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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택 목사
어버이주일 설교를 시작하면서 CBS TV에서 제작한 ‘수호천사 사랑의 달란트를 나눕시다’ 라는 프로그램에 나왔던 사연을 소개해 드립니다. (내용은 다음 주일 주보에 올립니다)
고린도후서 6:18에 “…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녀로 삼으시고 부모처럼 그들을 돌아보셨습니다. 무릎에 앉혀 기르시고 품에 안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며 사랑으로 양육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사랑하는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는 부모의 심정으로 그들에게 무서운 징벌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때로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때로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들을 길러주셨습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이사야의 말씀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아파하고 낙심하고 있는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안타까운 심정이 이 말씀에 잘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의 날에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버리시고 잊으셨어.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여도 우리를 잊고 잠잠히 계시는 것이야’(사49:14). 이렇게 말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잊었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사 49:16상). ‘
자식은 어디에 있든 항상 어머니의 품에 있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 있는 자식을 어머니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혹시 어머니는 자식을 잊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을 항상 자신 안에 품고 계십니다. ‘손바닥에 너를 새겼다’는 말씀은 이 말씀이 쓰여졌을 이사야 당시 문화 속에서 이해해야 할 말씀입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들 모두가 글을 알지 못합니다. 글을 알지 못하는 어머니는 아들이 멀리 떠나게 되자 아들을 생각나게 하여 주는 표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지금처럼 사진을 가질 수도 없었을 때 어머니는 문신을 새겨 주는 사람에게 가서 손바닥을 내어 밀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보고 싶을 때에 늘 기억할 수 있는 것을 그려 달라고 하였다. 아마도 문신을 하는 사람은 어머니의 손바닥에 바늘로 한 점 한 점씩 찔러가며 아들의 모습을 새겼을 것입니다. 비록 아들은 먼 곳으로 나갔지만 어머니는 날마다 그 아들을 생각하며 보고플 때에는 손바닥에 새겨진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위로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손을 씻을 때, 밥을 지을 때에도, 일을 할 때에도 언제나 아들은 그렇게 어머니의 손바닥에 그리고 어머니의 가슴 속에 있었습니다. 손을 물에 넣어도 지워지지 않고 닳아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일을 할 때나 쉴 때나 언제나 손바닥에 새겨진 것을 보고 아들을 생각하였을 것이며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아들을 마음에 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손바닥에는 언제나 아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 아들은 이렇게 항상 어머니의 마음에 있었고 어머니의 생각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곧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이 되었지만 16절에 ‘보라’는 말을 넣고 읽어봅시다. “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 고 하셨습니다. ‘보라’는 말은 ‘오!’ 라는 감탄사이며 탄식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스폴존 목사님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고 잊으셨다고 말하는 이스라엘의 불신을 보시고 너무 놀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아무 근거도 없이 이렇게 하나님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다니 이보다 더 기막힌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울부짖듯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손바닥에 새긴 너를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겠느냐? 너를 기억나게 하는 게 바로 내 육신에 새겨져 있는데 어떻게 감히 내가 너를 끊임없이 기억하지 않는다고 의심할 수 있느냐?”
어느 쪽이 더 놀라운 일입니까?
자기 백성들이 그렇게 의심하는데도 계속해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그처럼 신실하게 사랑하시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그의 백성들의 불신입니까?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의 약속을 수천 번도 더 지키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련만 당하면 또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분이요,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그는 절대 저물어 가는 태양이 아니요, 스쳐 지나가는 우박이나 번개도 아니요, 녹아 없어지는 증기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이 무슨 사막의 신기루라도 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염려하며 의심과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오늘 분문에 나온 “보라”라는 말에는 우리가 놀라고 탄복할 만한 주제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반역자들이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 마음속에서 그처럼 소중한 존재들이라니, 그 이름이 그의 손바닥에 쓰여질 만큼 그렇게 가까운 존재들이라니, 온 하늘과 온 땅이 놀랄 일 아닙니까?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네 이름”을 새겼다고 되어 있지 않고 “내가 너를 새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이름도 물론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새겼다.” 이 말씀 속에 얼마나 철저한 의미가 담겨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건 내가 너의 인격, 너의 모습, 너의 사정, 너의 처지, 너의 죄, 너의 유혹, 너의 약함, 너의 부족, 네가 한 일, 이 모든 것들을 다 새겼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너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새겼다는 뜻이요 내가 내 손바닥에 네 전체를 두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의 손바닥에 여러분을 새겼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또 하나님이 여러분을 잊어버리셨다고 말할 겁니까?” <생명의 말씀사 제공 ‘스폴존의 아침묵상’중에서>
우리들은 때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도에 대하여 잠잠하실 때에, 내가 고난을 당할 때와 시련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 자신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어. 주님께서 나를 잊으신 것이야’ 라고 말입니다. 그때 주님은‘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며 너는 항상 내 앞에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있으며 주님의 마음에 내가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염려하고 왜 근심을 해야 합니까? 나를 자신의 손바닥에 기록하시고 나를 항상 자신 앞에 두시는 분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나를 사시고 자신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영원토록 잊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눈 앞에 두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휴대폰 단축번호 1번에 사랑하는 사람, 가장 자주 통화하는 사람, 기억에 있는 1순위가 저장됩니다. 여러분의 전화기에 저장된 단축번호 1번은 누구인가요? 부모님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1번에 저장해 놓고 나를 찾으며, 나를 기억해 주고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그 사람이 부모님일 수 있고 믿음의 이웃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나도 모르는 중에 누군가 나를 기억 속에 두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든든함이란 그 무엇을 얻은 것보다 더 크게 전율을 느끼며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처럼 손바닥에 새기고 기억 1순위에 놓고 계십니다.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오늘 이사야서 말씀에 설명된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를 낳으신 육신의 부모님의 심정으로 이해를 해봅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품을 떠나 즐거운 시간을 가질 때,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을 때 오직 그 즐거움에 도취되어 지내지만,
어머니는 그 즐거움의 시간에 먹을 것이 풍성한 그 자리에서도 이 좋은 것들을 함께 나누었으면 하고 집을 떠난 자식들을 생각합니다.
사실 자식들은 그 시간 아무 부족함 없이 잘 먹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건만
어머니는 집을 떠난 자식들이 눈에 밟히고 목에 걸려 그 맛난 음식을 마음껏 드시지 못하고 슬그머니 상을 물리십니다.
그리고 주섬주섬 쌈질을 하여 냉장고 깊은 곳에 넣어두십니다. 언젠가 자식이 집에 오면 그때 먹여야지 하시고…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집을 나간 작은 아들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외국으로 떠나 자기 하고픈 대로 맘껏 즐기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돈 있으니 친구들도 따르고 아쉬울 것이 없는 풍족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돈 떨어지고 나니 친구도 즐거움도 다 떨어져 나가버리고 달랑 홀로 남았습니다. 그것도 오갈 데 없는 거지꼴이 되어 돼지 우리에서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아들은 그때 비로소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생각났고 풍족한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품꾼들이 부러웠습니다.
한편, 작은 아들을 떠나 보낸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부터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렸습니다. 혹시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문빗장을 걸어놓지 않고 날마다 문을 열어놓고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입니다. 여기에 아들과 아버지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들은 집을 떠나는 순간 오로지 자신이 마음껏 즐길 무지개 빛 꿈에 부풀어 부모 형제는 마음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진 것을 다 잃고 배고프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아버지가 생각났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떠나는 그 시로부터 한 순간도 그 아들을 마음에서 지운 적이 없었습니다.
자식들은 자주 부모님을 잊고 살지만 부모님은 자식을 늘 가슴에 품고 삽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녀들은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도 부모님의 품에 있는 자식일 뿐입니다. 아무리 머리카락 희어진 나이 먹은 자식일지라도 부모에게는 그저 사랑스런 자식으로 보입니다.
이사야 46:3-4을 봅시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아기가 태어나면 곧 엄마의 가슴에 안겨 엄마의 심장 고동소리를 듣게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힘들게 낳은 아이와 같은 사랑스런 백성이었습니다. 어리고 철없는 어린 이스라엘을 가슴에 안고 양육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라서는 제 스스로 저절로 어른이 된 줄로 알고 하나님의 품을 훌쩍 떠나가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간섭처럼 여겨져 불편하고 귀찮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의 부모님이셨습니다. 그들이 노년이 되고 백발이 되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품을 것이고 구하여 내리라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우리를 낳고 기르시며 품에 안고 걸으시는 부모님이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작자 미상의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는 감동적인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 속에서 주님과 나란히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가로질러 그의 인생의 장면들이 펼쳐졌습니다.
그는 모래밭에 찍힌 두 짝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한 짝은 그의 것, 다른 짝은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마지막 장면들이 지나간 다음,
그는 자기 인생의 가장 비천하고 슬펐던 순간,
그곳엔 한 짝의 발자국 밖에 없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낙담하여, 그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작정했을 때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제가 가장 주님을 필요로 했을 때
저의 곁을 떠나셨는지..."
주님께서 답하셨습니다.
"내 소중한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며, 너를 결코 떠나지 않는단다.
네 시험과 고통의 순간,
네가 한 짝의 발자국밖에 볼 수 없는 그 순간,
그것은 바로, 내가 너를 안고 걸었던 때란다."
혹시 육신의 부모는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부모님은 세월이 흘러 이미 내 곁을 떠나셨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가장 힘들고 외롭고 아플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마음 속으로 불러보고 싶은 이름, ‘어머니!’ 입니다. 이제 그 어머니가 세상에 계시지 않아 불러도 뵐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곁에 계시며 나를 품에 안고 계시는 하나님을 부릅시다. 그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고통의 시간을 지날 때 하나님은 나의 아픔에 관심 두지 않으시고 나를 잊으셨는가 하여 서운하고 우울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니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너의 그 무너진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 나는 언제라도 너의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게 하고, 허물어진 성전을 재건하여 나에게 나아와 예배하며 나와 너 사이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하나님이다. 고난 중에 흩어진 너의 자녀들이 다시 돌아와 텅 비었던 이 성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이 성이 좁아 너의 지경을 더 넓히도록 회복시키는 하나님이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한다! 너는 내 손바닥에 새겨졌느니라’하십니다.
하루 24시간 오로지 자식 생각만 할 수 있는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그려봅니다. 이 땅에 계신 부모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엿보게 하십니다. 십계명 가운데 사람에 대한 관계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가장 먼저 앞세운 것은 부모공경을 통하여 하나님 공경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하신 뜻이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는 좀 더 풍족하게 줄 수 있고 아니고 차이일 뿐 잘난 부모 못난 부모의 차이가 없습니다. 자식들의 장래를 축복하고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준비가 되어있는 어버이 사랑입니다. 우리를 세상에 있게 하신 부모님, 하나님을 알게 하신 부모님, 그분들께 오늘도 감사를 드립시다. 이런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하여 최고 최대의 보답은 생명의 주님을 소개해 드리고 함께 주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복된 가정을 이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