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길 닿는 곳마다 쓸고 닦노라
- 이건창(李建昌) 선종순 번역
[번역문]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는 자체가 잠시 빌려 사는 것이지만, 수당(修堂)은 그대에게 있어 빌려 사는 공간 중에 또 빌려 사는 공간이다. 이미 가족을 데려오지도 않았고, 소일할 서적도 없으며, 그릇이며 옷이며 생활에 필요한 가구도 없다. 그저 몇 개의 서까래가 비바람을 막아 주고 솥단지 하나로 끼니를 해결하니, 어느 날 이런 생활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는 주인에게 돌려주면 그만인 곳이다.
이런 판에 무엇 때문에 그 집을 손질하며, 또 무엇 때문에 그런 집을 위해 기문을 쓴단 말인가? 그러나 옛날에 곽유도(郭有道)*는 여관에 묵을 때에도 반드시 그 방을 쓸고 닦았는데, 뒤이어 그 방에 묵는 사람이 알아보고는 “이 방은 유도가 묵었던 곳이로군!” 하였다니, 이런 측면으로 보자면 그대가 집을 손질하는 것과 내가 기문을 쓰는 것이 모두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 곽유도(郭有道) : 유도는 후한 때의 고사(高士) 곽태(郭太)의 호로, 높은 학문과 덕을 지녀 일세의 숭앙을 받은 인물이다.
[원문]
人生天地間。固無之而非寓。然修堂之於君。又寓之寓也。旣不挈眷以隨。無書籍之玩。無器服什佰之具。數椽以庇風雨。一鐺以供饔飧。一日倦且歸。則付之守者而已。此焉用修之。又焉用爲之記。然昔郭有道過逆旅。必爲之灑掃。而人又從而識之曰。此有道宿處。夫若是則君之修之與余之記。皆無不可者。
- 이건창(李建昌, 1832~1898), 「수당기(修堂記)」, 『명미당집(明美堂集)』 제10권
이건창과 이남규(李南珪)**는 사는 곳이 수백 리나 떨어져 있어 서로 명성만 들었을 뿐이다. 어느 날 우연히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벼슬살이하게 되자 얼마간 회현동 미나리골이라는 곳에 나란히 세 들어 지낸다. 서로 고명(高名)을 익히 들었던 터라 술 한 잔에 부르고 시 한 수에 달려가 흉금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이남규는 참으로 깔끔한 사람이었나 보다. 비록 잠시 세 들어 사는 단칸방이지만 말끔히 손질을 한다. 뿐만 아니라 수당(修堂)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친구에게 기문을 써 달라고 조르기까지 한다.
잠시 머무는 단칸방에 이렇듯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요즘에도 참 보기 드물 것이다. 기문을 써 주는 이건창도 어이가 없는지 곧 주인에게 돌려주고 떠날 방을 손질은 해서 뭣하며 기문은 써서 뭣하겠냐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린다. 그러나 이남규의 이러한 성품이 마음에 좋았던지, 정인군자(正人君子)로 정평이 난 곽유도(郭有道)의 고사를 들어 수당에 깃든 뜻과 뒷사람을 배려하는 고매한 성품에 의미를 부여한다.
봄이 무르익어 여름으로 달려가는 요즈음 수많은 꽃이 제 순서를 지켜 차례로 피어나고 연녹색 새순들은 어느새 성큼성큼 세상을 초록빛으로 채워간다. 자연은 죽은 듯 보이는 황량한 겨울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아 이렇듯 해마다 아름다운 모습을 토해낸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놓칠세라 바쁜 일상에 잠시 짬을 내 자연의 품으로 달려들어 즐거움을 만끽한다. 이른바 행락철이다. 매년 이맘때면 전국 각지에 수많은 행락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필자가 있는 이곳 전주 한옥마을도 예외는 아니다. SNS를 통해 유명세를 타면서 구경 오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인산인해이다. 그러나 이곳 한옥마을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몸살을 앓고 있다. 사람만 많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쏟아 내는 쓰레기도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룰 지경이니 말이다. 눈 덮였던 한옥의 기와가 산뜻한 자태를 드러내고 정겨운 골목길 언저리에 어여쁜 들꽃을 피워 내기까지 겨우내 애쓴 자연의 노고를 행락객들은 얼마나 생각하고 있을까?
먹다 흘린 길거리음식들이 나뒹굴고 심지어 포장지와 막대들이 푸릇푸릇한 식물들 사이에 끼어 있는 한옥마을 거리를 보면 곽유도의 여관방과 이남규의 수당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뒷사람을 생각해서 여관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세 든 단칸방을 정성들여 손질한 이분들의 고매한 인격이 너무나도 아쉽기 때문이다. 이분들이 단순히 방 한 칸을 닦았을 뿐이겠는가. 자신의 몸을 닦고 마음을 닦고 나아가 세상을 닦은 분들인 것이다.
내 것이 아닌 우리 것에 조금씩이나마 마음을 써 주고 손길을 뻗쳐 다듬어 준다면, 그 짧은 시간이 자신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반대로 놀러 간 곳에서 무심코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으나 작게는 자신의 저급한 인격을 뒷사람에게 드러내 보이고, 크게는 우리가 잠시 빌려서 머물다 가는 이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후대가 평가할 우리의 인격이 내 손의 쓰레기를 버리는 작은 일에서 결정될지 누가 알겠는가.
** 이남규(李南珪, 1855~1907) : 구한말의 학자이자 애국지사로, 자는 원팔(元八), 호는 수당(修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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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길 닿는 곳마다 쓸고 닦노라 / 이건창(李建昌) 선종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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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5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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