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순종하는 그릇” 従順する器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신약성경 다섯 번째 책인 사도행전은 대단히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하신 모습은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만, 만약에 사도행전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행전이 있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어떻게 교회를 섬겼고,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 책 이름이 사도행전이긴 합니다만, 엄밀히 따지자면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합니다. 구약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때로는 선지자를 통해서, 때로는 천사들을 통해서 역사하셨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장 1절~4절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五旬節の日になって、皆が同じ場所に集まっていた。
すると天から突然、激しい風が吹いて来たような響きが起こり、彼らが座っていた家全体に響き渡った。
また、炎のような舌が分かれて現れ、一人ひとりの上にとどまった。
すると皆が聖霊に満たされ、御霊が語らせるままに、他国のいろいろなことばで話し始めた。
갑자기 하늘에서 성령님이 내려오시더니 이제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거기서 기도하는 모든 사람 위에 성령님이 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부터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17절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そしてわたしが父にお願いすると、父はもう一人の助け主をお与えくださり、その助け主がいつまで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ます。
この方は真理の御霊
です。世はこの方を見ることも知ることもないので、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あなたがたは、この方を知っています。この方はあなたがたとともにおられ、また、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
요한복음 14장 25절~27절
“25.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これらのことを、わたしは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る間に話しました。
しかし、助け主、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は、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話したすべてのことを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います。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平安を残します。わたしの平安を与えます。わたしは、世が与えるのと同じようには与えません。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ひるんではなりません。
요한복음 15장 26절
“26.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요한복음 16장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の益
になるのです。去って行か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はおいでになりません。でも、行けば、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を遣わします。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반복해서 성령님이 오신다는 사실, 그리고 성령님이 임하시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
예언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언은 앞서 살펴본 사도행전 2장 1절~4절로 인해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聖霊を与えてくださいます。」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부 극소수 선지자들만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야지만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난 다음 성령을 부어주신 이후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언제
어디서 어떤 때는지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예수님 이후로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시대입니다. 이제 사람의 능력이 아닌 성령님의 능력으로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은 그와 같은 놀라운 내용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사도행전이라기 보다는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서 핵심인물은 베드로와 바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도에 의해서 이스라엘 내외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우선 이스라엘 내외에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렇다면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 중에서 어느 쪽이 이스라엘 전도에 적합하고, 어느 쪽이 이방인 전도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이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두 사도에 대해서 간단하게나마 비교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사도 베드로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출신입니다. 그가 살던 곳은 요한복음 1장 44절에 의하면 <벳새다(ベツサイダ)라고
하는 곳이었는데, 이는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동네였습니다.
그 벳새다라고 하는 동네 이름의 뜻은 “어부의 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그 동네에 여러 직업이 있는 사람 중의 어부가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어부의 일밖에 모르는 사람, 당시에는 의무교육이나 그와 같은 제도가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철이 들고 난 다음부터 그저 고기잡이만 해왔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성령강림 사건 때에 그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렇게 되니까 아무리 많이 배우지 못했기는 하나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41절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そこで、ペテロは彼らに言った。「それぞれ罪を赦していただくために、悔い改めて、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バプテスマを受けなさい。そうすれば、賜物として聖霊を受けます。
この約束は、あなたがたに、あなたがたの子どもたちに、そして遠くにいるすべての人々に、すなわち、私たちの神である主が召される人ならだれにでも、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
ペテロは、ほかにも多くのことばをもって証しをし、「この曲がった時代から救われなさい」と言って、彼らに勧めた。
彼のことばを受け入れた人々はバプテスマを受けた。その日、三千人ほどが仲間に加えられた。
아무리 못 배운 베드로임에도 불구하고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니까 설교를 한 번 하자, 3천 명이나 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바울은 어떤지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私は、キリキアのタルソ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すが、この町で育てられ、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
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今日の皆さんと同じように、神に対して熱心な者でした。
빌립보서 3장 5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私は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イスラエル民族、ベニヤミン部族の出身、ヘブル人の中のヘブル人、律法についてはパリサイ人、
이와 같은 구절로 볼 때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바울이 태어난 곳은 길리기아 다소(キリキアのタルソ)라고 하는데, 당시 이 곳은 문화적으로도 상당히 큰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동서를 연결하는 중요한 무역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베냐민 지파였을 뿐만 아니라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바리새인이라고 맨날 예수님한테 혼
나고, 자기들은 맨날 잘난 척이나 하고, 결국 대제사장과 결탁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 장본인들 중 하나입니다만, 사실
그들은 당시 종교적으로 본다면 지도자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또 당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고 하는데, 사도행전
5장 34절에 보면 그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교사(民全体に尊敬されている律法の教師)”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학이라고 하면 캠퍼스에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고 거기에 수많은 학생들과 교수님들 계셔서 수업을
듣고 졸업을 하고 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에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아니라 어느 선생님에게 배웠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최고로 좋은 학교,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배경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2장 27절~29절
“27.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そこで、千人隊長はパウロ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私に言いなさい。あなたはローマ市民なのか。」パウロは「そうです」と答えた。
すると千人隊長は言った。「私は多額の金でこの市民権を手に入れたのだ。」パウロは言った。「私は生まれながらの市民です。」
そこで、パウロを取
り調べようとしていた者たちは、すぐにパウロから身を引いた。千人隊長も、パウロがローマ市民であり、その彼を縛っていたことを知って恐れた。
그를 재판하고 있는 천부장은 지금으로 본다면 외국으로부터 이민을 와서 비싼 돈을 들여가며 어렵게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고 하는데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던 것이지요.
자, 이와 같이 베드로와 바울을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작은 어촌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바울은 대도시에서 자랐습니다.
베드로는 분명 유대인이었겠으나 구체적인 지파나 집안 내력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리 내세울만한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반면에 바울은 베냐민 지파에 바리새파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 중에서도 상당히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많이 배우지도 못한 고기잡이 집안이었는데, 바울은 쉽게 말해서 훌륭한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를 했었으나, 바울은 고급 관료였습니다.
자, 지금 이 두 사람을 이용해서 유대인 선교와 이방인 선교를 벌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으로 본다면 누가 유대인 선교에
적합하고, 누가 이방인 선교에 적합하겠습니까.
이건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제게 말을 해준 그 분이 미국에 있는 어느 대학에 다닐 때의 일이래요. 지인들 중에
한국 명문 사립대를 나온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는 서울대를 나왔는데, 미국에 가서 얼마 안 되어서 미국인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분도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 그 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미국인이 한국인 친구들이 나온 그
명문 사립대를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뭐 그 미국인이 한국에 지나치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국사람이라면 다 아는 그 대학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하고, 그 학교를 나온 한국인 친구가 좀 실망을 하더래요.
그래서 서울대를 나온 그 분이, 아무리 그래도 서울대는 알겠지, 하고, 아, 자기는 서 울대를 나왔다고 하니까, 그 때까지 좀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국 학생 표정이 아주 밝아지더래요. 그래서, 그래, 역시 서울대 정도 되면 이 미국인 친구도
알아주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 미국인이 의외의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자기가 서울대를 나왔다고 하니까, 그 미국인 대학생이 뭐라 그랬냐 하면 아주 활짝 웃으면서 “Oh, I know
Seoul! I know Seoul Olympic!”
아하! 나 서울 알아! 서울올림픽 알아! 그랬다는 것이에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 미국인 친구는 서울대라고 하는 대학을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서울>이라고 하는 도시를 나도
알아!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지요.
뭐, 물론 그 미국인 대학생 친구가 너무 뭘 몰라서 그랬다고 하면 할 말은 없겠습니다만, 이 일을 경험하고 느낀 것이, 아, 그래
한국에서는 그렇게 죽어라고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했었는데, 어쩌면 그게 다 우물 안 개구리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상당히 허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을 보았을 때, 아무리 바울이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학교를 나왔다 하더라도, 아무리 고급
공무원이었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유대인들 사이에서나 알아주는 일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와~ 정말 대단하네~ 뭐 그러면서
인정해줄지는 모르지만, 거기서 한발자국 나가면 아무도 안 알아줍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시 그리스 같은 외국에 가서 아~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베냐민 지파고 바리새파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고……라고 하면 누가 알아주나요.
반면에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제 한 번 설교를 하니까 수 천명이 모여들어요. 하지만 화려한 배경이나 학벌이 없기
때문에 자칫하면 유대인들 사이에서 무시를 당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알아주는 배경과 실력을 갖춘 바울이 유대인 선교를 맡고, 그러한 학력이나 배경 같은 것이 없는 베드로는
오로지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방인 선교로 돌리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학벌도 배경도 없는 베드로,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더니 3천명이 모였다고? 그렇다면 내가 말씀을 전하면 적어도 3만 명은 모이지 않겠어……?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나중에 천국 가서 바울 선생님을 만났을 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고 혼이 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많이 부족한 저였더라면, 어쩌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 사도행전 13장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6절~41절까지 보면 안식일 날 유대인 회당에서 바울이 작심하고 말씀을 전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시간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이 날은 반응이 좀 괜찮았어요.
사도행전 13장 42절~43절
“42.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二人が会堂を出るとき、人々は、次の安息日にも同じことについて話してくれるように頼んだ。
会堂の集会が終わってからも、多くのユダヤ人と神を敬う改宗者たちがパウロとバルナバについて来たので、二人は彼らと語り合い、神の恵
みにとどまるように説得した。
바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따랐다고 합니다. 반응이 좋으니까 다음 주 안식일에도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 봐라. 역시 내 적성은 유대인 선교야……. 어쩌면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주 안식일입니다.
바울은 역시 그 날도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무리들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모여든 유대인들의 반응이 좀
이상해요.
사도행전 13장 44절~45절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次の安息日には、ほぼ町中の人々が、主のことばを聞くために集まって来た。
しかし、この群衆を見たユダヤ人たちはねたみに燃え、パウロが語ることに反対し、口汚くののしった。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기 위해서 모여든 것을 보고 시기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목사나 전도사라고 하는 직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이 말씀을 전할 사람을 섭외해서 말씀을 전하도록 했었다고 합니다만, 어쩌면 그 자리에는
평소에 말씀을 전하던 사람들이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보니까 자기가 설교할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요. 그러면 질투가 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많이 모여든 사람들을 보고 시기가 나니까 바울이 말한 것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고 트집을
잡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화가 난 바울은 말합니다.
사도행전 13장 46절
“46.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そこで、パウロとバルナバは大胆に語った。「神のことばは、まずあなたがたに語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あなたがたはそれを拒んで、自分自身
を永遠のいのちにふさわしくない者にしています。ですから、見なさい、私たちはこれから異邦人たちの方に向かいます。
이봐, 유대인들아, 너희들이 먼저 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하는데, 왜 이를 안 받아들이냔 말이야.
너희들 자꾸 이러면 차라리 이방인한테 가는 수가 있어?
자, 바울이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아이구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하고 바울을 만류했을까요?
사도행전 13장 50절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ところが、ユダヤ人たちは、神を敬う貴婦人たちや町のおもだった人たちを扇動して、パウロとバルナバを迫害させ、二人をその地方から追い出した。
참 인생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가 부귀와 명예와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모두 다 버리고 예수님을 전하기로 작정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평생을 바치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렇다면 좀 일이 술술 풀려줘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데도
일이 꼬이게 되니 바울도 참 답답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어떻게 말씀하고 계셨습니까.
사도행전 9장 15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しかし、主はアナニアに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の人はわたしの名を、異邦人、王たち、イスラエルの子らの前に運ぶ、わたしの選びの器です。
여기에 기록된 말씀은 사실 주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울에게 안수를 줄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 그러니까 바울더러 이방인 선교를 하라는 주님의 뜻을 바울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 13장 47절에서 바울 자신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7절
“47.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主が私たちに、こう命じておられるからです。『わたしはあなたを異邦人の光とし、地の果てにまで救いをもたらす者とする。』」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서 빨리 이방인들에게로 향했어야 했는데 계속해서 유대인들 사이에 남아있다 보니까, 사람들을 충동해서 아예
내쫓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바울을 가리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도 여러분께 질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전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면 축복을
받을까요? 못 받을까요. 예,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릇으로 쓰임을 받게 된다면 축복, 그것도 큰 축복,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부터가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여러분 앞에 나타나셔서, 너를 내 그릇으로 삼겠다, 라고 하면
어떠시겠습니까. 기쁘십니까. 두려우십니까. 1번 기쁘다. 2번 두렵다.
자, 우리는 당연히 기쁘다, 1번을 선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니, 그렇잖아요. 하나님께서 이 부족한
저를 주님께서 쓰시기 위한 그릇으로 택해주셨다는데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다음 구절입니다. 이사야 30장을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30장 12절~14절
“12.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을 의지하니
13.이 죄악이 너희에게 마치 무너지려고 터진 담이 불쑥 나와 순식간에 무너짐 같게 되리라 하셨은즉
14.그가 이 나라를 무너뜨리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아낌이 없이 부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붙이거나 물
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それゆえ、イスラエルの聖なる方はこう言われる。「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言うことを退けて、虐げと悪巧みに拠り頼み、これに頼った。
それゆえ、このあなたがたの不義は、そそり立つ城壁に広がって今にもそれを倒す裂け目のようになる。その倒壊は瞬く間に来る。
その倒壊は、陶器師の壺が容赦なく打ち砕かれるときのよう。その破片の中には、炉から火を取り、水溜めから水を汲むかけらさえ見つからない。」
지금도 실제로 손으로 도자기를 만드시는 분들을 보면요, 가마에서 구워 나온 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망치로 박살을
내버립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직 가마에 넣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다 구워 나온 상태에서는 어떻게 고칠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깨버리시냐 하면 그 조각을 가지고 불을 붙이거나
물을 뜨지도 못할 정도로 아주 완전히 박살내 버리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목이 말라요. 그래서 컵에 물을 따라 마시려고 했어요. 그런데 컵이 깨져버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물을 안 마셔요? 아니요. 다른 컵을 꺼내서 마시면 그만입니다.
에스더 4장 14절을 봅니다.
에스더 4장 14절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もし、あなたがこのようなときに沈黙を守るなら、別のところから助けと救いがユダヤ人のために起こるだろう。しかし、あなたも、あなたの父の家も滅
びるだろう。あなたがこの王国に来たのは、もしかすると、このような時のためかもしれない。」
이제 유다 민족이 망하게 생겼는데 왕비 에스더가 자기 목숨이 귀하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시겠지만,
너는 망한다고 에스더의 의부인 모르드개가 말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인데 얼마나 큰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겠습니까. 그러나 그 그릇이 하나님 뜻대로 쓰이는 것을 거부한다고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포기하시나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그 그릇을 아끼지는 않으십니다. 흔적도 없이 박살을 내신 다음, 새 그릇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바울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私が福音を宣べ伝えても、私の誇りにはなりません。そうせずにはいられないのです。福音を宣べ伝えないなら、私はわざわいです。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은 꼭 목사나 교역자, 또는 직분자만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 내가 지금 하는 일, 이는
모두가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거기 있고, 내가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주님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세우시고 우리를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그 후에는 주님의 크고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순종하지 않고, 주님을 거부한 채로 세상을 섬기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어두움 속에서, 죄악
속에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아닌 다른 그릇을 선택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하시고자 하는 뜻을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바울이 만약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끝까지 자신은 유대인 선교를 하겠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시라고, 내가 이방인 선교보다는 유대인
선교가 더 낫지 않겠느냐고 끝까지 우겼다고 한다면, 주님은 결국 바울이라고 하는 그릇을 깨고 다른 그릇을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이고 절망적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릇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고 희망적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달려갈 길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あとは、義の栄冠が私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だけです。その日には、正しいさばき主である主が、それを私に授けてくださいます。私だけでなく、主の現れを慕い求めている人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
우리 모두 하나님의 그릇, 예수님의 그릇으로서 바울이 끝까지 순종하여 의의 면류관을 얻은 것과 같이, 우리에게 남겨진 삶 속에서
끝까지, 순종하는 그릇으로 쓰임 받음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우리를 위해 예비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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