. 정학 처분을 받아도 정신을 못 차리고 도둑질과 폭력의 나날을 보내다 결국 퇴학 처분을 받았고, 당연히 졸업장은 받지 못한다.
어머니의 눈물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드 니로는 뒷골목의 건달이 되어 세월아 네월아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1960년, 만 17세였다. 다시금 영화배우가 될 공부를 하고 싶었다. 뉴욕의 연기 학원 드라마틱 아트스쿨을 스텔라 아들러가 교장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원서를 내고 연기 테스트를 받았는데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합격을 했다. 유일하게 하고 싶고 할 줄 아는 것이 연기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아들러 교장은 액터스 스튜디오의 리 스트라스버그를 초청강사로 수시로 불러 연기 지도를 맡겼다. 드 니로는 이 두 스승의 마음에 들고자 연기 공부에 열을 올렸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그는 영화계 데뷔를 미루고 유럽으로 갔다. 1963년, 스무 살 때였다.
그는 연기 공부의 폭을 넓히려고 독일로 건너갔다. 롤프 로히너의 희곡을 극화한 <거리의 외침>에 처음으로 출연했다. 그 후 그는 유럽 각국을 방랑하면서 수많은 연극에 출연했다. 영어만 구사해도 되는 소극단 연극에 주로 출연했지만 연기 수업을 폭넓게 할 수 있었다.
1965년, 파리에 있을 때 영화 단역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 마르셀 카르네가 영어를 구사하는 단역을 구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온 중년의 남녀(아니 지랄도와 모리스 로네)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었다. 단역이었지만 출연료가 나와서 몇 주 배곯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정확히 65년에서 66년에 걸쳐서 나는 파리의 서클레르 사원 근처의 싸구려 여인숙에 투숙하고 거리의 예술가들과 사귀었다.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으려고 극단에 교섭을 해보거나 길거리에서 연기를 했다. 연기력도 키우면서 나름대로 자유롭게 연극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어찌나 멋이 있던지. 그렇지만 나는 돈도 없었고 식비조차 마련이 안 되었다. 대학교 구내로 들어가 제일 싸게 식사를 하고 거리로 나와서 연기를 보여주곤 했다. 1개월 정도 어슬렁대다 소극단에 참가했고, 카르네 감독의 영화 <맨하탄의 애수>에 단역으로 나갔다. 그 이후 나는 영국, 스코틀랜드,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그리스 등 1600킬로나 방랑했다. 힘들었지만 즐거운 시절이었다.”
1967년 미국으로 돌아온 드 니로는 그리니치 빌리지를 시작으로 소극단에 참가, 예술가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했다.
그 당시 알고 지내던 친구 중 세 살 위의 시나리오 작가 브라이안 드 팔마가 있었다. 그는 콜롬비아 대학과 사라 렌스 대학 재학 때부터 언더그라운드 영화를 제작, 주목을 받고 있었다. 드 팔마는 졸업 후 다큐멘터리 영화에 손을 댔으며, 1964년부터는 극영화 감독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다.
드 니로는 친구의 소개로 드 팔마를 알게 되었다. 드 팔마는 <그리팅스>(Greetings, 1968)를 찍으면서 드 니로를 주연으로 발탁하였다. 드 니로의 미국 영화계 데뷔작이다. 이 영화는 드 팔마의 출세작으로 1969년 베를린영화제에 출품, 감독상을 받았다.
뉴욕을 무대로 한 이 영화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기를 거부하는 세 청년을 그린 반전영화였다. 드 니로는 셋 중 머리가 약간 모자란, 존이라는 청년 역을 맡았다. 안경을 쓰고 수염을 붙인 존이라는 남자의 이상성격을 잘 소화한 드 니로에게 드 팔마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드 니로의 연기에 주목한 사람이 있었다. 할리우드 B급 영화의 대부 로저 코먼과 원로 여배우 셜리 윈터스였다. 셜리 윈터스는 “드 니로의 아무 말없이 타인을 차분히 관찰하는 냉철한 눈은 스타의 탄생을 예감케 한다.”며 지인들에게 말했다. 드 니로는 여전히 무명이었고, 다시금 연극계를 떠돌고 있었다. 그녀는 그러한 드 니로를 편들었고, 귀여워했고, 어머니처럼 보살폈다.
1970년에 로저 코먼 감독, 셜리 윈터스 주연의 <블러디 마마>(Bloody Mama)가 영화화되었다. 이 영화는 1880년에 태어나 아들 넷을 둔 애리조나 클라크 베이커 일가의 1920년에서 1935년까지의 삶을 그린, 실화에 근거한 갱영화였다. 영화평이 이렇게 나왔다.
“한 모친과 무서운 네 아들이 살인을 하고 억만장자를 유괴하여 경찰에 쫓겨다니다 끝내는 전원이 죽는다. 연출은 어쨌든 셜리 윈터스와 네 아들의 연기는 소름이 느껴질 정도로 무서운 박력을 보여주었다.”
영화는 폭력적인 장면이 지나치게 많아 부분 커트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감독은 드 니로를 4남 로이드 베이커 역으로 캐스팅했다. 드 니로가 분장한 로이드 베이커는 1927년에 25세의 나이로 죽은 실존인물이다.
이 영화의 네 형제 허먼(돈 스트로우드 분), 아더(클린트 킴블로우 분), 플렛(로버트 월덴 분), 로이드(드 니로 분) 중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보여준 이는 4남 역을 맡는 드 니로였다. <대부>의 제2편을 기획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드 니로를 발탁해서 썼다. 영화의 주인공은 알 파치노라고 할 수 있었고, 젊은 날의 돈 코를레오네 역을 맡아 열연한 드 니로는 부주인공 격이었다. 두 사람의 연기는 막상막하,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대부 2>에서
1975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대부 2>의 드 니로에게 남우조연상이 주어졌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대부 2>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사운드 오브 뮤직>의 관객 동원수를 능가했다. 제작비 1300만 달러, 9개월의 촬영이라 엄청난 ‘대작’은 아니었지만 아카데미 작품상 등 6개 부문을 석권했다.
미국 영화계에는 <라스트 탱고 인 파리>라는 영화로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의 베르나르도 페르톨루치라는 감독이 있다. 이 감독과 함께 <1900년>이라는 영화의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신인 시나리오 작가 폴 슐레이더가 쓴 <택시 드라이버>라는 영화의 대본이 집에 와 있었다. 드 니로는 이 역은 내가 해야 한다는 감이 왔다.
드 니로는 대본을 읽자마자 승낙했다. 출연료는 25만 달러였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뉴욕에서 실제로 택시 드라이버가 되어 두어 달 차를 몰면서 경험을 쌓았다. 택시를 몰다 드 니로는 실제로 호모 남자의 유혹을 받기도 했고, 어떤 날 밤에는 창녀한테서 5달러 팁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은 영화 촬영시 그에게 영화 속 배역과 동일한 심정을 갖게 하였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영화팬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택시 드라이버>에서. 드 니로는 왼손잡이인데 이 영화에서는 오른손으로 글을 쓴다.
영화 속 인물ㅡ베트남 귀환병 출신인 젊은 택시기사는 괴짜였다. 이 택시기사는 사랑도 하고 실연도 하는데, 정치에 대한 반감이 컸고 도시라는 거대한 괴물에 대한 슈퍼맨적 정의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꼴불견인 자들이 정치인들이었다. 그는 총을 구입해 테러를 준비한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인간의 고독이 엉뚱한 폭력을 키우는 과정이 이 영화의 주제였다.
<택시 드라이버>의 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이렇게 말했다. “드 니로와 나는 이탈리아 이민의 자식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드 니로와는 촬영하는 내내 집요할 정도로 의견을 많이 나누며 협력을 했다. 우리는 영화의 주인공 트라비 비클을 특징짓는 고독감과 소외감을 자연스럽게 도출하기 위해 힘썼으며, 드 니로는 자신의 힘으로 멋진 주인공을 만들어냈다.”
공연한 조디 포스터도 이렇게 말했다. “그는 늘 연기 플랜을 짰다.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가 카메라가 작동하면 드 니로가 아닌 다른 사람, 즉 완전히 주인공이 되어 촬영 현장에 있었다.”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분신이 되어 완전히 그 사람의 역할을 한 것이다. <택시 드라이버>는 1976년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주인공의 차가운 연기에 반한 미국영화평론가협회와 뉴욕영화평론가협회는 서른세 살의 드 니로에게 남우주연상을 주었다. 그 뒤 드 니로의 연기 인생은 순항한다. 1980년에 제작된 <분노의 주먹(Raging Bull)>에서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과 골든글러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분노의 주먹>에서
아래는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약력이다.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최고의 연기파 배우 로버트 드 니로는 1969년 브라이언 드 팔마의 <웨딩 파티>(Wedding Party) 이후 본격적인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 5년 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2>에서 젊은 콜리오네 역할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그는 6년 후, 스콜세지의 <분노의 주먹>에서 프로 권투선수 제이크 라모타 역을 맡아 뛰어난 연기를 선보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사실 그의 경력에 대한 설명은 사족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는 맡는 작품마다 뛰어난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이코적인 택시 운전수 트라비 비클 역을 맡았던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를 비롯해 마이클 치미노의 <디어 헌터>, 스콜세지의 <케이프 피어> 등으로 강렬한 카리스마 연기를 선보였던 그는 이 작품들로 모두 아카데미 후보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폴링 인 러브> 같은 멜로에서도 유감없이 매력을 뿜어내는 그의 연기는 장르에 국한받지 않는다. 최근에 그는 연기의 지평을 한발 더 넓혀 <히트>로 액션 연기를 해내더니 <애널라이즈 디스>로 코미디 연기에까지 도전하여 골든글러브 후보에 올랐다. 이후 한층 발전된 코미디 연기를 <미트 페어런츠>를 통해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다.
첫댓글 이 글은 저 이승하가 이동주의 님의 책 내용을 정리하여 블로그에 올려둔 것인데 퍼왔음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시인님...정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