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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까지, 법조계의 기원을 추적한 책이 나왔다. 아무도 몰랐던 우리의 숨겨진 역사, 우리나라 법조계의 형성 과정을 치밀하게 복원한 책. "헌법의 풍경""불멸의 신성가족" 등의 책을 통해 우리나라 법조계를 날카롭게 분석해온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의 김두식 교수가 치밀한 조사를 통하여 역사에서 사라진 해방공간의 법조인들을 소환했다.
해방 직후 법조계에 자리잡은 이들을 고등시험 사법과, 조선변호사시험, 서기 경력을 통해 특별 임용된 사례로 구분해 소개하며 개개인의 이력에 숨은 맥락을 살핀다. 또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비롯하여 정부 수립 전후에 법조계에서 벌어진 각종 좌익 사건을 통하여 우리 법조계가 어떤 과정을 통해 좌익과 중도가 사라진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는지 살펴본다. 또한 그간 간과했던 '이법회'( 또는 의법회) 문제를 발굴하여 초창기 법조계 5년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설명한다. 초창기 법조인들이 1980년대까지 법조계를 비롯한 사회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도 그들의 후손이 사회 각계의 상층부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법조계의 풍경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법조계의 풍경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사법부의 구조와 현상 등을 상당 부분 설명해주는 길이 될 뿐 아니라, 친일문제를 비롯해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우리 사회의 전반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즉 우리 법조계가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그 뿌리를 집요하게 탐구한 치열한 시도다. 해방전후부터 한국전쟁까지 우리나라 법조 직역의 형성과정을 '사람' 이야기로 풀어가는 이 책은 총 7부로 구성되어 있고 초창기 대한민국 법률가들을 네가지 유형으로 묶어 설명한다. 제1법률가군은 해방후 한국 법조계의 최상층부를 형성한 사람들로, 일본 고등시험 사법과를 합격하고 일제시대 판검사를 지낸 이들이다. 제2법률가군은 조선변호사시험 출신, 제3법률가군은 일제시대 서기 겸 통역생 출신으로 해방직후 판검사에 임용된 사람들이다. 해방직후 잠시 존속했던 사법요원양성소 출신 등 해방후 법률가자격을 갖춘 이들은 제4법률가군으로 분류된다. 1부부터 3부까지는 그런 법률가군들의 기원과 태생에 대해 설명한다.
'1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은 1937년 합격자들을 중심으로 일본 고등시험 사법과 제도를 탐구했다. 바로 제1법률가군(群) 이야기다. 일제의 법률가 선발 시스템은 판검사 임용시험과 변호사시험으로 분리 시행되다 1923년 고등시험 사법과로 통합되었다. 고등시험은 예비시험, 필기시험, 구술시험의 3단계로 진행되었으며, 학력 제한이 존재했다. 예비시험에 응시라도 하려면 중학교를 졸업하거나 그와 동등한 학력을 갖추어야 했고, 예비시험을 면제받으려면 고등학교, 대학예과 또는 문부대신이 이와 동등 이상이라고 인정하는 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경성제대와 전문학교 중에서는 관립 경성법전 졸업자만이 고등시험 시행 초창기부터 예비시험을 면제받았고, 보성전문 졸업생은 1929년, 연희전문 졸업생은 1932년에 이르러서야 예비시험을 면제받았다. 진입장벽이 그만큼 높았다. 예비시험은 논문과 외국어 두과목으로 실시되었고, 한번만 합격하면 이후에 다시 응시할 필요가 없었다.
제1법률가군의 대표적 인물이자 당대 최고의 엘리트 김영재는 안동지역 유수의 독립운동가 가문 출신으로 경성제대 재학시절 급진적 사상의 언저리를 맴돌았으나,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 이후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개인의 영달을 추구했다. 친일 검사로 일하며 누릴 것은 다 누렸다. 해방후 반성의 의미로 좌익진영에 가담했던 '성찰가' 강중인, 조선법학과동맹(법맹)을 결성한 '호걸쾌남' 조평재, 반공판사로 유명했던 '외골수' 양원일, 해방직후 첫번째'‘사법파동'의 주인공인 오승근, 법조계의 모든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영광을 누린 민복기 등 1937년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의 일제시대 인생행로도 김영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2부 이류에서 일류로 편입된 사람들: 변호사시험 출신들'은 일제시대 '이류' 법률가로 취급받았으나 해방이후 고등시험 사법과 출신과 함께 법조계의 가장 중요한 뼈대를 형성한 조선변호사시험출신들의 삶을 다뤘다. 제2법률가군 이야기다. 일제시대 시행된 조선변호사시험은 이름 그대로 변호사가 되기 위한 시험이었다. 판검사가 될 수 없었던 대신 응시자격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독학자라도 이 시험만 붙으면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공부에 자신이 있는 청년들은 누구나 한번쯤 조선변호사시험을 꿈꾸었다. 이 조선변호사시험 출신 중 대표적인 인물이 허헌이었는데, 판검사를 거치지 않은 순수 변호사의 아버지 격이던 허헌은 해방후 좌익과 중도진영의 지도자로 변신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종합대 총장 등을 지냈다. 그가 왼쪽으로 기울게 된 뿌리를 탐구하는 것은 해방공간 좌익진영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념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주로 허헌의 함경도 인맥, 이종만의 대동콘체른과 맺은 인연, 해방이후 남한지역의 과도한 '좌익사냥'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3부 벼락처럼 찾아온 해방, 새로운 기회의 시대'는 해방으로 조선인 법률가들에게 벼락처럼 찾아온 새로운 기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일본인 판검사를 재판에서 배제하고 조선인 법률가로 그 자리를 채웠다. 1945년 10월 11일 해방후 첫번째 판검사 임용이 실행되었다. 고등시험 사법과와 조선변호사시험 출신들이 이른바 가장 먼저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미래가 보장되었던 이들의 임용과정에서 친일경력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인맥과 운이었다. 삼팔선 이북지역에서 해방을 맞이한 판검사들은 월남시기에 따라서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했다. 이 과정에서 한민당 출신이 요직을 독점했다.
출신지역과 좌우대립에 따른 내부갈등도 적지 않아 임용을 받고도 출근하지 않는 판검사들이 많았다. 미군정과 법조인력정책 담당자들은 빈자리를 채울 특단의 조치를 마련해야 했다. 일제시대 서기 겸 통역생으로 일하며 일본인 판검사들을 보조했던 사람들이 판검사들로 임용되었다. 바로 제3법률가군이다. 일제시대 서기경력을 바탕으로 해방후 검사에 임용된 오제도와 같은 제3법률가군 출신은 해방 당시를 기준으로 판검사, 변호사자격을 갖추지 못했던 '미자격자'로 분류된다. 이들은 해방공간에서 수적으로는 판검사의 다수를 점했으면서도 실제로는 한번도 주류가 되지 못했다. 기득권을 인정받은 '자격자'들과 달리 제3법률가군이 권력의 상층부에 진입하려면 어떤 형태로든 자기 실력을 보여줘야 했다. 미자격자는 판사보다 검사들 중에 더 많았다.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이들의 강박은 해방공간의 무리한 검찰 사건조작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또한 해방후 군법무관으로 법조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자격자인지가 분명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예 어떤 종류의 자격시험도 거치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군법무관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대거 전역하여 변호사를 개업했다. 대한변호사협회나 서울변호사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0년을 기준으로 할 때 서울지역 변호사는 300여명에 불과했다. 100명에 육박하는 군법무관 출신들은 결코 작은 세력이 아니었다. 1960년 10월 고등시험 사법과, 조선변호사시험 등 이른바 '정통 고시' 출신들은 '서울변호사회가 군법무관 출신 변호사들에게 좌우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변호사들의 질적 저하가 초래되고 있다"면서 새로운 변호사회인 서울제일변호사회를 창립했다. 1980년 통합되어 서울통합변호사회를 결성할 때까지 20년 동안 서울지역의 변호사회는 두개로 운영되었다.
3부까지에 걸쳐 설명한 우리 초창기 법조계의 풍경을 바탕으로 4부와 5부에서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어떤 권력을 휘두르며 활동했는지를 대표적인 사건을 통해 살펴본다. 이어서 6부는 한국전쟁이 우리 법조계에 끼친 영향을, 7부에서는 해방 당일 시험에 응시했던 기록만으로 법조계에 몸담게 되었고 이후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던 '이법회'의 행적을 추적한다.
4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해방공간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을 일거에 불법화시킨 1946년 5월의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이야기한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단일사건이 아니었다. 조선정판사 사건에 앞서 우리 법조계는 '김계조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김용무 대법원장, 이인 대법관 등 한민당 세력이 장악한 법원과 검찰은 첫 판검사 임용 때부터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받았다. 오승근 판사, 백석황 검사로 대표되는 좌익 또는 중도성향의 법률가들은 '김계조 사건'을 계기로 이 상황을 바로잡고자 했다.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재경지역에 근무하던 판검사 80퍼센트가 김용무 대법원장 퇴진운동에 동조했다. 우리 법조역사상 첫번째 사법파동이었다. 일시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던 이 시도는 역풍을 불러왔다. 그 역풍으로 오승근, 백석황 등의 저항세력은 퇴출되었고 한민당의 김병로가 사법부장으로 전면에 등장해 법원과 검찰을 장악했다.
바로 이 시기에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졌다. 조작 여부가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이 사건에는 조재천과 김홍섭이 검사로, 조평재, 윤학기, 강중인, 김용암,한영욱, 이경용, 강혁선, 오승근. 백석황이 변호사로 관여했다. 재판장을 맡은 양원일은 편파적인 공판진행으로 물의를 빚었다. 재판장 개인의 외골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재판이었다. 이 책은 당시 변호인들이 제출한 상고이유서를 중심으로 사건 전체가 조작 또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다. 사건수사가 진행된 본정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의 습성화된 고문과 조작행태도 이런 추정을 유력하게 뒷받침한다.
'5부 ‘법조프락치’ 사건’은 1948년 정부수립을 전후해 법조계에서 벌어진 각종 좌익 관련 사건을 다룬다. 1947년 12월 '사법기관 내의 남로당 프락치'로 구속된 남상문, 홍승기, 서범석 등 이른바 '적색 사법관'사건,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진압의 한복판에서 군경에 학살된 순천지청 박찬길 검사 사건, 1949년 7월의 서울지방검찰청 김영재 차장검사 사건, 그해 12월의 2차 '법조프락치' 사건, 1950년 3월의 이홍규 검사 사건 등은 좌익을 박멸해야 한다는 극우세력의 편집증적 집착과 권력욕구가 만들어낸 '관제 빨갱이'의 대향연이었다. 이 책은 남쪽 출신과 북쪽 출신의 지역적 갈등도 이 사건들의 조작과 과장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추정한다. 이런 추정에 힘을 보태는 것은 흥미롭게도 이회창 전 총리의 아버지인 이홍규 검사다.
1차 '법조프락치' 사건 공판이 거의 마무리되던 1949년 12월부터는 젊은 세대 법률가들에게 불똥이 튀기 시작했는데 사법요원양성소 출신들이 주된 목표였고, 서기 출신 중에서는 비교적 강직하다는 이홍규 검사가 연루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6부 한국전쟁이라는 쓰나미'는 한국전쟁이 법조계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병로 대법원장, 김갑수 내무부차관 같은 극소수의 고위직 법조인들은 비교적 빨리 피난길에 올랐다. 유병진 판사, 오제도, 선우종원 검사 같은 월남민 출신들도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하고 한강을 넘었다. 피난 중에 김갑수, 오제도는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과 그 ‘처리요령’을 만들어 부역자 처벌을 준비했다. 서울환도 후에 유병진은 그 명령에 의해 양산되는 억울한 피해자를 막기 위해 피땀을 쏟았다. 같은 피난경험이었지만 결과는 그만큼 달랐다. 서울에 숨어 지낸 김홍섭 판사, 홍진기 법무국장, 민복기 대통령법률비서관, 정희택 검사, 방순원 변호사 등은 각자도생으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김용무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수많은 법조인들은 북한에 납북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전남지역에서는 이덕우, 염세열 변호사가 후퇴하는 군경에 학살되었다. 오제도, 선우종원 등이 만든 국민보도연맹의 광범위한 희생자 중의 하나였다. 이홍규, 이정남 검사처럼 ‘관제 빨갱이’로 몰렸던 사람들은 막상 인민군에게 과거 남로당활동 내용을 제출하려 해도 적어낼 것이 전혀 없는 황당한 처지에 놓였다. 김영재 차장검사나 홍승기 변호사처럼 인민군치하에서 법맹이나 자치위원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에 놓였다. 적에게 협력한 사실이 있으면 남쪽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 뻔히 예상되었다. 점령기간 중에 북한체제에 환멸을 느꼈다 하더라도 다를 건 없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어디까지가 납북이고 어디부터가 월북인지를 구별하기 어려운 다양한 행방불명자가 줄을 이었다. 그렇게 사라진 이들은 다시 법조계로 돌아오지 못했다. 겨우 살아 돌아온 몇몇은 더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다. 이로써 남한의 법조계는 좌익과 중도라는 한쪽 날개를 완전히 상실한 근본적인 한계를 떠안게 되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한국전쟁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7부 1980년대까지 이어지는 '이법회'의 문제는 이른바 '이법회(以法會)' 또는 의법회(懿法會)' 문제를 발굴함으로써 초창기 법조계 5년의 역사가 오늘에 끼친 영향을 설명한다. 1945년 해방당일에 시행 중이었던 조선변호사시험의 응시자들은 일본의 항복으로 시험을 끝마치지 못했다. 4일간 치러질 예정이었던 시험이 2일차 정오의 항복방송과 함께 중단되고 일본인 시험관들이 사라져버린 탓이다. 응시자들은 궁지에 몰린 일본인 시험위원회를 압박해 합격증을 받아냈다. 응시사실만 있으면 모두 합격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결성된 ‘이법회’ 구성원들은 해방후 각종 시험에서 필기시험을 면제받아 초창기 법조계의 가장 중요한 인력풀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법회 구성원들이 그 경력을 감췄기 때문에 전체적인 규모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누구나 그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조직이었다.
행정부와 입법부는 '선출된 권력'인 반면, 사법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어서 그 정당성이 늘 문제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 대한 시민 일반의 전통적인 존중이 사법부뿐만 아니라 법조계 전체의 정당성 확보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최소한 법조인들은 그렇게 믿어왔다. 그런데 우리 법조계의 출발점에 존재한 이법회라는 큰 구멍은 그런 믿음을 뿌리부터 흔들기에 충분하다. '전두환의 대법원장'이었던 유태흥은 공식적으로는 2회 변호사시험 출신이지만, 실제로는 이법회 출신으로 필기시험을 면제받고 면접만으로 변호사자격을 취득했다. 이법회 출신으로 2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또다른 법률가 홍남순의 경우는 같은 경험을 지녔다 해도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김두식 교수는 ‘프롤로그’에서도 밝힌바 이 책이 역사적 사실의 분석과 법조계의 제도에 초점을 맞춘 학술서이기보다는 ‘사람’이야기로 읽히기를 바랐다. 700면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임에도 속도감 있게 읽히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법조계의 중요한 궤적을 인물 중심으로 따라간 『법률가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은 역사 ‘덕후’나 법 관련 독자들만을 겨냥한 책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우리의 역사를 다룬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끝내 사회 각 분야의 발전을 가로막거나 더디게 해온 지난 시간 중에서도, 우리 사회의 최고위층이고 최고 엘리트라 자타 공인하는 법조계의 역사라면 과연 그들이 지금과 같은 권력을 누릴 자격을 갖추었나, 그들의 뿌리는 과누구도 몰랐던 우리의 숨겨진 역사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까지, 법조계의 기원을 추적하다!
우리나라 법조계의 시작점으로서 너무나 중요함에도 주목받지 못했던 해방 후 법조계의 형성 과정을 치밀하게 복원한 책. 『헌법의 풍경』『불멸의 신성가족』 등의 책을 통해 우리나라 법조계를 날카롭게 분석해온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의 김두식 교수가 3년 넘는 치밀한 조사 끝에 역사에서 사라진 해방공간의 법조인들을 소환하고 빈 구멍을 채웠다.
해방 직후 법조계에 자리잡은 이들을 고등시험 사법과, 조선변호사시험, 서기 경력을 통해 특별 임용된 사례로 구분해 소개하며 개개인의 이력에 숨은 맥락을 고찰한다. 또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비롯하여 정부 수립 전후에 법조계에서 벌어진 각종 좌익 사건을 분석하며 우리 법조계가 어떻게 좌익과 중도가 사라진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는지 살펴본다. 또한 그간 간과했던 '이법회'( 또는 의법회) 문제를 발굴하여 초창기 법조계 5년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설명한다. 초창기 법조인들이 1980년대까지 법조계를 비롯한 사회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도 그들의 후손이 사회 각계의 상층부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법조계의 풍경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치열하고 집요하게 복원한 한국 법조계 최초의 풍경들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까지, 법조계의 기원을 추적하다!
우리 헌법에 담긴 근본정신을 현대적 의미로 되살려낸 『헌법의 풍경』, 법조계를 둘러싼 모순과 병폐를 정면으로 제기했던 『불멸의 신성가족』, 그리고 영화를 통해 인권의 여러 측면을 알기 쉽게 풀이한 『불편해도 괜찮아』,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규범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담은 『욕망해도 괜찮아』 등, 전공 분야를 넘나들며 우리 사회에 던지는 굵직하고 건강한 메시지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김두식 교수(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가 오랜 자료조사와 연구 끝에 『법률가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을 펴냈다. 이번 책은 우리 법조계의 초창기 풍경임에도 주목받지 못했던 해방 전후 법조계의 형성 과정을 치밀하게 복원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진 해방공간의 법조인들을 소환해 빈 구멍을 채웠다.
김두식표 글쓰기의 특장은 전작에서도 이미 증명된바, 이 책도 복잡한 역사적 흐름과 수많은 인물이 등장함에도 특유의 탄탄한 글솜씨를 바탕으로 흡사 대하 역사 소설에 버금가는 흡인력있는 전개와 자상하고 친절한 해설, 균형잡힌 시각이 빛을 발한다. 역사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소재와 인물이 무수하게 등장하지만 모두에게 고른 각광을 비추며 공과功過를 일방적으로 단언하고 평가하지 않는 저자의 배려와 숙고가 행간에 많은 여운을 남기며 독자들의 독서 경험을 풍성하게 해줄 것이다.
당시 법조계의 풍경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사법부의 구조와 현상 등을 상당 부분 설명해주는 길이 될 뿐 아니라, 친일문제를 비롯해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우리 사회의 전반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불멸의 신성가족’ 그 뿌리는 누구인가
『법률가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은 ‘불멸의 신성가족’, 즉 우리 법조계가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그 뿌리를 집요하게 탐구한 치열한 시도다. 해방전후부터 한국전쟁까지 우리나라 법조 직역의 형성과정을 ‘사람’ 이야기로 풀어가는 이 책은 총 7부로 구성되어 있고 초창기 대한민국 법률가들을 네가지 유형으로 묶어 설명한다. 제1법률가군은 해방후 한국 법조계의 최상층부를 형성한 사람들로, 일본 고등시험 사법과를 합격하고 일제시대 판검사를 지낸 이들이다. 제2법률가군은 조선변호사시험 출신, 제3법률가군은 일제시대 서기 겸 통역생 출신으로 해방직후 판검사에 임용된 사람들이다. 해방직후 잠시 존속했던 사법요원양성소 출신 등 해방후 법률가자격을 갖춘 이들은 제4법률가군으로 분류된다. 1부부터 3부까지는 그런 법률가군들의 기원과 태생에 대해 설명한다.
‘1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은 1937년 합격자들을 중심으로 일본 고등시험 사법과 제도를 탐구했다. 바로 제1법률가군(群) 이야기다. 일제의 법률가 선발 시스템은 판검사 임용시험과 변호사시험으로 분리 시행되다 1923년 고등시험 사법과로 통합되었다. 고등시험은 예비시험, 필기시험, 구술시험의 3단계로 진행되었으며, 학력 제한이 존재했다. 예비시험에 응시라도 하려면 중학교를 졸업하거나 그와 동등한 학력을 갖추어야 했고, 예비시험을 면제받으려면 고등학교, 대학예과 또는 문부대신이 이와 동등 이상이라고 인정하는 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경성제대와 전문학교 중에서는 관립 경성법전 졸업자만이 고등시험 시행 초창기부터 예비시험을 면제받았고, 보성전문 졸업생은 1929년, 연희전문 졸업생은 1932년에 이르러서야 예비시험을 면제받았다. 진입장벽이 그만큼 높았다. 예비시험은 논문과 외국어 두과목으로 실시되었고, 한번만 합격하면 이후에 다시 응시할 필요가 없었다.
제1법률가군의 대표적 인물이자 당대 최고의 엘리트 김영재는 안동지역 유수의 독립운동가 가문 출신으로 경성제대 재학시절 급진적 사상의 언저리를 맴돌았으나,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 이후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개인의 영달을 추구했다. 친일 검사로 일하며 누릴 것은 다 누렸다. 해방후 반성의 의미로 좌익진영에 가담했던 ‘성찰가’ 강중인, 조선법학과동맹(법맹)을 결성한 ‘호걸쾌남’ 조평재, 반공판사로 유명했던 ‘외골수’ 양원일, 해방직후 첫번째 ‘사법파동’의 주인공인 오승근, 법조계의 모든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영광을 누린 민복기 등 1937년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의 일제시대 인생행로도 김영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2부 이류에서 일류로 편입된 사람들: 변호사시험 출신들’은 일제시대 ‘이류’ 법률가로 취급받았으나 해방이후 고등시험 사법과 출신과 함께 법조계의 가장 중요한 뼈대를 형성한 조선변호사시험출신들의 삶을 다뤘다. 제2법률가군 이야기다. 일제시대 시행된 조선변호사시험은 이름 그대로 변호사가 되기 위한 시험이었다. 판검사가 될 수 없었던 대신 응시자격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독학자라도 이 시험만 붙으면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공부에 자신이 있는 청년들은 누구나 한번쯤 ‘독학자들의 등용문’ 조선변호사시험을 꿈꾸었다. 이 조선변호사시험 출신 중 대표적인 인물이 허헌이었는데, 판검사를 거치지 않은 순수 변호사의 아버지 격이던 허헌은 해방후 좌익과 중도진영의 지도자로 변신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종합대 총장 등을 지냈다. 그가 왼쪽으로 기울게 된 뿌리를 탐구하는 것은 해방공간 좌익진영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념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주로 허헌의 함경도 인맥, 이종만의 대동콘체른과 맺은 인연, 해방이후 남한지역의 과도한 ‘좌익사냥’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3부 벼락처럼 찾아온 해방, 새로운 기회의 시대’는 해방으로 조선인 법률가들에게 벼락처럼 찾아온 새로운 기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일본인 판검사를 재판에서 배제하고 조선인 법률가로 그 자리를 채웠다. 1945년 10월 11일 해방후 첫번째 판검사 임용이 실행되었다. 고등시험 사법과와 조선변호사시험 출신들이 이른바 ‘자격자’로서 가장 먼저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미래가 보장되었던 이들의 임용과정에서 친일경력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인맥과 운이었다. 삼팔선 이북지역에서 해방을 맞이한 판검사들은 월남시기에 따라서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했다. 이 과정에서 한민당 출신이 요직을 독점했다.
출신지역과 좌우대립에 따른 내부갈등도 적지 않아 임용을 받고도 출근하지 않는 판검사들이 많았다. 미군정과 법조인력정책 담당자들은 빈자리를 채울 특단의 조치를 마련해야 했다. 일제시대 서기 겸 통역생으로 일하며 일본인 판검사들을 보조했던 사람들이 판검사들로 임용되었다. 바로 제3법률가군이다. 일제시대 서기경력을 바탕으로 해방후 검사에 임용된 오제도와 같은 제3법률가군 출신은 해방 당시를 기준으로 판검사?변호사자격을 갖추지 못했던 ‘미자격자’로 분류된다. 이들은 해방공간에서 수적으로는 판검사의 다수를 점했으면서도 실제로는 한번도 주류가 되지 못했다. 기득권을 인정받은 ‘자격자’들과 달리 제3법률가군이 권력의 상층부에 진입하려면 어떤 형태로든 자기 실력을 보여줘야 했다. 미자격자는 판사보다 검사들 중에 더 많았다.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이들의 강박은 해방공간의 무리한 검찰 사건조작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또한 해방후 군법무관으로 법조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자격자인지가 분명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예 어떤 종류의 자격시험도 거치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군법무관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대거 전역하여 변호사를 개업했다. 대한변호사협회나 서울변호사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0년을 기준으로 할 때 서울지역 변호사는 300여명에 불과했다. 100명에 육박하는 군법무관 출신들은 결코 작은 세력이 아니었다. 1960년 10월 고등시험 사법과, 조선변호사시험 등 이른바 ‘정통 고시’ 출신들은 “서울변호사회가 군법무관 출신 변호사들에게 좌우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변호사들의 질적 저하가 초래되고 있다”면서 새로운 변호사회인 서울제일변호사회를 창립했다. 1980년 통합되어 서울통합변호사회를 결성할 때까지 20년 동안 서울지역의 변호사회는 두개로 나뉘어 존재했다. 서울통합변호사회는 1983년 서울지방변호사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그들은 권력을 어떻게 휘둘렀나
3부까지에 걸쳐 설명한 우리 초창기 법조계의 풍경을 바탕으로 4부와 5부에서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어떤 권력을 휘두르며 활동했는지를 대표적인 사건을 통해 살펴본다. 이어서 6부는 한국전쟁이 우리 법조계에 끼친 영향을, 7부에서는 해방 당일 시험에 응시했던 기록만으로 법조계에 몸담게 되었고 이후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던 ‘이법회’의 행적을 추적한다.
‘4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해방공간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을 일거에 불법화시킨 1946년 5월의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이야기한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단일사건이 아니었다. 조선정판사 사건에 앞서 우리 법조계는 ‘김계조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김용무 대법원장, 이인 대법관 등 한민당 세력이 장악한 법원과 검찰은 첫 판검사 임용 때부터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받았다. 오승근 판사, 백석황 검사로 대표되는 좌익 또는 중도성향의 법률가들은 ‘김계조 사건’을 계기로 이 상황을 바로잡고자 했다.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재경지역에 근무하던 판검사 80퍼센트가 김용무 대법원장 퇴진운동에 동조했다. 우리 법조역사상 첫번째 사법파동이었다. 일시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던 이 시도는 역풍을 불러왔다. 그 역풍으로 오승근, 백석황 등의 저항세력은 퇴출되었고 한민당의 김병로가 사법부장으로 전면에 등장해 법원과 검찰을 장악했다.
바로 이 시기에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졌다. 조작 여부가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이 사건에는 조재천과 김홍섭이 검사로, 조평재?윤학기?강중인?김용암?한영욱?이경용?강혁선?오승근?백석황이 변호사로 관여했다. 재판장을 맡은 양원일은 편파적인 공판진행으로 물의를 빚었다. 재판장 개인의 외골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재판이었다. 이 책은 당시 변호인들이 제출한 상고이유서를 중심으로 사건 전체가 조작 또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다. 사건수사가 진행된 본정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의 습성화된 고문과 조작행태도 이런 추정을 유력하게 뒷받침한다.
‘5부 ‘법조프락치’ 사건’은 1948년 정부수립을 전후해 법조계에서 벌어진 각종 좌익 관련 사건을 다룬다. 1947년 12월 ‘사법기관 내의 남로당 프락치’로 구속된 남상문?홍승기?서범석 등 이른바 ‘적색 사법관’ 사건,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진압의 한복판에서 군경에 학살된 순천지청 박찬길 검사 사건, 1949년 7월의 서울지방검찰청 김영재 차장검사 사건, 그해 12월의 2차 ‘법조프락치’ 사건, 1950년 3월의 이홍규 검사 사건 등은 좌익을 박멸해야 한다는 극우세력의 편집증적 집착과 권력욕구가 만들어낸 ‘관제 빨갱이’의 대향연이었다. 이 책은 남쪽 출신과 북쪽 출신의 지역적 갈등도 이 사건들의 조작과 과장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추정한다. 이런 추정에 힘을 보태는 것은 흥미롭게도 이회창 전 총리의 아버지인 이홍규 검사다.
1차 ‘법조프락치’ 사건 공판이 거의 마무리되던 1949년 12월부터는 젊은 세대 법률가들에게 불똥이 튀기 시작했는데 사법요원양성소 출신들이 주된 목표였고, 서기 출신 중에서는 비교적 강직하다는 이홍규 검사가 연루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6부 한국전쟁이라는 쓰나미’는 한국전쟁이 법조계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병로 대법원장, 김갑수 내무부차관 같은 극소수의 고위직 법조인들은 비교적 빨리 피난길에 올랐다. 유병진 판사, 오제도?선우종원 검사 같은 월남민 출신들도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하고 한강을 넘었다. 피난 중에 김갑수, 오제도는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과 그 ‘처리요령’을 만들어 부역자 처벌을 준비했다. 서울환도 후에 유병진은 그 명령에 의해 양산되는 억울한 피해자를 막기 위해 피땀을 쏟았다. 같은 피난경험이었지만 결과는 그만큼 달랐다. 서울에 숨어 지낸 김홍섭 판사, 홍진기 법무국장, 민복기 대통령법률비서관, 정희택 검사, 방순원 변호사 등은 각자도생으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김용무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수많은 법조인들은 북한에 납북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전남지역에서는 이덕우, 염세열 변호사가 후퇴하는 군경에 학살되었다. 오제도, 선우종원 등이 만든 국민보도연맹의 광범위한 희생자 중의 하나였다. 이홍규, 이정남 검사처럼 ‘관제 빨갱이’로 몰렸던 사람들은 막상 인민군에게 과거 남로당활동 내용을 제출하려 해도 적어낼 것이 전혀 없는 황당한 처지에 놓였다. 김영재 차장검사나 홍승기 변호사처럼 인민군치하에서 법맹이나 자치위원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에 놓였다. 적에게 협력한 사실이 있으면 남쪽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 뻔히 예상되었다. 점령기간 중에 북한체제에 환멸을 느꼈다 하더라도 다를 건 없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어디까지가 납북이고 어디부터가 월북인지를 구별하기 어려운 다양한 행방불명자가 줄을 이었다. 그렇게 사라진 이들은 다시 법조계로 돌아오지 못했다. 겨우 살아 돌아온 몇몇은 더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다. 이로써 남한의 법조계는 좌익과 중도라는 한쪽 날개를 완전히 상실한 근본적인 한계를 떠안게 되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한국전쟁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7부 1980년대까지 이어지는 ‘이법회’의 문제’는 이른바 ‘이법회(以法會)’ 또는 ‘의법회(懿法會)’ 문제를 발굴함으로써 초창기 법조계 5년의 역사가 오늘에 끼친 영향을 설명한다. 1945년 해방당일에 시행 중이었던 조선변호사시험의 응시자들은 일본의 항복으로 시험을 끝마치지 못했다. 4일간 치러질 예정이었던 시험이 2일차 정오의 항복방송과 함께 중단되고 일본인 시험관들이 사라져버린 탓이다. 응시자들은 궁지에 몰린 일본인 시험위원회를 압박해 합격증을 받아냈다. 응시사실만 있으면 모두 합격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결성된 ‘이법회’ 구성원들은 해방후 각종 시험에서 필기시험을 면제받아 초창기 법조계의 가장 중요한 인력풀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법회 구성원들이 그 경력을 감췄기 때문에 전체적인 규모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누구나 그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조직이었다.
행정부와 입법부는 ‘선출된 권력’인 반면, 사법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어서 그 정당성이 늘 문제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 대한 시민 일반의 전통적인 존중이 사법부뿐만 아니라 법조계 전체의 정당성 확보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최소한 법조인들은 그렇게 믿어왔다. 그런데 우리 법조계의 출발점에 존재한 이법회라는 큰 구멍은 그런 믿음을 뿌리부터 흔들기에 충분하다. ‘전두환의 대법원장’이었던 유태흥은 공식적으로는 2회 변호사시험 출신이지만, 실제로는 이법회 출신으로 필기시험을 면제받고 면접만으로 변호사자격을 취득했다. 이법회 출신으로 2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또다른 법률가 홍남순의 경우는 같은 경험을 지녔다 해도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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