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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구주백제를 세운 무령왕(재위501~523)
무령대왕武寧王(462~523)은 개로왕과 반풍황녀의 아들로서 일본에서 태어났고 왜무왕倭武王이었으며 이름은 시마왕島王이라고도 했다. [일본서기]에서 일본에서 태어난 개로대왕의 아들인 무령대왕은 도군島君, 즉 도島왕자라고 하였다. 도島는 일본말로 시마斯麻라고 발음하는데 무령대왕릉 지석에 기록된 이름이 역시 시마斯麻다.
왜무왕은 당시 478년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475년에 있었던 개로대왕과 왕자들의 죽음을 부형父兄의 죽음으로 기록하였다. 그 국서에서 왜제왕을 부왕이라 하면서 동시에, 참살당한 개로대왕을 부왕이라고 부른 그 국서에 의해서 왜무왕이 시마왕, 즉 백제 무령대왕인 것이 증명된다. [宋書] 臣亡考 濟 , 奄喪 父兄 , 申父兄之志..
왜무왕은 이 국서로서 자신의 왜왕 즉위를 알리면서 동시에 왜왕과 백제왕의 겸왕을 선언하였다. 무령대왕은 개로대왕의 아들로서 숙부인 문주대왕을 인정 안한 것이다.
또한 일본에는 무령왕보다 훨씬 나이많은 삼촌인 청령천황 곤지왕이 있었고, 또 모후 반풍황녀의 오라비들인 인현천황, 현종천황 형제들이 있어서 왜무왕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479년, 청령천황은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해 왜무왕의 왜군을 동원하였다. 백제대왕으로는 인현천황仁賢天皇(447~498) 억계왕億計王을 임명하였다. [일본서기/청령천황기]에서 청령천황은 억계왕을 태자로 세웠다고 하였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 건원 2년, 480년에 백제왕으로 모도왕牟都王을 책명하였고, 또한 영명8년, 490년에 그 손자 모대왕牟大王을 백제왕으로 책명하였다. 즉, 백제 모도왕牟都王이 동성대왕東城大王이며 인현천황仁賢天皇이다.
479년인 웅략천황 23년에 말다왕末多王을 백제왕으로 봉하여 축자국군筑紫國軍(큐슈의 군대) 500명으로 호송하고, 또 축자의 안치신安致臣, 마사신馬飼神들이 배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고 하였다.
동성대왕東城大王(=모도대왕牟都大王=인현천황仁賢天皇)은 이중천황履中天皇의 아들인 이치베노오시와왕市邊忍鹵王(416~458)의 큰 아들이다. 인현천황은 동생인 현종천황과 함께 몸을 피했다가 여동생인 반풍황녀가 개로대왕비가 되니 누이를 찾아와서 각자궁角刺宮에 살고 있었다. 청령천황은 그중 인품이 있는 첫째 인현천황으로 백제왕을 삼고, 반풍황녀의 아들인 무령대왕으로 왜무왕을 삼았던 것이다.
이때 479년에 부형을 잃은 왜무왕, 무령대왕과 청령천황이 함흥 방면 고구려 공략의 선봉에 선 것이다. 청령천황과 무령대왕이 고구려로 떠나던, 479년에 미에三重縣에 은거했던 웅략천황雄略天皇(418~479)이 죽었다.
무령대왕武寧大王(462~523)은 고구려계 윤공천황의 증손녀인 난파소야왕難波小野王(461~498)과 사랑에 빠졌다. [고사기/웅략천황기]에 나오는 천어가天語歌 등의 시가詩歌 6편이 무령대왕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청령천황과 왜무왕의 고구려 정벌은 역사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청령천황과 무령대왕은 함경북도 청진淸津에 상륙하여 경성(鏡城)과 부령(富寧-옛 사마현(斯馬縣)) 등을 점거하고 그곳에 이름을 남겼다.
무령왕은 478년 왜무왕倭武王으로 즉위했으나,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 청령천황과 함께 함경북도 청진에 나가서 지켰다.
무령대왕의 479년, 고구려 공격과 함경북도 청진 지배는 현재 지명과 [삼국사기지리지]로 알 수 있다.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인 경성鏡城 도호부에는 길주吉州, 명천군明川郡 부령군 富寧郡 등이 속해 있었다.
경성鏡城의 옛이름은 목랑고성木郞古城, 또는 우롱미于籠耳라고 했는데, 왜무왕倭武王이었던 무령대왕과 관련되어서 원래는 무령고성武寧古城, 또는 지금 수성천輸城川이 무령산에서 흘러내리는데 본래 용성천龍城川이었다. 즉 무령대왕이 479년 고구려를 공략하러 들어와 있던 곳이다. 길주吉州의 고선화진古宣化津은 무령대왕 동생인 선화천황宣化天皇이 있던 곳으로 고려된다.
우수주牛首州는 다른말로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했다는데 함흥 성천강城川江의 이름에 흑말천이 있다.
호원군乎原郡은 北原이라고도 했는데, 함흥 북쪽 홍원군洪原郡이다.
근평군斤平郡은 병평(幷平)이라고도 했고 심천현深川縣만 있었는데, 평주진 고성으로 고려된다.
양구군陽口郡은 신포시 양화만(陽化灣)이다. 대양산(大陽山) 아래에 있다. 삼현현三峴縣은 밀파혜(密波兮)라고도 했는데 북청군의 북쪽 덕성군 삼산(三山)으로 고려된다. 즉 덕성읍이 삼현현이다.
성천군(犬生-川郡) 또는 야시매(也尸買)는 이원군利原郡으로 고려된다. 시리군이라고도 하였다.
대양관군大楊管郡은 마근압馬斤押이라고도 했다.
대양관군에는 매곡현買谷縣과 고사마현 古斯麻縣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경성도호부의 18역(驛) 이름중에도 무녕역(撫寧驛)이 있었다. 지금 수성천輸城川이 무릉산에서 흘러내리는데 무령산이었을 수도 있다. 길주吉州의 고선화진古宣化津은 무령대왕 동생인 선화천황宣化天皇이 있던 곳으로 고려된다.
수성천의 최상류는 부령군에 있다. 그런데 이 수성천의 원류를 회령군 여이현(餘伊峴) 남쪽에서 발원하여 나온다고도 하였다. 급벌산군은 경성시鏡城市로 추정된다. 모성군母城郡, 또는 야차홀(也次忽)은 경성 남쪽 어랑천漁郞川이 흐르는 어랑군漁郞郡의 어대진(漁大津)이다.
객련군客連郡, 또는 가혜아(加兮牙)는 명천읍(明川邑)으로 추정된다. 상아동(象牙洞)이 있다. 백록산도 있는데 이 모두가 중국인 기자의 후예와 관련된다. 기자조선이 처음 생겨났던 요녕성 조양시 객좌현의 지명들이 옮겨온 것이다.
천성군淺城郡 비열홀比烈忽은 안변읍(安邊邑)이다. 천정군泉井郡은 원산시에 있던 덕원군德源郡이다. 내생군(奈生郡)은 고원군(高原郡)으로 고려된다. 을아차현(乙阿次縣)은 천내군으로 고려된다. 우오현(于烏縣) 또는 욱오현(郁烏縣)은 문천시 구읍내 옥평리로 고려된다. 주연현(酒淵縣)은 통천 구읍으로 고려된다. 위 기록에서 천성군 비열홀이던 안변군이 가장 남쪽인데 현 이름들은 대개 현재 국사학계 통설과 일치한다. 천정군도 역시 일치한다.
모도대왕이 웅진의 백제왕이 되고, 청령천황과 왜무왕인 무령천황이 고구려 청진에 공략중인 때에, 모도대왕의 동생인 현종천황은 왜왕위를 찬탈하더니 고구려와 내통하여, 그 처벌로서 488년에 형왕인 모도대왕 인현천황이 일본에 복귀하여 제거당했는데, 이때 왜국 신하들의 반목이 있었다.
484년, 평군진조平群眞鳥가 모도대왕 인현천황을 수행하여 백제에 있는 동안에, 난파소야왕을 보호하던 평군진조의 아들 평군지비平郡志毗가 난파소야왕을 뺏으려는 현종천황과 대반금촌련大伴金寸連에 의해 살해당했었다.
그후 인현천황이 488년에 백제에서 돌아와 현종천황과 난파소야왕을 제거하고 인현천황으로 즉위하여서 평군진조를 재상으로 하니, 그 아들을 죽인 대반금촌련大伴金寸連은 숨어지내야 했다. 현종천황의 아들 추촌?寸은 고구려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 대반금촌련이 평군진조를 죽였다. 494년에서 497년 사이에, 고구려 문자왕이 금야강의 수곡성을 비롯하여 문천의 우산성을 차지한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일본에서도 고구려계가 득세하여 무열천황이 다시 선 것이다.
이때 인현천황은 연금되었거나 중병에 들었다.
모도대왕의 손자인 백제 모대대왕은 이듬해 501년 12월에 백제에서 죽었다.
무열천황은 오토하스세와카사자키천황小泊瀨稚??天皇이라고도 하였는데 하스세泊瀨라는 지명은 윤공천황, 웅략천황 등의 고구려계 호창으로서 무열천황 역시 고구려 피가 섞인 것을 나타낸다.
[고사기]에서는 현종천황 즉위 전에 현종천황이 죽이는 평군지비平群志毗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무열천황 즉위 전에 나온다.
무령대왕은 백제왕으로 즉위하자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피가 섞인 무열천황의 폐위를 요구하고 마나麻那 왕자를 일본에 보냈는데, 그는 모대대왕牟大大王(재위 488~501)의 동생으로 고려된다. [삼국사기]에서 모대를 마모摩牟라고도 기록했다.
504년 무령대왕은 동생인 사아왕斯我王(466~535)과 백제 군대를 함께 보내어 일본 큐슈九州 정벌을 시작하였다. 사아왕은 법사군法師君을 낳았고, 그가 훗날 왜군倭君의 선조가 되었다고 하는데, 왜군은 곧 왜왕倭王을 왜곡한 것이다.
대반금촌대련大伴金寸大連은 백제 침공을 당하여 일단 고구려 피가 섞인 무열천황을 죽였다. 백제 무령대왕은 피붙이인 계체천황을 향한 일본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일찍이 고구려 윤공천황이 점령했다가 그 세력이 많이 남아있는 큐슈 임나를 평정하기 시작하였다.
이후로 일본에서는 규슈가 떨어져나와 백제 땅이 되어서 구주백제가 생겨났다. 다음은 백제의 왕자로서 구주백제왕을 지낸분들의 연표다. 구주백제왕은 뒤에 백제왕이 되거나 일본천황이 되었다. 안한천황과 선화천황은 무령왕의 동생들이고 흠명천황은 무령왕의 아들인데 일본 천황이 되기전에 구주백제왕을 먼저 하였다.
509년, 백제 사아왕(안한천황)은 일본 큐슈 진출의 첫 사업으로 큐슈 임나의 현읍縣邑에 있는 백제인 후손을 찾아서 호적 정리를 하였다.
512년, 백제는 큐슈 임나의 상치리上?唎, 하치리下?唎, 사타娑陀, 모루牟婁 4현을 차지하였다. 하치리는 역시 하구다리로서 옛 안라국이 있던 곳으로서 구마모토다.
구주백제
본래 다라국 중심인 구루메시久留米市가 고구려 고우라산高良山 고모라高牟禮가 되었는데 여기서 다시 고구려 이름을 빼고 옛이름 다라국으로 돌아와서 구다라가 된 것이다. 그런데 구다라를 감추기 위해서 구다(口多)를 합자하여 치?로 위장한 것이다. 지금도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큐슈의 백제 땅이름 구다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타娑陀는 가고시마鹿兒島 남단의 사다佐多곶과 관련하여 가고시마로 추정된다. 모루현은 지금의 모로군諸縣郡의 위치다. 미야자와현宮岐縣이다. 제諸를 모로로 읽는데 우리말 “모두”의 고어다.
즉, 백제 무령대왕 때에 동생인 사아왕자는 규수 중부와 남부를 점령한 것이다. 이때 백제의 구다리국수?唎國守로 임명된 수적신압산穗積臣押山은 계체천황이 있는 대화에 사자로 가서 백제랑 싸워 지킬 수 없으니 그냥 주어서 백제와 큐슈를 합병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고, 대화의 대반대련금촌은 큐슈에 사신을 보내려했지만 죽을까봐 아무도 가지 못했다.
513년, 백제는 대마도 남도의 반파국伴跛國이 점령한 대마도 북도인 기문己汶을 내놓으라고 대화조정에 요구하였다. 반파국은 옛 불합국不合國, 즉 불이합도不二合島인 대마도다. 하나지만 둘로 갈려져 합치지 못한 섬이 대마도인데 그 남쪽을 당시 반파국이라 한 것이다.
계체천황은 백제 큐슈왕인 사아왕斯我王에게 인현천황의 딸 춘일황녀를 보내서 달랬다.
513년 12월, 계체천황은 사아왕斯我王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는 다음대 천황으로 선언한 것이다.
514년, 계체천황은 백제장수 저미문귀姐彌文貴와 사라斯羅의 문득지, 안라安羅의 신기계, 반파의 기전계 등의 성주를 대화조정에 불러서 북대마도의 기문己汶과 체사滯沙를 백제에 내주도록 하였다. 사라斯羅는 지금의 사와라인 큐슈 후쿠오카시福岡市 사와라구早良區 김무성金武城이다.
기문己汶은 임나의 동북에 있고 삼기문三己汶이 있다고 숭신천황 때에 대마도주인 임나도주가 말했다.
[신찬성씨록]任那國奏曰。臣國 東北 有 三己汶地。上己汶。中己汶。下己汶。地方三百里。土地人民亦富饒 지방 300리 크기의 기문은 대마도 북도를 말한다. 좌호천, 인전천, 인위천이 흐르는 3마을이 3기문으로 고려된다. 체사성은 대마도 남도의 성이다.
기문 섬을 백제가 가지니, 반파국은 다시 기문을 돌려달라고 대화조정에 요구한다. 반파국이 약탈한 신라는 큐슈 서북의 신라인 신량新良 사와라 땅에 해당한다. 이때 본토 신라는 512년에 울릉도를 점령하고 514년에 아나가야阿那伽倻에 소경小京을 설치하는 등, 강군으로서 국경을 확대 중이라서, 대마도 반쪽 반파국에 본토를 공격당할 수준이 아니다.
515년, 구주백제의 사아왕이 보낸 장수 물부련物部連이 사쓰도沙都島를 쳤는데 사쓰천佐須川이 중심에 흐르는 대마도 남도 반파국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파국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문모라汶慕羅로 물러나왔다. 문모라는 미마나, 즉 예전의 대마도 임나다. 지금 대마도 미진美津의 계지천 부근이다. 구주백제왕은 물부련을 기문(대마도 북도)에서 위로하고 귀국시켰다. 이후 523년에 무령대왕이 서거하고 성명대왕聖明大王(~554)이 즉위했다.
<삼국사기> 무령왕(武寧王)은 이름이 사마(斯摩)<혹은 융(隆)이라고도 하였다.>이고 모대왕(牟大王)의 둘째 아들이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牛頭城)에 이르러 한솔(~率) 해명(解明)에게 명령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 항복하자 왕은 그의 목을 베어 백강(白江)에 던져버렸다.
사론(史論): 춘추(春秋)에 『남의 신하가 된 자는 반역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無將, 반역하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백가(加)와 같은 흉악한 역적은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는 바인 데 곧장 죄주지 아니하고, 이에 이르러 스스로 죄를 면하기 어려움을 알고 반란을 꾀한 후에야 죽였으니 때가 늦었도다. 이후 역사에서 수곡성은 사라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황해도 수안군 장새현에 있었다는 수곡성은 발해 때에 옮겨온 것으로 고려된다. 503년, 무령대왕 즉위 3년에 산동반도 백제땅을 잃었다.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 고구려 문자명왕 12년, 503년에 백제의 진평군晋平郡을 없앴다고 하였다. 문자명왕은 백제의 식민지를 거의 다 빼앗아서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이 이제 고구려에 속했다고 하였다. 이때가 고구려의 최전성기다. 그러나 고구려가 산동 땅을 제대로 경영했는지는 의문이다. 6년(506) 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3월에서 5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오지 않아 내와 못이 말랐다. 백성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이해 백제는 대동강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이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이 기록된 것이 <평양성벽 각서>이다. 평양성벽 각서는 일부 남아 있고 일부는 기록만 전하고 있다. 평양성벽 각서중 4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병술년 12월 중에 한성漢城이 함락되어 후부(지명) 소형(관직) 문달 이름은 여기서 공사를 중단하고 서북쪽으로 물을 건너갔다.” 丙戌十二月中 漢城下 後部小兄 文達 節自此 西北行涉之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동강 평양성이 고구려 한성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평양성벽 각서는 제1석부터 5석까지 있는데 제 4석은 내성의 대동강 강가 성벽 장경문長慶門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성벽은 대동강을 따라서 동북과 서남 방향으로 이어졌고 서북쪽으로는 성벽을 쌓지 않았다. 한성은 바로 비문이 발견된 오늘날의 평양성에 대한 당시의 고구려 이름이고 백제 한성이기도 한 것이다. 다른 네 개의 각서와 마찬가지로, 공사의 시작이나 끝은 정확한 날자가 기록되어야 하지만, 병술년 12월에 한성이 함락되어 공사를 중단하고 황급히 서북으로 도망가다 보니, 그 뒷날에 공사가 중단된 날을 알 수도 없고 기록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비석이 발견된 곳에서 서북으로는 성벽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서북으로 도망간 것이다. 즉 이 기록은 공사를 시작하거나 마친 기사가 아니라 일단 내성을 쌓다가 중단하였던 사실에 대한 뒷날의 기록이다. 백제가 대동강 북쪽의 한성을 되찾은 것은 5회로 추정된다. 1. 아신왕阿莘王이 광개토왕에게 빼앗기고, 399년 일본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회복하였으나 광개토왕이 다시 뺏았다. 2. 비유왕毗有王이 말년, 454년 이전에 수복하였으나 475년에 개로대왕이 장수왕에게 다시 빼앗겼다. 3. 무령왕武寧王이 506년 회복하여 동이강국東夷强國이 되었으나 529년(성명왕聖明王 7년)에 빼앗겼다. 4. [일본서기]에서 성명왕聖明王이 550년경에 평양(平壤=南平壤=북한산성)과 한성(漢城=니현 한성)을 되찾았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거칠부전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 <평양성벽각서>를 만족시킬 수 있는 병술년은 506년이다. 즉, 506년 2월에 무령대왕은 평양과 한성을 수복하였고, 7년(507) 여름 5월에 고목성(高木城)의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웠고, 또 장령성(長嶺城)을 축조하여 말갈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고로(高老)가 말갈과 더불어 한성(漢城)을 공격하고자 꾀하여 횡악(橫岳) 아래에 진군하여 주둔하였다.
10년(510) 봄 정월에 명령을 내려 제방을 튼튼하게 하게 하고 중앙과 지방內外에서 놀고먹는 자遊食者들을 몰아 농사를 짓게 하였다.
12년(512) 여름 4월에 사신을 양(梁)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불성은 가화압(加火押)이라고 하였던 한성 남쪽의 중화군이다. 고구려가 수군부대로 중화군 서쪽의 해압면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16년(516) 봄 3월 초하루 무진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4월 18일이다. 0516 Apr 18 00:07 A 95 0.761 0.942 52.9N 143.5E 40 327 05m01s 21년(521) 여름 5월에 홍수가 났다. 가을 8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하여 들어간 자가 900집이었다. 겨울 11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는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쇠약해진지가 여러 해였다. 이 때에 이르러 표를 올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비로소 우호를 통하였으며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일컬었다. 12월에 고조(高祖)가 조서를 내려 왕을 책봉하여 말하였다. 『행도독백제제군사(行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백제왕(百濟王) 여륭(餘隆)은 해외에서 번방(藩方)을 지키고 멀리서 공물貢職을 보내 그 정성이 이르니 짐은 가상히 여기는도다. 마땅히 옛 법을 좇아 이 영예로운 책명(冊命)을 주니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이 가(可)하다.』
22년(522) 가을 9월에 왕이 호산(狐山)의 들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3년(523) 봄 2월에 왕이 한성(漢城)으로 행차하여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등에게 명령을 내려 한북주군민(漢北州郡民)의 백성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하였다. 쌍아산이 있는 함종현은 아산현(牙山縣)이라고도 하였는데 쌍아산의 모양이 두 개의 상아, 혹은 두 개의 물고기가 뻗어나온 산의 모양이다. 쌍아산에는 남쪽의 내성과 북쪽의 산성이 보이는데 각각 책계왕이 쌓은 것과 무령왕이 쌓은 두 개의 쌍현성으로 고려된다.
3월에 한성(漢城)으로부터 돌아왔다.
무령대왕릉은 현재 공주 송산리에서 발굴되어 있다.
[일본서기/웅략천황기]에 도입된 백제 기록은 [백제신찬百濟新撰]의 429년 기사년부터 461년 곤지군의 기록과, [백제기百濟記]의 475년 기록이 있다.[백제기(346~475년)]는 근초고대왕부터 개로대왕까지 소개되어 있는데, 그 이전의 역사를 포함할 수도 있다. 백제의 박사 고흥高興에 의해 [백제서기百濟書記]가 편찬된 것이 근초고대왕 때이므로, 근초고대왕 이전을 [백제서기]에 기록하고 근초고대왕 이후부터 [백제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백제신찬(429~501)]은 비유대왕부터 무령대왕까지 인용되었으며, [백제본기百濟本記(501~557)]는 무령대왕부터 위덕대왕초기까지 기록이 인용되었다.
중국 [양서]의 기록을 본다. 502년 백제왕을 정동장군이라고 하였다. 그간 고구려에 많이 침략당해서 "남한"으로 천도했다. 520년 큐슈를 거의 병합한 백제 무령대왕은 고구려를 여러번 무찔러서 비로소 양나라와 길을 통했으므로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고, 양나라 무제는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에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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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홍익인간/인류공영 원문보기 글쓴이: 솔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