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현문우답]"茶와 주님은 통하던군요" 떼제공동체 수사의 깨달음
#궁궁통1
프랑스 떼제에는
초교파 수도공동체인
떼제공동체가 있습니다.
한국에도
서울 화곡동에
떼제공동체가 있습니다.
영국 출신인
안선재 수사도
떼제공동체 소속입니다.
떼제공동체 소속인 안선재 수사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중세 문학을 전공했다. 중앙포토
영국인이었던 그는
옥스퍼드대에서
중세 문학을 전공했습니다.
박사 과정을 위해
프랑스에 갔다가
떼제공동체에 반해
수사가 된 사람입니다.
영국은 차(茶)로 유명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안 수사는 차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습니다.
서강대 근처에 있는
그의 오피스텔에서
마주 앉은 적이 있습니다.
안 수사는 저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었습니다.
#궁궁통2
한국의 전통 다기로
차를 따르던
안 수사가 말했습니다.
안선재 수사는 “다도의 핵심은 마음으로 차를 마시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중앙포토
“유럽에 있는 떼제공동체의
여러 수사도
홀로 차를 마신다.
물을 끓이고,
차를 따르고,
눈과 코와 혀로 차를 마신다.
그렇게 마음으로 차를 만난다.”
마지막 표현이
참 좋았습니다.
마음으로 차를 만난다.
제가 물었습니다.
마음으로 차를 만나는 건
어떤 의미냐고.
“차(茶)라는 한자를 들여다 보라.
풀(艸)과 나무(木) 사이에
사람(人)이 있는 거다.
다시 말해
자연 속의 인간을 뜻한다.
그건
주님 안의 인간이란 말과
일맥상통한다.”
궁금해지더군요.
자연 속의 인간과
주님 안의 인간이
왜 통하는지,
그 둘이
왜 같은 뜻인지 말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두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자연이고,
또 하나는 성경이다.”
그 말을 듣고서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두 권의 책에는
모두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자연에 담긴
진리를 찾는 것이
과학이고,
성경에 담긴
진리를 찾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과학과 종교를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종교가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과학의 진리와
종교의 진리가
서로 통하게 되지 않을까요.
자연 속의 진리와
경전 속의 진리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 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연을
깊이 들여다보면
주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러니
세상 만물이 나의 스승이고,
이 자연과 우주가
나의 경전입니다.
그 속에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궁궁통3
‘다도(茶道)’ 하면 왠지
엄격한 격식과
예법이 떠오릅니다.
안선재 수사는 “차는 단순함과 소박함이 원칙이다. 그런 다도의 정신이 종교의 정신과 통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안 수사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차는
너무 미학적이다.
한복을 입고
격식을 따져가며
차를 마실 필요도 없다.
그건 ‘쇼’다.
차는
단순함과 소박함이 원칙이다.
그게 생활차(生活茶)다.”
이 말끝에 안 수사는
종교도
그래야 한다고 했습니다.
“생활 기독교와
생활 불교,
그리고 생활차가
서로 통한다.”
삶을 단순하게,
삶을 소박하게,
그게 다도의 정신이고
또한
종교의 속성과도
통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와 삶,
둘은 어떤 관계일까요.
안 수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핵심은 삶이다.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시스템이고,
이데올로기이고,
형식일 뿐이다.”
놀랍더군요.
그리스도교의 수도자가
종교는 시스템이자
이데올로기라고 하더군요.
알맹이가 아니라
껍질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선
종교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진짜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신 거다.”
#궁궁통4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어떡해야
진짜로 사는 겁니까?”
안 수사는
사자성어를 꺼냈습니다.
“차도무문(茶道無門).”
다도의 길에는
문이 없다.
예전에 김영삼 대통령이
즐겨 썼다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이란
글귀가 떠오르더군요.
아침 해가 올라오기 직전의 새벽에 갈릴리 호수 위로 새들이 날고 있다. 백성호 기자
안 수사는
차도무문의 뜻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차도무문이 뭔가.
인간에 대해,
세상에 대해
나를 여는 거다.
나와 하느님 사이도
그렇게 여는 거다.”
그렇게 열어 놓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래서
사람과도 하나,
자연과도 하나,
하느님과도 하나 된 마음으로
사는 거다.
그게 진짜로 사는 거다.”
안 수사의
마지막 멘트가
제 가슴을 푹 찔렀습니다.
“그게 진짜로 사는 거다.”
그렇더군요.
유한한 육체를 가지고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
어떻게
영원을 획득할 수 있을까.
그 답이 거기에 있더군요.
사람과도 하나,
자연과도 하나.
또 진리와도 하나.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거겠지요.
사람이라는 이웃도
자연이라는 이웃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로,
그렇게
진짜로 한번
살아보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