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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49-51
노블레스 오블리제 신앙
요즘 유행하는 프랑스어 중에「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도덕상의 책임과 의무도 높다는 뜻입니다.
원래 노블레스라는 말은 닭의 벼슬의 의미하고, 오블리제라는 말은 달걀의 노른자라는 뜻으로, 닭의 사명은 벼슬을 자랑하는 데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말은 신분이 높은 귀족층일수록 평민보다 사명과 의무가 크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로마시대 때부터 그들은 국가를 위해 세금도 훨씬 많이 냈습니다.
이것이 곧 리더십의 본질입니다. 지도자는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권한을 가지고 더 잘 섬기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지도자일수록 사명과 책임이 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지도자는 섬기는 종의 마음을 품어야 함을 역설하십니다.
한 마디로 지도자는 사명자입니다. 그야말로 권리보다는 책임이 큰 것입니다.(no rights, but responsibilities)
P. Drucker는 유능한 리더의 네 가지 특징을 잘 정의해줍니다.
▶첫째는 따르는 사람(follower)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올바른 일을 시켜 성과를 가져오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다른 사람이 예의 주시하는 사람, 곧 자신이 역할 모델(role model)로서 모범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리더는 지위나 직위, 특권이 아니라, 직책임을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H. Truman 대통령의 훌륭한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좌우명으로 살았습니다.『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그래서 그는 백악관 집무실 책상 위에 이렇게 써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모든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
진정한 리더는 자신의 책임과 사명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익 중심으로 살지 않고 의무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 훌륭한 모델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민족의 영웅입니다. 서열 1순위의 특권층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전혀 자기의 권리나 야욕에 한눈팔지 않았습니다. 그는 초지일관 자신의 사명만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자신의 지위나 직위에는 연연하지 않고, 오직 직책에만 충실했습니다.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제 신앙, 즉 자신의 신분에 맞는 사명감으로 사는 신앙입니다.
1. 하나님을 우선하는 원칙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마다 살펴보고 있는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땅 정착 역사입니다.
특히 14장부터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 여호수아는 땅을 분배하는 일에 우선순위와 원칙이 분명했습니다.
맨 먼저 유다 지파에게 가나안 땅의 한 복판 가장 좋은 곳을 분할해줍니다.
사실 유다 지파는 서열이 네 번째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메시아가 출생하게 될 지파이기에 일순위로 높이 받든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모든 일에 우선순위가 분명한 신앙을 기초로 하고 있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레위 지파에게 최상의 땅을 분배해주고, 그리고 유다 지파를 최우선으로 가나안 땅의 중앙 지역을 분할해줍니다.
저는 이와 같은 여호수아의 신앙을 두 마디의 단어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선순위가 분명하고, 원칙이 뚜렷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앙의 priority와 principle이 명확합니다.
이것이 성공과 형통의 비결입니다.
몇 가지만 생각해보면 시간의 우선순위, 즉 일주일의 첫날인 주일은 예배에 최선을 다합니다.
물질의 우선순위로는 첫 번째 지출을 십일조로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또 활동의 우선순위로는 교회봉사와 헌신을 사명으로 여기고 삽니다.
소위 3T의 헌신입니다. Time, Tithe, Talent, 즉 시간과 십일조와 재능을 하나님께 바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축복받고 성공한 사람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과 신앙을 최우선으로 하는 원칙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금세기 리더십의 권위자 S. Covey는「원칙중심의 지도력」(Principle Centered Leadership)을 피력합니다.
그래요. 신앙생활의 우선순위에 따라 분명한 원칙중심으로 살아갈수록 형통한 축복을 받습니다.
청교도 설교자였던 Philips Brooks는 이런 원리를 제창합니다.
“하늘의 것을 먼저 추구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 둘 다 얻을 것이오.
반면에 땅의 것을 먼저 추구해보시오. 그러면 당신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 둘 다 잃을 것이오.”
이것이 청교도들이 받은 축복입니다. God & gold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언제나 첫 열매, 첫 시간, 첫 것을 드리라고 가르쳐줍니다. 최선을 최초에, First things first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어느 선교 일화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었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인도의 갠지스 강 둑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이상한 광경을 하나 보았습니다. 인도의 힌두교도 한 어머니가 두 아들을 갠지스 강 둑으로 데리고 가더니, 불구자 아들은 살려두고, 건강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고 돌아오기에 물었습니다. ‘부인께서는 왜 불구의 아들을 안 바치고, 멀쩡한 얘를 희생시킵니까?’ 그 부인은 선교사의 가슴에 큰 감동을 주는 대답을 했습니다.
“선생님, 미국에서는 어떤 신을 믿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 인도 사람들이 믿는 신은 우리가 그분에게 최상의 것을 드리기를 기대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옳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주님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에게 최상의 복을 주십니다.(잠언 3:9-10. 마태 6:33).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겨주십니다.(삼상 2:30)
2. 자기를 맨 뒤에 놓는 빈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또 하나의 훌륭한 점은 자기의 동역자 갈렙에게는 우선권을 부여했으나(15:13), 자신의 특권은 전혀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든 땅의 분배를 다 마감하면서 끝으로 자기 몫을 할당받습니다. 자신을 맨 후미로 두는 빈 마음의 지도자, 이것이 여호수아의 훌륭한 점입니다.
사실상 그는 민족 구원의 공로자입니다. 300만 백성 중에서 가장 연장자입니다. 최고 통치자입니다. 백성의 어른이요,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그러난 자신을 맨 뒷좌석에 놓았습니다.
그래서 49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땅 분배작업을 다 마치고 여호수아에게 주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51절에서는 가나안 땅 분배 작업을 깔끔하게 마무리합니다. 끝이 깨끗합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음을 비울수록 마무리가 깨끗한 여운을 남기게 됩니다.
사람은 시작도 좋아야 하지만, 끝이 더 좋아야 합니다. 빈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쁨을 영어로 Joy라고 하는데, 그 뜻은 이렇습니다.
Jesus, Others, and Yourself. 예수님이 첫째요, 이웃이 둘째요, 나를 셋째로 놓을 때 흐뭇한 기쁨과 행복을 맛보며 삽니다.
우리 같이 하십시다. ‘나는 셋째다.’
어떤 학자가 카리스마 리더십에는 네 가지의 덕목을 갖출 것을 제안합니다.
첫째, 자신의 이득을 구하는 것보다 먼저 공동체의 이득을 구하는 것입니다.
둘째, 권위적인 행동을 버리고 민주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받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를 위하는 카리스마 리더십은 교만하지 않고, 자신을 높이지 않으며, 겸손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리더십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인류 구원의 대속물로 주러 오셨습니다.(마가 10:45)
그래서 누구든지 큰 자가 되고 싶으면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섬기는 종이 되라고 역설하십니다.(마태 20:27)
세상은 지배의 철학을 가르치지만, 기독교는 섬김의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제가 얼마 전에 신문에서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테니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속 200km가 넘는 강력한 서브를 볼 때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대선수를 제압할 수 있는 기술을 ‘서비스 에이스’ 라고, 즉 일등짜리 최고의 서비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스포츠 정신의 본질에서 떠난 것입니다.
본래 테니스 경기에서 서비스란 상대방이 공을 잘 받아 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런 순수한 서비스가 이제는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야욕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호텔이나 고급 식당에서도 서비스 차지라는 곡해된 개념이 보편화 되어버렸습니다.
서비스란 순수한 섬김입니다. 이것이 우리 지구촌교회가 주력하고 있는 사랑의 순례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빈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되십시다.
3. 하늘의 소명을 따라 사명감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근거로 여호수아의 위대성을 또 하나 본받을 수 있습니다.
그의 충성스런 사명감입니다.
우리 다같이 본문 50절을 자세히 보십시다.
여호수아는 민족의 영웅이요 백성의 지도자로서 모든 권리주장을 마음 것 할 수 있었으나, 지금 그가 요청하는 땅은 어떤 곳입니까?
에브라임 산지 딤낫세라입니다. 아주 메마르고 척박한 땅입니다. 험준한 산지입니다.
그는 남들이 차지하기 싫어하는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이 들어가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성으로 들어가 재건했습니다.
비록 메마른 땅이요, 피폐한 성읍이지만 이곳도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의 일부이기에 자기가 들어가 개척하고 재건하기로 사명감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 사명감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기로 위대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서 살다가 그 땅에 묻힙니다.(24:30) 그는 110 세로 죽을 때까지 일평생 사명자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solitary saint로 살았습니다. 외로워도 자기 사명 다했습니다.
그는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의무에만 충실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일평생 하늘의 소명을 따라 사명감으로 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고귀한 사명의식이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든지 이 땅에 태어날 때 이미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엔지니어로, 어떤 사람은 과학자로, 또 어떤 사람은 교사로, 그리고 사업가로, 저처럼 목회자로, 우리는 각자가 하늘의 소명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라도 지고자하는 사명감이 필요합니다.
혹시 직장에서 해고되었거나, 사업에 어려움이 발생했거나, 건강에 이상이 생겼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Jonathan Edwards의 좌우명을 좋아합니다.
『사명감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그래요.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힘없이 끝나거나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하늘과 땅이 울리도록 힘차게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는 인류 구원의 위대한 사명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당신은 가정에서 어떤 책임이 주어졌습니까? 직장에서 어떤 업무가 할당되었습니까? 교회에서 어떤 직책으로 사명이 부여되었습니까? 비즈니스맨으로 어떤 사명감을 갖고 계신가요?
오늘 우리도 내 인생의 사명을 다 이루는 승리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제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하는 원칙중심의 신앙과 자기를 맨 뒤에 놓는 빈 마음의 순박한 신앙, 그리고 하늘의 소명을 따라 사명을 완수하는 찬란한 승리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초청) (찬송가 448장)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얼마나 책임적 인생을 살고 계신가요? 너무 무책임하지는 않으세요....
그리고 당신은 얼마나 하나님 중심의 우선순위와 원칙중심의 삶에 최선을 다하시는지요?
당신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만큼 당신은 존귀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하고 깔끔한 빈 마음으로 사명 따라 완주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다시 한 번 축복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사명감으로 사는 한 당신은 힘없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맥없이 주저앉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블레스 신자, 귀족적 신앙인으로 위대한 사명자로 승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