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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마치고 드리는 예배는 생각보다 좀 어려움이 있어요. 휴가 기간이 끝났을 때 예배와 또 명절 지내기 전보다 지난 후의 예배는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되게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마 명절 기간에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별히 오늘은 여러분이 기도하시면서 저를 위해 기도하시고 또 말씀 듣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말씀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품는 의문이 있습니다. 성도만 품는 의문은 아니고 불신자들도 이런 질문을 종종 하고 기독교를 공격하는 무신론자들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드셔서 에덴 동산에 두셨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창세기 3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하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선악을 알게 한 나무를 하나님께서 두셨어요.
그렇게 두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절입니다. 3절 말씀 우리 같이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동
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시고 가장 접근하기 쉬운 곳에 두시고,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 거예요. 처음부터 선악과를 만들지 마시던가 아니면 선악과를 만드셨다 하실지라도 인간이 발견할 수 없는 은밀한 곳에 두면 인간이 접근할 수 없고 죄를 짓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근데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시고 동산 중앙에 사람이 잘 보이는 곳에 두시고,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만지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고 명령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저의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시험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로 인해서 고통도 받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 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서 이렇게 인간이 죄인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 되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근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되는 일이 있어요.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는 법이 없으신 분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비하심과 준비하심에는 한 치의 실수도 없다는 겁니다.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 같이 읽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실수로 선악과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도가 있고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럼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시고 동산 중앙에 두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 경계를 두시고자 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와 그리고 피조물의 경계를 선악과로 만드셨어요.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것들의 경계를 만드셨는데 그 경계가 바로 선악과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신 이후에 많은 종류의 경계를 만드셨어요. 시편 104편 9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편 104편 9절 시작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시편 104편 9절에는 물의 경계를 만드셨다 그랬고, 시편 74편 17절에는 땅의 경계를 만드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시되 우주 만물을 만드시되 경계도 함께 만드셨다는 거예요.
이게 어떤 의미냐 하면 인간은 그 경계 안에 살아야 될 존재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경계를 만드셨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그 경계 안에 사는 것이 인간의 참된 행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제가 행복하라면 행복하게 이 땅의 삶을 살려면 하나님이 피조물을 두신 경계 가운데 우리가 살아야 우리가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죄로 인해서 우리가 고통받지 않으려 하면 피조물의 자리에 계속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창조주의 자리에 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경계를 온갖 종류의 경계도 만드시고 특별히 그중에 하나님과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도 엄격하게 만드셨는데 그것이 선악과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실 때 그냥 막 만들어 놓은 게 아니에요. 질서와 규칙으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 질서와 규칙 중에 하나가 경계를 만드는 거예요. 서로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선을 만들어 놓으셨어요. 피조물과 창조물도 마찬가지로 절대로 넘어서면 안 되는 선을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이게 인류의 비극이자 인간의 비극입니다. 인류의 비극은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려는 곳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비극은 인류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경계를 넘어서면서부터 시작이 됐어요. 인류는 계속해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하나님이 정해주신 피조물의 경계 안에 있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근데 아담과 하하가 선악과를 따먹고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가 되려고 했던 거예요.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경계선을 넘어섰어요. 그래서 경계선이 무너지게 되고 인간이 불행해지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을 피조물의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행동인 거예요. 선악과를 만지지도 말고 먹지도 않는 이 행동을 계속 지키는 것을 통해서 나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는 것을 믿고 지키게 하셨던 거예요.
그런데 아담과 하하가 이 경계선을 넘어서버렸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경계선을 넘어섰기 때문에 인류가 불행하기 시작했고, 인류의 행복이 깨어지기 시작했고, 인류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선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선악과가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선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계속 인식하고 있다면 선악과가 아무리 자주 보이고 이것이 아무리 먹음직해도 그것을 먹으려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근데 인간이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망각했어요. 피조물의 자리에 있을 때가 하나님을 가장 많이 누린다는 사실도 망각해버렸어요. 피조물의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도 망각해버렸어요.
욕심과 욕망에 이끌려서 성욕에 이끌려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아담과 하와는 이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있었는데 선악과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요. 원래는 이 선악과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야 돼요. 그런데 눈에 들어오도록 유혹하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뱀입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의 욕망을 자극했기 때문에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선악과를 먹지 않을 자유와 동시에 선악과를 먹을 자유를 함께 주셨어요. 인간이 계속해서 피조물의 자리에 머물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거예요.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피조물의 자리에 평생 머물러 있는 존재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자리에 머물도록 계속 노력해야 하는 존재로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그런데 노력하지 않으면 피조물의 자리에 있지 못해요. 이 사실을 안 뱀이 아담과 바울을 유혹하게 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의 경계선에는 3중 철조망이 쳐져 있어요. 근데 이 철조망은 평상시에 잘 인식되지도 않아요. 그냥 지나다니면서 철조망을 보수하면 돼요. 남쪽에 철조망이 있고 정확하게 말하면 북쪽에 철조망이 있고 그 가운데 이렇게 38선이 있고 이게 정확한데 그냥 간단하게 제가 철조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평상시에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 선이에요. 철조망이에요. 튼튼하기도 하고요. 경고하기도 하고 삼중망이 돼서 거리로 넘어올 사람도 별로 없어 보여요. 래서 지나다니면서 별 신경 쓰지 않고 혹시 구멍이 뚫렸는지 아니면 토사가 유출되었는지 이런 것만 살피면서 그냥 지나다니면 돼요.
문제가 언제 발생할까요? 이 경계선으로 북한이 내려오거나 남한이 올라갈 때 생기는 거예요.
내려오지 않거나 올라가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 내려오거나 올라가려고 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겨요.
그게 전쟁이라는 거예요. 북한이 내려가는 순간 전쟁이 벌어지는 거고 남한이 올라가려고 하는 순간 그럴 일도 없지만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악과는 평상시에는 중요하지 않아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일상을 방해하는 것도 아니에요. 근데 내가 경계선을 넘어서는 순간 그것을 먹는 순간 모든 상황이 다 바뀌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조물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평안이 깨져요. 아담과 하하가 피조물의 경계를 넘어서서 선악과를 먹어서 평안히 깨어졌던 것처럼, 여러분과 저의 지금 우리의 삶에도 우리가 피조물의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는 깨지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주신 평화는 우리가 피조물의 자리에 있으려고 노력할 때 깨어지지 않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창조주가 되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는 깨어져요.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피조물의 자리에 충실하게 머물러 있는 것을 힘들어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매순간 자기가 창조주가 되고 싶어해요.
생각해 보세요. 밥도 내가 지었어요. 자녀도 내가 낳았어요. 가정도 내가 꾸렸어요. 회사도 내가 만들었어요. 잘못 착각하면 내가 창조주처럼 보일 일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피조물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너무 어려워요.
왜요? 마침 내가 창조주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내 주변에 너무 많기 때문인 거예요. 그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순간을 잊어버려 그리고 창조주가 되는 결정을 합니다.
문제는 그때 평안이 깨어진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도 평안도 깨지고 내 삶에 있는 평안도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선을 마음대로 넘는 인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평안이 깨워지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지금 이 설교를 들은 여러분과 저 중에 누구도 내가 피조물의 자리에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더 나아가서 지금 온 인류가 문제잖아요. 재해로 인해서 자연재해로 인해서 엄청난 고통을 받잖아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류가 피조물의 자리에 돌아가야 던 생각도 하지도 않아요. 내가 더 완벽한 창조주가 되지 못해서 이 문제가 일어났다. 그래서 미국의 입장에서는 내가 더 완벽하게 전 세계의 질서를 잡지 못해서 이 문제가 일어났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죠.
내가 더 완벽하게 세계의 경제를 참지 못해서 이런 전쟁이 일어나고 싸움이 다툼이 일어난다라고 생각할 거예요.
문제는 인류에게 닥친 이 많은 문제들은 인간이 창조주가 되려고 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인류가 다시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야 돼요.
근데 목회자도 성도들도 그 누구도 우리가 다시 피조물의 자리에 돌아가야 인류의 문제가 생각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 문제가 있어요. 인류의 문제는 우리가 창조주가 되어서 생긴 문제라면 인류의 문제가 해결되는 길도 내가 다시 피조물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누가 봐도 그런 거잖아요. 말씀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 믿고 지금 자신의 문제 교회의 문제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피조물의 자리에 가려고 하지 않아요. 오히려 더 완벽한 창조주의 자리에 내가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을 더 완벽하게 통제할까 내가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를 더 완벽하게 통제할까? 내가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를, 내 주변의 사람들을, 내 가족들을 더 완벽하게 통제하는 창조주가 될까 여기에 관심을 가지지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인류의 문제를 창조주의 문제라고 여깁니다. 참 안타깝죠. 자기들이 창조주가 되어서 저지른 인류의 문제를 지금 인류가 이렇게 기근과 전쟁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창조주의 문제로 몰아붙여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이런 자연 재해가 있느냐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이런 전쟁이 있느냐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이런 문제가 생기냐고 하나님께 쏘아붙여요. 어처구니없는 일이에요. 자기들이 창조주를 무시하고 피조물인 자기가 창조주가 되어서 생긴 문제를 이제는 창조주에게 덮어 씌우고 있는 거죠.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교회가 해야 될 일은 다시 피조물의 자유로 우리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과 사람 사이도 경계를 넘으면 다툼이 일어나요. 감정의 경계선도 있고요. 가치관에 이렇게 서로의 경계선이 있어요. 부부도 서로의 경계선이 있어요. 이걸 넘어서면 어떻게 서로 다투고 싸워요? 평안이 깨지는 거죠. 나라와 나라도 경계선이 있어요. 국경이 있어서 넘어서면 평안이 깨져요.
하물며 사람과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경계를 인간이 뛰어넘었는데 그로 인해서 우리 가운데 고통이 임하지 않을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당연히 문제가 생기죠. 로마서 1장 25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는 인류를 향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의 욕망대로 인류를 그냥 버려두는 거예요. 스스로 창조주가 되어서 참 창조주에게 모든 문제를 덮어 씌우고 사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인류의 욕망대로 욕심대로 그냥 인류를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인류의 인간의 욕망에 제한선을 두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인간은 결국 이 욕망에 의해서 죽게 될 거예요.
그리고 성욕도 망 하나님이 음욕대로 인류를 그냥 버려두셨어요?
여러분 지금 선진국이라는 사회들의 실상을 가보세요. 과연 선진국일까요? 경제는 좀 부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하는 행위를 보면 과연 선주 후진국보다 훨씬 더 못한 삶을 살아요. 개인적인 윤리들은 그러니까 하나님이 음욕대로 그냥 버려둔 거예요.
하나님이 성욕대로 버려두고 욕망대로 버려두시고 음력도로 버려둔 것이 인류를 향한 조물조의 피조물의 경계선을 넘어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욕망대로 이끌어 살아가고 계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 버려두신 거예요. 왜요? 내가 언젠간 언제 난 언제 시절에 내가 피조물의 창조지의 경계선을 넘어선 거죠. 하나님이 나를 버려두신 것 내 욕망대로 살도록 욕망이 절제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버림과도 같을 수 있어요.
여러분 욕망이 절제가 되나요? 원래 우리는 욕망이 절제돼야 정상입니다. 말씀이 절제되고 십자가의 절제가 되고 성령의 절제가 돼야 돼요.
근데 만약에 우리의 욕망이 절제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느 순간 피조물의 자리를 떠나 창조가 되었고 하나님이 그런 창조주가 된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신 거예요.
성욕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그건 어떤 걸까요? 내가 피조물의 자리에서 창조주의 자리에 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도록 버려두신 거예요. 그러니까 성욕대로 살도록
그런 의미에서 건강한 비전과 욕망을 가졌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에요. 왜요? 그 사람이 아직 피조물의 자리에 있다는 걸 의미하거든요. 교회를 향한 열망을 가졌어요. 복음을 향한 열정을 가졌어요. 교회에 부흥하는 간절함을 가졌어요. 예배를 향한 뜨거움이 마음에 있어요. 이 사람들은 정말 복받은 사람이에요. 아직도 그 사람은 피조물의 자리에 있다는 증거인 거예요.
근데 어느 순간 내가 교회를 다니면서 이 거룩한 욕망들이 내게 다 사라져버렸어요. 왜 사라졌을까요? 내가 과거 어느 순간에 창조주의 자리를 침범한 거죠. 피조물인 내가 창조주의 자리에 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욕심대로 살도록 욕망대로 살도록, 성욕대로 살도록 그냥 버려 두신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8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경계선을 넘어선 인간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셔서 합당한 일을 좋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고 있어요. 표준새번역에 보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도록 내버려 뒀다 이렇게 번역된 거예요. 하나님이 피조물의 자리에 있지 않고 창조주에 간 그 인간들에 대해서 그 사람들에 대해서 해서는 안 될 일을 마음대로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둔 거예요.
여러분 지금 전 세계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거잖아요. 왜요? 피조물이 자리에 있을 인류가 창조주의 자리에 갔고 그리고 자기가 창조의 자리를 침범해놓고 그래서 인류가 불행하게 해놓고는 모든 원인을 하나님께 덮어씌우고 있기 때문이에요. 창조주의 문제라고 하나님의 문제라고 안타깝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런 많은 문제들을 하나님의 문제로 덮으시어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런 역사가 있을까요라고 하나님께 덮어 씌웁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그가 이미 피조물의 자리를 떠나서 창조주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시대는 회복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근데 어떻게 회복을 우리가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정의 회복도 그렇게 간절히 바라지 않아 교회 회복도 그렇게 바래요. 여러분 목회자들이 지금 거의 막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를 포기하듯이 살아요. 진짜 목회를 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목회를 포기하듯이 살아요. 살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안 되니까 안 되니까 회복하길 원하는데 안 돼요. 열심히 했는데 안 돼요. 그래서 너무 힘들어해요.
근데 방법이 틀렸어요. 말씀에 의하면 회복은 우리가 피조물의 자리에 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어느 순간 넘어선 창조주의 자리를 내가 포기하고 내려놓을 때 다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복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시간이 필요해요.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를 다시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회복은 우리가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갈 때 회복이 일어났는데 그렇게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피조물의 자리에 돌아가게 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파괴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살게 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돼서 피조물의 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자 예수님이 이 인류에게 하나님이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창조주를 온전히 예배하는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달렸던 십자가에 우리 자신을 못 박아야 다시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내 욕심과 정력이 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야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야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때 다시 잃어버렸던 평안과 우리가 회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회복은 다시 피조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지키는 존재입니다. 여러분과 저가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됐다는 것은 이 새로운 피조물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철저히 지키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창조한 사람이에요. 인류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러분과 저는 예수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잖아요. 우리가 정말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이 경계를 넘는 일을 행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끊임없이 피조물의 자리에 있기 위한 싸움이 오늘도 있어야 하고 내일도 있어야 하고 계속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회복 인류의 회복 교회와 인류가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창조주처럼 살았던 삶을 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처럼 사는 삶을 못 버려요. 그래서 피조물의 자리로 못 돌아가는 거예요. 왜요? 멋있거든요.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살면 멋있고 내 뜻대로 살면 멋있어요. 내 마음대로 돈을 써도 멋있고요. 내 마음대로 권력을 써도 멋있었고요. 내 마음대로 내 인생을 써도 멋있어요. 그래서 피조물의 자리로 못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신 것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절대로 넘으면 안 되는 선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선을 넘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을 넘은 인간들에게 욕망대로 특별히 성욕대로 살도록 방치하셨어요. 그러니까 창조주로 살도록 방치했어요. 우리가 창조주로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거예요.
여러분과 저런 피조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회복이자 우리의 본질이자 우리의 본래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지금 욕망이 여러분과 저는 욕망의 끝판왕을 세상의 가운데 보고 있어요. 욕망이 막 드글드글 끓어요. 욕망 덩어리들이 세상이에요. 날마다 보고 경험하지 않나요? 세상이 성욕으로 차고 넘쳐요. 날마다 보고 있지 않나요? 우리 주변의 가정들과 문화들과 우리가 요즘 왜 세계 여행을 많이 다닙니까? 여행을 가도 나라들이 얼마나 성욕으로 넘치는지 수없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잘못된 욕망들을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다시 피조물로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왜요? 언젠가 이 욕망이 여러분과 저를 삼킬 거예요. 우리가 다시 피조물로 돌아가지 않으면 언젠간 이 잘못된 욕망이 우리 교회도 삼키고 여러분의 인생도 삼키고 다 삼켜버릴 거예요.
여러분 욕망이 아담과 하하도 유혹을 했는데 욕망이 여러분과 저라고 유혹하지 못할까요? 사단이 우리의 용안의 욕망을 사용해서 여러분과 저를 못 무너뜨릴까요? 날마다 사단이 여러분과 저를 공격할 거예요. 그럼 우리도 동일하게 피조물의 자리에 머물기 위한 날마다 처절한 싸움이 있어야 돼요. 하나님 오늘도 나를 피조물로 살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나를 오늘도 피조물로 살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행여나 내가 창조주가 되려는 결정을 했다면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오늘도 나를 피조물로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끝없이 강구하고 소망하고 갈망해야 우리가 다시 회복될 수 있고 피조물의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바라는 소망이 하나 있어요. 여러 번 말했지만 예배에 대한 회복입니다. 저는 정말 예배가 잘 들여지는 정도의 교회가 아니라 정말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저의 삶에 정말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는 이 예배들을 드리고 싶은 소망이 늘 간절하고 그것 때문에 많은 고민과 어떤 결정들이 제 삶에 늘 있어요.
그런데 예배의 회복도 여러분 우리가 피조물로 돌아가야 누릴 수 있습니다. 창조주는 예배를 받는 분이고 피조물은 예배를 드리는 분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창조주가 되어서 예배는 결국 인간이 주인공이 된 예배가 돼버린 거예요.
여러분 지금 이 땅에 많은 교회가 사람이 주인공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왜요? 우리가 창조주가 된 삶을 살고 있거든요. 여러분이 창조주의 삶에서 내려오지 아니하면 결코 우리는 회복된 예배를 이 자리에 드릴 수 없습니다. 창조주의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아니라고요 아니요. 지금 창조주의 자리에 계신 거예요. 욕망이 여러분을 이끌어가고 있다면 창조주의 자리에 계신 거예요.
성령이 성령이 여러분을 이끌어가고 있다면 여러분 창조주의 자리 여러분 계신 거예요. 여러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창조주의 자리에 있는 거예요.
우리가 말을 조근조근하고 겸손한 것처럼 보인다고 그 사람이 피조물의 자리에 있는 걸까요? 아니에요. 그 사람의 행동과 결정들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좀 참된 예배 회복은 우리가 피조물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을 넘는 것을 용기라고 합니다. 어떤 경우는 그것을 위대함이라고 칭송하기도 합니다. 철학에서는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손을 넘는 건 파괴이자 곧 죽음입니다. 회복이 아니라 곧 절망입니다.
우리가 다시 행복해지려면 다시 피조물로 돌아가야 돼요. 여러분과 제가 다시 피조물로 돌아가는 역사가 우리 안에 만들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온전한 피조물이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창조주처럼 결정하지 마십시오. 창조주처럼 말씀하지도 마십시오. 창조주처럼 행동하지도 마십시오. 그럼 경계선이 무너지고 불행이 우리에게 닥쳐오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회복은 다시 피조물로 돌아가는 겁니다. 인간성의 회복도 피조물로 돌아가는 것이고, 인간의 행복도 다시 퓨즈몰로 돌아가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다시 퓨즈몰로 돌아가는 새로운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 되는 역사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