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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21년에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했다. 사마천(司馬遷)이 기원전 90년에 완성한 사기(史記)는 진(秦)의 영토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史記 秦始皇本紀
始皇 二十六年 分天下以為三十六郡 郡置守尉監① ..... 地東至海曁朝鮮② 西至臨洮③羌中④ 南至北嚮戶⑤ 北據河爲塞 并陰山⑥至遼東
사기 진시황본기
시황 26년(기원전 221년) , 천하를 36군(郡)으로 나누고 군(郡)에 수(守) , 위(尉) , 감(監)을 두었다. ... (중략) ... 영토는 동쪽으로 바다(海)와 조선(朝鮮)에 이르고, 서쪽은 임조(臨洮)와 강중(羌中)에 이르고, 남쪽은 북향호(北嚮戶)에 이르고, 북쪽은 황하(黃河)에 의지해서 요새로 삼고 음산(陰山)과 나란히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① 수위감(守尉監) : 수(守)는 군(郡)의 행정 책임자 태수(太守) , 위(尉)는 군사 책임자 , 감(監)은 감찰관
② 해기조선(海曁朝鮮) : 발해(渤海)와 조선(朝鮮)
사기정의(史記正義)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海謂渤海 南至楊蘇台等州之東海也 暨及也 東北朝鮮國 括地志云 髙驪治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即古朝鮮也
바다(海)는 발해(渤海)를 말한다. 남쪽으로 양주(楊州), 소주(蘇州), 대주(台州)의 동쪽 바다에 도달한다. 기(暨)는 급(及 = 및 = and)이다. 발해(渤海)의 동북쪽은 조선국(朝鮮國)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平壤城)은 본시 한(漢) 낙랑군 왕험성(王險城)으로서 바로 옛 조선이라 했다.
※ 양주, 소주, 대주(楊蘇台等州)는 당나라(唐)의 행정구역이다. 양주(楊州)는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 소주(蘇州)는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 대주(台州)는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대주(台州)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는 사기(史記)의 주석서로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24년(736년)에 장수절(張守節)이 저술했다. 장수절(張守節)은 조선의 위치가 발해(渤海)의 동북쪽이라 하고서 괄지지(括地志)에 수록된 다른 견해도 소개하였다. 괄지지(括地志)는 당태종(唐太宗)의 네째 아들 이태(李泰)가 642년에 편찬한 지리서이다. 필자는 고구려 원정을 구상하고 있는 당태종(唐太宗)에게 전쟁의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 이태(李泰)가 근거 없는 주장을 했다고 본다. 644년 6월에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명하였고 11월에 제1진이 출정했다.
③임조(臨洮) : 진(秦)의 농서군(隴西郡) 임조현(臨洮縣)으로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정서시(定西市) 임조현(臨洮縣)이다. 혹자는 지금의 정서시(定西市) 민현(岷縣)이라고 주장한다.
④ 강중(羌中) : 농서군(隴西郡)과 접한 강족(羌族)의 거주지로서 지금의 청해성(靑海省) 지역이다.
⑤ 북향호(北嚮戶) : 지금의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 지역이며 북향(北向)으로 집을 지었다고 해서 붙인 명칭이다.
⑥ 음산(陰山) : 내몽골 고원에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산맥이다. 서쪽 랑산(狼山 , 해발 2364 m)에서 동쪽 산해관(山海關)까지 약 1620 km에 달한다.
始皇 三十二年 始皇之碣石⑦ 使燕人盧生求羨門高誓⑧ 刻碣石門. (頌德碑文 省略) 始皇巡北邊 從上郡⑨入 燕人盧生使入海還 以鬼神事 因奏錄圖書⑩ 曰亡秦者胡也 始皇乃使將軍蒙恬發兵三十萬人北擊胡 略取河南地⑪。
시황 32년(기원전 215년), 시황이 갈석산(碣石山)에 갔다. 연인(燕人) 노생(盧生)에게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를 찾으라 시키고 갈석문(碣石門)에 글을 새겼다. (頌德碑文 省略) 시황이 북쪽 변경을 순행하고 상군(上郡)을 거쳐 도성으로 돌아왔다. 연인(燕人) 노생(盧生)이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귀신에 관한 일이라며 록도서(錄圖書)를 올렸는데 ‘진(秦)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다.’ 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시황은 장군 몽염(蒙恬)을 시켜 군사 30만 명을 동원해서 북쪽의 호(胡)를 공격하여 황하 남쪽 땅을 빼앗았다.
⑦ 갈석산(碣石山) : 해발 695 m ,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다.
⑧ 선문(羨門) 고서(高誓) : 전설 속의 두 신선(神仙)의 이름
⑨ 상군(上郡) :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북부 유림시(楡林市)
⑩ 록도서(錄圖書) : 예언서
⑪ 하남지(河南地) : 지금의 내몽골 오르도스(Ordos , 鄂尔多斯)와 영하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이다. 황하가 서쪽과 북쪽을 감싸고 흐르며 동남쪽은 섬서성(陝西省)에 접한다. 고원지대로 대부분 초원이고 서북부는 사막이다. 농경이 불가능하여 본시 유목민족의 거주지였다.
始皇 三十三年,發諸嘗逋亡人 , 贅婿 , 賈人 , 略取陸梁地⑫ ,為桂林象郡南海,以適遣戍。西北斥逐匈奴。自榆中并河以東 , 屬之陰山,以為三十四縣城 , 河上為塞。又使蒙恬渡河取高闕陽山北假中,筑亭障以逐戎人。徙謫實之初縣 , 禁不得祠。
시황 33년 (기원전 214년), 군역(軍役)이나 노역(勞役)을 피해 도망간 사람, 가난하여 데릴사위가 된 사람, 장사꾼들을 징발하여 육량(陸梁)⑫ 땅을 점령해서 계림군(桂林郡), 상군(象郡), 남해군(南海郡)을 만들고 유배형 받은 자들을 보내 지켰다. 서북쪽의 흉노를 몰아내고 유중(楡中)에서부터 황하(黃河)와 나란히 동쪽으로 속지음산(屬之陰山)에 34개 현성(縣城)을 만들고 황하를 따라 요새를 만들었다. 다시 몽염(蒙恬)을 시켜 북하(北河)를 건너 고궐(高闕) , 양산(陽山) , 북가(北假)를 차지하고 초소(哨所)와 장벽을 쌓아 융인(戎人)을 몰아냈다. 유배형 받은 자들을 이주시켜 새로 설치한 현(縣)을 채우고 허가 받지 않은 제사를 금했다.
⑫ 육량지(陸梁地) : 남령(南嶺) 이남 땅으로 지금의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 지역
◇ 史記 蒙恬列傳
始皇二十六年,蒙恬因家世得為秦將,攻齊,大破之,拜為內史⑬ , 秦已并天下,乃使蒙恬將三十萬衆北逐戎狄,收河南。筑長城,因地形,用制險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於是渡河,據陽山,逶蛇而北。暴師於外十餘年,居上郡。是時蒙恬威振匈奴。
사기 몽염열전
시황 26년(기원전 221년) , 몽염은 대를 이어 장수를 지낸 가문이기에 진나라(秦) 장군이 되어 제나라(齊)를 공격해 크게 무찌르고 내사(內史)에 임명되었다. 진나라(秦)가 천하를 병합하고 몽염을 시켜 3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융적(戎狄)을 북쪽으로 쫓아내고 하남(河南)을 차지했다. 장성을 쌓았는데 지형에 따라 험한 곳에 요새를 만들어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까지 만여 리를 뻗어갔다. 북하(北河)를 건너 양산(陽山)을 차지하고 구불구불 북쪽으로 이어갔다. 몽염은 외지에서 십여 년간 비바람을 맞으며 전전하다 상군(上郡)에 머물렀다. 이때 몽염의 위세가 흉노(匈奴)에 떨쳤다.
⑬ 내사(內史) : 함양(咸陽)이 위치한 위하(渭河) 유역 관중(關中)의 행정, 재정, 군사를 관할하는 관직
◇ 史記 匈奴列傳
後秦滅六國,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衆北擊胡,悉收河南地。因河爲塞,築四十四⑭縣城臨河,徙適戍以充之。而通直道,自九原至雲陽,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⑮治之,起臨洮至遼東萬餘里。又度河據陽山北假中。
사기 흉노열전
진나라(秦)가 육국(六國)을 멸한 후 시황제가 몽염을 시켜 수십 만 군사를 이끌고 북쪽의 호(胡)를 공격하여 하남(河南) 땅을 거두었다. 황하를 요새로 삼아 황하에 임하여 44 현성(縣城)을 쌓았고 유배형 받은 죄수들을 옮겨와 지키도록 해서 고을을 채웠다.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까지 직도(直道)를 개통했다. 변경 산에 의지하여 험한 골짜기에 구덩이를 파고 수선(修繕)할 수 있는 곳을 바로 잡아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였다. 또 북하(北河)를 건너 양산(陽山)과 북가(北假) 땅을 점거했다.
⑭ 44 현성(縣城) : 진시황본기에는 34 현성(縣城)이라고 했다.
⑮ 가선자(可繕者) : 수선(修繕)할 수 있는 곳. 만리장성은 전 구간을 신축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진(秦), 조(趙), 연(燕)의 장성을 수선하고 연결했다.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진시황이 통일한 영토의 북쪽 경계는 음산(陰山)산맥과 나란히 요동(遼東)에 도달하여 (并陰山 至遼東) 바다와 조선(朝鮮)에 이르렀고 (至海曁朝鮮) , 북쪽에 건설한 만리장성은 변경의 험한 산을 의지하여 요동에 이르렀다. (因邊山險 至遼東)
풀이하면 통일 진(秦)의 북쪽 경계는 음산산맥(陰山山脈)이고, 음산산맥은 요동(遼東)까지 이어져서 바다와 조선에 접하며 , 만리장성은 변경의 음산산맥을 따라 요동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음산(陰山)산맥은 내몽골 고원에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서쪽 랑산(狼山 , 해발 2364 m)에서 동쪽 산해관(山海關)까지 약 1620 km에 달한다. 동쪽으로 갈석산(碣石山)과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러 바다와 만나는데 그 이름이 발해(渤海)이다. 갈석산(碣石山)과 산해관이 고대 요동(遼東)의 끝자락이었다. 조백하(潮白河)가 북경(北京) 북쪽에서 음산산맥을 관통하여 발해(渤海)로 들어간다. 현대 지리학은 랑산(狼山)에서 조백하(潮白河)까지를 음산산맥(陰山山脈)이라 하고 조백하(潮白河)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를 연산산맥(燕山山脈)이라 하는데 사기(史記)는 전체를 음산(陰山)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211년 10월, 시황제가 순행에 나섰다. 일행은 남행하여 운몽(雲夢)⑯에서 배를 타고 장강(長江) 하류에 있는회계(會稽)⑰에 도착했다. 다시 해안을 따라 북행하여 낭야(琅琊)⑱와 지부(之罘)⑲를 순행하고 황하에 이르렀을 때 시황이 병에 걸렸다.
◇ 史記 秦始皇本紀
至平原津而病 , 七月丙寅 始皇崩於沙丘平臺 .... 行遂從井陘抵九原 .... 行從直道至咸陽, 發喪。太子胡亥襲位,為二世皇帝。九月葬始皇驪山。
진시황본기
시황 37년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평원진(平原津)⑳에 이르러서 병이 들어 7월 병인일에 사구평(沙丘平)㉑에서 사망했다. ... 정경(井陘)㉒을 거쳐 구원(九原)㉓에 이르러 직도(直道)를 따라 함양(咸陽)으로 돌아와 상(喪)을 알리고 태자 호해(胡亥)가 제위를 이어 2세황제가 되었다. 9월에 시황을 여산(驪山)에 안장(安葬)했다.
⑯ 운몽(雲夢) : 지금의 호북성(湖北城) 무한시(武漢市)
⑰ 회계(會稽) :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시(紹興市)
⑱ 낭야(琅琊)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연운시(連雲市)
⑲ 지부(之罘) :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연태시(烟台市)
⑳ 평원진(平原津) :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덕주시(德州市) 평원현(平原縣) 나루터
㉑ 사구평( 沙丘平) :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형태시(邢台市) 광종현(廣宗縣) 서북
㉒ 정경(井陘) :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석가장시(石家莊市)
㉓ 구원(九原) : 지금의 내몽고자치구(内蒙古自治區) 포두시(包頭市) 구원구(九原區)
二世皇帝元年 春,二世東行郡縣,李斯從。到碣石,并海南至會稽,而盡刻始皇所立刻石, 石旁著大臣從者名,以章先帝成功盛德焉 , 遂至遼東而還, 四月,二世還至咸陽
2세황제 원년 (기원전 209년) 봄 , 2세가 동쪽 군현을 순행하러 나섰고 이사(李斯)가 호종했다. 갈석산(碣石山)에 도착해서 바다를 따라 남쪽 회계(會稽)에 이르러 시황이 세운 비석에 글자를 새기고 비석 옆면에는 수행 대신들의 이름을 적고 선제(先帝)의 공덕을 적었다. 요동(遼東)에 이르렀다가 4월에 함양(咸陽)으로 돌아왔다.
2세황제는 갈석산(碣石山)에 들른 다음 회계(會稽)에 갔다가 다시 갈석산이 있는 요동(遼東)을 거쳐 함양으로 돌아왔다.
2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7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반란를 일으켰다. 진승 오광의 봉기를 계기로 도처에서 일어난 반란군 중에 초나라(楚) 후예 항우(項羽)의 세력이 가장 강대하였다. 항우가 중원에서 진(秦)의 대군을 격멸하는 동안 유방(劉邦)이 사잇길로 관중(關中)에 진입하여 기원전 207년 11월 진왕(秦王)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았다. 12월에 함양(咸陽)에 입성한 항우가 자영을 죽여 진나라(秦)는 시황제가 죽은지 3년만에 멸망했다.
기원전 206년 1월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하고 2월에 18개 왕국의 제후를 봉했다. 당시 예전 진승의 부하였던 한광(韓廣)이 옛 연(燕)의 도읍 계(薊)를 점령하고 스스로 연왕(燕王)을 칭하고 있었다. 항우는 연(燕)을 분할해서 무종(無終)을 도읍으로 요동국(遼東國)을 신설하여 한광을 요동왕(遼東王)에 봉하고, 자신의 측근인 장도(臧荼)를 연왕(燕王)에 봉했다. 한광이 이에 불복하자 장도가 공격하여 8월에 무종(無終)에서 한광을 죽이고 요동국 땅을 차지했다.
사기 항우본기(史記 項羽本紀)
徙燕王韓廣為遼東王。燕將臧荼從楚救趙,因從入關,故立荼為燕王,都薊。..... 臧荼之國,因逐韓廣之遼東, 廣弗聽, 荼擊殺廣無終, 竝王其地。
연왕 한광을 요동왕으로 옮겼다. 연 장수 장도가 초나라를 따라 조나라를 구하고 관중에 들어갈 때 종군한 까닭에 장도를 연왕에 세웠다. 도읍은 계(薊)이다. 장도가 연국(燕國)으로 가서 한광에게 요동으로 가라고 했으나 한광이 듣지 않자 장도가 공격하여 무종(無終)에서 한광을 죽이고 그 땅의 왕을 차지했다.
사기 고조본기(史記 高祖本紀)
燕將臧荼為燕王,都薊。故燕王韓廣徙王遼東。廣不聽,臧荼攻殺之無終。
연나라 장수 장도를 연왕으로 삼았다. 도읍은 계(薊)이다. 옛 연왕 한광을 요동왕으로 옮겼으나 한광이 듣지 않자 장도가 공격하여 무종(無終)에서 죽였다.
사기 진초지제월표(史記 秦楚之際月表)
義帝元年 二月 燕國王臧荼始, 故燕將, 都薊 , 遼東國王韓廣始,故燕王 都無終 , 八月 臧荼擊廣無終,滅之
의제(義帝) 원년(기원전 206년) 2월 옛 연나라 장수 장도가 연국왕이 되었다. 도읍은 계(薊)다. 옛 연왕 한광이 요동국왕이 되었다. 도읍은 무종(無終)이다. 8월에 장도가 한광을 공격하여 무종(無終)에서 멸했다.
무종현(無終縣)은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우북평군(右北平郡), 서진(西晉)의 북평군(北平郡), 수(隋)와 당(唐)의 어양군(漁陽郡)에 속했고 696년에 옥전현(玉田縣)으로 고쳤다.
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
漁陽郡 無終縣 大業初 置漁陽郡。有長城 , 有燕山 , 無終山 , 有海。
어양군 무종현 , 대업초 어양군을 설치했다. 장성, 연산, 무종산, 바다가 있다.
※ 대업 3년(607년)에 현주(玄州)를 어양군(漁陽郡)으로 고쳤다.
신당서지리지(新唐書地里志)
漁陽郡 玉田縣。中。本無終,武德二年置 貞觀元年省,乾封二年復置,萬歲通天元年更名
어양군 옥전현 , 본래 무종현으로 무덕 2년 (619년)에 설치했다. 만세통천(萬世通天) 원년(696년)에 옥전현(玉田縣)으로 개명했다.
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에서 어양군(漁陽郡)에 있다고 한 장성(長城)은 만리장성, 연산(燕山)은 연산산맥, 바다는 발해(渤海)를 가리킨다. 수나라(隋) 때 어양군에 이미 만리장성이 있었던 것이다. 연국(燕國)과 요동국(遼東國)의 경계는 조백하(潮白河)로 추정한다. 요동국(遼東國)의 북쪽 경계는 장성(長城)이고, 서쪽 경계는 조백하(潮白河)이며, 동쪽으로 갈석산과 산해관에 이른다. 사기(史記)의 기록은 요동(遼東)의 위치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연국(燕國)의 도읍 계(薊)는 지금의 북경(北京)이고 요동국(遼東國)의 도읍 무종(無終)은 지금의 당산시(唐山市) 옥전현(玉田縣)이다.
주류학계는 사기(史記)의 기록을 무시하고 요동(遼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요하(遼河)의 동쪽이며 통일 진(秦)의 영토는 아래과 같다고 주장한다. 상곡군(上谷郡) 동쪽이 사기(史記)의 기록과 크게 어긋난다.
주류학계는 아래 지도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현재의 만리장성은 명나라(明, 1368년 ~ 1644년) 때 건설되었고 진시황(秦始皇)이 건설한 만리장성은 장가구(張家口)에서 음산(陰山)산맥을 벗어나 그 훨씬 북쪽에서 요하(遼河)에 이르고 여기서 남쪽으로 평양(平壤)까지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음산(陰山)의 동쪽 끝이 요동이고 장성은 음산(陰山)을 따라 요동에서 끝난다고 기록한 사기(史記)를 외면한다.
진시황 장성의 서쪽 경로에 대해서도 주장이 엇갈리는데 필자는 이미 다른 논고에서 올바른 경로를 입증한 바 있다. 이 논고에서 필자는 장가구(張家口)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현재의 장성을 진시황이 건설했고 후세의 여러 왕조에서 복구 수리했음을 입증함으로써 주류학계의 주장이 낭설임을 밝히고자 한다. 먼저 명나라(明)에서 1461년에 편찬한 대명일통지(大明 一統志)를 살펴 보자.
◇ 대명일통지(大明 一統志)
今撫寧縣東二十里,有渝關。明初,魏國公徐達始徙而東去舊關六十里,謂之山海關。
지금의 무녕현 동쪽 이십 리에 유관(渝關)이 있었는데 명초(明初)에 위국공(魏國公) 서달(徐達)이 구관(舊關)에서 육십 리 동쪽으로 옮기고 산해관(山海關)이라 불렀다.
산해관(山海關)은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관문(關門)이다. 명나라(明) 장군 서달(徐達, 1332년 ~ 1385년)이 1381년에 원래 있던 유관(渝關)에서 60리 동쪽에 산해관(山海關)을 건설했다. 유관(渝關)은 임유관(臨渝關)의 약칭이다.
청나라(淸)에서 1739년에 편찬한 명사(明史)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명사지리지(明史地理地)
永平府 撫寧 府東少南。舊治在陽河西,洪武六年十二月所徙。十三年又遷於兔耳山東。東南濱海。又東有榆河,又有陽河,一名洋河,俱自塞外流入,俱東南注於海。東有山海關。洪武十四年九月置山海衛於此。北有撫寧衛,永樂元年二月置。又有董家口、義院口等關。東有一片石口,一名九門水口。
영평부 무녕현 : 영평부 동쪽으로 조금 남쪽이다. 옛 치소는 양하(陽河)의 서쪽이었는데 홍무(洪武) 6년(1373년) 12월에 치소를 옮기고 홍무 13년(1380년)에 다시 토이산(兔耳山) 동쪽으로 옮겼다. 동남쪽은 바다에 면한다. 동쪽에 유하(榆河)가 있고 양하(陽河)가 있는데 일명 양하(洋河)다. 모두 새외(塞外)에서 흘러 들어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동쪽에 산해관이 있다. 홍무(洪武) 14년(1381년) 9월 이곳에 산해위(山海衛)를 설치했다. 북쪽에 무녕위(撫寧衛)가 있는데 영락(永樂) 원년(1403년) 2월에 설치했다. 또 동가구(董家口)와 의원구(義院口) 등의 관문이 있고 동쪽에 일편석구(一片石口)가 있는데 일명 구문수구(九門水口)라고 한다.
昌黎 府東南。西北有碣石山. 東南有溟海 亦曰七里海 有黑陽河,自天津達縣之海道也。又有蒲泊,舊產鹽,置惠民鹽場於此。北有界嶺口 , 箭捍嶺等關。
창려현 : 영평부 동남쪽이다. 서북쪽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 동남쪽에 명해(溟海)가 있는데 칠리해(七里海)라고도 한다. 흑양하(黑陽河)가 있다. 천진(天津)에서 바닷길로 창려현에 도달한다. 또 포박(蒲泊)이 있고 옛날에 소금을 생산했다. 이곳에 혜민염장(惠民鹽場)을 설치했다. 북쪽에 계령구(界嶺口)와 전한령(箭捍嶺) 등 관문이 있다.
1737년 청나라(淸)는 산해위(山海衛)를 임유현(臨渝縣)으로 고쳤는데 임유현(臨渝縣)은 산해위(山海衛)의 옛 이름이다. 당나라(唐) 초에 임유현(臨渝縣)의 서쪽은 무녕현(撫寧縣)이고 임유현(臨渝縣)의 남쪽은 해양현(海陽縣)이었다. 원나라(元)가 임유현을 무녕현(撫寧縣)에 합병하고 해양현(海陽縣)을 해산현(海山縣)으로 고쳤다. 명나라(明)가 해산현(海山縣)을 창려현(昌黎縣)으로 고치고 1381년에 무녕현(撫寧縣)에서 옛 임유현을 분리하여 산해위(山海衛)라 하고 퇴락한 임유관((臨渝關) 인근에 산해관(山海關)을 신축했다.
◇ 明史 戚繼光列傳
自嘉靖以來,邊牆雖修,墩台未建。繼光巡行塞上,議建敵台。略言:「薊鎮邊垣,延袤二千里,一瑕則百堅皆瑕。比來歲修歲圮,徒費無益。請跨牆為台,睥睨四達。台高五丈, 虛中為三層,台宿百人,鎧仗糗糧具備。令戍卒畫地受工,先建千二百座。然邊卒木強,律以軍法將不堪,請募浙人為一軍,用倡勇敢督撫 」 上其議許之。浙兵三千至,陳郊外。天大雨,自朝至日昃,植立不動。邊軍大駭,自是始知軍令。五年秋,台功成。精堅雄壯,二千里聲勢聯接。
명사 척계광열전
가정제(嘉靖帝, 1521 ~ 1566) 때부터 변경의 담장을 수리했으나 돈대(墩台)는 세우지 않았다. 척계광은 요새를 순행하고 적대(敵台) 건설을 건의했다. ... 대(台)의 높이는 오장(五丈)이고 3층으로 만든다. 백 명이 숙박하고 식량을 구비한다. 우선 1,200 좌(座)를 건설한다. 황제가 건의를 허락했다. ... 5년째 가을에 대(台) 공사를 완성했는데 견고하고 웅장하여 명성과 위세가 이천 리에 이어졌다.
돈대(墩台)와 적대(敵台)는 적(敵)의 정세를 살피는 망대(望台)이다. 척계광(戚繼光, 1528 ~ 1588)은 1568년부터 1582년까지 북경 북부지역의 총병관(總兵官)으로 재직하면서 산해관(山海關)을 확장하여 요새화하고 산해관(山海關)에서 거용관(居庸關)에 이르는 산악지대에 기존의 장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명나라(明)는 이 구간의 장성을 신축한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존재했던 장성을 수리한 것이다.
북송(北宋)에서 구양수(歐陽修) 등이 1060년에 신당서(新唐書)를 완성했다. 신당서지리지(新唐書地理地)는 당대(唐代) 임유현(臨渝縣)과 임유관(臨渝關)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 신당서지리지(新唐書地理地)
北平郡 石城. 中. 本臨渝, 武德七年省, 貞觀十五年復置. 萬嵗通天二年更名. 有臨渝關, 一名 臨閭關. 有大海關. 有碣石山. 有温昌鎮.
북평군 석성현(石城縣) : 본래 임유현(臨渝縣)인데 무덕(武德) 7년(624년)에 없앴다가 정관(貞觀) 15년(641년)에 임유현으로 복구했고 만세통천(萬嵗通天) 2년(697년)에 석성현으로 고쳤다. 임유관(臨渝關)이 있는데 일명(一名) 임여관(臨閭關)이다. 대해관(大海關) , 갈석산(碣石山) , 온창진(温昌鎮)이 있다.
신당서(新唐書)는 북평군(北平郡) 임유현(臨渝縣)에 임유관(臨渝關)과 갈석산(碣石山)이 있다고 했다. 임유현(臨渝縣)은 지금의 진황도(秦皇島) 시(市)에 포함되며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다.
북주(北周, 557 ~ 581)의 외척 양견(楊堅)이 581년에 제위를 찬탈하여 수나라(隋, 581 ~ 618)를 세우니 고조(高祖) 문제(文帝, 재위 581 ~ 604)이다. 역사학계는 수나라(隋)와 고구려의 국경을 요하(遼河)로 보는데 여러 사서에 고구려의 영토가 요하(遼河)를 넘었다고 했다.
周書 : 高句麗 其地 東至新羅 西渡遼水
주서 : 고구려의 영토는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 요수를 건넌다.
舊唐書 : 高麗 東渡海至於新羅 西北渡遼水至於營州
구당서 : 고려는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른다.
新唐書 : 高麗地 東跨海距新羅 西北渡遼水與營州接
신당서 : 고려 영토는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와 떨어져 있고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와 접한다
필자는 요양하(饒陽河)를 고구려의 서쪽 국경으로 본다. 수나라隋) 초에 임유관(臨渝關)에서 요양하(饒陽河)에 이르는 지역을 영주(營州)라고 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조양(朝陽)이다.
임유관(臨渝關)은 수서(隋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수서(隋書)는 당나라(唐, 618 ~ 907)에서 편찬한 수나라(隋, 581 ~ 618)의 정사다. 안사고(顔師古)와 공영달(孔潁達) 등이 집필하여 636년에 제기(帝紀)와 열전(列傳)을 완성하고, 우지영(于志寧) 등이 656년에 지(志)를 완성했다.
◇ 隋書地理志
遼西郡. 舊置營州, 開皇初置總管府, 大業初府廢. 統縣一 , 戸七百五十一
柳城. 後魏置營州於和龍城, 領 建德 冀陽 昌黎 遼東 樂浪 營丘 等郡, 龍城 大興 永樂 帶方 定荒 石城 廣都 陽武 襄平 親昌 平剛 柳城 富平 等縣. 後齊唯留 建德 冀陽 二郡. 永樂 帶方 龍城 大興 等縣, 其餘並廢. 開皇元年唯留 建德一郡 龍城一縣, 其餘並廢. 尋又廢郡, 改縣為龍山, 十八年改為柳城. 大業初置遼西郡. 有 帶方山 秃黎山 雞鳴山 松山. 有 渝水 白狼水.
수서지리지
요서군(遼西郡) : 옛날에 영주(營州)를 설치하였다. 개황(開皇) 초에 총관부(總管府)를 두었고, 대업초(大業初)에 폐지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1개이고 가구수는 751이다.
유성현(柳城縣) : 후위(後魏 = 北魏) 때 화룡성(和龍城)①에 영주(營州)를 설치하여 건덕군(建德郡) 기양군(冀陽郡) 창려군(昌黎郡) 요동군(遼東郡) 낙랑군(樂浪郡) 영구군(營丘郡) 및 용성현(龍城縣) 대흥현(大興縣) 영락현(永樂縣) 대방현(帶方縣) 정황현(定荒縣) 석성현(石城縣) 광도현(廣都縣) 양무현(陽武縣) 양평현(襄平縣) 신창현(新昌縣) 평강현(平剛縣) 유성현(柳城縣) 부평현(富平縣) 등을 다스렸다.
북제(北齊)는 건덕군(建德郡)과 기양군(冀陽郡) 두 군과 영락현(永樂縣) 대방현(帶方縣) 용성현(龍城縣) 대흥현(大興縣)을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였다.
개황(開皇) 원년(581년)에 건덕군과 용성현을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였다. 다시 건덕군을 폐지하고 용성현을 용산현으로 고쳤고 개황 18년(598년)에 유성현으로 고쳤다. 대업초② 요서군을 설치하였다. 대방산(帶方山) 독려산(秃黎山) 계명산(雞鳴山) 송산(松山)이 있고 유수(渝水)와 백랑수(白狼水)가 있다.
① 화룡성(和龍城) : 학계에서는 지금의 대릉하(大凌河)에 임한 조양(朝陽)으로 본다.
② 대업초(大業初) : 대업(大業) 3년(607년)에 영주(營州)를 요서군(遼西郡)으로 고쳤다.
◇ 隋書 帝紀
煬帝 大業 三年 夏四月 壬辰,改州為郡
양제 대업 3년(607년) 여름 4월 임진일에 주(州)를 군(郡)으로 고쳤다.
수문제(隋文帝)는 589년에 남조(南朝) 진나라(陳, 557 ~ 589)를 멸하여 중국을 통일했다. 고구려에서는 590년에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년 ~ 618년)이 즉위했다. 두 나라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598년에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벌어졌다. 다음과 같다.
◇ 隋書 東夷列傳 高麗
開皇 十八年 元率靺鞨之衆萬餘騎寇遼西,營州總管韋沖擊走之。高祖聞而大怒,命漢王諒為元帥總水陸討之,下詔黜其爵位。時餽運不繼,六軍乏食,師出臨渝關,復遇疾疫,王師不振 , 及次遼水,元亦惶懼,遣使謝罪,上表稱「遼東糞土臣元」云云。上於是罷兵,待之如初,元亦歲遣朝貢。
수서 동이열전 고려
개황 18년(598년) 원(元, 고구려 영양왕)이 말갈(靺鞨) 기병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에 침입했는데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沖)이 물리쳤다. 고조(高祖)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원수(元帥)로 삼아 수륙으로 고구려를 토벌하라 명하고 조서(詔書)를 내려 원(元)의 작위(爵位)를 삭탈하였다. 이때 식량 수송이 이어지지 않아 육군(六軍)이 굶주리고, 군대가 임유관(臨渝關)을 나와서 역병이 퍼져 한왕(漢王) 군대는 진격이 부진하였다. 군이 요수(遼水)에 이르자 원(元)이 두려워하여 사신(使臣)을 보내 사죄하고 표문(表文)을 올렸는데, ‘요동(遼東) 분토(糞土)의 신(臣) 원(元) 운운(云云)’하였다. 고조(高祖)는 이에 군사를 거두고, 처음과 같이 대우했다. 원(元)도 해마다 조공(朝貢)을 보냈다.
당(唐)에서 659년에 이연수(李延壽)가 완성한 북사(北史)는 수본기(隋本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北史 隋本紀
開皇 十八年 二月乙巳,以漢王諒為行軍元帥,水陸三十萬,伐高麗。六月丙寅,詔黜高麗王高元官爵。九月己丑,漢王諒師遇疾疫而旋,死者十二三。
북사 수본기
개황 18년(598년) 2월 을축일에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행군원수로 삼고 수륙 30만 명으로 고려를 쳤다. 6월 병인일에 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高元)의 관작을 삭탈했다. 9월 을축일에 한왕 양량의 군대가 역병을 만나 되돌아 왔다. 죽은 자가 열에 두셋이었다.
1145년에 고려에서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三國史記 卷二十
高句麗 嬰陽王 九年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營州摠管韋沖 擊退之 隋文帝聞而大怒 命漢王諒王世積幷爲元師 將水陸三十萬來伐 夏六月 帝下詔 黜王官爵 漢王諒軍 出臨渝關 値水潦 餽轉不繼 軍中乏食 復遇疾疫 周羅睺 自東萊泛(범)海趣平壤城 亦遭風船多漂沒 秋九月 師還 死者十八九
삼국사기 권20
고구려 영양왕 9년(598년) 왕이 말갈군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에 침입했는데 영주총관 위충이 물리쳤다. 수문제(隋文帝)가 듣고 대노해서 한왕 양량(楊諒)③과 왕세적(王世積)을 함께 원수로 삼으라 명하여 수륙 30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여름 6월 문제가 조서를 내려 영양왕의 관작을 삭탈했다. 한왕 양량의 군대가 임유관(臨渝關)을 나왔는데 장마를 만나 식량수송이 이어지지 못하여 군대가 굶주리고 또 역병이 퍼졌다. 주라후(周羅睺)는 동래(東萊)④에서 바다로 나가 평양성으로 향했으나 태풍을 만나 많은 선박이 표류하고 침몰했다. 가을 9월에 군대가 귀환했는데 죽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
③ 양량(楊諒) : 수문제(隋文帝)의 넷째 아들
④ 동래(東萊) :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연대(煙臺)
수문제(隋文帝)를 계승한 양제(煬帝, 605 ~ 617)는 612년에 백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참패하였다. 618년에 수나라(隋)가 망하고 당나라(唐)가 일어섰다. 645년에 당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945년에 편찬한 구당서(舊唐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舊唐書 太宗本紀 下
貞觀十九年春二月庚戌,上親統六軍發洛陽。乙卯,詔皇太子留定州監國;開府儀同三司、申國公高士廉攝太子太傅,與侍中劉洎、中書令馬周、太子少詹事張行成、太子右庶子高季輔五人同掌機務;以吏部尚書、安德郡公楊師道為中書令。贈殷比干為太師,謚曰忠烈,命所司封墓,葺祠堂,春秋祠以少牢,上自為文以祭之。三月壬辰,上發定州,以司徒、太子太師兼檢校侍中、趙國公長孫無忌,中書令岑文本、楊師道從。夏四月癸卯,誓師於幽州城南,因大饗六軍以遣之。丁未,中書令岑文本卒於師。癸亥,遼東道行軍大總管、英國公李勣攻蓋牟城,破之。五月丁丑,車駕渡遼。甲申,上親率鐵騎與李勣會圍遼東城,因烈風發火弩,斯須城上屋及樓皆盡,麾戰士令登,乃拔之。六月丙辰,師至安市城。丁巳,高麗別將高延壽、高惠真帥兵十五萬來援安市,以拒王師。李勣率兵奮擊,上自高峰引軍臨之,高麗大潰,殺獲不可勝紀。延壽等以其衆降,因名所幸山為駐蹕山,刻石紀功焉。賜天下大酺二日。秋七月,李勣進軍攻安市城,至九月不克,乃班師。冬十月丙辰,入臨渝關,皇太子自定州迎謁。
구당서 태종본기 하
정관 19년 (645년) 봄 2월 경술일에 황제가 친히 6군을 통솔하여 낙양(洛陽)을 출발했다. (중략) 4월에 이적( 李勣)이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켰다. 5월 정축일에 황제가 요수(遼水)를 건넜다. 황제가 친히 철기병을 통솔하여 이적(李勣)과 함께 요동성을 포위하여 마침내 함락시켰다. 6월 병진일에 군대가 안시성에 이르렀다. (중략) 가을 7월에 이적(李勣)이 진군하여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9월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여 회군했다. 겨울 10월 병진일에 임유관에 들어왔다. 황태자가 정주(定州)에서 와서 영접하고 알현했다.
북송(北宋)에서 1060년에 완성한 신당서(新唐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新唐書 太宗 本紀
貞觀十九年 九月癸未,班師。十月 丙午,次營州,以太牢祭死事者。丙辰,皇太子迎謁于臨渝關
신당서 태종본기
정관 19년 (645년) 9월 계미일에 회군했다. 10월 병오일에 영주(營州)에 도착해 전사자들의 태뢰제(太牢祭)⑤를 지냈다. 병진일에 황태자가 임유관에서 황제를 영접하고 알현하였다.
⑤ 태뢰제(太牢祭) : 소, 양, 돼지를 각 1마리씩 통째로 올리는 제사
혹자는 임유관(臨渝關)의 위치가 영주(營州) 즉 지금의 조양(朝陽) 근처라고 주장하는데 허무맹랑한 낭설이다. 수서( 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를 종합하면 임유관(臨渝關)의 위치는 갈석산 동쪽 임유현(臨渝縣)으로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인근이다.
◇ 隋書地理志
冀州 北平郡 舊置平州。統縣一,戶二千二百六十九。
盧龍, 舊置北平郡,領新昌、朝鮮二縣。後齊省朝鮮入新昌,又省遼西郡並所領海陽縣入肥如。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十八年改名盧龍。大業初置北平郡。有長城。有關官。有臨渝宮。有覆舟山。有碣石。有玄水、盧水、溫水、閏水、龍鮮水、巨梁水。有海。
수서지리지
기주 북평군 : 옛날에 평주에 설치했다. 다스리는 현은 하나이고 2,269 가구이다.
노룡현 : 옛날에는 북평군을 설치하여 신창현, 조선현 2개 현을 다스렸다. 후제(後齊, 550 ~ 577)가 조선현을 폐하여 신창현에 편입했고 또 요서군의 해양현을 없애고 비여현에 편입했다. 개황 6년(586년)에 비여현을 신창현에 편입하고, 개황 18년(598년)에 노룡군으로 개명했다. 대업초(大業初)에 북평군을 설치했다. 장성(長城), 관관(關官), 임유궁(臨渝宮), 복주산, 갈석산이 있고 현수, 노수, 온수, 윤수, 용선수, 거양수가 있고 바다가 있다.
후제(後齊)는 흔히 북제(北齊)라고 한다. 북제(北齊)의 북평군 신창현과 조선현 및 요서군 해양현과 비여현을 수나라가 598년에 노룡군으로 개명하고 대업(大業) 3년(607년)에 북평군으로 고쳤다. 북평군에 장성(長城), 임유궁(臨渝宮), 갈석산(碣石山), 복주산(覆舟山), 바다가 있다고 했으니 난하(灤河) 유역을 가리킨다. 장성(長城)은 만리장성을 지칭하고 임유궁(臨渝宮)은 임유관(臨渝關)으로 보인다.
◇ 舊唐書地里志
河北道 平州 : 隋為北平郡. 武徳二年, 改為平州, 領 臨渝 肥如 二縣. 其年, 自臨渝 移治 肥如, 改為盧龍縣, 更置撫寧縣. 七年, 省 臨渝 撫寧 二縣. 天寶元年, 改為北平郡. 乾元元年, 復為平州. 舊領縣一, 戸六百三, 口二千五百四十二. 天寶領縣三, 戸三千一百一十三, 口二萬五千八十六. 在京師東北二千六百五十里, 至東都一千九百里.
구당서지리지
하북도 평주(平州) : 수(隋)에서는 북평군(北平郡)이었다. 무덕(武徳) 2년(619년)에 평주(平州)로 고쳤고 임유현(臨渝)과 비여현(肥如)을 다스렸다. 그 해에 치소를 임유현(臨渝縣)에서 비여현(肥如縣)으로 옮겼고, (비여현을) 노룡현(盧龍縣)으로 고쳤다가 무녕현(撫寧縣)으로 고쳤다. 무덕(武徳) 7년(624년)에 임유현(臨渝縣)과 무녕현(撫寧縣)을 없애고 천보 원년(742년)에 북평군(北平郡)으로 고쳤으며 건원(乾元) 원년(758년)에 다시 평주(平州)로 고쳤다. 옛날에 다스리던 현은 1개이고 가구수는 603이며 인구는 2,542명이었다. 천보(天寶, 742년 ~ 756년) 년간에 다스리는 현이 3개이고 가구수는 3,123이며 인구는 25,086명이다. 경사(장안) 동북 2,650리에 있고 동도(낙양)까지는 1,900리이다.
盧龍, 後漢肥如縣, 屬遼西郡, 至隋不改. 武徳二年, 改為盧龍縣, 復開皇舊名.
노룡현(盧龍縣), 후한(後漢)의 비여현(肥如縣)으로 요서군(遼西郡)에 속했으며 수(隋)에 이르기까지 고치지 아니하였다. 무덕(武徳) 2년 (619년)에 노룡현(盧龍縣)으로 고쳐서 개황(開皇, 581 ~ 600) 년간의 옛 이름을 복구했다.
石城, 漢縣, 屬右北平. 貞觀十五年, 於故臨渝縣城置臨渝. 萬嵗通天二年, 改為石城, 取舊名.
석성현(石城縣), 한(漢)의 현이고 우북평군에 속했다. 정관(貞觀) 15년(641년)에 옛 임유현성(臨渝縣城)에 임유현(臨渝縣)을 설치하였고, 만세통천(萬嵗通天) 2년(697년)에 옛 이름을 취해서 석성현으로 고쳤다.
馬城, 開元二十八年, 分盧龍二縣置.
마성현(馬城縣), 개원(開元) 28년(740년)에 노룡현(盧龍縣)을 둘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 新唐書地里志
河北道 平州 北平郡. 下. 初治臨渝, 武德元年徙治盧龍. 土貢, 熊鞹, 蔓荆實, 人葠. 户三千一百一十三, 口二萬五千八十六. 縣三. 有府一, 曰盧龍. 有盧龍軍, 天寳一載置. 又有柳城軍, 永泰元年置. 有 温溝 白望 西狹石 東狹石 緑疇 米磗 長楊 黄花 紫蒙 白狼 昌黎 遼西 等十二戍, 愛川 周夔 二鎮城. 東北有 明垤關 鶻湖城 牛毛城.
신당서지리지
하북도 평주(平州) 북평군(北平郡) : 처음에는 임유현(臨渝縣)에서 다스리다가 무덕(武德) 원년(618년)에 노룡현(盧龍縣)으로 옮겨 다스렸다. 토공(土貢)으로는 곰가죽과 순비기나무열매(蔓荆實)와 인삼(人葠)이 있다. 가구수는 3,113이고 인구는 25,086명이다. 현은 셋이고 부(府)가 하나인데 노룡(盧龍)이라고 한다. 노룡군(盧龍軍)이 있는데 천보(天寳) 1년(742년)에 설치하였다. 또한 유성군(柳城軍)이 있는데 영태(永泰) 원년(765년)에 설치하였다. 온구(温溝), 백망(白望), 서협석(西狹石), 동협석(東狹石), 록주(緑疇), 미부(米磗), 장양(長楊), 황화(黄花), 자몽(紫蒙), 백랑(白狼), 창려(昌黎), 요서(遼西) 등 12 수(戍)가 있고 애천(愛川)과 주기(周夔) 2개의 진성(鎮城)이 있다. 동북쪽에는 명질관(明垤關)과 골호성(鶻湖城)과 우모성(牛毛城)이 있다.
노룡현(盧龍縣).
盧龍. 中. 本肥如. 武德二年更名, 又置撫寧縣, 七年省.
노룡현 : 본래 비여현(肥如縣)인데 무덕(武德) 2년(619년)에 노룡현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다시 무녕현(撫寧縣)을 설치했다가 무덕(武德) 7년(624년)에 없앴다.
석성현(石城縣).
石城. 中. 本臨渝, 武德七年省, 貞觀十五年復置. 萬嵗通天二年更名. 有臨渝關, 一名 臨閭關. 有大海關. 有碣石山. 有温昌鎮.
석성현 : 본래 임유현(臨渝縣)인데 무덕(武德) 7년(624년)에 없앴다가 정관(貞觀) 15년(641년)에 임유현으로 복구했고 만세통천(萬嵗通天) 2년(697년)에 석성현으로 고쳤다. 임유관(臨渝關)이 있는데 임여관(臨閭關)이라고도 한다. 대해관(大海關)과 갈석산(碣石山)과 온창진(温昌鎮)이 있다.
마성현(馬城縣).
馬城. 中. 古海陽城也, 開元二十八年置, 以通水運. 東北有千金冶城. 東有茂鄉鎮城.
마성현 : 옛 해양성(海陽城)이다. 개원(開元) 28년(740년)에 설치하였고 운하(運河)를 통하게 하였다. 동북쪽에는 천금야성(千金冶城)이 있고 동쪽에는 무향진성(茂鄉鎮城)이 있다.
수나라 북평군과 당나라 북평군은 같은 곳이다. 북평군 임유현(臨渝縣)을 697년에 석성현(石城縣)으로 고쳤는데 이곳에 임유관(臨渝關), 갈석산(碣石山), 장성(長城), 바다가 있다. 임유현은 아래의 북평군 지도에서 청룡하(靑龍河)의 동쪽이며 장성(長城)의 남쪽이다. 지금의 진황도(秦皇島) 시(市)로서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다.
수서(隋書)와 당서(唐書)는 임유현(臨渝縣)과 임유관(臨渝關)에 변할 유(渝)를 쓰고 임유관(臨渝關)을 줄여서 변할 유(渝) 유관(渝關)이라 했다. 그런데 수서(隋書)에 느릅나무 유(楡) 유관(榆關)이 등장한다.
◇ 隋書 帝紀
高祖 文帝 開皇 三年 三月 癸亥 城榆關。
고조 문제 개황 3년(583년) 3월 계해일에 유관(榆關)을 축성했다.
당(唐)에서 이연수(李延壽)가 659년에 편찬한 북사(北史)는 수본기(隋本紀)에 수서(隋書)를 옮겨 적었다.
당(唐)에서 두우(杜佑)가 801년에 편찬한 통전(通典)은 임유관(臨渝關)을 느릅나무 유(楡) 임유관(臨榆關)으로 기록했다.
◇ 通典 州郡 八
北平郡 盧龍 漢肥如縣。有碣石山,碣然而立在海旁,故名之。晉太康地志云 , 秦築長城, 所起自碣石,在今高麗舊界,非此碣石也。漢遼西郡故城在今郡東。又有漢令支縣城。臨閭關今名臨榆關,在縣城東一百八十里。盧龍塞在城西北二百里。
북평군 노룡현은 한(漢)의 비여현이다. 갈석산이 있는데 돌비석처럼 해변에 우뚝 솟아 있어 그런 이름을 붙였다. 진(晉)의 태강지지(太康地志)에 이르기를, '진(秦)이 장성을 쌓았는데 갈석산에서 시작한다' 라고 했다. 지금 고구려의 옛 영역에 있는 것은 이(북평군 노룡현) 갈석산이 아니다. 한(漢)의 요서군 옛 성이 지금 북평군의 동쪽에 있다. 또 한(漢) 영지현 성이 있다. 임여관(臨閭關)은 지금의 임유관(臨榆關)인데 노룡현 성의 동쪽 180리에 있다. 노룡새(盧龍塞)는 성의 서북 200리에 있다.
북송(北宋)에서 974년에 완성한 정사(正史) 구오대사(舊五代史)에도 느릅나무 유(楡) 유관(楡關)이 등장한다.
◇ 舊五代史 契丹列傳
契丹者,古匈奴之種也。代居遼澤之中,潢水南岸,南距榆關一千一百里,榆關南距幽州七百里,
구오대사 거란열전
거란은 옛 흉노의 종족이다. 대를 이어 요택(遼澤)의 가운데에 살았다. 횡수(潢水)의 남안이다. 남쪽으로 1100리 거리에 유관(榆關)이 있고, 유관(榆關)에서 남쪽으로 700리 떨어져 유주(幽州)가 있다.
구오대사 거란열전의 유관(榆關)은 임유관(臨渝關)을 가리키는데 느릅나무 유(楡)로 기록했다. 학계에서는 구오대사 거란열전의 유관(榆關)과 수서(隋書) 제기(帝紀)의 유관(榆關)은 둘 다 임유관(臨渝關)을 가리키며 수나라 고조 문제 개황(高祖 文帝 開皇) 3년(583년)에 축성했다고 주장한다.
◇ 史記 朝鮮列傳
元封二年 漢使涉何誘諭右渠終不肯表詔 何去至界上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朝鮮禆王長 即渡馳入塞
원봉 2년 한나라 사신 섭하(涉何)는 패수(浿水)에 임한 국경에 이르러 섭하를 호송한 조선의 비왕 장을 찔러 죽이고 즉시 패수를 건너 말을 달려 요새로 들어 갔다.
사기정의(史記正義) 주석 :
入塞 : 入平州楡林關也
평주 유림관(楡林關)으로 들어 갔다.
당나라(唐)의 평주(平州)는 난하에서 임유관(臨渝關)에 이르는 지역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는 섭하(涉何)가 들어간 새(塞)를 평주(平州) 유림관(楡林關)이라 했는데 이는 임유관(臨渝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344년에 원나라(元)에서 편찬한 요사(遼史)지리지에 유림관(榆林關)이 등장하는데 임유관(臨渝關)을 가리킨다.
南京道 , 有居庸、松亭, 楡林之關 , 古北之口
남경도에 거용관(居庸關) , 송정관(松亭關) , 유림관(榆林關) , 고북구(古北口)가 있다.
이처럼 변할 유(渝)와 느릅나무 유(楡)가 혼용된 결과 변할 유(渝) 임유관(臨渝關)과 느릅나무 유(楡) 임유관(臨榆關) 심지어 유림관(榆林關)은 동일한 관문이며 수나라(隋)에서 583년에 처음으로 건축했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수서(隋書)와 당서(唐書)에서 변할 유(渝) 유관(渝關)은 임유관(臨渝關)을 가리키고 583년에 건축한 느릅나무 유(楡) 유관(楡關)은 유림관(榆林關)으로서 임유관(臨渝關)에서 3천 리 서쪽에 있다.
◇ 隋書地理志
雍州 榆林郡 開皇二十年,置勝州。統縣三,戶二千三百三十。榆林 開皇七年 置。大業初置郡。富昌開皇十年置。金河開皇三年置,曰陽壽,及置油雲縣,又置榆關總管。五年改置雲州總管。十八年改陽壽曰金河,二十年雲州移,二縣俱廢。仁壽二年又置金河縣,帶關。
수서지리지
옹주(雍州) 유림군(榆林郡) : 개황 20년(600년) 승주( 勝州)를 설치했다. 3개 현을 다스리고 가구수는 2330이다.
유림현(榆林縣) : 개황 7년(587년)에 설치하고 대업초(大業初)에 유림군(榆林郡)을 설치했다.
대업초(大業初) : 대업 3년(607년)
부창현(富昌縣) : 개황 10년(590년)에 설치했다.
금하현(金河縣) : 개황 3년(583년)에 양수현(陽壽縣)을 설치하고 유운현(油雲縣)을 설치했다. 또 유관총관(榆關總管)을 두었다. 개황 5년(585년)에 운주총관(雲州總管)으로 고쳤다. 개황 18년(598년)에 양수현을 금하현으로 고치고 개황 20년(600년)에 운주(雲州)로 고치고 두 현을 모두 폐했다. 인수(仁壽) 2년(602년)에 다시 금하현(金河縣)과 대관(帶關)을 설치했다.
수서(隋書)에 대업(大業) 3년의 기록이 있다.
◇ 隋書 帝紀
大業 三年 六月 戊子,次榆林郡。丁酉,啟民可汗來朝。己亥,吐谷渾、高昌並遣使貢方物。甲辰,上御北樓觀漁于河,以宴百僚
秋七月 辛亥,啟民可汗上表請變服,襲冠帶。詔啟民贊拜不名,位在諸侯王上。甲寅,上於郡城東御大帳,其下備儀衞,建旌旗,宴啟民及其部落三千五百人,奏百戲之樂。賜啟民及其部落各有差。丙子,殺光祿大夫賀若弼、禮部尚書宇文㢸、太常卿高熲。尚書左僕射蘇威坐事免。發丁男百餘萬築長城,西距榆林,東至紫河,一旬而罷,死者十五六。
八月壬午,車駕發榆林。乙酉,啟民飾廬清道,以候乘輿。帝幸其帳,啟民奉觴上壽,宴賜極厚。上謂高麗使者曰:歸語爾王,當早來朝見。不然者,吾與啟民巡彼土矣。
수양제(隋煬帝)는 대업 3년(607년) 6월 유림군(榆林郡)에 이르러 돌궐(突厥)의 계민가한(啟民可汗)한테서 충성을 서약 받고 황하의 물고기를 구경하고 연회를 베풀어 위무하였다. 백여만 명의 장정을 동원하여 유림군 일대에 장성을 쌓았는데 죽은 자가 10에 5~6이었다. 8월에 유림군을 출발하여 계민가한(啟民可汗)의 장막을 방문해서 연회를 하다가 마침 이곳에 와있던 고구려 사신을 만났다.
◇ 신당서지리지(新唐書地里志)
關內道 勝州,榆林郡,下都督府。武德中沒梁師都。師都平,復置。土貢:胡布、青他鹿角、芍藥、徐長卿。戶四千一百八十七,口二萬九百五十二。縣二。有義勇軍。
榆林,中下。有隋故榆林宮。東有榆林關,貞觀十三年置。
河濱 , 中下。貞觀三年置,以縣置雲州,四年曰威州,八年州廢,來屬。東北有河濱關,貞觀七年置。
관내도 승주 유림군
유림현(榆林縣) : 수나라의 옛 유림궁(榆林宮)이 있고 동쪽에 유림관(榆林關)이 있다. 정관(貞觀) 13년(639년)에 유림현을 설치했다.
하빈현(河濱縣) : 정관 3년(629년)에 설치했다. 운주(雲州)를 설치하고 정관 4년(630년)에 위주(威州)라 했고 정관 8년(634년)에 위주(威州)를 폐하고 승주(勝州)에 속했다. 동북쪽에 하빈관(河濱關)이 있는데 정관 7년(633년)에 설치했다.
당(唐) 헌종(憲宗) 원화(元和) 8년 (813년) 이길보(李吉甫, 758 ~ 814)가 편찬한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元和郡縣圖志
關內道 勝州,榆林。下府。開元戶四千九十五。鄉十三。元和戶
愚貢 雍州之域。春秋為戎狄地。戰國時為晉趙地。《地理志》云 , 云中立五原,本戎狄地,趙有之。始皇時分三十六郡,為雲中郡。漢因之不改。按漢雲中在今州理東北四十里榆林縣界雲中故城是也。漢末大亂,匈奴侵邊,其城遂空。晉末屬赫連氏,赫連勃勃稱夏,都於統萬。按統萬城在今州理西南八百里,夏州是也。後魏太武帝平赫連昌之後,訖於周代,往往置鎮,不立郡縣。
隋文帝開皇三年於此置榆林關,七年又置榆林縣,屬雲州。二十年,割雲州之榆林、富昌、金河三縣置勝州,立嘉名也。煬帝大業五年,以勝州為榆林郡,領榆林、富昌、金河三縣。十五年,郡人郭子和以城入突厥。武德四年,郭子和歸國,其地又陷梁師都。貞觀二年平師都,三年,仍隋舊理置勝州。時柴紹、劉蘭破滅匈奴,奪得河南之地,因置州,以決勝為名。
管縣二:榆林,河濱。
榆林縣,中下。郭下。本漢沙南縣地,屬雲中郡。漢末北虜侵擾,曆魏、晉、周,此地皆無縣邑。隋開皇七年置榆林縣,地北近榆林,即漢之榆溪塞,因名,屬雲州,二十年改屬勝州。皇朝因之。
金河泊,在縣東北二十里。周回十里。
雲中故城,在縣東北四十里。趙雲中城,秦雲中郡也。史記曰趙武靈王北破林胡、樓煩所置。秦因之。隋榆林宮,在州城內,大業二年置,因榆林郡為名。其年,煬帝北巡,陳兵塞表,以威北狄,因幸此宮,突厥啟人可汗獻馬及兵器新帳,因賦詩云云。
榆林關,在縣東三十里。東北臨河,秦卻匈奴之處,隋開皇三年,於此置榆林關。
河濱縣,中下。本漢沙南縣地,屬雲中郡。訖於魏、晉,此地不立縣邑。至後魏及周,復為銀城縣也。隋時復為榆林縣地。貞觀三年,於此置河濱縣,東臨河岸,因以為名。改雲州為威州,立嘉名也。八年,廢威州,以縣屬勝州。
黃河,在縣東一十五步。闊一里,不通船楫,即河濱關,渡河處名君子津。河濱關,在縣東北,貞觀七年置。
◇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
관내도(關內道) 승주(勝州)
기원전 221년 : 시황제가 천하를 36군으로 나누면서 이곳에 운중군(雲中郡)을 설치했다. 한(漢)이 고치지 않고 따랐다.
583년 : 수문제(隋文帝) 개황(開皇) 3년, 유림관(榆林關)을 설치하고 유관총관(榆關總管)을 두었다.
585년 : 개황(開皇) 5년 유관총관(榆關總管)을 운주총관(雲州總管)으로 고쳤다.
587년 : 개황 7년, 유림현(榆林縣)을 설치했는데 운주(雲州)에 속했다.
600년 : 개황 20년 운주(雲州)를 승주(勝州)로 고치고 유림현, 부창현, 금하현으로 나누었다.
606년 : 양제(煬帝) 대업(大業) 2년 유림현에 유림궁(榆林宮)을 설치했다.
607년 : 대업(大業) 3년 양제(煬帝)가 유림궁에 행차했다.
609년 : 대업(大業) 5년 승주(勝州)를 유림군으로 고쳤다. 유림현, 부창현, 금하현을 다스렸다.
유림현(榆林縣) : 본래 한(漢) 사남현(沙南縣) 땅으로 운중군(雲中郡)에 속했다. 유림관(榆林關)은 유림현(榆林縣) 동쪽 30리에 있으며 동북쪽으로 황하에 임한다. 진나라(秦)가 흉노를 물리친 곳이다.
하빈현(河濱縣) : 본래 한(漢) 사남현(沙南縣) 땅으로 운중군(雲中郡)에 속했다. 후위(後魏) 및 북주(北周)에 이르러 은성현(銀城縣)이라 하고 수나라(隋) 때 유림현(榆林縣)이라 했다. 정관(貞觀) 3년(629년) 이곳에 하빈현(河濱縣)을 설치했는데 동쪽으로 황하에 임한다. 정관 8년(634년)에 위주(威州)를 폐하고 하빈현을 승주(勝州)에 속하게 했다. 동북쪽에 하빈관(河濱關)이 있는데 정관(貞觀) 7년에 설치했다.
수문제(隋文帝)가 황하와 음산(陰山) 사이에 하주(夏州), 풍주(豊州), 승주(勝州)를 설치했는데 수양제(隋煬帝)가 하주(夏州)를 삭방군(朔方郡)으로, 풍주(豊州)를 오원군(五原郡)으로, 승주(勝州)를 유림군(榆林郡)으로 고쳤다. 유림관(榆林關)은 유림군(榆林郡) 유림현(榆林縣) 동쪽 30리에 있다. 당(唐)에서 오원군(五原郡)을 구원군(九原郡)으로 고쳤다. 진시황 때는 삭방군과 오원군을 합쳐서 구원군(九原郡)이라 했고 유림군(榆林郡)은 운중군(雲中郡)이라 했다.
장성(長城)이 북평군 임유관(臨渝關)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간 경로가 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에 기록되어 있다. 다음과 같다.
◇ 隋書地理志
冀州 漁陽郡, 開皇六年 徙玄州于此,並立總管府。大業初府廢。統縣一,戶三千九百二十五。
기주 어양군, 개황 6년(586년)에 현주를 이곳으로 옮기고 아울러 총관부를 세웠다. 대업초에 총관부를 폐지했다. 다스리는 현은 하나이고 가구수는 3,925다.
無終, 後齊置,後周又廢徐無縣入焉。大業初置漁陽郡。有長城。有燕山、無終山。有泃河、如河、庚水、灅水、濫水。有海。
무종현 : 후제(後齊)가 설치했고 후주(後周)가 폐하여 서무현에 편입시켰다. 대업초에 어양군을 설치했다. 장성(長城) , 연산, 무종산(無終山) , 구하, 여하, 경수, 루수(灅水), 남수(濫水)가 있고 바다가 있다.
冀州 安樂郡. 舊置安州, 後周改為玄州. 開皇十六年 州徙, 尋置檀州. 統縣二, 戸七千五百九十九.
기주 안락군(安樂郡) 옛날에 안주(安州)를 설치했는데 후주(後周, 557 ~ 581)가 현주(玄州)로 고쳤다.
개황(開皇) 16년(596년)에 주(州)를 옮겨 다시 단주(檀州)를 설치했다. 다스리는 현은 2개이고 가구수는 7,599이다.
燕樂. 後魏置廣陽郡, 領 大興 方城 燕樂 三縣, 後齊廢郡, 以 大興 方城 入焉. 大業初置安樂郡. 有長城. 有沽河.
연락현(燕樂縣). 북위(北魏)가 광양군(廣陽郡)을 설치하여 대흥현(大興縣)과 방성현(方城縣)과 연락현(燕樂縣)을 다스렸고, 북제(北齊, 550 ~ 577)가 광양군을 폐하고 대흥현(大興)과 방성현(方城)을 연락현에 편입시켰다. 대업(大業, 605 ~ 618) 초에 안락군(安樂郡)을 두었다. 장성(長城)이 있고 고하(沽河)가 있다.
密雲. 後魏置密雲郡, 領 白擅 要陽 密雲 三縣. 後齊廢郡, 及二縣入密雲. 又有舊安樂郡, 領 安市 土垠 二縣, 後齊廢土垠入安市, 後周廢安市入密雲縣. 開皇初郡廢. 有長城. 有桃花山 螺山. 有漁水.
밀운현(密雲縣) : 북위(北魏)가 밀운군(密雲郡)을 설치하여 백단현(白檀縣) 요양현(要陽縣) 밀운현(密雲縣)을 다스렸고, 북제(北齊)가 밀운군을 폐하고 백단현(白檀縣)과 요양현(要陽縣)을 밀운현에 편입시켰다. 또한 옛날에 안락군(安樂郡)이 있어 안시현(安市縣)과 토은현(土垠縣)을 다스렸는데 북제(北齊)가 토은현을 폐하여 안시현에 편입시켰고, 후주(後周)가 안시현을 폐하여 밀운현에 편입시켰다. 개황(開皇) 초(581년)에 안락군을 폐하였다. 장성(長城)이 있고 도화산(桃花山)과 라산(螺山)이 있고 어수(漁水)가 있다.
연락현은 지금의 고북구(古北口) 일대이고, 고하(沽河)는 지금의 조백하 상류 조하(潮河)다.
밀운현은 지금의 북경시 밀운현이다. 어수(漁水)는 호수이며 밀운호를 가리킨다.
冀州
涿郡 , 舊置幽州,後齊置東北道行台。後周平齊,改置總管府。大業初府廢。統縣九,戶八萬四千五十九。
薊 舊置燕郡,開皇初廢,大業初置涿郡。
良鄉, 安次, 涿 舊置范陽郡,開皇初郡廢。
固安 舊曰故安,開皇六年改焉。
雍奴, 昌平 舊置東燕州及平昌郡。後周州郡並廢,後又置平昌郡。開皇初郡廢,又省萬年縣入焉。有關官。有長城。
懷戎 後齊置北燕州,領長寧、永豐二郡。後周去北字。開皇初郡廢,大業初州廢。有喬山,歷陽山,大小翮山。有漷水、鳷水、涿水、阪泉水。
潞 舊置漁陽郡,開皇初廢。
탁군(涿郡) 계현(薊縣)은 훗날 연경(燕京)이라 했고 지금의 북경(北京)이다. 탁군(涿郡)에 관관(關官)과 장성(長城)이 있다고 했는데 관(關)은 거용관(居庸關)을 말한다.
북평군에 임유현, 임유관, 장성(長城), 갈석산, 바다가 있고, 어양군에 무종현(無終縣), 무종산(無終山), 장성(長城), 바다가 있다. 만세통천(萬世通天) 원년(696년)에 무종현(無終縣)을 옥전현(玉田縣)으로 개명했는데 지금의 당산시(唐山市) 옥전현(玉田縣)이고 무종산(無終山)이 있다. 안락군 연락현과 밀운현에 장성(長城)이 있고, 연락현은 지금의 고북구(古北口)인데 장성이 있다. 탁군(涿郡)에 장성(長城)과 거용관(居庸關)이 있다.
수(隋)나라 당시 탁군(涿郡)에서 안락군(安樂郡)과 어양군(漁陽郡)을 거쳐 북평군(北平郡)의 갈석산(碣石山)과 바다에 이르기까지 장성이 존재한다고 수서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거용관(居庸關)에서 고북구(古北口)와 밀운현(密雲縣)을 지나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장성의 경로와 일치한다. 이 구간의 장성을 명나라(明) 때 처음으로 건설했다는 주장은 허무맹랑한 낭설인 것이다.
907년에 주온(朱溫)이 당(唐, 618 ~ 907)을 멸하고 후량(後梁, 907 ~ 923)을 세우면서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전란이 시작되었다. 바로 그 해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거란족을 통일하여 거란국(契丹國)을 창건했다.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후량(後梁)이 돌궐족과의 전쟁으로 정신 없는 틈을 타 922년에 장성(長城)을 넘어 계주(薊州)와 석성현(石城縣)을 점령하고 923년에 평주(平州)를 점령했다. 거란국은 946년에 국호를 요(遼)로 바꾸었다. 1344년에 원나라(元)에서 편찬한 요사(遼史)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遼史 太祖本紀
天贊元年 夏四月甲寅,攻薊州 , 戊午,拔之 。 辛未,攻石城縣,拔之。
천찬 원년(922년) 여름 4월 갑인일에 계주(薊州)를 공격하여 무오일에 점령했고 신미일에 석성현(石城縣)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天贊二年 春正月丙申,大元帥堯骨克平州,獲刺史趙思溫、裨將張崇。二月甲子,以平州為盧龍軍,置節度使。
천찬 2년(923년) 봄 정월 병신일에 대원수 요골(堯骨)이 평주(平州)를 점령하고 자사(刺史) 조사온과 비장 장종을 사로잡았다. 2월 갑자일에 평주를 노룡군으로 만들고 절도사를 두었다.
돌궐족은 923년에 후량(後梁)을 멸하고 후당(後唐, 923 ~ 936)을 세웠다. 936년 석경당(石敬瑭)이 거란국의 병력을 지원 받아 후당(後唐)을 멸하고 후진(後晉, 936 ~ 946)을 세웠다. 석경당은 그 보답으로 연운(燕雲) 16주(州)를 거란국에 바쳤는데 연운(燕雲) 16주의 북쪽 경계 전부가 현재의 만리장성과 일치한다. 서쪽 9주(九州)의 경계는 현재의 외장성(外長城) 및 내장성(內長城)과 일치하고 동쪽 7주(七州)의 북쪽 경계는 거용관(居庸關)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현재의 장성과 일치한다. 936년 당시에도 만리장성은 현재의 위치에 존재했던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장가구(張家口)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구간을 명나라(明)가 처음으로 건설했다는 주장은 낭설임이 드러난다.
◇ 요사지리지 남경도(遼史地理志 南京道)
南京析津府... 有居庸、松亭、榆林之關。古北之口, 統州六、縣十一
남경 석진부(析津府)① .... 거용관(居庸關)② , 송정관(松亭關)③ , 유림관(榆林關)④ , 고북구(古北口)⑤가 있다. 6주(州) 11현(縣)을 다스린다.
① 석진부(析津府) : 치소(治所)는 지금의 북경시(北京市) 중심부
② 거용관(居庸關) : 북경시 중심부에서 60 km 북쪽에 있다. 춘추전국시대 연나라(燕)가 이곳에 거용새(居庸塞)를 건설했다.
③ 송정관(松亭關) :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당산시(唐山市) 천서현(遷西縣)과 관성현(寬城縣)의 접경에 위치한다. 난하( 灤河)와 장성이 만나는 곳이다. 명나라(明)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년 ~ 1424년) 때 희봉구(喜峰口)로 개명하고 1452년에 관문을 축성하여 희봉구관(喜峰口關)이라 칭했다.
④ 유림관(榆林關) : 위치가 미상이다. 혹자는 임유관(臨渝關)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는데 명확한 기록이 없다.
⑤ 고북구(古北口) : 지금의 북경시(北京市) 밀운구(密雲區)에 속한다. 조백하(潮白河)의 상류 조하(潮河)가 장성과 만나는 곳이다. 수나라의 밀운현(密雲縣)이다.
灤州,永安軍,中,刺史。本古黃洛城。灤河環繞,在盧龍山南。齊桓公伐山戎,見山神俞,即此。秦為右北平。漢為石城縣,後名海陽縣。漢末為公孫度所有。晉以後屬遼西。石晉割地,在平州之境。太祖以俘戶置。灤州負山帶河,為朔漢形勝之地。有扶蘇泉,甚甘美,秦太子扶蘇北築長城嘗駐此;臨榆山,峰巒崛起,高千餘仞,下臨渝河。
統縣三:
義豐縣。本黃洛故城。黃洛水北出盧龍山,南流入於濡水。漢屬遼西郡,久廢。唐季入契丹,世宗置縣。戶四千。
馬城縣。本盧龍縣地。唐開元二十八年析置縣,以通水運。東北有千金冶,東有茂鄉鎮。遼割隸灤州。在州西南四十里。戶三千.
石城縣。漢置,屬右北平郡,久廢。唐貞觀中於此置臨渝縣,萬歲通天元年改石城縣,在灤州南三十里,唐儀鳳石刻在焉。今縣又在其南五十里,遼徙置以就鹽官。戶三千。
난주(灤州) 영안군(永安軍) : 중급으로 자사刺史)가 있다. 본래 옛 황낙성이다. 난하(灤河)가 감싸고 있으며 노룡산(盧龍山)의 남쪽에 있다. 제나라(齊) 환공(桓公)이 산융(山戎)을 정벌했으니 바로 이곳이다. 진나라(秦) 우북평군(右北平郡)이고 한나라(漢) 석성현(石城縣)이고 후에 해양현(海陽縣)이라 했다. 한말(漢末)에 공손도(公孫度)가 차지했고 진(晉) 이후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난주(灤州)는 산을 등에 지고 강이 띠처럼 두르고 있어 한나라(漢)의 북부 지역에서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부소천(扶蘇泉)이 있는데 물맛이 무척 감미롭다. 진시황의 태자 부소(扶蘇)가 이곳에 머물며 장성을 쌓았다. 임유산(臨榆山)은 봉우리(峰巒 봉만)가 우뚝 솟아 높이가 천여 인(仞, 8尺)이고 산 아래에 임유하(臨渝河)가 있다. (중략) 석성현(石城縣)은 한나라(漢)가 설치해서 우북평군에 속했고 옛날에 폐지했다. 당나라(唐) 정관(貞觀, 627년 ~ 649년) 때 이곳에 임유현(臨渝縣)을 설치했고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696년)에 석성현(石城縣)으로 고쳤다. 난주(灤州) 남쪽 30리에 있다.
요사지리지에 오류가 있다. 난주(灤州)가 진나라(秦) 우북평군(右北平郡)이고 한나라(漢) 석성현이고 훗날의 해양현이라고 기록했는데 한서지리지에 석성현은 우북평군에 속하고 임유현과 해양현은 요서군에 속한다고 했다. 후한서(後漢書) 군국지는 요서군에 임유현, 해양현, 영지현, 비여현, 양락현이 속한다고 했다. 신당서(新唐書)는 정관(貞觀) 15년(641년) 옛 임유현 자리에 임유현(臨渝縣)을 복구했고 만세통천(萬歲通天) 2년(697년)에 석성현(石城縣)으로 고쳤으며 갈석산과 임유관(臨渝關)이 있다고 했다.
◇ 요사지리지 중경도(遼史地理志 中京道)
榆州, 髙平軍, 下, 刺史. 本漢臨渝縣地, 後隸右北平驪城縣. 唐載初二年, 析慎州置黎州. 處靺鞨部落, 後為奚人所據. 太宗南征, 横帳嘉哩以所俘慎州民置州. 開泰中没入. 屬中京. 統縣二.
和衆縣. 本新黎縣地.
永和縣. 本漢昌城縣地. 統和二十二年置.
榆州(유주), 髙平軍(고평군), 下, 刺史. 본래 漢의 臨渝縣(임유현)의 땅이었는데 후에 右北平(우북평) 驪城縣(여성현)에 예속되었다. 唐(당) 載初(재초, 689~690) 2년 (690년)에 慎州(신주)를 나누어 黎州(여주)를 설치하였다. 靺鞨(말갈) 부락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는데 후에 奚人(해인)들이 점거하였다. 太宗(태종)이 남쪽을 정벌하고 横帳(횡장)인 嘉哩(가리, 해리解里)가 慎州(신주)의 사로잡은 백성들로 주를 설치하였다. 開泰(개태) 년간에 몰수하여 중경에 속하게 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2개이다.
和衆縣(화중현). 원래 新黎縣(신려현)의 땅이다.
永和縣(영화현). 본래 漢의 昌城縣(창성현)의 땅이다. 統和(통화) 22년(1004년)에 설치하였다.
통화(統和, 983년 6월 ~ 1012년 10월) : 요나라(遼, 거란국) 성종(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의 첫번째 연호이다.
개태(開泰, 1012년 11월 ~ 1021년 11월) : 요나라(遼, 거란국) 성종(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의 두번째 연호이다.
요사지리지는 중경도(中京道) 유주(榆州)가 한(漢)의 임유현(臨渝縣)이라고 했는데 이는 사실과 어긋난다. 유주(榆州)는 임유현臨渝縣) 북쪽의 산악지대로서 지금의 요녕성(遼寧省) 능원시(凌源市)이다. 요사지리지는 난주(灤州)에 임유하(臨渝河)와 임유산(臨榆山)이 있으며 이곳이 당나라(唐)의 임유현(臨渝縣)이자 석성현(石城縣)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시실에 부합한다. 임유현(臨渝縣)에 임유관(臨渝關)이 있는데 요사(遼史)에는 누락되었다. 진시황의 태자 부소(扶蘇)가 난주(灤州)에 머물며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난주(灤州)에 장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임유현(臨渝縣)은 전한(前漢,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의 역사서 한서(漢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반고(班固) 가족이 서기 100년 무렵 완성한 한서(漢書)에 당나라(唐)에서 안사고(顔師古)가 주석을 달아 641년에 한서주(漢書注)를 편찬했다.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 대목은 다음과 같다.
◇ 漢書地理志
遼西郡, 秦置. 有小水四十八, 并行三千四十六里. 屬幽州. 戸七萬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萬二千三百二十五. 縣十四.
요서군 ,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작은 강들이 48개이고 모두 합쳐 3,416리를 흘러간다. 유주(幽州)에 속한다. 가구수는 72,654이고 인구수는 352,325명이다. 현은 14개이다.
且慮, 有高廟. 莽曰鉏慮. 師古曰 且音子余反慮音廬.
차려현(且慮縣) : 고묘(高廟 = 漢高帝 사당)가 있다. 왕망(王莽)은 서려(鉏慮)라고 하였다.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且의 음은 져(子余反)라 했고 慮의 음은 려(廬)라고 했다.
海陽, 龍鮮水東入封大水. 封大水 緩虚水 皆南入海. 有鹽官.
해양현(海陽縣) : 용선수(龍鮮水)가 동쪽으로 봉대수(封大水)로 들어간다. 봉대수(封大水)와 완허수(緩虚水)는 모두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염관(鹽官)이 있다.
新安平, 夷水東入塞外. 柳城, 馬首山在西南. 參柳水北入海. 西部都尉治.
신안평현(新安平縣) : 이수(夷水)가 동쪽으로 새(塞) 밖으로 들어간다.
令支, 有孤竹城. 莽曰令氏亭. 應劭曰 故伯夷國 今有孤竹城 令音鈴 孟康曰支音秪師古曰令又音郎定反.
영지현(令支縣) : 고죽성(孤竹城)이 있다. 왕망(王莽)은 영씨정(令氏亭)이라고 하였다.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옛 백이국(伯夷國)인데 지금 고죽성(孤竹城)이 있으며 令의 음은 령(鈴)이라 했다.
맹강(孟康)이 말하기를 支의 음은 지(秪)라고 했다.
안사고(顔 師古)가 말하기를 令은 또 음이 렁(郎定反)이라 했다.
肥如, 玄水東入濡水. 濡水南入海陽. 又有盧水南入玄. 莽曰肥而. 應劭曰 肥子奔燕 燕封於此也 師古曰 濡音乃官反 宋祁曰 入玄當作入畜.
비여현(肥如縣) : 현수(玄水)가 동쪽으로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유수(濡水)는 남쪽으로 해양현(海陽縣)으로 들어간다. 또 노수(盧水)가 있어 남쪽으로 현수(玄水)로 들어간다. 왕망(王莽)은 비이(肥而)라고 하였다.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비자(肥子)가 연(燕)으로 달아나니 연(燕)이 이곳에 봉하였다고 했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濡의 음은 놘(乃官反)이라 했다.
송기(宋祁)가 말하기를 入玄은 당연히 入畜으로 써야한다고 했다.
賔從, 莽曰勉武.
빈종현(賔從縣) : 왕망(王莽)은 면무현(勉武縣)이라고 하였다.
交黎 , 渝水首受塞外, 南入海. 東部都尉治. 莽曰禽虜. 應劭曰 今昌黎 師古曰 渝音喻 其下並同應劭
교려현(交黎縣) : 유수(渝水)가 상류에서 새(塞) 밖에서 만나서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린다. 왕망은 금로현(禽虜縣)이라고 하였다.
응소가 말하기를 지금의 창려(昌黎)라고 했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渝의 음은 유(喻)이고 그 아래는 응소와 같다고 했다.
陽樂, 양락현
狐蘇, 唐就水至徒河入海.
호소현(狐蘇縣) : 당취수(唐就水)가 도하현(徒河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徒河, 莽曰河福.
도하현(徒河縣) : 왕망(王莽)은 하복현(河福縣)이라 하였다.
文成, 莽曰言虜.
문성현(文成縣) : 왕망(王莽)은 언로현(言虜縣)이라 하였다.
臨渝, 渝水首受白狼, 東入塞外. 又有侯水, 北入渝. 莽曰馮徳. 師古曰 馮讀曰憑.
임유현(臨渝縣) : 유수(渝水)가 상류에서 백랑수(白狼水)를 받고 동쪽으로 새(塞) 밖으로 들어간다. 또한 후수(侯水)가 있는데 북쪽으로 유수(渝水)로 들어간다. 왕망은 풍덕현(馮徳縣)이라 했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馮은 憑(빙)으로 읽는다고 했다.
絫, 下官水南入海. 又有揭石水 賔水 皆南入官. 莽曰選武. 師古曰 絫音力追反.
루현(絫縣) : 하관수(下官水)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 게석수(揭石水)와 빈수(賔水)가 있는데 모두 남쪽으로 흘러 하관수(下官水)로 들어간다. 왕망(王莽)은 선무현(選武縣)이라고 했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絫의 음은 루(力追反)라고 했다.
◇ 한서지리지
유주(幽州) 우북평군(右北平郡)
驪成, 大揭石山在縣西南. 莽曰揭石, 師古曰揭音桀.
여성현(驪成縣) : 대게석산(大揭石山)이 여성현 서남에 있다. 왕망이 게석(揭石)이라 했다
안사고(顔師古)가 揭의 음은 걸(桀)이라고 했다.
요서군 루현(絫縣)에 게석수(揭石水), 우북평군(右北平郡) 여성현(驪成縣)에 대게석산(大揭石山)이 등장하는데 본래 갈석(碣石)이라고 하던 것을 왕망(王莽)이 게석(揭石)으로 고쳤다. 한서지리지에 요서군의 속현으로 임유현이 등장하나 그 위치가 명확하지 않다.
북위(北魏)에서 역도원(酈道元, 470 전후 ~ 527)이 수경(水經)에 방대한 주석을 달아 515년경 수경주(水經注)를 완성했다. 수경(水經)은 중국의 하천을 기술한 지리서로서 후한(後漢)에서 상흠(桑欽)이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원본은 망실되었고 수경주(水經注)를 통하여 그 내용이 전해 온다. 수경주(水經注)는 한서지리지의 게석산(揭石山)을 갈석산(碣石山)으로 표기했다. 수경주(水經注) 권14(卷十四)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水經 : 濡水從塞外來, 東南過遼西令支縣北. 又東南過海陽縣, 西南入于海
수경 : 유수(濡水)는 새외(塞外)로부터 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요서군 영지현(令支縣) 북쪽을 지난다.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해양현(海陽縣)을 지나고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水經注 : 濡水又東南至絫縣碣石山. 文穎曰..碣石在遼西絫縣. 王莽之選武也. 絫縣并屬臨渝, 王莽更臨渝為馮徳. 地理志曰..大碣石山在右北平驪成縣西南, 王莽改曰掲石也.
수경주 : 유수(濡水)는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루현(絫縣) 갈석산(碣石山)에 이른다. 문영(文穎)이 말하기를 갈석산(碣石山)은 요서군 루현(絫縣)에 있다고 했다. 왕망의 선무현(選武縣)이다. 루현(絫縣)은 임유현(臨渝縣)에 합병되었고 왕망(王莽)이 임유현(臨渝縣)을 풍덕현(馮徳縣)으로 고쳤다. 한서지리지에 이르기를 "대갈석산(大碣石山)은 우북평군(右北平郡) 여성현(驪成縣) 서남쪽에 있으며 왕망이 게석산(掲石山)으로 고쳤다."고 했다.
문영(文穎)은 삼국시대 위나라(魏)의 역사가이며 한서(漢書)의 주석서를 저술했다. 혹자는 전한(前漢) 임유현(臨渝縣)의 위치가 지금의 대릉하(大凌河) 연안 조양(朝陽)이라 하고 혹자는 위치불명이라 한다. 수경주(水經注)에 의하면 유수(濡水)는 지금의 난하(灤河)이고, 요서군 루현(絫縣)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루현(絫縣)이 임유현에 합병됨으로써 갈석산(碣石山)이 임유현에 속하게 되었다. 지금의 진황도(秦皇島) 시(市)에서 갈석산 북부는 본래 전한(前漢) 임유현(臨渝縣)이고 갈석산 이남은 루현(絫縣)이었는데 루현(絫縣)이 임유현(臨渝縣)에 합병되었다.
서진(西晉 265 ~ 316)에서 사마표(司馬彪)가 후한(後漢)의 역사 속한서(續漢書)를 저술했다. 사마표의 생몰 연도는 불분명한데 서진(西晉) 혜제(惠帝 재위 290 ~ 307) 말년에 60여 세로 사망했다고 하니 240년대 초에 출생했을 것이다. 속한서는 290년 ~ 300년 무렵 편찬되었고 남조(南朝)의 양(梁 502~557)나라에서 유소(劉昭 514 ~ 565)가 주석을 달았는데 대부분 멸실되어 지(志)만 전해 온다. 지(志)의 원문과 주석은 훗날 북송(北宋)에서 속한지(續漢志)라는 이름으로 후한서에 합본되었는데 지리지(地理志)에 해당하는 것이 군국지(郡國志)로서 후한(後漢) 안제(安帝, 재위 106 ~ 125) 이후의 행정구역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구간과 관련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 속한지 권23 군국지 유주(幽州)
漁陽郡, 秦置. 雒陽東北二千里. 九城, 户六萬八千四百五十六, 口四十三萬五千七百四十. 漁陽, 有鐵. 狐奴. 潞. 雍奴. 泉州, 有鐵. 平谷. 安樂. 傂奚. 獷平.
어양군,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낙양(雒陽)에서 동북쪽으로 2,000리 떨어져 있다. 성은 9개, 가구는 68,456, 인구는 435,740명이다.
1) 어양현(漁陽縣), 철(鐵)이 있다.
2) 호노현(狐奴縣).
3) 로현(潞縣).
4) 옹노현(雍奴縣).
5) 천주현(泉州縣), 철(鐵)이 있다.
6) 평곡현(平谷縣).
7) 안락현(安樂縣).
8) 치해현(傂奚縣).
9) 광평현(獷平縣).
右北平郡, 秦置雒陽東北二千三百里. 四城, 户九千一百七十, 口五萬三千四百七十五. 土垠, 徐無, 俊靡, 無終.
우북평군(右北平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낙양(雒陽)에서 동북쪽으로 2,300리 떨어져 있다. 성은 4개, 가구는 9,190, 인구는 53,475명이다.
1) 토은현(土垠縣),
2) 서무현(徐無縣),
3) 준미현(俊靡縣),
4) 무종현(無終縣).
遼西郡, 秦置 雒陽東北三千三百里. 五城, 户萬四千一百五十, 口八萬一千七百一十四. 陽樂. 海陽. 令支, 有孤竹城.[1] 肥如. 臨渝.[2]
요서군 :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낙양(雒陽)에서 동북쪽으로 3,300리 떨어져 있다. 성은 5개, 가구는 14,150, 인구는 81,714명이다.
1) 양락현(陽樂縣).
2) 해양현(海陽縣).
3) 영지현(令支縣), 고죽성(孤竹城)이 있다.[1]
4) 비여현(肥如縣).
5) 임유현(臨渝縣).[2]
[1] 伯夷叔齊本國.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본국이다.
[2] 山海經曰..碣石之山, 編水出焉, 其上有玉, 其下有青碧. 水經曰..在縣南. 郭璞曰..或曰在右北平驪城縣海邊山也.
산해경(山海經)에 이르기를, "갈석산(碣石山)에서 편수(編水)가 나오는데 상류에는 옥(玉)이 있고 하류에는 푸른 벽(碧)이 있다"고 했다. 수경(水經)에 이르기를, (갈석산은) 임유현(臨渝縣)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곽박(郭璞)이 이르기를 "혹자는 (갈석산이) 우북평군 여성현(驪城縣) 해변에 있는 산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곽박(郭璞, 275 ~ 324)은 서진(西晉)의 학자다.
영지현과 임유현의 주석 [1]과 [2]는 유소(劉昭 514 ~ 565)가 달았다. 갈석산이 임유현 남쪽에 있다고 한 수경(水經)을 인용함으로써 임유관의 위치가 확인된다.
속한서 군국지 유소(劉昭)의 주석에 이르기를, 후한(後漢)의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 임유현(臨渝縣)에 갈석산이 있다 했고, 수경주(水經注)에 이르기를 전한(前漢)의 요서군 루현(絫縣)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루현은 임유현에 합병되었다고 했으니 한(漢)의 임유현은 지금의 산해관 서쪽 진황도 시에 속한다. 다만 한서지리지와 속한서 군국지 및 수경주에는 임유현과 갈석산에 장성이 존재한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220년에 후한(後漢)이 멸망하고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이 정립하였다. 위(魏, 220년 ~ 265년)의 권신 사마염(司馬炎)은 263년에 촉(蜀)을 멸하고 265년에 제위를 찬탈하여 진(晉) 왕조를 세웠다. 무제(武帝) 사마염은 279년에 남쪽 오(吳)나라를 공격하여 280년에 멸하였다. 이로써 중국은 후한(後漢)이 망한 후 60년만에 통일되었다. 진(晉)은 311년에 흉노에게 수도 낙양이 함락되고 황제 회제(懷帝)가 사로잡혀 사실상 멸망하였다. 317년에 사마씨 일족이 장강(長江) 남쪽으로 천도하여 420년까지 왕조를 유지하였기에 265년부터 316년까지를 서진(西晉)이라 부르고 317년부터 420년까지를 동진(東晉)이라 부른다.
진서(晉書) 당빈열전(唐彬列傳)에 유주(幽州)의 진장성(秦長城)을 복구한 기록이 있다. 다음과 같다.
◇ 晉書 列傳 卷 四十二 唐彬列傳
唐彬,字儒宗,魯國鄒人也。(中略) 後與王濬共伐吳 (中略) 北虜侵掠北平,以彬為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右將軍. 彬既至鎭,訓卒利兵,廣農重稼,震威耀武,宣喻國命,示以恩信。於是鮮卑二部大莫廆、擿何等並遣侍子入貢。
兼修學校,誨誘無倦,仁惠廣被。遂開拓舊境,卻地千里。復秦長城塞,自溫城洎(계)于碣石,綿亙(긍)山谷, 且三千里,分軍屯守,烽堠相望。 .... 元康初,拜使持節前將軍 , 領西戎校尉 , 雍州刺史 , 元康四年卒官,時年六十
[진서 열전 권 42 당빈열전]
당빈(唐彬)은 자(字)가 유종(儒宗)이고 노국(魯國) 추읍(鄒邑) 사람이다. (중략) 뒤에 왕준(王濬)과 함께 오(吳)나라를 정벌하였다. (중략) 북방의 오랑캐가 북평군(北平郡)을 침략하매 당빈(唐彬)을 사지절, 감(監)유주제군사, 영호(領護)오환교위우장군으로 삼았다. 당빈이 진(鎭)에 도착하여 병졸들을 훈련시키고 농업을 중시하여 넓히고 위세와 무력을 떨치고 국가의 법령을 깨우쳐 알리고 은혜와 믿음을 보였다. 이에 대막외(大莫廆)와 적하(擿何) 등 선비 2부가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아울러 학교를 만들어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인자함과 은혜가 널리 미쳤다. 마침내 옛 경역을 개척하고 천 리를 물리쳐 진나라(秦) 장성요새를 복구해서 온성(溫城)으로부터 갈석산(碣石山)까지 산과 골짜기에 면면히 이어졌다. 또 삼천 리에 군대를 나누어 주둔해서 지키고 봉화대가 서로 바라 보았다. ..... 원강(元康) 초(291년) 사지절 전장군 령서융교위 옹주자사에 임명되었고, 원강 4년(294년) 관직에 있으면서 60세에 죽었다.
당빈(唐彬, 235 ~ 294)은 279년 오(吳)나라 정벌에 출정하여 280년에 오나라를 멸한 후 유주(幽州)의 총사령관에 부임하였고 수 년의 준비 후 온성(溫城)으로부터 갈석산(碣石山)까지 진나라(秦)의 장성을 복구했으며 291년에 옹주자사(雍州刺史)에 임명되어 유주(幽州)를 떠났다. 따라서 당빈이 진장성(秦長城)을 복구한 시기는 283년에서 290년 사이로 보인다. 갈석산(碣石山)은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으므로 당빈이 복구한 진나라(秦) 장성과 현존하는 장성의 위치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성(溫城)은 온현(溫縣)을 가리키는데 낙양(洛陽)에서 동쪽이며 태항(太行)산맥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다. 당빈(唐彬)이 갈석산에서 서쪽으로 거용관에 이르는 장성을 복구하고 태항(太行)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온성(溫城)에 이르는 장성을 건설한 것이다.
당빈(唐彬)이 진나라(秦) 장성을 복구할 때의 직책은 유주(幽州) 총사령관이었다. 진서지리지(晉書地里志)는 진무제(晉武帝, 재위 265년 ~ 290년) 말년의 행정구역인데 유주(幽州)는 다음과 같다.
유주(幽州)
幽州. 按, 禹貢冀州之域, 舜置十二牧, 則其一也. 周禮..‘東北曰幽州.’ 春秋元命包云..‘箕星散為幽州, 分為燕國.’ 言北方太隂, 故以幽㝠為號. 武王定殷, 封召公於燕, 其後與六國俱稱王. 及秦滅燕, 以為 漁陽 上谷 右北平 遼西 遼東 五郡. 漢 髙帝 分 上谷 置 涿郡. 武帝置十三州, 幽州依舊名不改. 其後開東邉, 置 玄莵 樂浪 等郡, 亦皆屬焉. 元鳯元年, 改燕曰廣陽郡. 幽州所部凡九郡, 至晉不改. 幽州統郡國七, 縣三十四, 戶五萬九千二百.
유주(幽州). 안(按), 우공(禹貢)에서 기주(冀州)의 영역이라고 했고 순(舜)은 12목(牧)을 설치하였는데 즉 그 중 하나이다. 주례(周禮)에서 말하기를 ‘동북쪽은 유주(幽州)이다’라고 하였다 춘추원명포(春秋元命包)에서 말하기를 ‘箕星散為幽州, 分為燕國.’이라 하였다. 북방을 태음(太隂)이라고 하는바 (유주를) 유명(幽㝠)이라고 부른다. 무왕(武王)이 은(殷)을 평정하고 소공(召公)을 연(燕)에 봉하였는데 그 후에 6나라는 모두 왕이라 칭하였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어양(漁陽), 상곡(上谷),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5군으로 삼았다. 한(漢) 고제(髙帝)는 상곡군(上谷郡 )을 나누어 탁군(涿郡)을 설치하였다. 무제(武帝)는 13주를 설치하였는데 유주(幽州)는 옛 이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 후에 동쪽 변방을 개척하여 현도군(玄莵郡) 낙랑군(樂浪郡) 등을 설치하였고 모두 유주에 속하였다. 원봉(元鳯) 원년(BC 80년)에 연(燕)을 광양군(廣陽郡)으로 고쳤다. 유주(幽州)는 모두 9개 군을 거느렸고 진(晉)에 이르기까지 바뀌지 아니하였다. 유주(幽州)는 다스리는 군국(郡國)이 일곱이며 현은 34개이고 가구수는 59,200이다.
① 범양국
范陽國, 漢置涿郡. 魏文更名范陽郡. 武帝置國, 封宣帝弟子綏為王. 統縣八, 戶一萬一千. 涿.良鄉. 方城. 長鄉. 遒. 故安. 范陽. 容城, 侯相.
범양국(范陽國), 한(漢)에서 탁군(涿郡)을 설치하였고. 위(魏) 문제(文帝)가 범양군(范陽郡)으로 고쳤다. 무제(武帝)는 속국(屬國)을 설치하고, 선제(宣帝)의 조카 수(綏)를 왕으로 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8개이고 가구수는 11,000이다.
1) 탁현(涿縣).
2) 양향현(良鄉縣).
3) 방성현(方城縣).
4) 장향현(長鄉縣).
5) 주현(遒縣).
6) 고안현(故安縣).
7) 범양현(范陽縣).
8) 용성현(容城縣), 후상(侯相)이다.
② 연국
燕國, 漢置, 孝昭改為廣陽郡. 統縣十, 戶二萬九千. 薊. 安次, 侯相. 昌平. 軍都, 有關. 廣陽. 潞. 安國, 國相, 蜀主劉禪封此縣公. 泉州, 侯相. 雍奴. 狐奴.
연국(燕國), 한(漢)에서 설치하였다. 효소제(孝昭帝, 재위 기원전 87년 ~ 기원전 74년)가 광양군(廣陽郡)으로 고쳤다. 10개의 현을 다스리고 가구수는 29,000이다.
1) 계현(薊縣).
2) 안차현(安次縣), 후상(侯相)이다.
3) 창평현(昌平縣).
4) 군도현(軍都縣), 관(關)이 있다.
5) 광양현(廣陽縣).
6) 로현(潞縣).
7) 안국현(安國縣), 국상(國相)이다. 촉주(蜀主) 유선(劉禪)을 이 현의 공(公)으로 봉하였다.
8) 천주현(泉州縣), 후상(侯相)이다.
9) 옹노현(雍奴縣).
10) 호노현(狐奴縣).
③ 북평군
北平郡, 秦置. 統縣四戶五千. 徐無. 土垠. 俊靡. 無終.
북평군(北平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4개이고 가구수는 5,000이다.
1) 서무현(徐無縣).
2) 토은현(土垠縣).
3) 준미현(俊靡縣).
4) 무종현(無終縣).
④ 상곡군
上谷郡, 秦置. 郡在谷之上頭, 故因名焉. 統縣二, 戶四千七十. 沮陽. 居庸.
상곡군(上谷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군(郡)이 곡(谷)의 상두(上頭)에 있기에 상곡이라 이름한 것이다. 관할하는 현은 2개이며 가구수는 1,070이다.
1) 저양현(沮陽縣).
2) 거용현(居庸縣).
⑤ 광녕군
廣寗郡, 故屬上谷, 太康中置郡, 都尉居. 統縣三, 戶三千九百三十. 下洛. 潘. 涿鹿
광녕군(廣寗郡), 옛날에는 상곡군에 속했다. 태강(太康) 년간에 광녕군을 설치하였으며 도위(都尉)가 머문다. 관할하는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3,930이다.
1) 하락현(下洛縣).
2) 반현(潘縣).
3) 탁록현(涿鹿縣)
⑥ 대군
代郡, 秦置統縣三戶三千四百. 代. 廣昌. 平舒. 富城.
대군(代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3,400이다.
1) 대현(代縣).
2) 광창현(廣昌縣).
3) 평서현(平舒縣).
4) 부성현(富城縣).
⑦ 요서군
遼西郡, 秦置統縣三戶二千八百. 陽樂. 肥如. 海陽.
요서군(遼西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2,800이다.
1) 양락현(陽樂縣).
2) 비여현(肥如縣).
3) 해양현(海陽縣).
연국(燕國) 계현(薊縣)은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도읍이었다. 학계에서는 지금의 북경으로 간주한다.
연국(燕國) 군도현(軍都縣)의 관(關)은 거용관(居庸關)이다.
촉주(蜀主) 유선(劉禪)은 촉한(蜀漢)의 후주(後主)이다. 위(魏)나라가 263년에 촉한을 멸하고 유선을 안국공(安國公)에 봉했다.
안국현(安國縣)은 지금의 북경시 밀운현(密雲縣) 북쪽 고북구(古北口) 일대로서 현존하는 만리장성이 지나간다.
상곡군 거용현(居庸縣)에 거용관(居庸關)이 있다.
당빈(唐彬)이 복구한 진나라(秦) 장성은 갈석산(碣石山)에서 시작하여 북평군을 거쳐 지금의 북경 북쪽 밀운현을 지나 상곡군에 이르렀으니 수서지리지에 기록된 장성의 경로와 일치하며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경로와도 일치한다.
316년에 서진(西晉)이 흉노에게 멸망한 후 화북지방은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전란이 계속되었다. 서진(西晉)이 망하자 317년에 장강(長江) 남쪽으로 천도한 동진(東晉)은 420년에 송(宋, 420 ~ 479) 바뀌었다. 선비족(鮮卑族)이 평성(平城)을 도읍으로 386년에 세운 북위(北魏)의 3대 황제 세조 태무제(世祖 太武帝, 재위 423 ~ 452)는 431년에 하(夏, 407 ~ 431)를 멸하고, 436년에 북연(北燕, 407 ~ 436)을 멸하고, 439년에 북량(北凉, 397 ~ 439)을 멸하여 화북을 통일하고 450년에 남조 송(宋)을 쳐서 회하(淮河) 이북 땅을 빼앗았다.
북위(北魏)는 535년에 동서(東西)로 분열했다. 동위(東魏)는 550년에 북제(北齊)로 바뀌었다. 서위(西魏)는 553년에 남조 양(梁)의 내분을 틈 타 파촉을 빼앗았고 557년에 북주(北周)로 바뀌었다. 남조(南朝)는 557년에 진(陳)으로 바뀌었다.
북제(北齊 , 550 ~ 577) 왕조에서 위수(魏收)가 북위(北魏 , 386 ~ 534) 왕조의 정사(正史) 위서(魏書)를 편찬했다. 본기 14권과 열전 96권은 554년(천보 5년)에, 지(志) 20권은 559년(천보 10년)에 완성했다. 위서(魏書)에 장성을 축성한 기록이 있다.
◇ 魏書 世祖 太武帝 本紀
太平眞君 七年六月 丙戌,發司、幽、定、冀四州十萬人築畿上塞圍,起上谷,西至于河,廣袤(무)皆千里。
위서 세조 태무제 본기
태평진군 7년(446년) 6월 병술일에 사주, 유주, 정주, 기주 등 4개 주에서 십만 명을 징발하여 기(畿 : 수도권)에 요새를 쌓았는데 상곡군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황하까지 길이가 모두 천 리였다.
태평진군(太平眞君)은 북위 세조 태무제(太武帝)의 다섯 번째 연호로서 440년 6월부터 451년 6월까지 사용하였다. 태무제 때 북위의 수도는 평성(平城)으로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이고 상곡군(上谷郡)은 북경의 북쪽이다. 446년에 태무제가 쌓은 장성의 길이가 천 리라고 했으니 상곡군에서 시작하여 대동(大同)을 거쳐 황하의 만곡부에 이르기까지 장성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외장성(外長城) 구간으로서 진시황이 건설한 만리장성과 겹친다. 태무제는 446년에 장성을 신축한 것이 아니고 진시황이 건설한 장성을 수축한 것이다.
당(唐)에서 636년에 이백약(李百藥)이 북제서(北齊書)를 완성했다. 북제서(北齊書)는 동위(東魏, 534년 ~ 550년)와 북제(北齊, 550년 ~ 577년)의 정사인데 북제(北齊)의 장성 건설을 상세히 기록했다.
◇ 北齊書 本紀
文宣帝 天保三年冬十月乙未,至黃櫨嶺,仍起長城,北至社干戍 四百餘里,立三十六戍。
天保六年, 是年,發夫一百八十萬人築長城,自幽州北夏口, 至恒州九百餘里。
天保七年 冬十月丙戌 , 是月,發山東寡婦二千六百人以配軍士,有夫而濫奪者五分之一, 十二月,西魏相宇文覺受魏禪。先是,自西河總秦戍築長城東至於海,前後所築東西凡三千餘里,率十里一戍,其要害置州鎮,凡二十五所。
天保八年, 是年,於長城內築重城,自庫洛拔而東 至於塢紇戍,凡四百餘里。
북제서 본기
문선제(文宣帝, 재위 550년 ~ 559년) 천보(天保) 3년(552년) 10월 을미일에 (문선제가) 황노령에 이르러 장성을 일으켜서 북쪽으로 사간수(社干戍)에 이르렀다. 사백여 리에 36개 요새를 세웠다.
천보 6년(555년), 장정 백팔십만 명을 징발하여 유주 북쪽 하구(夏口)로부터 항주(恒州)까지 구백여 리에 장성을 쌓았다.
천보 7년(556년), 겨울 10월 병술일에 산동지역 과부 이천 육백 명을 징발하여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남편이 있는데 빼앗아 온 자가 5분지 1이었다. 12월 서위(西魏)의 재상 우문각이 위나라(魏)를 선양 받았다. 이에 앞서 서하군(西河郡) 총진수(總秦戍)로부터 장성을 쌓아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 전후에 동서로 모두 삼천여 리를 쌓았고 십 리 마다 1개 요새를 두고 중요한 곳에 모두 25개소의 주진(州鎮)을 설치하였다.
천보 8년(557년) 장성 내에 중성(重城)을 쌓았다. 고락발(庫洛拔)로부터 오흘수(塢紇戍)까지 모두 사백여 리였다.
당(唐)에서 이연수(李延壽)가 659년에 완성한 북사 제본기(北史 齊本紀)에도 북제서(北齊書)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北史 齊本紀
文宣帝 天保六年, 詔發夫一百八十萬人築長城,自幽州北夏口,西至恒州,九百餘里。
天保七年 十二月庚子,魏恭帝遜位於周。是歲,庫莫奚、契丹遣使朝貢。脩廣三臺宮殿。先是,自西河總秦戍築長城東至海,前後所築,東西凡三千餘里,六十里一戍,其要害置州鎮凡二十五所。
天保八年 初, 於長城內築重城,庫洛拔而東,至於塢紇戍,凡四百餘里。
천보 6년(555년) 기사의 하구(夏口)는 지금의 거용관 입구이며 항주(恒州)는 지금의 산서성 대동(大同)이다.
천보 7년(556년) 기사의 총진수(總秦戍)는 지금의 산서성 대동(大同) 서북이고, 바다는 지금의 산해관 해변이다.
북제(北齊) 문선제는 555년 ~ 556년에 걸쳐 대동(大同)으로부터 산해관까지 장성을 수축했다.
천보 8년(557년) 기사의 고락발(庫洛拔)은 지금의 산서성 대현(代縣)과 삭현(朔縣)이 만나는 곳이며, 오흘수(塢紇戍)는 지금의 산서성 영구현(靈丘縣) 서남이다. 중성(重城)은 내장성(內長城)을 가리키는데 내장성 건설에 관한 기록은 북제서가 처음이니 문선제가 557년에 신축한 것이다.
북제서(北齊書)와 북사(北史)는 곡률금(斛律金)열전에서 곡률금(斛律金)의 차자(次子) 곡률선(斛律羨)이 565년에 장성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 北齊書 列傳 九 斛律金列傳
次子羨,字豐樂,河清三年, 轉使持節,都督幽、安、平、南北營、東燕六州諸軍事,幽州刺史。其年秋,突厥衆十餘萬來寇州境,羨總率諸將禦之。天統元年 斛律羨 以北虜屢犯邊,須備不虞,自庫堆戍東拒於海,隨山屈曲二千餘里,其間二百里中凡有險要,或斬山築城,或斷谷起障,並置立戍邏五十餘所。
북제서 열전 9 곡률금열전
곡률금의 둘째 아들 곡률선(斛律羨)은 자(字)가 풍악(豐樂)이다. 하청(河清) 3년(564년)에 사지절 도독, 유주, 안주, 평주, 남영주, 북영주, 동연주 등 6주 제군사, 유주자사가 되었다. 그 해 가을 돌궐 무리 십여 만명이 유주 경계를 침입했는데 곡률선이 여러 장수들을 총지휘하여 방어했다. 천통(天統) 원년(565년) 곡률선(斛律羨)은 북쪽 오랑캐가 변경을 거듭 침범하는 까닭에 근심이 없도록 방비하였다. 고퇴수(庫堆戍)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막았는데 산을 따라 구불구불 이천여 리이고 그 사이 이백 리는 지세가 험한 요충지였다. 혹은 산을 깎아 성을 쌓고 혹은 골짜기를 끊어 장벽을 세웠으며 아울러 오십여 곳에 수라(순찰기지)를 세웠다.
◇ 北史 齊列傳 斛律金列傳
次子羨 字豐樂,河清三年,為都督、幽州刺史。其年,突厥十餘萬寇州境,羨總諸將禦之。
天統元年 羨以虜屢犯邊塞,自庫推戍東拒於海。二千餘里,其間凡有險要,或斬山築城,斷穀起障,並置立戍邏五十餘所。
북사 제열전 곡률금열전
곡률금의 둘째 아들 곡률선은 자(字)가 풍악(豐樂)이다. 하청 3년(564년)에 도독유주자사가 되었다. 그 해에 돌궐 십여 만명이 유주에 침입했는데 곡률선이 여러 장수들을 총지휘하여 방어했다. 천통 원년(565년)에 곡률선은 오랑캐가 거듭 변경을 침범하기에 고퇴수로부터 동쪽으로 바다까지 이천여 리를 막았다. 그 사이에 지세가 험한 요충지가 있어 산을 깎아 성을 쌓고 골짜기를 끊어 장벽을 세웠으며 아울러 오십여 곳에 수라(순찰기지)를 세웠다.
고퇴수(庫堆戍)는 지금의 북경시(北京市) 밀운현(密雲縣) 고북구(古北口)이며 바다는 지금의 산해관 해변을 가리킨다. 곡률선(斛律羨)이 565년에 밀운현(密雲縣) 고북구(古北口)에서부터 산해관에 이르는 장성을 수축했다. 북제장성(北齊長城)의 현대 지명(地名)은 중국의 장성학자 손지승(孫志升)의 저서 "중국장성(中國長城)"을 인용하였다.
효창(孝昌) : 북위 효명제의 네 번째 연호로서 525년 6월 ~ 528년 1월에 사용하였다.
영희(永熙) : 북위 효무제의 세 번째 연호로서 532년 12월 ~ 534년 10월에 사용하였다.
천평(天平) :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의 첫 번째 연호로서 534년 10월 ~ 537년 12월에 사용하였다. 천평 2년은 535년이다.
◇영주(營州)
樂浪郡, 前漢武帝置 二漢晉曰樂浪 後改罷 正光末復 治連城. 領縣二, 戸二百一十九, 口一千八.
낙랑군(樂浪郡) : 전한(前漢) 무제(武帝)가 설치하였다. 두 한(漢)과 진(晉)에서 낙랑군(樂浪郡)이라 했으며 후에 고쳤다가 폐지했고 정광(正光 520~525) 말년에 다시 설치했다. 연성(連城)에서 다스린다. 현은 2개, 가구수는 219, 인구는 1008명이다.
① 永洛, 正光末置 有鳥山.
영낙현(永洛縣), 정광(正光) 말년에 설치하였다. 조산(鳥山)이 있다.
② 帶方, 二漢屬晉屬帶方 後罷 正光末復屬.
대방현(帶方縣), 두 한(漢)에 속했고 진(晉)에서는 대방군(帶方郡)에 속했으며 후에 폐하였다가 정광(正光 520~525 ) 말년에 다시 (낙랑군에) 속하였다.
◇평주(平州),
平州, 晉置, 治肥如城. 領郡二, 縣五. 户九百七十三, 口三千七百四十一.
평주 : 진(晉)나라가 설치하였고 비여성(肥如城)에서 다스리며 2개 군과 5개 현을 관할한다. 가구수는 973이며 인구수는 3741명이다.
遼西郡, 秦置. 領縣三, 户五百三十七, 口一千九百五.
요서군(遼西郡) : 진(秦)나라가 설치하였다.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537이며 인구수는 1905명이다.
① 비여현(肥如縣),
두 한(漢)과 진(晉)에 속했다. 고죽산사(孤竹山祠), 갈석산(褐石山), 무왕사(武王祠), 영지성(令支城), 황산(黄山), 유하(濡河)가 있다.
肥如, 二漢 晉屬. 有 孤竹山祠 褐石 武王祠 令支城 黄山 濡河.
② 양락현(陽樂縣),
두 한(漢)과 진(晉)에 속했다. 진군(真君) 7년(446년)에 영지(令支)와 영자(令資)를 병합하여 (양락현에) 속하게 하였다. 무력산(武歴山), 복주산(覆舟山), 임유산(林榆山), 태진산(太真山)이 있다.
陽樂, 二漢 晉屬. 真君七年併令支 令資屬焉. 有武歴山 覆舟山 林榆山 太真山.
③ 해양현(海陽縣),
두 한(漢)과 진(晉)에 속했다. 횡산(横山), 신부산(新婦山), 청수(清水)가 있다.
海陽, 二漢晉屬. 有横山 新婦山 清水.
북평군(北平郡) : 진(秦)나라가 설치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2개이고 가구수는 130이며 인구수는 1,836명이다.
北平郡, 秦置. 領縣二, 户四百三十, 口一千八百三十六.
① 朝鮮, 二漢晉屬樂浪 後罷 延和元年徙朝鮮民於肥如復置屬焉.
조선현(朝鮮縣), 두 한(漢)과 진(晉)에서는 낙랑군(樂浪郡)에 속했으며 후에 폐지했다. 연화(延和) 원년(432년)에 조선(朝鮮) 사람을 비여현(肥如縣)으로 옮겨 (조선현을) 다시 설치해서 (북평군에) 속하게 하였다.
② 新昌, 前漢屬涿 後漢晉屬遼東 後屬 有盧龍山.
신창현(新昌縣), 전한(前漢)에서 탁군(涿郡)에 속하였고 후한(後漢)과 진(晉)에서는 요동군(遼東郡)에 속하였다가 후에 (북평군에) 속하였다. 노룡산(盧龍山)이 있다.
◇유주(幽州)
漁陽郡, 秦始皇置. 真君七年併北平郡屬焉. 領縣六. 户六千九百八十四. 口二萬九千六百七十.
雍奴, 二漢屬, 晉屬燕國, 後屬. 真君七年併泉州屬. 有泉州城 雍奴城.
潞, 二漢屬, 晉屬燕國,後屬. 真君七年併安樂 平谷屬焉. 有樂山神.
無終, 二漢晉屬右北平, 後屬. 有無終城 狼山.
漁陽, 二漢屬, 晉罷, 後復. 有漁陽城 闕樂城 桃芝山.
土垠, 二漢晉屬右北平, 後屬. 有北平城.
徐無, 二漢晉屬右北平, 後屬. 有徐無城.
어양군(漁陽郡)
진시황(秦始皇)이 설치하였다. 진군(真君) 7년(446년) 북평군(北平郡)에 병합하여 속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6개이고 가구수는 6,984이며 인구는 29,670명이다.
1) 옹노현(雍奴縣), 두 한(漢)에 속했으며 진(晉)에서는 속국인 연국(燕國)에 속했고 후에 어양군에 속했다. 진군(真君) 7년 천주(泉州)를 병합하여 속했다. 천주성(泉州城)과 옹노성(雍奴城)이 있다.
2) 로현(潞縣), 두 한(漢)에 속했고, 진(晉)에서는 연국(燕國)에 속했고 후에 어양군에 속했다. 진군(真君) 7년 안락현(安樂縣)과 평곡현(平谷縣)을 병합하여 속했다. 낙산신(樂山神)이 있다.
3) 무종현(無終縣), 두 한(漢)과 진(晉)에서는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했고 후에 어양군에 속했다. 무종성(無終城)과 랑산(狼山)이 있다.
4) 어양현(漁陽縣), 두 한(漢)에 속했고 진(晉)에서는 파하였는데 후에 다시 되돌렸다. 어양성(漁陽城)과 궐악성(闕樂城)과 도지산(桃芝山)이 있다.
5) 토은현(土垠縣), 두 한(漢)과 진(晉)에서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했고 후에 어양군에 속했다. 북평성(北平城)이 있다.
6) 서무현(徐無縣), 두 한(漢)과 진(晉)에서 우북평군에 속했고 후에 어양군에 속했다. 서무성(徐無城)이 있다.
여기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진시황이 건설한 만리장성을 서진(西晉), 북위(北魏), 북제(北齊), 명(明)에서 수축복구(修築復舊)한 사실이 진서(晉書) 당빈열전(唐彬列傳),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명사(明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북사(北史),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요사(遼史)에 장성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여러 사서에 기록된 장성의 경로는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경로와 동일하고 장성의 동쪽 끝은 임유관으로서 지금의 산해관이다. 현존하는 만리장성을 명(明)나라 때 건설했다는 주장은 허무맹랑한 낭설인 것이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사망한 후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 기원전 206년 1월에 진(秦)나라가 멸망하고, 이어서 항우의 초(楚)나라와 유방(劉邦)의 한(漢)나라가 4년간 싸웠다. 기원전 202년 1월 항우가 해하(垓下) 전투에서 패하여 자결하고 한나라가 중원을 제패했다. 기원전 202년 8월 한(漢) 고조(高祖) 유방은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에 봉하고 노관은 패수(浿水)를 조선과의 경계로 정했다. 기원전 195년 위만이 패수(浿水)를 건너 조선으로 망명했고 조선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했다.
◇ 사기 노관열전(史記 盧綰列傳)
漢五年八月,乃立盧綰為燕王 .... 高祖使使召盧綰 綰愈恐 迺遂稱病不行 上益怒 使樊噲擊燕 燕王綰悉將其宮人家屬騎數千居長城下 侯伺 幸上病愈 自入謝 四月高祖崩 盧綰遂將其衆亡入匈奴 匈奴以為東胡盧王 居歲餘 死胡中
한나라(漢) 5년(기원전 202년) 8월 노관을 연왕으로 세웠다.... 중략 ... (기원전 195년 2월) 고조가 노관을 장안으로 불렀다. 노관이 두려워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고조가 더욱 노하여 번쾌에게 연(燕)을 치라 하였다. 연왕 노관은 자신의 궁인, 가속과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장성(長城) 아래에 머무르며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고조의 병이 나으면 스스로 들어가 사죄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4월에 고조가 죽자 노관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도망쳐 흉노 땅으로 들어갔다. 흉노가 그를 동호(東胡)의 노왕(盧王)으로 삼았다. 그렇게 1년 남짓 지내다 오랑캐 땅에서 죽었다.
◇ 사기 조선열전(史記 朝鮮列傳)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至浿水 為界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満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斉亡命者, 王之, 都王険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나라 때 처음으로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 한(漢)이 일어나고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매 요동의 옛 요새를 복구 수리해서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고 연(燕)에 속하게 했다. (기원전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역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이 망명했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공지(空地) 상하장(上下鄣)에 머물렀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망명자들을 복속시켜서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했다.
서진(西晉, 265년 ~ 316년)에서 진수(陳壽, 233 ~ 297)가 290년 무렵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를 편찬했고 비슷한 시기에 어환(魚豢)이 위략(魏略)을 저술했다. 어환(魚豢)은 진수(陳壽)와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행적이 없다. 훗날 남조(南朝) 송나라(宋, 420년 ~ 479년)에서 배송지(裵松之, 372 ~ 451)가 위략(魏略) 등 150 종류의 서적을 참고하여 삼국지(三國志)에 방대한 주석을 달았다. 송(宋) 문제(文帝, 재위 424년 ~ 453년)의 명으로 429년에 착수하여 완성본을 문제(文帝)에게 올렸는데 완성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아래는 배송지(裵松之)의 주석이다.
◇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
魏略 曰:及秦並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准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准,准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爲燕王,朝鮮與燕界於浿水。及綰反,入匈奴,燕人衛滿亡命,爲胡服,東度浿水,詣准降,說准求居西界,(故)中國亡命爲朝鮮籓屏。准信寵之,拜爲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滿誘亡黨,衆稍多,乃詐遣人告准,言漢兵十道至,求入宿衛,遂還攻准。准與滿戰,不敵也。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위략에 이르기를,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기원전 221년),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 이르렀다. 이때에 조선왕 부(否)가 즉위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정략상 진나라에 복속하였으나 조회에 응하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이 즉위하였다. 이십여 년 후 진승과 항우가 일어나 천하가 어지럽자, 연, 제, 조 백성들이 고생하여 점점 준에게 도망가니, 준이 이들을 서쪽에 두었다. 한이 노관을 연왕에 봉하고 (기원전 202년) , 조선과 연이 패수를 경계를 삼았다. 노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기원전 195년) ,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호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와서 투항하였다. 준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고, 중국 망명인으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고자 하니, 준이 믿고 총애했다. 박사의 벼슬을 주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라고 명하였다. 위만이 도망한 무리들을 꾀어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준에게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고하기를, 한의 병사가 열길로 쳐들어 오니 들어가서 지키겠다 하고, 돌아와 준을 공격하였다. 준이 위만과 싸웠으나 대적하지 못하고, 좌우 궁인들과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한(韓)의 땅에 자리잡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불렀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漢武帝)가 조선을 침공해서 기원전 108년에 왕험성(王險城)을 함락시켜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땅에 4군을 설치하였다. 사기(史記)에는 패수와 왕험성이 어디인지 분명하지 않고 4군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후한(後漢, 25 ~ 220) 때 반고(班固) 가족이 서기 100년경 한서(漢書)를 완성했다. 한서(漢書)는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창건한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 ~ 기원후 8년)과 왕망(王莽)이 창건한 신(新, 8년 ~ 23년)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한서(漢書)는 한무제가 위만조선 땅에 설치한 4군이 진번군(真番郡) , 임둔군 (臨屯郡) , 낙랑군(樂浪郡) , 현도군 (玄菟郡)이며 낙랑군에 조선현이 있고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있다고 했으나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한서지리지(漢書地里志)에 요동군의 속현으로 험독현(險瀆縣)이 있다. 후한(後漢)에서 190년경 응소(應劭, 204년 死)가 한서지리지(漢書地里志) 주석서를 저술했는데 원본은 망실되고 험독현(險瀆縣) 대목이 다른 서책에 인용되어 전해 온다. 남북조시대 유송(劉宋, 420 ~ 479) 왕조에서 배인(裵駰)이 저술한 사기집해(史記集解)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 사기집해(史記集解)
應劭注漢書地理志 遼東險瀆 朝鮮王舊都
응소가 한서지리지에 주석을 달아 요동군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고 했다.
배인(裵駰)은 진수(陳壽, 233 ~ 297)가 저술한 정사 삼국지(三國志)에 주석을 단 배송지(裵松之, 372년 ~ 451년)의 아들인데 생몰 년대는 미상이다.
당(唐)나라에서 사마정(司馬貞, 679 ~ 732)이 편찬한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 사기색은(史記索隱)
應劭曰 險瀆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응소가 말하기를 험독은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며 강(江)의 험(險)에 의지하기에 험독(險瀆)이라 부른다고 했다.
서진(西晉 265 ~ 316)에서 사마표(司馬彪)가 후한(後漢, 기원후 25년 ~ 220년)의 역사 속한서(續漢書)를 저술했다. 사마표의 생몰 연도는 불분명한데 서진(西晉) 혜제(惠帝 재위 290 ~ 307) 말년에 60여 세로 사망했다고 하니 240년대 초에 출생했을 것이다. 속한서는 290년 무렵 삼국지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되었고 남조(南朝)의 양(梁 502~557)나라에서 유소(劉昭 514 ~ 565)가 주석을 달았다.
속한서는 대부분 망실되고 지(志)만 남아 이를 속한지(續漢志)라 하며 지리지(地理志)에 해당하는 것이 군국지(郡國志)이다. 속한지(續漢志)는 훗날 북송(北宋, 960 ~ 1127)에서 후한서(後漢書)에 합본되어 정사로 인정되었다. 속한지 군국지(郡國志)에 의하면 후한(後漢) 안제(安帝, 재위 106~125년) 때 요동군의 무려현, 험독현, 방현과 요서군의 창료현, 빈도현, 도하현을 합쳐서 요동속국(遼東屬國)을 신설했다. 다음과 같다.
◇ 후한서 속한지 제 23권 군국지(郡國志)
遼東屬國, 故邯鄉, 西部都尉, 安帝時 以為屬國, 都尉别領六城, 雒陽東北三千二百六十里.
昌遼, 故天遼, 屬遼西. 何法盛 晉書 有青城山 [1]
賔徒, 故屬遼西.
徒河, 故屬遼西.
無慮, 有醫無慮山.
險瀆, 史記曰 王險 衛滿所都 [2]
房
요동속국(遼東屬國), 옛 감향(邯鄉)이며 서부도위(西部都尉)였다. 안제(安帝) 때 서부도위를 요동속국을 만들어 도위(都尉)가 별도로 여섯 성을 다스렸다. 낙양(雒陽)에서 동북쪽으로 3,260리 떨어져 있다.
① 창료현(昌遼縣), 옛 천료현(天遼縣)이다. 전에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1] 하법성(何法盛)의 진서(晉書)에 청성산(青城山)이 있다고 했다.
② 빈도현(賔徒縣), 전에는 요서군에 속했다.
③ 도하현(徒河縣), 전에는 요서군에 속했다.
④ 무려현(無慮縣), 의무려산(醫無慮山)이 있다.
⑤ 험독현(險瀆縣), [2] 사기(史記)에 왕험성(王險城)으로서 위만(衞滿)이 도읍한 곳이라 했다.
⑥ 방현(房縣)
[1]과 [2]는 유소(劉昭)의 주석이다.
의무려산은 지금도 그 이름이라 무려현(無慮縣)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요동군과 요서군의 경계는 대릉하(大凌河)와 세하(細河)임을 알 수 있다.
험독현은 대릉하와 요하(遼河) 사이에 있는데 더 이상의 구체적 위치는 알 수 없다.
당(唐)나라에서 안사고(顔師古, 581~645)가 한서지리지에 주석을 달아 641년에 편찬했는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 한서지리지(漢書地里志)
樂浪郡 : 武帝元封三年開 應劭曰 樂浪郡故朝鮮國也
낙랑군 : 무제 원봉 3년(기원전 108)에 개설했다. 응소가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라 했다.
朝鮮縣 : 應劭曰 武王封箕子於朝鮮
조선현 :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했다고 했다.
배인(裵駰)과 사마정(司馬貞)과 유소(劉昭)에 따르면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요동군 험독현은 위만조선의 도읍 왕험성이라 했다는 것이고, 안사고(顔師古)에 따르면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한무제(漢武帝)가 조선국에 낙랑군을 개설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응소(應劭)가 남겼다는 두 가지 주석이 상반되는데 한무제가 조선국에 낙랑군을 설치했으니 조선국의 도읍 왕험성은 낙랑군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서지리지에는 낙랑군의 구체적 위치를 말해 주는 기록이 없다.
북제(北齊 , 550 ~ 577)에서 위수(魏收)가 554년에 북위(北魏 386~534)의 역사 위서(魏書)를 편찬했다. 위서(魏書) 고구려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위서(魏書) 고구려열전
世祖時,釗曾孫璉始遣使者安東奉表貢方物,并請國諱。世祖嘉其誠款,詔下帝系名諱於其國,遣員外散騎侍郎李敖 拜璉為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郎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敖至其所居平壤城,訪其方事云 , 遼東南一千餘里,東至柵城,南至小海,北至舊夫餘,民戶參倍於前魏時,其地東西二千里,南北一千餘里。
세조(北魏 太武帝, 재위 423 ~ 452) 때 쇠(釗, 고구려 고국원왕)의 증손 련(璉, 고구려 장수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안동(安東)으로 보내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치며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청하였다.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황제의 계보와 이름을 기록하여 보내게 하였다.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郎) 이오(李敖)를 보내 련(璉)에게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정동장군(征東將軍)·영동이중랑장(領東夷中郎將)·요동군공(遼東郡公)·고구려왕(高句麗王)의 벼슬을 내렸다. 이오(李敖)가 고구려왕이 살고 있는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러 지방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 요동 남쪽 1천여 리인데 동쪽으로는 책성(柵城)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소해(小海)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옛부여(舊夫餘)에 이르른다. 민호(民戶)는 전위(前魏 = 曺魏, 220 ~ 265) 때의 3배이고, 땅은 동서 2천 리, 남북 1천여 리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권18
長壽王 十五年, 移都平壤.
二十三年, 夏六月, 王遣使入魏朝貢, 且請國諱. 世祖嘉其誠款, 使錄帝系及諱以與之. 遣員外散騎侍郞李敖, 拜王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장수왕 15년(427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장수왕 23년(435년) 여름 6월, 왕이 위(魏)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청하였다. 위 나라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황제의 계보와 이름을 기록하여 보내게 하였다. 원외산기시랑 이오(李敖)를 보내 왕에게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의 벼슬을 내렸다.
고구려 장수왕은 427년에 압록강변 환도성(丸都城)에서 평양성(平壤城)으로 천도했다. 삼국사기에는 평양이 여러 차례 등장해서 평양의 위치를 종잡을 수가 없는데 위서(魏書) 고구려열전에 평양성은 요동에서 남쪽으로 1천여 리에 있다고 했으니 이는 대동강변 평양을 가리킨다. 북위(北魏) 사신 이오(李敖)가 평양을 방문한 435년의 형세는 아래와 같다. 북위와 고구려 사이에 북연(北燕, 407년 ~ 436년)이 있어서 북위와 고구려는 해상으로 왕래하였다. 북연(北燕)은 436년에 북위(北魏)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위서(魏書)에 평양성에서 남쪽으로 소해(小海)에 이른다고 했는데 소해(小海)가 어느 바다인지 학계에서 아무런 연구가 없다. 조선왕조에서 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지금의 황해도 재령평야는 당시 바다였다. 지질학계는 이 바다를 재령만이라 부르는데 조선 인조(仁祖, 재위 1623 ~ 1649) 때부터 간척을 시작하여 대(代)를 이은 공사 끝에 농경지로 바뀌었다. 필자는 위서(魏書)에 기록된 소해(小海)가 재령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북위(北魏, 386 ~ 534)에서 역도원(酈道元, 470 전후 ~ 527)이 수경(水經)에 방대한 주석을 달아 515년경 수경주(水經注)를 완성했는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 수경주(水經注)
許慎云..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 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 盖出其縣南逕鏤方也 昔燕人衞滿 自浿水西 至朝鮮. 朝鮮故箕子國也. 箕子教民以義田織信厚, 約以八法, 而下知禁, 遂成禮俗. 戰國時, 滿乃王之, 都王險城, 地方數千里.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遣 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 討 右渠, 破渠于浿水, 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其地今髙句麗之國治. 余訪蕃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 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以朝鮮為逺, 循遼東故塞, 至浿水為界. 考之今古于事差謬, 盖經誤證也.
허신(許慎)이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루방현을 나와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가는데 일설에는 패수현에서 나온다고 한다. 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 말하기를 패수현은 낙랑군 동북쪽에 있고 루방현은 낙랑군 동쪽에 있는데 모두 패수현과 루방현을 나와 남쪽으로 루방현을 지난다고 하였다. 옛날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으로부터 조선에 이르렀는데 조선은 옛 기자의 나라이다. 기자는 백성에게 의(義)와 밭갈기와 옷감짜기를 믿음과 두터움으로 가르치고 8조의 금법을 알게 하여 예속(禮俗)을 이루었다. 전국시대에 위만이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하였는데 땅이 사방 수천리였다. 그 손자 우거에 이르러 한무제 원봉 2년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였는데, 우거를 패수(浿水)에서 쳐부수고 마침내 우거를 멸하였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너지 않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의 도성이다. 내가 고구려 사신에게 찾아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도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고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서 옛 낙랑군 조선현 즉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의 치소를 지나 서북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옛 한서지리지에 이르기를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또 漢이 흥하자 조선이 너무 멀어 요동의 옛 새(塞)를 복원하여 패수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다고 했다. 이것을 고찰하면 지금과 옛 일에 차이와 오류가 있는데 모두 수경(水經)이 틀렸음을 증명한다.
역도원(酈道元)이 수경주(水經注)를 저술할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대동강변 평양성이었다. 역도원은 고구려의 도읍이 위만조선의 땅이라고 했는데 이는 평양을 왕험성이자 낙랑군의 옛땅으로 본 것이다. 이와 함께 역도원은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라고 사기에 기록된 패수가 대동강이라고 생각하였다. 역도원은 오로지 고구려 사신의 말에 따라 이렇게 생각했는데 고구려 사신이 말하기를 평양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고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낙랑군 조선현 즉 낙랑군의 치소를 지나간다고 했다는 것이다.
역도원은 수경주(水經注)를 저술하기 삼백 년 전에 응소(應劭)가 한서지리지에 주석을 달아 요동군 험독현은 위만의 도읍 왕험성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와 왕험성의 위치는 그 당시까지 분명치 않았는데 역도원은 이에 대한 해답을 단지 고구려 사신의 말에서 얻었다고 한다. 고구려 사신의 말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검증하지도 않고 사실로 믿은 것은 학자의 태도가 아니다. 평양이 왕험성이고 낙랑군의 옛땅이라고 기록한 문헌은 그 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사기에 의하면 왕험성은 패수에서 동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으니 패수에 붙어있는 평양성은 왕험성이 될 수 없다. 대동강이 한(漢)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라면 왕험성은 임진강이나 한강을 끼고 있어야 하고 평양이 왕험성이라면 패수는 압록강이라야 한다. 대동강이 한(漢)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이고 평양이 왕험성이라는 주장은 사기의 기록과 어긋나 성립하지 않는다.
◇ 후한서 광무제본기(後漢書 光武帝本紀)
光武帝 建武 六年 六月 初 樂浪人王調據郡不服 樂浪郡古朝鮮國也 在遼東 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
광무제 건무 6년(서기 30년) 6월 초, 낙랑 사람 왕조가 낙랑군을 점거하고 불복했다.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가을에 낙랑태수 왕준을 보내 공격했다. 낙랑군의 관리가 왕조를 죽이고 항복했다.
※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樂浪郡古朝鮮國也 在遼東)라는 대목은 후한서 원전이 아니고 당나라 측천무후의 둘째아들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이 붙인 주석이다. 서기 30년 당시 낙랑군은 요동의 옛 조선 땅에 있었다는 것이다.
당(唐)나라에서 736년에 장수절(張守節)이 저술한 사기정의(史記正義)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 사기정의(史記正義)
括地志云 高麗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
괄지지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본래 한(漢) 낙랑군 왕험성이며 옛 조선땅이라고 했다.
괄지지(括地志)는 당태종(唐太宗)의 네째 아들 이태(李泰)가 642년에 편찬한 지리서인데 원본은 망실되고 일부가 여기저기 인용되어 전해온다. 왕험성(王險城)에 관하여 당(唐)나라 때까지 요동군 험독현이라는 주장과 낙랑군이라는 주장으로 갈렸고 낙랑군은 요동에 있다는 주장과 평양이라는 주장으로 갈렸다. 945년에 후진(後晉, 936~946)에서 편찬한 구당서(舊唐書)가 정사(正史)로서는 처음으로 평양은 옛조선 왕험성이며 한나라의 낙랑군이라고 했다. 다음과 같다.
◇ 구당서 동이열전(舊唐書 東夷列傳)
高麗者,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성으로 한(漢) 낙랑군의 옛땅이다.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흔히 고려로 표기했다. 평양은 낙랑군의 옛땅이라고 한 것은 평양을 왕험성으로 본 것이다. 왕험성은 위만조선의 도읍이고 위만조선 땅에 낙랑군을 설치했으므로 왕험성은 낙랑군에 있는 것이 논리에 부합하지만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증거는 없다. 구당서에 평양이 낙랑군의 옛땅이라고 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구당서를 편찬할 당시까지 평양이 낙랑군의 옛땅이라고 기록한 문헌은 역도원(酈道元)이 저술한 수경주(水經注)와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인용된 괄지지(括地志) 뿐인데 수경주는 단지 고구려 사신이 그렇게 말했다고 전했을 뿐이고 사기정의(史記正義)는 괄지지(括地志)의 단편적인 문장을 인용했을뿐 이를 뒷받침하는 설명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 후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편찬한 정사(正史)는 아무런 검증 없이 구당서를 옮겨 적었고, 조선왕조에서 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중국 사서를 따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1권 :
평안도는 본래 고조선의 땅이다. ... 평양부는 본래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으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에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단군(檀君)이라 일컬었으니 이것이 전(前)조선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여기에 봉하니 이것이 후(後)조선이다. 전하여 41대 손 준(准)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이 그 땅을 빼앗아 왕험성(王險城)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漢)의 명을 받들지 않으므로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년)에 장수를 보내 토벌하여 사군을 설치하고 왕험성으로 낙랑군을 삼았다.
기원전 210년에 진시황이 죽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기원전 206년초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가 기원전 202년 1월까지 싸웠다. 이 혼란기에 주변의 여러 민족은 중국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했는데 조선도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땅을 수복했다. BC 81년에 한(漢)나라 조정에서 기록하고 BC 50년경에 책으로 편찬한 염철론(鹽鐵論)은 조선의 영토회복을 명확하게 기술했다.
염철론(鹽鐵論) 벌공편(伐功篇)
大夫曰 齊桓公越燕伐山戎 破孤竹 殘令支. 趙武寧王踰句注 過代谷 略滅林胡樓煩. 燕襲走東胡 辟地千里 度遼東而攻朝鮮
대부가 말하기를, 제나라 환공은 연을 넘어 산융을 벌하고 고죽을 격파하고 영지를 멸했다.
조나라 무령왕은 구주산(句注山)을 넘어 대와 상곡을 지나 임호와 누번을 경략해 멸하였다.
연나라는 동호를 습격해 천리 밖으로 물리치고 요동을 건너 조선을 침공했다.
염철론(鹽鐵論) 비호편(備胡篇)
大夫曰 往者,四夷俱強,並為寇虐, 朝鮮踰徼,劫燕之東地
대부가 말하기를, 옛적에 사방의 오랑캐가 함께 강해져 나란히 노략질과 포학을 저질렀다. 조선은 요(徼)를 넘어 연의 동쪽 지역을 빼앗았다.
요(徼)는 요동외요(遼東外徼)를 가리킨다. 과거 연나라가 진번을 정복하고 조선의 서쪽 땅을 빼앗았는데 진시황이 연을 멸하고 이 곳을 요동외요라 불렀다. 염철론에 의하면 진(秦)나라가 망한 후 초한쟁패기에 조선은 요동외요를 넘어 연나라의 동쪽 땅 일부까지 점령하였다. 주류학계는 이러한 기록을 무시하고 연나라 전성기의 영토가 진시황을 거쳐 한무제 때까지 유지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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