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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ly for the curiosity, Partly for the survey in an attempt to write books on #Buddhism and #Minhwa-#Korean_Falk_Painting, This is a short essay of a trip around the Western Region of China.
https://cafe.daum.net/miguancf/gRi2/252?svc=cafeapi
서북중국항공 Northwest China Airline
저 비행기를 타고 서역으로 간다. 날개에 비천飛天이 그려져 있다. 비천... 우리에게도 익숙한 소재이다. 머나먼 서역과 한국문화의 원류를 찾아 나서는 나와의 사이를 비천이 연결한다.
우르무치
출구에서 피켓Picket을 들고 기다리기로 한 가이드Guide가 보이지 않는다. 피켓을 만들어 들고 피켓을 든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그래도 나타나지 않는다. 몇몇 택시기사가 달라붙는다.
“전화를 하고 싶다 워샹따티엔와我想打电话”
내가 묻는다. 택시기사가 우정 친절하게 군다.
“저기에 전화가 있다-나아유어띠엔화那儿有电话”
전화로 간다. 다이얼을 돌린다.
“러 선생 계시오?-리 센샹 짜이마李先生在吗?”
“내가 러요-워 쉬 러샤트沃·舒·拉夏特”
“한국에서 왔는데...공항에서 만나기로 했지 않아요? This is Kim from Korea, Why you are at home? You supposed to be here in airport"
"차가 없어요 I have no car"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그랬지 운전수가 필요한게 아니거든요 What I need is a guide, not a driver with a car"
"그래도 한시간이나 걸리는데...But it takes an hour to get there..."
"그럼...내가 거기로 가요? Then What should we do, shall I go to your palce?"
"할리데이 인에서 만납시다. 한 시간은 벌겠네요 Let's meet at Holiday Inn, then we can save 1 hour each"
처음부터 이야기가 매우 쉽다. 이렇게 영어가 통하는 가이드라면 일이 순조로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할리데이 인은 비싼 여관이다. 캘리포니아에서 72시간을 밤낮없이 그레이하운드Greyhound 를 다섯 번이나 옮겨타면서 뉴욕에 도착했을 때 맨 처음 나를 주눅들게 했던 네온사인이 “할리데이 인 하루 숙박 99달러”이었다. 200달러면 로스 앤젤레스에서 한달 월세를 낼 수 있는데...
할리데이 인에서 가이드를 만난다. 송충이같은 시꺼먼 눈섶아래 까만 테 안경을 썼다. 가느다란 골격에 배만 볼록 튀어나왔다. 평범하고 착해보인다. 가이드로는 합격점이다. 여행안내서에도 택시 하나를 타도 운전사의 인상을 보라고 했다.
할리데이 인의 하루 숙박료는 600위안이다. 우리말 표기로는 위안이지만 실제 유엔이라고 발음해야 중국인은 알아듣는다. 비수기라 에누리를 해도 400위안이다. 600위안이면 9만원이고 400위안이면 6만원이다. 한국의 중간이하 호텔 방세에 맞먹는다.
여관 세 곳을 순방한다. 두 곳은 빈 방이 없고 세 번째는 120위안이다. 2만원 정도면 그래도 안심이 된다. 입구에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지니같은 복장을 한 벨보이가 문을 열어준다. 회전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도 매캐한 매연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인도의 델리나 카라카스보다는 낫다. 거기에는 아련한 향수처럼 카펫에 매연이 배어 있었다.
우루무치의 아침
첫날 아침, 우르무치Urmci를 구경하기로 한다. 박물관은 토요일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 눈길을 헤치고 서역西域의 매운 바람을 가르며 박물관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모양이다.
대신 시내 구경을 나간다. 삼각대를 산다. 난쟁이 삼각대로 만족하기로 한다. 98위안이니까 14700원이다. 황학동에서 2만원에 팔린다. 그보다 약간 부드럽다. 한국에서 중국제를 사가지고 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삼각대는 가져오지 않았었다.
재래시장을 구경한다. 난이라는 빵, 드럼통에서 구어파는 군고구마, 잘라서 파는 수박, 온갖 견과류... 모두 사진을 찍는다. 이런 사진은 사실 남의 것을 이용하기가 께름직하다. 그 시간의 그 상황 속에서 그 사람만이 찍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가공을 하더라도 필자로서의 권위와 양식에 문제가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 대해 협조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꼭 사진 찍는 것이 싫으면 돌아서거나 사각寫角에서 피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연기를 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양고기를 팔거나 케밥이라는 꼬치 요리를 장만하는 장면은 매우 이국적이다. 그러나 꼬치는 한국의 포장마차에서 파는 것과 똑 같다. 철물점에서는 케밥용 쇠꼬챙이를 판다.
트럼프 점 치는 여자를 스냅으로 찍기 위해 않는 순간 점쟁이 여자가 엉겨붙었다. 윗도리를 잡고 흔든다. 옆 사람들이 말린다. 나는 러센샹을 부른다. “사진...안 찍었소 I didn't take pictures”라고 해명을 한다. 그제사 여자는 떨어진다. 그리고 나서야 가이드가 나타난다.
“What do you say 'May I take your pictures?' in Chinese? 사진 찍어도 됩니까를 중국어로 뭐라 그래요?"
"You can say 커이 쨔오샹마可以照相吗??
“OK. 커이 쨔오샹마?”
필름을 갈아끼려고 보니까 2번 3번 필름이 없다. 비디오 테잎 역시 분명히 주머니에 넣었는데 2번 3번이 없다. 그 짧은 순간 점쟁이 여자가 흔들면서 양손에 테입 둘과 필름 둘을 쥐고 숨겼다는 말인가. 안찍은 필름과 테입이었기 망정이지 찍은 필름과 테입이거나 혹은 현금이나 패스포트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한 순간이었다.
매연이 자욱한 역광속에서 꿈틀꿈틀 움직이는 생명력을 비디오로 담고 싶었다. 배경에는 모슬렘Moslem 궁전을 넣자. 가까운 건물 중에 새로 여는 카페가 있다. 카페는 단장중이어서 삼층 옥상에 간다. 새로 산 삼각대가 아무래도 마음에 놓이지 않아 바람이라도 불면 떨어질 것 같다. 스트랩Strap을 잡고 촬영을 한다. 가이드는 멀찍이 떨어져 담배를 핀다.
그것이 우르무치의 추억이었다. 우유에는 우락떠껑이가 둥둥 떠 있다. 일본 유부같은 촉감인데 맛이 있다.
투르판
둘째날 아침, 투르판Turfan행 버스를 탄다. 택시는 500위안, 버스는 일인당 50원이다. 투르판 정거장에서 반갑게 기사가 인사한다. 기사를 멀찌감치 두고서 가이드가 투르판 투어에 300위안이면 어떠냔다. 하루에 100위안이면 나쁠 것 없다고 판단해 좋다고 한다.
가이드에게 100위안을 준다.
“용돈이고요오. 안내비용에는 포함되진 않소 This is for your personal expense, not included in your guide fee.
금방 씻고 나와서 박물관으로 향한다. 박물관은 점심시간에 문을 닫는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4시까지란다. 그 사이에 교하고성交河故城에를 간다.
교하, 쨔오허고성은 협곡의 오른 쪽 고원에 세워진 옛 도시이다. 관공서-민가-사원-불탑 등이 있다. 싸하게 코끝을 간지르는 매운 공기, 높은 곳에 서면 금방 손끝이 얼어온다. 그러나 한국에서 들었던 살인적인 추위는 아니다. 워낙 겁을 먹어서 겹겹이 두꺼운 옷을 겹쳐 입었던 탓이기도 할 것이다.
투르판지역에서는 사진은 찍어도 좋지만 비디오는 안된다. 만약 적발되면 벌금이 3천위안이다. 45만원이니 내 여행경비의 절반이 날아간다. 이런 곳 역시 남의 사진을 쓸 입장이 못된다. 그리고 내 카메라와 시각이라면 그들보다 낳은 사진을 찍을 수 있으리라는 자신도 있다.
“어떻게 비디오 찍는 거 적발하죠? 어디 CCTV나 감시탑이라도 있소? How do they catch the video taking scenes, is there CCTV or watching tower?"
"관광객 틈에 끼어서 잡아내요 They pretend to be tourists and catch the person who takes video pictures"
"왜 비디오를 못 찍게하죠? Why do they prohibit the videos?"
"돈 때문이죠 Because of money."
"무슨 돈요, 벌금? What money, fine?"
"뭐...제네들 용돈이죠...No, for their pocket money."
이런 상황이라면 용기를 낼만하다. 높은 곳에 서서 스케치북을 꺼낸다. 그리곤 그림을 그린다. 손끝이 금방 얼어붙는다. 잠깐동안 비디오를 꺼내 준비를 한다. 준비해온 멘트를 읽는다. 사실 읽기도 벅찬 상황이다.
재빨리 카메라를 집어넣는다. 카메라를 싸려고 가져온 털모자는 가이드가 쓰고 있다. 배터리가 얼면 오동작을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고는 하지만 하지 말라는 짓을 하면서 태연할 수 있을만큼 강심장이지는 않다.
”안내원들에게 한국 대학에서 강의용이라고 말해줄래요? Could you explain to the guard here that I would like to take video pictures just to show to my students in the university in Korea?“
가이드는 잠시 멈칫 하더니 상황을 파악한 듯 했다. 그리곤 사람이 안보는 곳에서 비디오를 찍어도 좋다고 한다. 멀찍이 떨어진 사원과 탑을 힐끗 찍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부지런히 이곳 저곳을 비디오에 담는다. 가이드는 앞쪽에서 망을 보고 있다. 사실 망이라고 하지만 해바라기를 하는 편이다. 평상복으로 다니기에는 살인적으로 춥기도 할 것이다.
가이드는 먼저 내려간다. 비디오보다는 스틸 사진을 70컷 이상을 찍었다. 하루 분량을 다 찍은 셈이다. 조바심이 난다. 20통의 사진을 인화하려면 20만원이 든다.
혼자 내려오는 길에 조그마한 도편陶片을 줍는다. 집으로 가져갈 요량이다. 낙타가 입이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즐겨 먹는다는 마른 낙타풀을 조금 떼어 주머니에 넣는다. 가는 곳마다 공기를 가져가서 조그만 유리캡슐에 넣어 팔면 돈이 될텐데. 교하고성의 공기... 매점에서도 그런 기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하지 못한다.
가이드가 기다리는 매점 밖에는 매점 주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저 사람은 책과 비디오를 사러 온 사람이다 라는 정보를 얻은 모양이다. 추위에 시퍼렇게 질려서도 부지런히 설명을 한다. 사진과 비디오, 그리고 허접쓰레기 유출에 대한 속죄삼아 VCD와 안내책자를 산다.
다시 우루무치의 박물관에 간다. 그제사 박물관에서는 겨울에 문을 열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가이드도 택시 기사도 알 수 없는 관행인가부다.
식당에 들어간다. 입구에 거적보다 더러운 차폐막이 쳐져 있다. 그 앞에는 북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홍보수단이 허용되지 않아 저렇게 북을 쳐서 이목을 끄는 것이란다. 그렇게 손님이 오게 하려면 입구의 거적부터 갈아넣지.. 회전문도 좋고 자동문도 좋을 것이다.
식사를 한다. 나는 우락떠껑이가 떠 있는 우유를 먹는다. 가져간 간편식을 먹는다. 그들 역시 간편하게 식사한다. 물주가 그렇게 먹는데 호사스런 저녁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일 만나기로 하고 여관에 들어간다. 러샤트는 결혼하여 딸 아이가 하나 있다. 전공은 영어, 직업은 여행사의 가이드이다. 한국의 여행사에서 특별주문한 특별 가이드이다. 겨울이어서 그렇겠지만 하루 200위안, 3만원이다. 중국의 물가로 봐서는 작은 돈이 아니겠지만 한국에서라면 20만원 정도 요구할만한 직종일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3만원은 큰돈이기는 하다.
그러나 가이드는 언제나 돈만 축내지는 않는 사람들이다. 북경에 갔을 때는 러유樂遊호텔에 있는 가이드와 다녔다. 버스로 다니면서 그들은 싸고 맛있는 식당으로 모신다. 중국인 요금이 적용되는 관광지에는 중국인 표를 사준다.
무엇보다도 현지인들 중에서 심뽀가 뒤틀린 사람들이 접근하거나 도심盜心을 품을만한 사람이 있으면 미리 차단을 해준다. 결과적으로 가이드는 어떠한 경우건 돈을 벌어주거나 도난-강도 등 위해危害에서 보호해준다.
그러나 가이드는 여행자의 주머니에 비춰 소비를 조절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자신의 소비패턴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숙박비-식비-운송비 등 처음 대강 규모를 정해주면 가이드는 거기에 맞추어 소비를 조절해준다.
투르판에 도착, 버스 정류소에 속한 여관에 묵는다. 주차장으로 통하는 입구에는 순하게 생긴 수위가 사람들이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쇠사슬을 벗기고 문을 열어준다. 반대쪽 길로 통하는 문은 열려있다.
묻는다
“왜 수위가 이렇게 지키죠 Why do they keep there?”
퉁명스레 대답한다.
“What reason for the security? 시큐리티에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두 개의 침대가 있는 방이 120위안이다. 속옷만 입고 TV를 보는 가이드의 불룩한 배가 귀엽게 보인다. 체질적으로도 한국인에게 적용되는 배불뚝이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한국인 중에서 배가 튀어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이 동그랗고 뼈대가 약하며 손이 작은 체형이 많다. 이 가이드는 얼굴이 둥글지는 않지만 약한 뼈대와 작은 손이 그 전형에 속한다.
“위구르족维吾尔族이라 들었는데, 서역에 얼마나 많이 사는가?”
“우르무치와 투르판에 10%정도이다. 나머지는 모두 중국인이다.”
“어떤 말을 쓰는가?”
“우리는 위구르말을 쓴다.”
“위구르말은 중국어와 다른가?”
“우리는 단철어이다. 중국어는 교착어이다.”
“한글도 단철어이다. 그렇다면 위구르는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보아야한다. 그럼 서역에서 공용어는 무엇인가.”
“중국어다. 90%가 보통화-푸통후와普通话를 쓴다.”
중차대한 정보를 얻어낸다.
“위구르족이라면 소수민족이라는 말인데, 원래 서역의 토착민 혹은 원주민이 아니었나?”
가이드가 값을 발하는 순간이다.
“830년대에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온 몽골족이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생김새는 아라비아나 서구의 혼혈이므로 이국적이지만 그 근본 태생은 몽골족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돈황에서 제일 큰 서점에 간다. 책을 너무 사는 게 아닌가 가이드가 자꾸 필요없는 책이라면서 빼 버릴만큼 많이 샀는 모양이다. 가이드는 자기가 읽은 책 중에서 좋은 책을 골라준다. 중국식으로 표기된 스벤헤딘斯文赫丁Sven Anders Hedin-스타인斯坦因Stein-페리오佩里奥Perio의 책도 있다.
투르판의 소수민족에 대한 보고서도 있다. 거기에 분명 내가 원하는 정보가 있을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영어책에 실리지 않은 귀중한 자료가 거기 있을 것이다.
3일째
아침, 식사를 한다. 가이드 덕분에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면을 먹을 수 있다. 두부도 먹어본다. 투파라고 부르는 두부는 한국과 꼭같이 만들어 똑같이 네모낳게 짤라서 판다.
점심, 밥을 시켜먹는다. 펄펄 날아가는 것이 이것도 밥이냐 하는 생각이 들지만 꾸역꾸역 밀어넣는다. 괜히 검연쩍으니까 한마디 한다.
“한국에서는 먹던 음식을 남기면 안되는 관습이 있다.”
러샤트가 응수한다.
“우리도 그렇다.”
흠...그렇단 말이지...그거 신통하구만 하면서 물어본다.
“그런가?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부엌에 들어가거나 요리를 하면 안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러샤트가 다시 말을 받는다.
“우리도 그런 관습이 있다...”
몽골족이라더니 위구르의 관습이 우리네 농촌의 관습과 너무나 꼭 같다는 데서 짜릿한 흥분이 감돈다.
식사후, 베제클리크柏孜克里克千佛洞에 간다. 죽 벋은 사막의 고속도로에서 화염산火焰山을 지나 왼쪽으로 꺾어진다. 그리고 왼쪽 산길로 접어든다. 길에는 눈과 얼음이 곳곳에 쌓여있고 산사태가 나서 길의 절반이 막힌 곳도 있다. 풍경이 삭막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하다.
눈길을 헤치고 베제클리크 입구로 간다. 아무도 없다. 택시기사가 철장을 넘어 사무실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없다. 나는 입구 왼쪽에 세워진 현장법사와 손오공-저팔계-사오정의 조각을 찍는다. 이렇게 황량한 곳에 솜씨좋은 조각을 세우면서도 알뜰살뜰하게 철장을 둘렀다. 좀 더 튼튼히 만들면서 사람들이 타고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도록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참을 기다려도 사람이 안온다. 베제클리크 뒤쪽에 사는 주민들이 경운기처럼 털털거리는 트럭을 타고 지나간다. 먼저 고창고성에 가잔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는 하지만 갔다왔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고창高仓古에서 가이드는 높은 곳에 가서는, 여기는 관공서-여기는 민가-저기는 불탑이 있다고 설명해준다. ‘비디오를 찍어서는 안되지만 특별히 당신에게는 허용합니다. 그러나 들키지는 않도록 하세요’ 하고는 관리사무실에 들어간다.
프롬트Prompt를 읽는다. 그러면서도 실수나 실언이 나온다. 따뜻한 차를 보온병에 가져가서 연방 마시는 것은 목이 마르기도 하려니와 한번에 실수없이 녹화를 끝내야한다는 부담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조약돌을 주었다가 벽돌조각을 바꾸고 세 번째로 화불化佛의 좌대로 생각되는 진흙파편을 주머니에 넣는다. 비가 오거나 마차거나 사람의 발길에 부서질 운명이긴 하지만 걸리면 문화재밀반출로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냥 도편에 튀어나온 세가닥 띠가 고작이다. 이것을 화불좌대로 보는 이유는 실크로드라는 비디오에서 이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오면서 일부러 아까 산 ‘난’이라는 이름의 빵을 우적우적 씹어먹는다. 나는 먹는 것에나 관심이 있지 비디오 따위는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으로 기대한다.
다시 베제클리크로 간다. 이번에는 매표원이 있다. 잠시 표를 팔고는 톱밥난로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간다. 택시기사와 가이드도 따라 들어간다. 서로 잘 아는 눈치다. 가이드는 슬쩍 귀뜸을 한다. ‘뒤에 따라갈테니까 먼저 가 구경하세요.’
계단을 내려가 난간을 따라 열려있는 동굴로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비디오를 꺼내 동굴을 훑어 비디오를 찍는다. 두사부일체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앞에서 찍고 뒤에서 찍고 돌려서 찍고... 화급하게 팬닝Panning-쥬밍Zooming-스틸 컷Still Cut을 챙기고 조명이 허용하는 몇 컷은 스틸로 찍는다. 머리 속에는 화집에서 보았던 사진들이 마치 애니메이션 컷이 영화가 되어 살아나듯이 살아나 재생된다.
그러나 사실 비디오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그다지 의미는 없을 것이다. 모든 동굴들이 어두울 뿐 아니라 사람 키만큼 두터운 스테인레스 기둥 사이에 두꺼운 유리로 차단막을 쳐놨기 때문에 화집의 사진만한 수준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진을 찍어야 하는 것은 그 공기를 숨쉬기 위해서이고, 화집에서 볼 수 없었던 훼손을 확인해야하고, 서구의 좀도둑들이 짤라간 톱자국을 사진찍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열려있는 몇 개의 동굴을 사진찍는다. 마지막 동굴을 촬영하고 나와서 멘트를 준비한다. 멀리서도 보이지 않을 위치에 비디오를 놓고 동굴문앞에 앉아서 프롬트를 본다.
가이드가 내려온다. 동굴의 바깥에서는 촬영이 허용된다했으므로 여유를 부린다. 가이드도 바깥에서 비디오를 찍고 있으니까 입장이 난처하지 않아 좋은 모양이다.
러샤트는 박식하다. 가이드자격이 차고 넘친다.
“베제클리크의 동굴벽화가 훼손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네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슬람때문이구요. 두 번째는 서구의 탐험가들이 절취했습니다. 세 번째는 농민들이 비료로 쓰기 위해 긁어갔구요. 네 번째는 레드 가드Red Guard라 부르는 홍위병红卫兵들이 부셨습니다.”
“위구르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하는데 이런 도상들과 눈이 마주치면 영혼을 빼앗긴다고 생각한다면서요? 그래서 눈이 없는 불상이나 불화가 많던데..”
“모든 이슬람이 파괴에 참가한 것이 아닙니다. 무식한 이슬람들의 짓이지요.”
배터리와 테입을 정비하고 아스타나阿拉木图로 간다. 기사는 일찌감치 난로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간다. 가이드는 가이드답게 ‘아스타나는 아라비아말로 도시라는 뜻입니다. 위구르인들의 장례문화와 사후관을 볼 수 있는 곳이지요’ 하고 설명한다.
그리고선 사람들 안보는 데서는 살짝 ‘비디오를 찍어도 좋습니다’ 라고는 들어간다. 관리직원들과 난로 옆에 앉아 노닥거릴 것이다. 혹시 이야기가 나면 저 사람은 학생들 보여주기 위해 소개멘트 정도 찍는다고 바람막이를 해줄 것이다.
몇 개의 고분으로 들어가면서 가방에서 비디오를 꺼낸다. 최대한 한번에 모든 장면을 찍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찍고 돌려서 찍고, 줌해서 파고들면서 찍고 휘휘 저어서 찍는다. 혹시 인쇄에 쓸 수도 있을까 하고 스틸 사진도 몇 컷 찍는다.
비디오 카메라를 땅에 놓고 앙각으로 입구에 앉은 나를 겨누고 프롬트를 읽는다. 가이드가 나온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니까 가이드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하, 저 사람은 그냥 학생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입구에서만 비디오를 찍는 사람이구나....
아스타나의 벽화는 조선민화와 똑같다. 난초같은 풀 앞에 서있는 오리그림은 한국에서 누군가가 보더니 웬 민화야 할 정도로 같다. 혹시 830년대에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던 화가가족이 중국의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란을 피해 대본을 나눠가지고 하나는 서역으로, 하나는 신라로 온 게 아닐까. 그렇게 아스타나에는 민화를, 베제클리크에는 불화를 그렸고, 신라에서 고려불화-조선민화로 이어지는 그림의 전통이 수립된 것이 아닐까.
다시 투르판으로 돌아온다. 오는 길에 화염산을 지난다. 여름 화염산이라면 한 삼십분 삼각대를 고정하고 찍었다가 겨울에 보면 땀이 뻘뻘 날 것같기는 하다. 그러나 죽 벋은 고속도로에서 한 10분의 차창 풍경으로 본다면 여름 화염산이라도 기승을 부릴 것 같지는 않다.
돌아와서 가이드는 택시 기사를 로비에 떼어놓고 여관방에 혼자오더니 기사를 보내자고 한다. 우체국에도 가야하고 내일 버스 정류소에까지 가는 요금이 아니냐니까 오늘 너무 많이 우회했단다. 300위안을 준다. 아마 나가서 200위안 정도를 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100위안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장면이 보나 마나 눈에 선하다.
우르무치와 투르판에서 산 책을 우체국으로 가져간다. 가이드는 앞에서 휘적휘적 걸어간다. 책을 가득 담은 가방을 멘 나는 불만이다. 택시비라면 기껏 5위안인데 걸어가는 것은 택시기사를 보낸 책임감 때문일 것이다.
우체국 여직원은 조그만 종이박스에 책들을 넣어본다. 이렇게도 넣어보고 저렇게도 넣어보지만 손이 아둔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랑오 워라이 이시让我来试一试...”
내가 넣는다. 한국에서 밥먹듯 이사한 솜씨 아닌가. 좁은 방에 비디오 네 대, 서재를 겸해서 냉장고와 이불까지 넣고서 책쓰고 비디오 편집하고 먹고 자는 솜씨에 그게 어려울까. 기어히 두 개의 짐으로 만들려는 우체국 여직원의 농간을 뿌리치고 하나로 만든다. 그러나 무게야 어떻게 줄이겠는가. 배편으로 3백25위안이 들었다.
출국시 인민폐人民币RMB로 50만원, 달러로 50만원을 환전했다. 인민폐는 3300위안, 달러는 400달러가 된다. 인민폐를 다썼다. 달러로 계산해도 되겠느냐고 우체국직원에게 물으려니까 가이드가 자기가 환전해주겠단다. 800위안으로 백달러를 환산해 받아 우편요금을 지불한다.
비행기편으로는 열흘, 배로는 12일이란다. 비행기는 배보다 두배가 비싸다. 그래서 배로 보내라 했다. 그러자 가이드가 12일에서 한달이라고 정정한다. 그럼 20일 정도면 되겠구먼... 하는 심정도 있다. 12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서 여독이 풀릴 즈음이면 짐이 도착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촬영한 비디오 테입과 필름을 넣는다. 만에 하나 출국시 압수당하거나 벌금을 물거나 짐을 도둑맞더라도 분산을 하겠다는 심뽀이다.
오는 길에는 택시를 탄다. 방에 와서는 가이드와 상의한다. 다음 일정은 돈황이다. 어떻게 갈까. 비행기와 기차와 버스가 있다. 비행기는 비싸고 기차는 우루무치까지 가야한다. 버스는 하미哈密를 거쳐 이틀간 돈황으로 간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욕까지 72시간 그레이하운드를 타면서도 질리지 않은 내가 48시간을 겁내랴.
가이드와 상의한다.
“비행기는 원하지 않고 우르무치까지 다시 돌아갈 이유는 없다. 남은 것은 버스니까 버스로 가겠다. 이제 네 할 일은 내일 아침 버스표를 끊어주는 일 밖에 없다. 오늘 예매가 된다면 그 일도 줄어든다. 네 아내와 딸이 기다릴 것같아 내가 불안하다. 가이드 비로 얼마를 주면 되겠느냐. 한국에서 들었을 때 하루 200위안이라 하던데...”
러샤트가 머리를 굴린다.
“4일로 계산해서 800위안을 줄 수 있겠는가.”
흔쾌히 응수한다.
“좋다. 달러로 주겠다. 100달러면 한국에서 환전하면 840원 인민폐에 해당된다. 좀 더 주고 싶지만 앞으로 여행을 해야하니까 이해해달라.”
가이드는 버스표를 예매해주고 버스를 타고 우르무치 제 집으로 간다. 그러니까 첫날 10시부터 12시까지-이튿날 24시간-사흘째 16시간을 일하고 나흘치 가이드비와 100위안의 용돈을 받는 셈이다. 그러나 그런 계산이라면 하루저녁 자고 아침에 버스표 사주는 정도로 200위안이 더 날아갈 판이다.
내가 많이 배웠다고 칭찬하고, 비디오를 찍게 해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하고 책을 쓰면 당신 이야기를 써도 되겠느냐고 하자 러샤트의 표정이 밝아졌다. 명함을 하나 달라더니 꼼꼼하게 주소 전화번호 팩스번호까지 적어준다. 전자메일이 없느냐니까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했다.
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