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째 주 공부는 소토아 부인의 '언클 톰스 캐빈'을 공부하겠습니다.
작품은 하나 만 올립니다.
보조 작품은 두어 편 올리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미극 흑인의 역사를 참고 자료로 올리겠습니다.
요즘 TV에서 헤일리의 '뿌리'를 내보고 있으니 보시면 흑인의 역사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번에 미국 흑인을 조금 이해해 봅시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
작가 ; 헤리엇 비처 스토어(1811 - 1891)
초판 발행 ; 1852
* 죽은 해가 1891년인지. 1896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은 미국의 사실주의 작가이자 노예제 반대자인 해리엇 비처 스토(1811년-1896년)가 1852년에 발표한 대표작이다. 이 소설은 노예제의 비참함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어 노예제 반대론자와 찬성론자간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려졌다. 반대론자들은 노예제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소재가 되었고, 찬성론자들에게는 "편견으로 가득찬 책"이었던 것이다. 폭력에 반대하다가 악마 같은 노예주 레글리에게 구타당한 톰이 "비록 나의 몸은 당신에게 팔려 왔지만, 내 영혼만은 하느님의 것입니다."라고 외친 선언은 노예제에 대한 반대하는 작품의 성격을 잘 설명해준다.
《National Era》라는 잡지에 처음으로 연재되었던 첫 장편 소설이며, 1850년에 발표된 도망 노예 단속 법안과 노예 제도에 대한 반발로 쓰여졌다. 해리엇은 아이들을 모두 재운 뒤 밤마다 이 소설의 집필에 매달렸다고 한다.
줄거리는
켄터키주(州)의 지주 셸비 부부는 노예들에게는 마음씨 좋은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셸비는 사업에 실패하고 막대한 빚을 져 농장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충실하였던 노예 톰과, 혼혈 노예 엘리저의 다섯 살난 아들 해리를 노예상인에게 판다.
아들 해리와 헤어질 것을 알게 된 엘리저는 해리와 함께 도망치고, 해리의 아버지인 조지 해리스를 만나 평화주의 교회인 퀘이커교회 신자의 도움으로 무사히 캐나다에 당도한다. 한편 톰은 팔려가는 도중, 배가 강을 따라 내려갈 때, 같은 배의 승객인 에바의 생명을 구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의 아버지 오거스틴 생클레어에게 팔려가고, 그곳에서 한동안 행복하게 지낸다.
그러나 에바와 오거스틴이 사망하고 냉혹한 시몬 레글리에게 다시 팔려가서 레글리의 목화밭에서 심한 학대를 받는다. 톰은 레글리의 다른 노예인 캐시와 에믈린의 탈출을 도와주고 그로 인해 레글리로부터 죽임을 당한다.
톰이 죽기 직전 톰의 원래 주인인 셸비 부부의 아들 조지는 톰을 다시 사들이려고 찾아오지만, 톰은 결국 사망한다. 조지는 켄터키 본가로 돌아가 노예들에게 톰의 희생에 대해 알리고, 모든 노예를 풀어준다.
1850년에 도망 노예법이 만들어지면서 미국에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초래되었다. 어떤 젊은 여성이 도망노예법을 ‘끔찍한 악몽’이라 말하며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고 미국과 전 세계의 양심을 뒤흔드는 작품을 내놓은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1년 동안 30만 부가 팔렸다. 유럽에서 번역물이 출간되자 판매량은 전세계적으로 150만 부를 넘었다. 서적 판매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연극으르도 공연되어 스토어 부인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류 인사의 반열에 올랐다. 1862년 링컨은 헤리엇 비처 스토를 만나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게 자그마한 여인이 그토록 큰 전쟁이 일어나게 한 책을 썼다는 거요” 이 소설이 기록한 놀라운 성공 때문에 소토우 부인은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였다. 이 소설이 주장한 반 노예 사상이 남, 북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여러가지 타입의 인물들이 엮어 나가는「Uncle Tom’s Cabin」이 경이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기는 하였으나 문학적으로는 별로 가치가 없다는 의견이 오랫동안의 통념이 되어 왔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열렬한 기독교 신자인 한 흑인 노예의 비참한 생애와 그 당시의 여러가지 사회상을 묘사함으로써 북부 사람들에게 노예제도 폐지를 결심케하고 이윽고 남북전쟁 발발의 원동력의 하나가 된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인물이 모두 유형적이며 사건은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는 평을 받아 왔다. 다시 말하면「Uncle Tom’s Cabin」은 센티멘탈이며 멜로 드라마라는 것이다.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된 작품은 아니라는 뜻이다.
“스토오 부인은 제 1급의 작가도 아니고 천재도 아니다.”
평론가들은 이상하게도 ‘톰 아저씨의 오두막 솔직히 칭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론가들이 뭐라고 해도 이 작품이 어떤 다른 서적보다 미국의 역사를 움직인 작품이며,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작품이며, 오늘날에 있어서도 놀라운 힘을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작품을 쓴지 100년이 훨씬 지나서야 해리엣 비쳐 스토오는 미국의 주요한 작가들 축에 끼어든 느낌이다. 미국의 역사를 바꾸고 전세계의 독자에게 감동을 일으킨 소설「Uncle Tom’s Cabin」의 작가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미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너무나 인색하였던 것 같다. 스토오 부인은 그 후 제2의 반 노예소설인「드레드(Dred)」등 뉴잉글랜드에서 취재한 일련의 소설을 발표하였으며, 남북전쟁 후에는 주로 플로리다에 살면서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작가>
1811년 미국 코네티컷 주 리치필드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맏언니 캐서린의 영향 아래 성장했다. 캐서린이 설립한 하트퍼드 여학교에 다녔으며, 훗날 그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쳤다. 노예 농장주와 결혼한 이모 메리에게 처음으로 노예제의 참상을 전해 들으며 당시 사회의 부조리에 눈떴다.
하트퍼드의 학교에서 공부한 뒤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832년 신학교를 설립하려는 아버지를 따라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로 이주했고, 1836년에는 목사이며 신학교 교수, 노예해방론자인 캘빈 엘리스 스토와 결혼했다. 노예제도를 유지한 남부와 인접한 신시내티에서 18년간 살면서 그녀는 노예들의 실상을 잘 알게 되었다. 가난한 신학 교수 캘빈 스토와 결혼한 후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문예지에 단편소설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결코 윤택하지 못하였다. 처음 7년간에 5남매를 낳았으니, 칼빈의 박봉으로 생활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할 수 있다. 부부의 성격에도 문제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해리엣은 거동이 느리고 관용한 데가 있었으나 칼빈은 꼼꼼하고 신경질적이었다. 칼빈은 아침 기도나 식사를 정해진 시간에 시작하고 싶었으나 해리엣은 그런 것에 구애 받지 않았다. 칼빈은 집안의 모든 것이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좋아했지만 해리엣은 모든 것을 여기 저기로 옮기기를 좋아하였다. 칼빈은 신문도 읽은 다음에는 제대로 접어 놓기를 바랐으나 해리엣은 펼쳐 놓은 채였다.
이렇게 해서 결혼 생활에 지칠대로 지친 해리엣은 약 1년간 전지요양을 하게 된다. 1850년에 도망노예법이 반포되자 노예제에 항의하는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북부에서 활동하던 흑인 목사 조시아 헨슨을 모델로 ‘톰 아저씨’라는 인물을 만들어내고, 노예제 반대 신문 <내셔널 이러>에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852년 두 권짜리 단행본으로 출간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북부에서는 뜨거운 찬사를, 남부에서는 격렬한 비난을 받으며 금서로 지정되었다. 이후 노예제에 반대하는 두번째 소설 『드레드』를 비롯하며, 『목사의 구애』『오어 섬의 진주』『정든 마을 사람들』『샘 로슨의 옛 고향 노변정담』 등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미국 국민들의 양심에 호소한 엉클 톰스 캐빈』은 출간 첫해에만 30만 부가 팔렸다. 이 소설은 대중의 노예제 반대감정을 고취시키며 유례없는 인기를 누렸다. 남북전쟁을 촉발시킨 항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그 강렬한 주제 의식뿐만 아니라 소설로서의 매력을 여전히 잃지 않으며 오늘날 미국문학사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남북 전쟁 이후에는 플로리다 주에 살면서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1896년에 85세를 일기로 하트퍼드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