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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 후보작품
----이미산 김보나 송승안 권기선 김묘재 사공경현 권선옥 반칠환 박분필
이현서 김종규 이병국 오윤경 김용칠 한성환 우정인 함민복 강수정
이명
이미산
몹시 아팠던 여섯 살
슬픔이 초대한 매미 한 마리
내 오른쪽 귓속에 눌러앉았지
누군가 내 국어책 숨겼을 때
매미는 나 대신 골목을 헤매며
돌려줘
돌려줘
직장에 다닐 땐 피곤해 피곤해
그래서 결혼이나 하고
일기장에 이상한 남편을 일러바칠 때도
매미는 나보다 더 슬피 울었지
매미가 떠나면 나는 행복해질까
보약을 먹고 명상음악을 듣고
그러나 점점 힘이 세진 매미는
원고 마감일
고치고 또 고치다 문장의 뼈대마저 허물어졌을 때
두 마리였다가 세 마리였다가 죽음의 칸타타 레퀴엠
나는 살려줘 살려줘
매미는 나를 삼키고 떠나겠다는 듯이
그래서 그날까지
우리는 서로를 묵묵히 견딘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황차의 별
김보나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너는 종종 묻곤 했다. 지금 보이는 빛이 일억 광년 전의 은하에서 온 거라면…… 우리를 둘러싼 것은 부드러운 이 어둠뿐이냐고.
말라붙은 찻잎에 들끓는 물을 부을 때마다 향내가 살아났다. 따뜻한데 죽어 있던 차를 마시면 마른 장작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속에서부터 불씨가 타오르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물을 삼켜 살아나는 불이 있다면.
연녹색 강에 물결을 일게 하던 인부들의 망치질은 그쳤어도 여전히 다리를 건널 수 없는 밤이다. 누군가의 무덤에서 발견된 책의 문자열처럼 비가 내리면 사람을 앞에 두고 차를 마셨다. 철관음, 금준미, 백호은침…… 울렁이는 금빛. 언젠가 받은 볕이 끓어넘치는 물을 한 모금 넘길 때
“죽기 전에 오렌지 빛을 본 사람이 있대. 쪽빛이나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사람도 있대. 그게 자기 마음의 색이래”
고대 인도 사람들은 불의 신이 인간과 신을 연결해 준다고 믿었다. 제물을 살라 신에게 닿도록 연기를 흩어놓기 때문에 그렇다지.
네가 찻물을 올리던 때, 물이 사정없이 끓어넘치던 그때에도 우리 곁엔 불의 신이 있었을까.
어쩌면 찾아드는 신이, 지금 보이는 빛이 일억 광년 전에 출발했다 해도…… 연노랑 빛에 기어이 이름을 붙이고 싶은 것이 나의 마음.
떠날 사람이 내준 차를 마신다. 물로 타오르는 불. 홧홧하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오래된 선풍기
송승안
바람이 분다
이잉이잉 소리를 죽이고 분다
달려가도 닿을 수 없는 거리
식지 않는 가슴을 파닥이며 분다
아무리 불어도 모자라는 힘
힘 없이도 과열되는 걸
타버리고 나면 소용없는 걸
목을 빼고 분다
한쪽으로만 분다
뒤돌아볼 줄 모르고
고개를 흔들 줄은 더욱 모르고
걷잡을 수 없다가 가라앉다가
어지러운 속을 다잡고 분다
흐어엉 흐어엉 떨다가도 분다
멈추었다가도 분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실몽失夢
권기선
아이를 낳으면 손가락을 만져보고 싶었다 감자에서 올라오는 포슬포슬한 김을 마주하며 어쩐지 꿈을 잃은 것 같은데
가정이 아닌 형태가 너를 울게 할 것 같아 손을 만진다 둥글게 갈아냈던 반지와 손가락의 지름을 눈물을 참고 있는 눈망울을 쓰다듬고 싶었다
작게 흠집이 난 테이블 유리에는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조그맣게 걸려 있고
공기의 무거움을 마음의 찬물처럼
생각해도 어루만질 수 없는 걸 안다
너를 닮은 아이였을 수도 나를 닮음을 바란 너였을 수도 있다
혼자 쓴 다짐을 보았지, 아이를 낳으면 만져보고 싶은 가정의 형태를 보태려 하지 않아도 가득 들어왔던 과일처럼 생기에 찬 태몽을
기록을 태우는 일이 잔인한 일인지 포옹으로 불행을 독대할 수 있는지
말하지 않고 흘린 눈물이 눈가에 박혀 종일
입김처럼 떨고 있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파,열음
김묘재
쭉쭉 뻗은 저 목소리, 무슨 파인가요?
칠성파는 구속되고 막가파는 흩어지고 재개발에 밀린 석창파는 위기랍니다. 중국산 대파가 들어오면 조선파는 어찌 될지 모르는데 탕수육 앞에서도 나뉘는 민심 찍먹파는 도끼를 내려놓으시죠. 야릇한 깻잎 논쟁, 당신의 목청은 어느 쪽인가요?
좌파와 우파
끝은 갈라진 손톱
할퀴는 것은 극과 극의 방식
집안싸움에 쪽파가 고개를 들지 못해도
도레미파 라도파 파파파
둥근 파열음에 부푸는 허파
그 자리에서
반음씩만 올라가봅시다.
상하좌우 갈라져도
고음, 다음, 다음, 화음
뭉개지지 않는 당신의 처음
부딪혀야 맛깔스러운 불협화음
텅빈 목울대를 흔드는 파파파,팡파르
쉿!
파꽃이 터지고 있어요.
모두를 품고 사방팔방 날아갑니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압력
사공경현
세상은 압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순한 양처럼 보이는 공기도 압력 자체이고 사람의 심장도 마음도 압력 덩어리다 압력의 작용에 따라 인생사 희로애락이 교차한다 자연의 고기압은 화창한 날씨를 제공하고 사람의 저기압은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한다 압력은 고정되지 않고 살아 움직인다
사전적으로 ‘압력’은 “두 물체가 접촉면을 경계로 하여 서로 그 면에 수직으로 누르는 단위 면적당의 힘”으로 정의 된다 따라서 무엇 홀로서는 성립할 수 없는 상대적 개념이다 또 다른 전제는 두 물체 간의 접촉면이 있어야 하며 그 접촉은 수직으로 상관해야 한다
개인은 수많은 압력에 노출되어 있다 국가를 지탱하는 힘인 권력에 접촉면을 잇댄 피지배자는 국가가 수직으로 누르는 힘에 늘 시달려왔다 세금을 내야하고 병역을 감당해야 하고 법규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등 피치 못할 압력 속에 살아가고 있다
직장이라고 별수 없다 조직의 힘을 등에 업은 상사의 누르는 힘은 가히 살인적이라 수직 각도를 피해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느라 늘 피곤하다 이를 견디다 못해 사직서를 내던지면 비로소 그 중압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또 다른 압력에 당면하게 될 것을 뻔히 아는지라 이래저래 진퇴양난이다
내던질 용기를 던져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압력이 발생하지 않는 수평 관계의 평화로운 상태가 된다 밤이 되어 수직 접촉면으로 전환되면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을 위해 단위 면적당 힘의 크기를 최대한 키우려고 용을 써보지만, 스트레스 앞에 장사 없다고 수직성은 물론이고 압력 또한 이내 포물선을 그리게 된다
압력을 행사하지 못해 압력에 직면한 상황에서 폭풍아 해일아 휘몰아쳐다오 주문을 걸어보지만, 허공에 빈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날카로운 수직의 힘이 난무하는 세상일진대 가정에서만이라도 압력 없는 평안을 기원하며 소주 한잔에 허전한 밤을 자위나 해보는 것이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짐승 같은 놈
권선옥
그렇다
사람으로 태어난 게 죄다
짐승으로 태어났으면
사람 같은 놈인데
---애지 2025년 봄호에서
약초를 배우며
반칠환
목련 봉오리가 코에 좋다고 적는다.
냉이가 골다공에 좋다고 적는다.
음양곽이 정력에 좋다고 적는다.
따고, 뽑고, 썰고, 덖는 법을 배운다.
구증구포,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정성을 배우다가 나에게 묻는다.
나는 목련의 어디에 좋은가?
나는 냉이의 어디에 좋은가?
나는 음양곽의 어디에 좋은가?
나는 이 별의 생명들에게 어떤 명약인가?
---애지 2025년 봄호에서
곶감 할매
박분필
할매가 햇살 바른 곳에 멍석을 펴고 앉아 곶감을 깎으면서 시퍼렇게 젊었던
시절엔 모든 일들이 참 많이도 떫었지 생각한다
어느새 발그레 익어 삶의 단맛을 겨우 알 듯도 한데 쌓아온 생이 송두리째
벗겨져 꼬지에 꽂히는 이것이 나지 싶어지다가
어느 듯 처마 밑에 매달린 곶감이 시집살이 등살에 시달리듯 풍상에 시달리며
절이 삭고 어쩔 수 없이 쫀득쫀득 곶감이 되어갈 때쯤
떫디떫었던 당신의 마음자리에도 보이지 않게 새록새록 채워지던 단맛이 적지
않았음을 눈웃음 짓는다
할매가 주름지고 오그라진 곶감 한 접을 반반하게 펴 열 개씩 노끈으로 묶고
뽀얗게 분이 낀 열 묶음의 곶감들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무거운 것들이 다 빠져나간 후, 가벼워진 이것을 나는 달콤한 행복이라 이름
짓는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물고기의 집
이현서
투명한 시간이 계절을 끌고 간다
잔설이 내린 겨울 천변
징검돌 주위로 작은 물고기들 모여있다
가지런한 검은 날짜들 사이 투명한 빛
하나둘 스쳐 흐르듯
먼 곳에서 돌아오는 반짝이는 어린 행성들
물빛 고요에 닿는다
캄캄한 밤 알전구를 만나듯 반갑다
벼랑 끝 단단한 뿌리의 감정을
부드러운 물결이 어루만져
파릇파릇 무의식의 세계를 깨우고 있다
저 잔잔한 파동이 한 우주를 밀고 있다
물의 지문을 열면
무수한 질문들 사이
존재의 발원지를 찾아가듯 일렁이는 심연 속
자꾸만 떠오르는 등지느러미들
오늘 밤 저 물고기의 집으로 세 들고 싶다
가만히 순한 지느러미에 기대어
단단한 슬픔을 헹구고 싶다
세상은 북국, 그리고 겨울
휘몰아치는 바람에도 저 아늑한 요람
투명한 시간을 하염없이 끌고 가는
---애지 2025년 봄호에서
아무튼 중년
김종규
왕년이 저평가 되는 것이다
빠른 결정을
선점하는 손과
실력 차가 나는,
깜짝 놀랄 발상과 거리가 먼,
연식 오래된 두뇌 이미지를 벗지 못하는
못 뚫는 벽,
당연한 걸 놓친다
최대한 빨리 달려도
늦는 것이다
최저점에서 멈춘 시력이
마지막 줄에서
막히는,
성장판에서나 써먹던, 언제 적
실력이냐는,
기준점이 다른,
이해력 안 되는 머리로는
더 이상 부상은
물 건너 가는 것이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일요일
이병국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던 날이 있었다. 지금은 지난 계절에 입었던 셔츠 사이에 넣어 분리수거함에 넣는다. 동남아 어느 도시의 쓰레기산 계곡에서 유해처럼 떠오를 거라는 건 생각지 못한다. 아무렇지 않게 쌓이는 물건들 속에서 추억을 톺는 일이 일요일 아침 짜파게티를 끓이는 마음과 다를 바 없다. 저녁에는 전날 냉동실에 넣어둔 밥을 전자레인지에 5분 정도 데운다. 다른 찬을 상 위에 올려놓아 본 게 언제였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수저는 한 벌. 파트타임으로 학원에 출강하던 날엔 옷 한 벌로 일주일을 보낸 적도 있다. 아이들은 나를 보며 귤을 닮았다 했다. 병원에 가서 점을 뺐고 작은 반창고를 얼굴에 덮었다. 긁지 않으려면 손가락에 골무를 씌우거나 벽을 두르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됐다. 의자는 깨끗하고 앉아 생각할 수 있다. 책상 위에는 가방과 책과 프린터와 백여 개의 연필과 메모지, 유리 테이프와 물티슈와 사 년 전 문화재단에서 받은 다이어리와 엽서, 시위에 나가 흔들었던 피켓과 크리넥스 티슈 조각과 이어폰, 샘플 화장품과 올인원 로션이 있고 엊그제 쓰다 만 시가 구겨진 채 놓여 있다. 한때는 책상이 식탁이었던 적도 있지만 고양이와 자리다툼을 한 이후로 밥은 상을 펼쳐 놓고 먹는다.
차돌된장찌개 밀키트를 뜯어
붓고
끓이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책임을 지는 건 이후의 일이라지만 지구에게 미안할 때가 있다.
가장자리를 따라 찢어진 구멍에
몸을 끼워 넣는다.
마침맞게 어울린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에스키스
오윤경
추위를 너무 많이 타니까. 덜덜덜 너는 살집도 많은 게.
대신 떨어줄 것도 아니면서. 불 앞에서. 술 앞에서.
언제 가장 춥니? 물어보자. 물어보자 하니까.
춥기 시작한다. 얼기 시작한다.
입술이 떨어질 때를 기다리다가. 우리는 너와 나로 분리된다. 시험에 떨어지고 걷던 골목. 쫒겨난 것도 아닌데 갈 데가 없어. 땀이 났는데. 반바지를 입고 가는 사람들이. 쭉쭉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 아이가. 무서웠어.
얼음이 녹는다. 한계에 이른 것처럼. 얼어붙지 않는 시간도 있다.
천천히 해 천천히 마음먹기에 달렸다잖아. 그렇게 말하는 너부터 먹어 치울까? 먹어도 먹어도 그 마음은 허기지다. 무게가 없다. 슬쩍 바람만 불어도 핑핑 날아다니느라 부딪힌 이마가 부풀어 오른다. 조금 더 가까이 앉을까.
우리 사이에 가만가만 바람이 넘치는 이유. 난로 곁에서 너는 팔짱을 낀다.
자러 갈까. 저만치 켜진 불빛은 따뜻해 보인다. 모든 빛이 온도를 가진 건 아니야. 우리가 나눌 게 고작 섹스밖에 없을 때.
춥다. 으스스 어느 구석에서라도 귀신이 나올 거 같아. 한가득 냉기를 쏟아 놓을 때까지도 서로를 견디고 있다.
팔짱을 끼는 건 자기를 안아주는 거래. 너는 나를 안지 않고. 우리는 우리라서 춥다. 겨울의 알몸이 다 덮이도록 눈이 내렸으면 하고
---애지 2025년 봄호에서
양의 전설
김 용 칠
평화로움에 물든 하늘과 땅의 정기精氣 결정체인 맑은 옹달샘 속에서 순한 양은 천기天氣를 받아 태어났다
양의 성정은 고사리손 같아 순함과 화평지기和平之氣 그 자체인 존재
어느 날 신神이라 칭하는 양가죽을 뒤집어 쓴 늑대가 나타나 양의 사회전반 규율을 그들의 입맛에 따라 똬리를 튼 독毒을 풀어 제정하고
양은 그 독毒 주사를 맞고 시나브로 규율 속 수동적 노예근성의 파도에 휩쓸려 가고 있었다
양은 본래 대우주자연을 어버이처럼 숭상하고 함께하는 정신精神이 살아 숨 쉬고 있었는데
시대가 화살을 맞은 흐름에 따라 독毒주사의 마법으로 점점 자연을 점령군 놀이로 훼손하게 되고 정신은 비틀거리며 쇠퇴해져만 갔다
양이 본시 가지고 있던 찬란한 황금시대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깊은 어둠속으로 내팽개쳐져만 가고 있었다
독毒의 마법은 점점 더 양의 탈을 쓴 늑대를 닮아가고 싶어 안달이 나게끔 이끌었지
양은 자연과 동화되는 빛나는 정신문명의 선도자 역할을 했지만
늑대와 친교를 맺고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흘러 이제 자연친화적 문명은 어느덧 토사구팽!
드디어 양의 울음소리조차 상실하고 늑대 울음소리를 앵무새 되어 내 소리인 듯 있는 힘껏 흉내 내며 제소리인 듯 소리치고 있다
양은 제가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알고 있으나 양의 일상생활을 규범 짓는 주체는 늑대임을 그 어느 양이 알랴!
그! 렇! 다!
양의 실상은 이 세상 주인공이 아닌 늑대의 한갖 희노애락 펼칠 노예에 불과한 것 이었다
다만, 착각은 자유인 세상에서 제가 주인인줄 아는 진정한 노예!
늑대는 무너져 가는 양의 주변을 좋게 해주겠다고 입만 열고 말만 하면 꿀 바른 무지개빛 사탕발림으로 속삭인다
대부분의 양은 그 사탕발림을 달콤하게 받아들이나
극히 일부 문제의식 있는 양은 이 세상에 원怨과 한恨을 울부짖으며 등지고 하차하게 되고
늑대는 양의 사회에 대해 조금 더 완벽하고 치밀한 통제를 위해 병病주고 독약毒藥주는 시지프스 전략을 택하게 된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둥지 속 세상
한성환
후드득
둥지로 날아든 개개비
주둥이에 가득 물고
새끼들
어, 어
작은 것들아
모두 어디로 갔니
개개 개개 개개객
삐비이 비비비
쩍 벌린 큰 놈 입에
몽땅 밀어 넣고
그냥 운다
저 너머
숲속에 둥지가 없어
내가 지은 둥지가 없어
네 집에 맡겨 둔 새끼
뻐꾹뻐꾹
뻐뻐꾹 뻐꾹
뻐꾸기가 운다
남의집살이 내 새끼
눈치 보지 않고
잘 살고 있는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운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신종 도감
우정인
보고되지 않은 종에 대해 쓴다
화석으로도 발견된 적 없기에 뼈의 길이와 섭생을 유추할 수 없다
그들은 아래층과 위층 사이에 서식한다
쿵쿵과 고요함 사이에 끼어 산다
쉽게 깨어지는 구름과 하루 사이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꼬리뼈가 지워진 자리 망할, 불면증에도
그것은, 산다
여러 마리가 뒤엉켜 살기도 한다
발자국 화석이 보고된 적 없으나 유인원과 동종으로 유추된다 발 소리는
깊은 밤, 더욱 우렁차다
이 동물을 야행성이라 쓰기로 한다
짧고 간결하게 스타카토, 길고 지루한 난타, 의자 긁는 소리, 피아노 소리, 진공청소기소리와 유사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알 수 없는 고함소리, 낭묘와 여묘처럼 수상한 울음, 암컷과 수컷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바람의 여백 침묵과 침묵 사이에 때때로 둔탁한 마침표를 남긴다
수많은 제보가 모여들지만
아무도 그들을 목격했다는 보고는 없다
인터폰이나 초인종 소리에 거칠고 포악해진다는 제보가 때때로 접수된다
그냥, 살고 있다고 쓴다
멸종 기대 동물, 이라고 쓴다
우리 집 위층에도 있다고 쓴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등
함민복
한 해의 끝 날 바닷가에서
역광이라 얼굴을 포기하고
서쪽을 바라다보며
서쪽을 찍고 있는
한 무리 사람들
등을 중심에 세우고
어둡게 빛내주는
석양
돌아선 등에게 그제서야 사랑을 고백했었지
돌아설 수 없어 꾹꾹 험담을 받아 적기도 했었지
눈길 멀어 독해도 수정도 늘 타인의 몫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묵묵히 살아온 비면碑面
어미 등판에서 가슴을 키운 죄
이미 지나온 시간의 폭포
수평을 찾아 눕기도 하지만
등은 울지 않는다
울 린 다
쭈그려 앉아
사람들 마음을 추슬러 업는
세월의 붉은 등
노을
---애지 2025년 봄호에서
명왕성 외 4편
-134310-
강수정
2006년, 나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
작고 희미한 존재
뻥 터진 팝콘 무리에서 갇혀버린 부스러기 한 톨
지옥의 세계가 이렇게 어둡고 외로울까
친구가 필요해
카론, 나와 함께 궤도에 오르자
함께 밤하늘을 꿰뚫어 보자
러시안 블루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
그 수평선 너머 침묵하는 작은 나를 찾아 주세요
134310
보홀의 바닷속에 숨겨둔 안경원숭이를 찾아가세요
심장보다 더 큰 눈으로 태양을 찾아 줄게요
스틱스, 하이드라, 케르베로스
두 손 가득 달빛을 모아 내 검은 얼굴을 닦아내고
반딧불이 되어 당신을 향해 다가갑니다
궤도는 불균형, 혹독한 겨울의 땅
이탈된 낙오자는 우주를 떠돌고
어츨해진 심장은 유성우로 쏟아집니다
당신은 나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매년 여름이면 수만 그루의 꽃을 피울 겁니다
키 작은 해바라기로
밤하늘은 샛노랗게 물들겠지요
---애지 2025년 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