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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를 찾아가는 섬여행] 스크랩 [전남] 진도의 추억(하)
박충식 추천 0 조회 46 08.12.11 21: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진도의 추억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다음날

일출은 시간관계상 보지 못하고 진도 본섬으로 가서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첫 배를 타기 위해 아침부터 서두른다.

 

제시간에 나타난 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하여 하조도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다시 버스로 조금 이동하여 하조도 어류포항에 도착하여 짧은 시간 정들었던 버스와 작별을 나누고 진도 본섬으로 가기위해 배에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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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조도 창유리(어류포항)를 떠나며

 

 

역시 30분 걸려 팽목항에 도착하니 서울에서 우리 팀을 태우고 온 강서관광버스가 기다리고 있어 버스기사와 반갑게 재회의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승차하여 동석산 산행을 위해 이동한다.

 

앞전 진도여행 때 처음 접한 동석산의 암골미에 반하여 이번엔 산악회 식구들과 다시 찾았다.

 

 

동석산(童石山)

진도 섬, 서남쪽 끝에 바다에서 불꽃처럼 일어나 바다에서 유리 된 죄로 다도해를 그리워하는 산이 있다. 그 산은 밤이면 밤마다 가슴에 사무치는 한을 하늘을 우러러 한 올 한 올 풀어 헤친다.

 

진도의 산들은 뭍의 산들과 달리 야트막하고 자잘한 높이를 자랑하는, 마치 동네 뒷산 같은 친근한 느낌을 주는 산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동석산(童石山 240m)은 2백m급 산에 불과하지만 여느 산과 달리 암벽미와 암릉미가 탁월한 산이다.

 

동석산은 진도군 지산면 심동리에 위치한 산으로 서남쪽의 조도에서 보면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또한 자체가 거대한 성곽을 연상케하는 바위덩어리로 어우러진 산으로 약 1.5km 남북으로 이어져 있고, 암릉 중간마다 큰 절벽을 형성하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동틀 무렵 산중턱에서 도복을 입고 지팡이를 쥔 노승이 불공을 드리다가 사라진다는 전설이 있으며, 산 아래에는 천종사라는 절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암릉 앞부리 남쪽에는 심동저수지, 동쪽에는 봉암저수지가 있어 조망하는 맛도 좋거니와, 서해와 남해의 섬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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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산 1/25,000 지형도

 

 

비 예보가 있었지만 비는 오지 않고 구름 만 낀 산행하기 좋은 날씨이다.

 

산행들머리인 천종사에 도착한다.

 

동석산은 그동안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산이었다.

높이도 낮은데다가 멀리 외딴섬 진도에 있다 보니 더욱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처음 진도를 접했을 때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동석산까지는 각종 시설물을 설치해놔서 편안하게 산행을 할 수가 있었다. 동석산 이후로는 아직도 예전 그대로 그 모습이었다.

 

천종사를 우측에 두고 좌측으론 대파 밭이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 길로 얼마간 진행을 하다 보면 경고판이 세워져 있는 곳이 나온다. 이곳이 들머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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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산 입구에서 바라본 동석산의 모습(좌)과 천종사 주차장에서 단체사진(우)을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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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산 산행

 

 

 

밧줄이 걸려있던 곳에 잘 만들어진 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편안하게 계단으로 올라가니 새롭게 이정표도 세워져 있고 쇠 난간도 세워져 있다. 아무리 시설물이 세워져 있어도 멋진 모습은 변하지 않아 황홀한 바위의 전시장을 감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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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산의 모습

 

 

동석산까지는 시설물이 곳곳에 세워져 있어서 편안하게 진행할 수가 있었는데 이정표(←큰애기봉 3.0km, 동석산정상 0.2km→)를 지나 안부로 내려와 다시 암릉길을 올라가는데 이곳부터는 시설물이 전혀 세워져 있지가 않다. 이제부턴 네발로 기어가야 한다. 산행(두발)이 아닌 등반(네발)인 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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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산의 황홀한 암릉

 

 

암봉에 올라 주변을 조망하는 맛이란?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을만큼 가슴 벅찬 조망에 그저 넋을 놓고 주변을 바라볼 뿐이다.

감히 설악산의 용아장성이니 공룡능선보다도 더 멋지다 할 것이다. 다만 규모가 작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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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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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암릉

 

 

이정표(←큰애기봉 2.5km, 동석산정상 0.5km→)를 지나면 암릉길이 사면으로 가야하는 구간이 나오는데 주의를 요하는 구간인데 여성회원님들이 이외로 무난하게 진행하여 안심을 한다.

 

다시 암봉 위에 선다. 멋진 봉암저수지도 바라보며 잠시 휴식을 한다.

 

이제 급경사 안부로 떨어져 암릉이 사면길로 진행을 하게 되는데 동석산 산행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이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여성회원님들께서 매우 조심스럽게 잘 진행을 한다.

 

몇 번의 암봉을 오르내리고 마지막 암봉에서 마지막 바위 전시장 조망을 즐기다 내려가면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숲 능선이 잠시 이어지다가 전망이 터지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선 바다가 조망된다. 이후 바다를 잠시 바라보다 조금 더 진행을 하면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에서 내려가면 사거리 안부가 나오는데 이곳이 가학재이다. 이정표(←큰애기봉 1.2km, 동석산정상 2.0km→, ↓가학마을 0.9km, ↑가치마을 1.0km)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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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산 산행모습

 

 

 

가치마을로 하산한다.

 

처음엔 약간 경사가 있지만 이내 완만하게 조금 내려가니 대파밭이 나온다.

 

대파밭지대를 지나니 400년 된 동백나무(수고: 12m, 흉고직경: 3.1m) 보호수가 나오고, 조금 더 진행하면 2차로 포장도로가 나오면서 산행을 마친다.

 

동석산 산행을 정리하면,

-전체적인 평가는 우선 매우 만족스런 산이고,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바위덩어리라고 표현하면 맞을 것 같다.

-그리해서 산행은 위험한 구간이 많다. 동석산까지는 안전시설이 되어 있으나 그 후로는 안전시설이 거의 없어서 많은 구간을 네발로 기어서 다녀야 한다.

-바위의 종류를 알 수 없으나 뾰죽뾰죽하고 돌출이 많아 그것을 밟거나 잡고서 산행을 할 수가 있다.

-자일을 가져가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못 갈 산은 아니다. 고소공포증이 없고 조심(몇 군데 우회구간이 없는 구간이 있지만)만하면 통과 할 수 있다. 다만 비가 올 경우와 겨울철에는 (안전장비와 관계없이) 가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다.

 

 

동석산 산행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려고 미리 연락한 진도읍내의 진도식당으로 가기위해 이동을 하여 진도읍내로 들어선다. 때 마침 진도읍 장날이다.

 

점심을 먹고, 간재미회무침도 별식으로 조금 먹고는 진도장날 구경을 하는데 파장시간이라 장 분위기가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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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림산방 모습

 

 

 

다시 진도식당 근처에 주차하고 있던 강서관광버스로 가서 다음 행선지인 운림산방으로 향한다.

 

 

운림산방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인 소치(小癡) 허유(許維·1809-1893)선생이 말년에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로서 일명 ‘운림각’이라고도 한다. 소치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8세 때 대흥사 두륜산방의 초의선사 밑에서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3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게 된다.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게 되었다.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흥선대원군을 비롯해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첨찰산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이후 이곳은 소치(小痴)~미산(米山)~남농(南農)~임전(林田) 등 4대에 걸쳐 이어온 한국 남화의 본거지가 되었다. 첨찰산 기슭에 자리 잡은 운림산방은 연못과 어우러진 정원이 조화를 이룬다. 운림산방 안에는 소치의 사당과 소치·미산·남농의 3대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소치기념관, 진도의 고유한 문화적 배경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진도역사관등이 조성되어 있다. 관람료는 어른 2,000원, 청소년 1,000원, 초등학생 800원. 관람시간은 09:00~18:00. 주차료는 없다.

전화 061-543-0088

소치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음에도 비교적 늦은 나이인 28세에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대흥사 두륜산방의 초의(草衣)선사 밑에서 공제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혔고, 33세가 되던 해 소치의 천재성을 알아챈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아래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게 된다. 천재성에다 강한 의지까지 지녔던 소치는 이후 급성장을 거듭해 결국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에 능한 남화의 대가가 된다. 군왕인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흥선대원군,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 당시 내로라하는 권문세가들과도 어울렸다. 소치라는 호는 스승인 추사가 붙여줬는데, 이는 중국 원나라 4대 화가인 대치(大痴) 황공망과 비교할 만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추사의 남화 분위기를 잘 살렸다는 평을 받는 소치는 죽수계정도, 선면산수도, 노송도 같은 좋은 작품을 남겼다. 또 추사김정희의 반신상인 ‘완당선생 초상’ 같은 초상화도 그렸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이듬해 고향 진도로 돌아와 운림산방을 지었다. 이곳에서 소치는 85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제자를 기르며 불후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후 운림산방은 한국 남화의 본거지로서 소치 허유~미산 허형(米山 許瀅)~남농 허건(南農 許健)·임인 허림(林人 許林)~임전 허문(林田 許文)의 직계 4대에 걸쳐 5인의 화가를 배출하면서 세계에서 드물게 큰 화맥을 이어가고 있다. 또 소치의 5세에 속하는 현손 중에서 붓을 잡은 화가가 6명이나 된다 하니 가히 세계적인 화가 집안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진도주민들은 우스갯소리로 「진도의 허씨 집안은 빗자루만 잡아도 명필이 나온다」고 말한다.

흔히 어느 고을의 장점을 말할 때 「어디 가서 무엇을 자랑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주로 돈이나 주먹, 인물 등에 관련된 자랑인데, 진도에선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려 세 가지나 된다. 첫째 글씨 자랑이요, 둘째 그림 자랑이고, 셋째는 노래 자랑이다.

우선 다른 고을의 자랑거리와 비교해 볼 때 품격이 다르거니와, 이 세 가지만으로도 진도를 우리나라 최고의 예향으로 꼽는 데 이의를 달 수 없다. 이외에도 진도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주량이다. 특히 홍주를 앞에 놓고 주량을 자랑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진도 사람들은 홍주를 받아들이는 배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진도에 들어선 날이 금요일이라면 ‘금요상설무대’가 펼쳐지는 남도국립국악원으로, 토요일이라면 ‘토요민속여행’으로 흥겨운 진도향토문화회관으로 발길을 향하는게 좋다. 물론 홍주 몇 병 사들고 우리나라 최초의 노래방이 있는 지산면 소포리 마을회관 노인들을 찾는 것도 괜찮다. 아니면 학교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초등학생 손목이라도 붙잡고 미소로 노래를 청하든지. 어쨌거나 어렵사리 머나먼 진도까지 내려와서 진도의 세 번째 자랑거리인 노랫가락 한 대목 듣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 진도는 뭐니 뭐니 해도 민요가 넘실대는 고을이다. 진도에선 낯선 남자가 길을 가면 밭일을 하던 아낙들은 멱구리(씨앗망태)로 길을 막고 노래를 시키곤 했다. 그가 노래를 한 가락 하면 앞길을 열어 주지만 만일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 노래로 놀려댔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진도 사람들은 원수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을 때도 먼저 시를 짓고, 결판이 안나면 노래를 불렀고, 그것마저 우열을 가리지 못하면 그제야 힘으로 대결했다고 한다. 참 그럴 듯한 이야기다. 증거는 많다. 노래와 춤을 곁들인 수많은 중요무형문화재가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의 전설이 서린 강강술래(제8호), 진도 농부들이 농사일을 할 때 부르는 남도들노래(제51호), 망자가 편안히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씻김굿(제72호),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다시래기(제81호)는 국가에서 지정한 것이고, 도에서 지정한 진도북놀이, 진도만가,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진도아리랑 등을 합하면 실로 무궁무진하다. 노래 부분만을 보더라도 가창 부문의 인간문화재 23명 중에서 진도 출신이 무려 6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진도에서 이렇듯 다양하고 많은 판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진도의 넉넉한 물산 덕이다. 진도는 섬이면서도 농사 지을 땅이 많았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어업보다는 농업으로 사는 주민들이 훨씬 많았고, 게다가 토지도 비옥해 일 년 농사를 지으면 삼 년을 먹고살 만큼 소출이 많았다. 고려 때의 옥주(沃州)라는 지명도 여기서 비롯했다. 이런 넉넉함에서 나온 여유가 문화적 욕구로 이어졌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곳간에서 인심도 나고 노랫가락도 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도들노래 등 대체적으로 노랫가락은 향토색이 짙고 매우 흥겹다.

그런데, 이런 문화의 향유에서 진도 아낙들의 역할은 참으로 컸다. 제주도 해녀에서 보듯 원래 섬 아낙의 생활력은 대단한데, 농삿일이 많았던 진도는 김매기는 물론 산에서 땔감을마련하는 것도 여자의 몫이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여자도 상여를 메겠는가. 이런 환경에서 진도 여인들은 잔칫집이나 굿판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위안을 삼았다.

또한 진도는 씻김굿, 다시래기, 진도만가 등 죽음과 관계된 민속도 많다. 무당이 하는 제사인 씻김굿은 죽은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고 편안히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굿이다. 원한을 씻어준다 해서 씻김굿이라 부른다. 진도씻김굿의 음악은 무속 선율인 육자배기목(시나위목)을 중심으로 피리·대금·해금·장고·징으로 이루어진 삼현육각(三絃六角) 반주로 진행되는데, 요즘엔 가야금·아쟁·북 등을 쓰기도 하고, 때로 정주나 바라를 보조악기로 쓰는 수도 있다. 무당은 흰색 옷에 다홍색 띠를 걸치는 정도의 소박한 옷차림으로 불교적 성격이 짙은 승복과 비슷하며, 죽은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 지전(紙錢)춤을 춘다. 노래는 홀로 부르는 통절(通節) 형식과 선소리를 메기고 뒷소리로 받는 장절(章節)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선율의 부침새와 여러 가지 세련된 목구성을 구사해 매우 흥겹고 아름답다. 진도씻김굿은 죽은 사람뿐 아니라 산 사람의 무사함을 빌고 불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굿으로, 춤이나 음악에서 예술적요소가 매우 뛰어나다. 원시종교인 샤머니즘과도 통하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초연한 자세를 예술적 세계로 승화시킨다는 평을 듣고 있는 진도씻김굿은 1979년 세계민속음악제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또 진도에서는 초상, 특히 망자가 수명을 다 누리고 세상을 떠난 경우 동네 상여꾼들이 전문 예능인들을 불러 함께 밤을 지샌다. 진도 다시래기다. 다시래기는 한자로 다시락(多侍樂), 즉 같이 즐긴다, 또는 우리말로 다시 낳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래기 놀이 맨 끝에 사람 죽은 집에서 “갓난애나 둘려 가지고 가자”는 대사처럼 죽고 낳고 하는 세상살이를 이야기하는 굿이다.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 보이는 벽화와 고구려·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를 통해 보듯 오랜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장례에서 가무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연극놀이는 언제부턴가 모든 지역에서 사라졌고 진도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 진도를 원형의 섬으로 부르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을 때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가면서 부르는 상여소리를 만가(輓歌)라 하는데, 진도만가는 여느 지방과는 달리 여자도 상두꾼으로 참여하고, 만가의 반주로 사물과 피리가 등장하는 게 다르다. 이외에도 가면을 쓴 방자쇠 두 사람이 조랑말을 타고 칼춤을 추면서 잡신을 쫓는가 하면 횃불이 등장하고 상주들의 상복 또한 특이하다.

슬픈 곡소리가 넘쳐나야 할 상가에 다시래기굿으로 웃음이 터지고, 슬퍼해야 할 장송곡인 상여소리에 풍악이 울리니 진도 주민들의 의식세계는 어찌 된 것일까. 진도의 민속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진도 사람들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시련 없이 피어나는 꽃이 없듯, 진도가 간직하고 있는 이런 원형의 아름다움은 역사적인 상처에서 유래했다. 진도의 비극은 후삼국 무렵부터 시작됐다. 후삼국시대 왕건에게 끝까지 저항한 후백제 군사가 여기 진도에서 격파되어 천민 거주지인 향(鄕)이 되었고, 고려 말기엔 삼별초군이 들어왔으며, 정유재란 때엔 조선군과 일본 수군이 전투를 벌였다. 이럴 때마다 진도엔 피바람이 몰아쳤는데, 삼별초의 항몽전 여파로 당시 여몽 연합군은 전투에서 승리한 뒤 아녀자를 제외한 모든 장정을 몰살해 피가 내를 이루었다. 살아 남은자들은 대부분 몽골에 노예로 팔려갔는데, 이들은 20여년만 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여말선초엔 왜구들 때문에 80여 년간 섬을 비운 적도 있을 정도로 환란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도 왜군은 전략상 요충지인 진도에 상륙해 약탈, 방화, 살인등으로 섬을 초토화했다. 이렇듯 각종 전란으로 남정네 씨가 마르면서 진도 아낙들은 남성의 일인 상여를 메고 지아비를 장사 지내는 아픔을 겪었다. 이러한 한이 씻김굿 등으로 승화됐다. 그래서 진도의 노래 속에는 한과 흥이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있다.

많은 굿판에서 뒤풀이 민요로 불리는 진도아리랑을 보자. 정선아리랑이 깊은 산중에서 신산한 삶을 읊은 한의 노래라면, 진도아리랑은 널따란 들녘에서 여유롭게 부르는 흥의 노래다. ‘응 응 응’ 하는 후렴의 떨림소리를 바다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소리로 보기도 한다. 또한 진도아리랑은 소리와 춤의 동시성을 지니고 있다. 장단은 세마치 장단이며 선율은 시나위형으로 중머리 장단에 불린다. 특히 진도아리랑은 가사보다는 그 여음의 묘미가 특색이다. 계통 없이 불리던 진도아리랑을 체계적으로 악보로 정리한 사람은 임회면 삼막리 출신으로 우리나라 대금산조의 명인으로 꼽히는 박종기(1879-1939) 선생이다.

한편, 진도는 유배의 섬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부터 조선까지 무려 180여 명이 진도에 유배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유배당한 사대부들은 대부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관직에 오르기 때문에 유배지 인근에서 일정한 세력을 유지했다. 오죽하면 당시 유배자들 때문에 진도 주민들이 먹을 게 없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하지만 진도 주민들의 핏속에 유전되는 넉넉함과 예술적인 기질은 유배자들에게서 고급 문화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장점을 흡수해서 진도만의 독특함으로서 발전시켰다.

진도아리랑에 등장하는 「문경새재는 왠 고갠가」 하는 대목도 여기서 유배생활을 했던 영남출신 사대부의 흔적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진도 출신의 한 음악선생은 자신의 논문에서 진도아리랑의 첫마디가 「문경새재」가 아닌 「문전세재」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문 앞의 세 고개」는 태어나는 첫 번째 고개, 인생살이 두 번째 고개, 북망산천으로 가는 세 번째 고개를 말한다는 것이다. 진도에선 60세 이상의 노인들이 모두 「문전세재」로 발음하고, 진도아리랑의 내용이 인생의 희로애락을 노래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그럴 듯한 의견이다.

늘상 아리랑 울려 퍼지는 진도의 겨울은 푸르다. 전국 시장점유율이 무려 20%에 육박한다는 겨울대파와 월동배추가 펼쳐진 덕이다. 거기에 드문드문 보리밭이 있으니 푸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터. 그래서 강원도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한겨울에도 진도 주민들은 대파와 배추를 수확하느라 구슬땀을 흘린다.

그렇다. 누군가의 말처럼 저 푸른 들녘이 있어 우리의 겨울밥상은 그렇게 싱그러웠던 것이다. 허나 어디 육신의 밥상뿐이겠는가. 진도의 푸른 겨울날, 너른 들판을 터벅터벅 반나절만 걷다보면 잊고 있던 풍류가 살아날 터니, 진도는 타향이 아니고 바로 잊고 있던 우리의 본향인 것을-.[월간 산 발췌]

 

운림산방 주차장에 도착하고는 운림산방 안으로 들어가니 타 산악회에서 단체로 구경와서 많은 사람들로 북적된다. 덕분에 많은 인간문화재 출연의 국악공연도 공짜(?)로 구경하는 행운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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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 주간(좌)과 야간(우)의 모습

 

 

 

이로써 진도여행일정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진도대교 하나 남았다.

 

차량으로 이동하여 녹진전망대 위로 올라가서 진도대교를 마지막으로 구경하고 귀경길에 올랐는데 웬일인지 고속국도(서해안)가 소통이 원활하여 서울에 일찍 도착했다.

 

이런저런 사유로 진도여행을 다녀온지 꽤 시간이 흐른 후에 후기가 완성되었다.

다시 가보고 싶은 진도에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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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관광안내도

 

 

 

[진도군]

 

위 치 : 전남 진도군 진도읍

 

개 관 : 전라남도 서남단 해남반도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동남쪽은 완도군, 동북쪽은 명량해협을 건너 해남군, 서쪽은 서해, 남쪽은 제주해협, 서북쪽은 신안군의 여러 섬들과 접하고 있다. 전체면적은 430.72㎢이며 총인구가 37,329명(2004년)에 이르고 군청소재지는 진도읍 성내리이다.

 

자연환경 : 소백산맥의 지맥이 남서로 뻗어 해남반도를 이루고, 바다를 건너 이군에 이른다.

진도, 상조도, 하조도, 가사도 등의 섬들은 지질 시대에는 모두 육지에 연결되었던 섬이며, 후빙기의 해수면 상승의 결과 여러 개의 섬으로 분리된 것이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첨찰산, 여귀산, 덕신산, 지력산, 백야산, 돈대봉 등이 있고, 이들 산지사이에 좁은 계곡평야와 잔구가 나타난다. 하천으로는 인지천, 석교천, 진도천, 의신천 등이 있다. 기후는 온화한 편이지만 북서쪽으로 개방되어 겨울철에 계절풍의 영향을 직접 받기 때문에 인접해 있는 완도군보다는 다소 추운 편이다.

 

 

역 사 :

 

[고대] 백제시대에는 인진도군이라 하여 영현으로 도산현과 매구리현을 거느렸다. 삼국통일 이후, 인진도군을 진도현으로 고쳐 무안군의 영현으로 하였으며, 도산현은 뇌산군으로 승격·독립되고, 매구리현은 첨탐현으로 고쳐져 뇌산군에 속하였다.

 

[고려] 940년(태조 23) 뇌산군을 폐지하여 이를 가흥현으로 하고, 첨탐현은 임회현, 진도현은 외이현으로 하여 이들 3현을 속현으로 두는 진도군을 독립시키고, 고성에 치소를 두었다. 1018년(현종 9)에 읍성을 고성에서 용장성으로 옮겼다.

 

[조선] 1409년(태종 9)에 해남현과 합하여 해진군으로 하였으며 1437년(세종 19)에 해남과 분리하여 진도군으로 복귀하였다.

 

[근대] 1895년(고종 32)에 진도군이 되었으며, 1906년에 명산면을 영암군에, 삼촌면을 해남군에 이속시켰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안창, 가좌, 도초면을 무안군에 이속시켰다. 1938년에 진돗개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대] 1979년에 진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 조도면 만재도리와 가사도리의 일부가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1984년에 진도대교가 가설되어 육지와 연결되었다.

 

 

문 화 :

[문화제] 진도 신비의 바닷길 영등축제가 해마다 펼쳐진다. 행사 기간 중에는 바다열리는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데, 고군면 금계리 회동마을 앞에 있는 사당에서 오후 1시 경부터 '뽕할머니'를 신주로 모셔 놓고 거행한다. 이 제와 함께 진도 전래의 씻김굿, 다시래기, 남도들노래, 강강술래, 북춤 등 특유의 행사가 이루어진다. 이 행사는 진도 군민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와 외국에서 모여든 관광객들과 함께 어울려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 그 특색이다.

한편, 진도평화제는 명량해전이 일어났던 음력 9월 16일에 명량해협(울돌목) 주변에서 열리는 행사로 오랜 옛날부터 전략의 중요성 때문에 왕건과 견훤의 최후 결전, 삼별초 진도정부의 공방전, 정유재란시 명량해전 등으로 바닷속에서 숨져간 전사들의 충혼을 달래고 이들의 넋을 씻기고 천도시켜서 인간이 전쟁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 비극을 없애고 인류의 평화를 추구코자 하는 행사다. 행사 기간 중에는 진도 북춤, 살풀이 춤, 씻김굿, 강강술래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시연된다.

 

특 산 물 : 진도개 - 천연기념물 제53호, 세계명견 제334호

구기자 - 중국 진시황에게 바쳤다는 불로장생초

검정약쌀 - 향긋한 향이 나고 식욕이 좋아짐

진도홍주 - 전통술로 '지초'라는 한약재를 사용해서 숙취가 없음

돌미역 - 타지역에 비해 맛이 뛰어나 궁중의 진상품으로 쓰였음.

돌김 - 청정해역에서 나는 진도돌김은 영양가가 풍부하고 맛이 좋음

 

교 통 : 주로 해상교통에 의존한다. 벽파진을 통해 목포와의 정기여객선이 다니며, 목포-완도, 목포-제주 항로의 기항지로서 제주-완도와 연결되고 이밖에도 목포-조도 항로에 의해 군내의 여러 섬과 연결된다. 도로는 진도읍을 중심으로 진도 본도의 주요 지역과 통하며 선박으로 해남군과도 연결된다.

진도대교는 1981년에 기공하여 1984년에 완공된 연륙교로서 군내면 녹진리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사이에 건설되어 있으며 길이 484m이다.

 

관 광 : - 명랑대첩지인 울돌목위에 놓여진 진도대교

-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진도 신비의 바닷길

- 다도해의 비경 관매도

- 삼별초의 배중손 장군이 최후를 마친 남도석성

- 남화의 본거지 운림산방

- 불멸의 충혼이 타오르는 용장산성

- 진도의 금강이라 부르는 금골기암

 

정보제공자 : 진도군청 문화관광과 (061-540-3236)

작성기준일 2006년 09월 25일* 현지사정에 따라 정보가 변경될 수 있으므로 필요한 사항을 사전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진돗개·구기자·돌미역의 삼보(三寶)와 노래·서화·홍주를 일컫는 삼락(三樂)의 섬 진도(珍島)다.

 

 

소전미술관

서예가 소전(素田) 손재형(孫在馨·1903-1981)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옛 진도군청 자리에 있던 지하 1층, 지상 2층, 400여 평 규모의 문화예술관 건물을 미술관으로 새롭게 꾸몄다. 이곳에 전시된 작품은 송간조월(松間照月), 사해인민송태평(四海人民頌太平) 등 300여 점으로,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초기작부터 1970년대 작품까지 소전의작품 세계를 빠짐없이 감상할 수 있다.

소전은 광복 후 1949년 국전 심사위원을 지낸 이래 국전 운영위원장, 홍익대 교수, 문화재 보호위원장, 예총 회장, 예술원 부원장 등을 지내며 고대의 서체에 바탕을 둔 ‘소전체’라

는 독특한 서체를 개발해 한국 서예를 예술로 자리매김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한 서예가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의 작품으로는 1961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작품상을 수상한 팔마유풍(八馬遺風),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이순신장군시(詩) 등이 유명하다. 벽파진에 있는 충무공전적비의 글씨도 소전의 작품이다. 입장료 어른 1,5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500원. 관람시간 09:00~18:00, 주차 무료. 매주 월요일휴관.

전화 061-544-3401

 

진돗개

진도의 자랑인 진돗개(천연기념물 제53호, 세계명견 제334호)는 한국 특산의 개 품종이다. 석기시대 사람이 기르던 개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개 중에서 나온 한반도 토종견으로서, 섬이라는 지리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고유의 품종으로 유지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견이다. 기원은 중국 남송(南宋)의 무역선에서 유입되었다는 설과 조선 초기에 진도군 지산면에 설치된 군마 육성 목장을 지키게 하기 위해 몽골에서 들여온 개가 진돗개의 원종이라는 설 등이 있다.

대륙과 격리된 채 비교적 순수한 형질을 그대로 보존해온 진돗개는 여러 우수한 품성을 지녔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기본으로 용맹성과 수렵성이 뛰어난 사냥개다. 또한 귀소본능, 대담성, 결벽성, 경계성, 비유혹성 등의 우수한 품성을 지니고 있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진도에서는 매년 10월 한국 진도개 전국품평회를 개최한다.

진도읍 동외리의 진돗개시험연구소는 진돗개의 우수 혈통을 보전하고 세계적인 명견으로 육성하기 위해 설립된 연구소다. 진돗개의 질병·체형·유전자·인공수정 등 진돗개 연구와 관리 등이 주요 업무로서 훈련장과 사육장, 진료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선 다양한 진돗개 종류를 관람할 수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중엔 진돗개의 묘기와 훈련등을 구경할 수 있으며, 도우미로부터 설명도 들을 수 있다.

주차와 관람은 무료다. 전화 061-540-3389

 

진도 홍주

진도 홍주(紅酒)는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는 진도의 토속명주다. 조선시대엔 지초주(芝草酒)라 하여 최고 진상품으로 꼽혔다. 조선 세조 때 경상도절도사 허종(許琮)의 부인 청주 한씨가 홍주의 양조비법을 후손들에게 전하였다. 그 후 5대 후손 허대(許岱)는 진도로 내려와 부인 경주 이씨가 전수한 양조법으로 홍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비법은 진도의 양천 허씨문중에 대대로 전해져 계승 보전되었다.

전라남도는 1994년 진도군내 홍주 제조자 15명으로 구성된 진도홍주보존회를 단체지정 무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하고 기능자를 허화자씨로 결정했다. 진도 홍주는 1994년 전남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알코올 도수는 40도 이상이다. 현재 진도 내에서는 현대적 시설을 갖춘 홍주 술도가가 5~6군데 있다.

 

국립남도국악원

임회면 상만리 언덕에 2004년 문을 연 국립남도국악원은 600석 규모의 대극장과 1,200석 규모의 야외공연장 등을 갖추고 있다. 국립국악원 가운데 세 번째인 남도국악원의 대극장은 특히 최첨단 음향장비와 무대설비 등 초현대식 시설을 자랑한다.

매주 금요일 펼쳐지는 상설공연에는 전통예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남도민요, 진도다시래기, 진도 북놀이를 비롯해 심청가·흥보가 등의 판소리와 살풀이 등의 경연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공연문의 061-540-4033.

 

진도해양생태관

고군면 회동리 영등축제 현장과 가까운 곳에 세워진 진도해양생태관은 각국의 희귀 조가비와 어류생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으로 홍보관·조가비관·생태관·수족관·기획관 등이 갖춰졌다. 생태관 1층 조가비전시관에는 전세계에서 수집한 조가비 830종 12,525점이 전시되어 있다. 또 1층의 대형 수족관에는 상어 등 바다생물 350마리가 전시되어 있고, 홍보관에는 바닷길이 열리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상영돼 시기를 맞추지 못한 관광객도 신비의 장관을 볼 수 있다.

2층 해양생태전시관에는 철갑상어 등 각종상어와 연안에서 서식하는 생물 등 700여 종이 전시되어 있고, 담수관과 웅덩이생물관 코너도 있다. 9㎡ 넓이의 바닥에 관람객이 올라서면 바다 생물과 진도 지도가 화면으로 나타난다. 3층은 신비의 바닷길이 드러나는 회동 앞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휴게전망대, 그리고 그림과 조각품 상설전시공간을 마련해 200여 명에 이르는 진도 출신 국도전 작가들과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해양생태관에 기증된 전세계 희귀조가비 12,500여 점은 진도출신 허병운씨(78)가 1966년부터 1971년까지 외항선 선장시절 세계 각국을 돌며 수집해 보관해 오던 것을 진도군에 기증한 것이다. 이것을 모태로 생태관 건립이 이뤄졌다. 입장료 어른 1,5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500원. 관람시간 09:00~18:00. 월요일 휴관. 주차 무료. 전화061-542-3404.

 

용장산성

1231년(고종 18)부터 침략해오던 몽골과의 전쟁을 벌이기 위해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그리고 40여 년 동안 삼별초가 중심이 되어 몽골과 전쟁을 벌였으나, 1270년(원종 11)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였다. 몽골에 대한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배중손(裵仲孫)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군은 왕족인 승화 후 온(承化候 溫)을 왕으로 삼은 뒤진도로 내려와 용장산성(龍藏山城)을 쌓고 몽골에 대항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38,741척(尺), 높이 5척이라 하였을 뿐, 그 이상의 상황은 밝혀 놓지 않았다. 현재성의 대부분은 원형이 사라진 상태며, 성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성내엔 용장사지와 행궁터가 있다. 성의 길이는 군내면의 용장리, 세등리, 고군면의 도평리, 벽파리, 오류리를 잇는 산등성을 따라 총 12.75km, 높이는 4m 내외다. 용장산성은 축성 연대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현재 용장산성 행궁터 옆에 자리한 용장사에 안치되어 있는 석불은 광배(光背)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동체(胴體)도 원형이 아닌 시멘트로 발라버려 원래의 모습을 찾을 길 없다. 배중손이 진도로 왔을 때 조성한 불상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대좌석을 만든 솜씨로 고려 초기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배중손장군 사당

배중손(裵仲孫·?-1271) 장군은 가장 유력한 삼별초 지휘관이어서 대몽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수령으로 추대되었다. 1270년(원종 11) 몽골에 다녀온 원종이 출륙환도(出陸還都)를 단행하고 삼별초에 대해 강화도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삼별초가 이를 거부하자 왕은 강제로 해산명령을 내렸다. 이에 삼별초는 왕온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정부를 수립하여 저항을 시작하였다.

배중손 등은 진도로 본거지를 옮겨 성곽을 구축하고 궁전을 짓는 등 장기 항전태세를 굳혔다. 고려군의 지휘관 김방경(金方慶)이 몽골군과 연합하여 공략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1271년 5월 홍다구(洪茶丘)가 몽골의 대군을 이끌고 출동하여 김방경·흔도(欣都)의 연합군과 합세하여 진도를 함락시켰다. 당시 임회 방면으로 패주했던 배중손 장군과 그 부하들은 남도석성에서 최후를 마쳤다 한다. 임회면 굴포리 바닷가엔 배중손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조도군도

진도 서남쪽엔 크고 작은 150개의 섬들이 새떼와 같이 모여 있어 조도군도(鳥島群島)라 한다.

그 중 이마에 등대를 얹은 하조도는 가장 큰 어미새로서 진도에 딸린 섬들 중에서 중심이 된다. 하조도 주변의 서남해는 수많은 섬들이 파도를 막아주어 육지의 호수처럼 보인다. 짙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아기자기한 섬들과 섬 사이를 떠다니는 고깃배들, 그리고 바닷가에 움을 튼 아담한 어촌은 아주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하내 마을 끄트머리 갯바위 벼랑에 서서 ‘새떼’ 사이를 오가는 배들을 안전하게 인도하고 있는 하조도 등대도 제법 운치 있다. 등대까지 해안선을 따라난 오솔길을 걷는 맛이 쏠쏠하다.

진도 팽목항(061-544-5353)에서 조도까지 여객선이 1일 4회(08:00, 10:20, 14:00, 17:00) 운항.

 

관매도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 속하는 조도군도 가운데 관매도는 절경이 많은 섬이다. 천연기념물 제212호로 지정된 후박나무가 있으며, 특산물로는 자연산 돌미역이 유명하고, 이외에도 멸치, 꽃게, 우럭, 농어, 돔 등 싱싱한 자연산 활어가 많이 생산된다.

관매8경은 고운 모래가 돋보이는 3km 길이의 관매도 해수욕장, 선녀가 방아를 찧었다는 방아섬(남근바위), 하늘장사가 묻힌 돌묘와 옥황상제가 애지중지했다는 꽁돌, 비 오는 날이면할미도깨비가 나온다는 할미중드랭이굴, 바위산을 칼로 자른듯이 잘린 하늘다리, 선녀들이 목욕하고 밥을 지어먹었다는 서들바굴폭포, 자연산 돌미역·톳·돌김·우뭇가사리 등 해산물이 풍부한 다리여를 말한다.

진도 팽목항에서 관매도까지 하루 1차례(14:00) 운행. 문의조도농협(061-542-5383~5).

 

첨찰산 쌍계사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첨찰산(尖察山·485.2m) 남서 기슭에 자리 잡은 쌍계사는 신라 때인 857년(문성왕 19)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다. 절 양편으로 계곡이 흐른다 하여 쌍계사라 이름하였다. 석가모니를 모시는 대웅전은 1982년 수리할 때 발견된 기록에 숙종 23년이라 쓰여져 있어1697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목조삼존불좌상은 가운데본존불을 중심으로 양쪽에 협시불을 모시고 있는 형태인데, 대웅전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쌍계사 사찰 뒤쪽 계곡을 따라 첨찰산을 10분쯤 오르면 천연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된 상록수림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록수림으로서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으므로 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숲을 구성하고 있는 식물은 동백나무·후박나무·참가시나무·감탕나무·졸참나무·느릅나무·말오줌때·쥐똥나무 등 50여종류에 이른다. 있다. 면적 621,351㎡.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진도의 금강 - 금골산(金骨山 193m)

해발 193m에 불과하지만 금골산은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로 우뚝 솟은 기이한 산이다. 금골산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조각가가 일일이 예술작품을 조각해 놓은 것 같다. 수십 길 절벽에는 층층바위를 이룬 곳 구멍이 숭숭 뚫린 곳이 있는가 하면 보는 방향에 따라 사람으로 또는 짐승으로 연상케 하는 기암괴석들이 산 전체를 수놓고 있다.

여기다가 황색, 흑색, 백색, 회색 등 기암마다 색깔을 달리하고 있어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기 그지없어 예부터 「진도의 금강(金剛)」이라고 불리어 오고 있다.산자락에는 산의 규모에 비하면 해묵은 천년고찰 해원사(海院寺) 또는 해언사로 불리는 절이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높이 4.5m인 이 석탑은 석질은 별로 단단하지 않지만 보물로 지정된 이유는 고려 후기 작품이면서도 정읍 은선리에 있는 삼층석탑과 거의 같은 백제탑의 양식이 가미되어 있기 때문이다.지금의 해언사(태고종 소속)는 한동안 금골사(金骨寺)로 불리어 온 절이었는데 주지인 지수(智洙) 스님이 옛날 이름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4년 전 개칭했다. 해언사는 옛날 도선국사가 3천 8백 군데의 사찰을 정할 때 그중 한 곳으로 정한 곳이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해언사 위 수십길 절벽 위 자연석굴 속에 있는 마애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도 전해진다. 이 굴 속에는 늙은 스님과 상좌 한 사람이 살았는데 바위구멍에서 매일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만 나왔고 식객이 더 늘더라도 절대 욕심을 버리고 그 나온 쌀만으로 먹고 살아야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그런데 어느 날 의외로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두 사람 분 쌀만 가지고는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늙은 중이 화를 내며 「이놈의 구멍은 인정사정도 없더란 말이냐」하면서 더 많은 쌀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쌀 구멍을 쑤셨다. 그러나 쌀은 더 나오지 않고 홧김에 쑤신 구멍만 망가지고 그 이후로는 구멍에서 한 톨의 쌀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놀라움과 후회에 잠긴 노승은 상좌와 함께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는 이곳을 떠나고 말았다는 얘기가 그것이다.이 굴속에 양각되어 있는 마애여래좌상 가슴 아래 움푹 패인 사각형 구멍이 바로 전설속의 쌀 구멍이다. 지수 스님에 의하면 6.25 때에는 순경 3형제가 인민군에게 잡혀와 총살을 당했는데 세 사람 모두 총알이 빗나가 살아남았을 정도로 이 산은 영험함이 있는 산이라고 한다.

<코스가이드>

금골리에서 금골산으로 찾아드는 길은 시종 오른쪽으로 산 전경이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에 간단하다. 금골주유소에서 진도읍 쪽으로 100m 거리인 삼거리에 다다른 다음 삼거리에서 오른쪽 천수답 사잇길로 150m쯤 더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꺽여 금골산을 마주보며 들어가는 더욱 좁은 길이 나온다.좁은 길을 따라 500m 거리에 이르면 30여 평의 마당이 있는데 여기까지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다. 마당에서 폭 3m쯤 되는 콘크리트 포장길은 5~6분 거리인 해언사 마당까지 이어진다. 해언사 마당에서 서쪽 요사채를 지나면 오른쪽 급경사 사면을 오르는 산길이 있다. 이 급경사 산길을 올라가면 왼쪽 아래로 덕병리 앞 바다가 보이는 사면 길로 이어진다.경사진 바위를 가로지는 사면 길로 200m 거리에 이르면 길은 오른쪽 바윗길을 올라 주능선에 닿는다. 해언사에서 주능선까지는 10분이 조금 더 걸린다.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10분 쯤 올라가면 해언사 지붕이 아찔하게 내려다 보이는 정상이다.정상에서 해언사 지붕을 내려다 보며 오른쪽 절벽을 내려가는 바윗길이 있다. 추락방지를 위해 쇠 난간이 설치되어 있는 바윗길로 8~9분 가량 내려가면 석굴에 닿는다. 남향인 석굴 벽면에는 높이 3m 폭 2.5m 넓이로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명량대첩지인 울돌목과 벽파진 일원 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걸어 다닐 수 있는 산길은 마애불에서 끝나기 때문에 하산은 다시 정상으로 기어오른 다음 올라갔던 코스를 되 집어 해언사로 내려와야 한다. 정상에서 동쪽 사리암으로 내려가는 암릉길이 있지만 매우 위험하므로 가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

 

금골산 5층석탑 군내면 둔전리에 솟아있는 금골산(193m)은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로 우뚝 솟았다. 수십 길 절벽에는 층층바위를 이룬곳과 구멍이 숭숭 뚫린 곳이 있는가 하면 보는 방향에 따라 사람으로, 또는 짐승으로 연상케 하는 기암괴석들이 산 전체를 수놓고 있다. 산 아래 초등학교에 위치한 금골산 5층석탑(보물 제529호)은기단부와 1층 몸돌은 매우 길게 조성되어 정읍의 은선리 삼층석탑(보물 제167호) 양식과 비슷한데, 고려 후기 작품으로 보인다. 석탑은 석질 등이 별로 좋지 않고 우주(隅柱) 간의체감비례 등이 맞지 않으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제9호)을 모방한 백제 양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길에서 만난 별미 l 간재미찜

간재미는 가오리와 비슷하지만 맛은 홍어에 뒤지지 않는 바닷고기다. 간재미 살은 부드럽고 담백해 별미로 꼽히는데, 영양분을 비축해 살이 통통하게 오르는 겨울부터 이른 봄 사이춥고 눈 올 때가 제 맛을 낸다. 다른 계절엔 뼈(연골)가 드세져서 맛이 덜하다. 간재미는 우리나라 서해안에 고르게 서식하지만, 진도지역에서 많이 잡히는데다가 맛도 좋아 오래전부터 진도 사람들이 즐기는 요리로 자리를 굳혔다.

진도 사람들은 서부 해안의 서촌 간재미를 가장 쳐준다. 모래가 아니라 뻘 바닥이라 더 맛있기 때문이다. 또 진도는 같은 섬이라 해도 동부 해안과 서부 해안의 온도 차이가 심한데,

수온이 차가운 서부 해안에서 잡은 물고기가 맛이 좋다고 한다. 진도사람들은 간재미를 된장에 찍어서 곧바로 먹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회무침·탕·찜 등으로 내놓는다. 홍어처럼 톡 쏘는 맛이나 비린내가 없어 회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쉽게 맛볼 수 있다. 회무침을 할 때는 우선 얇게 포를 뜬 간재미를 막걸리로 씻어 낸다. 막걸리 속의 유기산이 생선의 단백질을 응고시켜 고깃살이 풀어지지 않고 쫄깃한 맛을 내기 때문이다. 포를 뜬 간재미를 채 썬 무, 미나리를 함께 푸짐하게 넣고 여기에 해풍 맞고 자라 향이 독특한 진도 대파와 마늘, 참깨, 고추장, 고춧가루, 참기름, 식초 등을 넣어 맨손으로 잘 무친다. 그러면 새콤달콤하고 오들오들 씹히는 간재미회무침이 완성된다. 여기에 진도 전통 명주인 홍주를 곁들이면 상은 더 없이 푸짐해진다.싱싱한 간재미 한 마리를 통째로 쪄내는 찜은 양념이 밴 속살과 연골이 입에서 부드럽게 넘어간다. 맵지 않고 부드러워 누구나 먹을 수 있다. 간재미를 토막 내 신김치와 함께 넣고 푹 끓여낸 탕은 국물 맛이 얼큰하면서도 시원해 숙취해소에 제일이다. 진도파출소 맞은편의 문화횟집(061-544-2649), 성내리의 제진관(061-544-2419)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간재미찜 한 접시(2~3인분) 20,000원, 회무침은20,000~30,000원, 탕은 20,000원이다.

 

 

[진도 답사 일정표]

2008년 2월 29일(금)~3월 2일(일)

날 짜

시 간

일 정

비 고

제1일

(2/29)

금요일

22:00

건대입구역 발

출발지(강서관광)

22:40

천호역 경유

경유지

23:00

상일동 발

경유지

제2일

(3/1)

토요일

23:00~05:00

이동(중간 휴게소에서 두 번 휴식)

03:30경 진도대교통과

(불꺼져있음)

06:40~07:38

수품항(아기밴바위)일출

일출(07:02)

07:38~07:54

이동

강서관광

07:54~08:33

탑 공원에서 아침식사

산악회 제공

08:33~08:45

이동

강서관광

08:45~09:15

남도석성 답사

30분정도면 충분

09:26~09:36

이동

강서관광

09:36

팽목항 착

10:20

팽목항 발

선박(카훼리호)

10:50

하조도(창유리) 착

조도면

11:00~13:15

조도 육상관광

(하조도등대 11:13~11:42)

(도리산전망대 12:30~12:50)

조도여객 전세

13:15~13:44

점심식사

삼거리식당

13:44~14:00

이동

조도여객

14:00~15:00

관매도 해상관광

선박 전세

15:00~15:10

이동

조도여객

15:10~16:20

민박집에서 휴식

신전리

16:35~18:23

돈대봉 산행(약 2시간)

일몰 산행

18:30~19:30

저녁식사

삼거리식당

19:40~19:55

이동

조도여객

20:00~

민박집에서 휴식(이후 자유시간)

신전리 민박집

22:00~

취침

민박집

제3일

(3/2)

일요일

05:00

기상

민박집

06:10~06:20

이동

조도여객

06:30~07:00

아침식사

삼거리식당

07:00~07:05

이동

조도여객

07:30

하조도 창유리 발

카훼리 쾌속선

08:00

팽목항 착

08:05

팽목항 발

08:05~08:20

이동

강서관광

08:30~11:30

동석산 산행

암릉길

11:40~12:40

이동

강서관광

12:40~13:10

점심식사(백반, 간재미회)

진도읍(진도식당)

13:10~13:20

이동

강서관광

13:30~14:20

운림산방 답사

공연관람

14:20~14:40

이동

강서관광

14:50~15:20

진도대교(녹진전망대)

15:22~

귀경시작

강서관광

21:00

상일동 착

소통원활

21:30

건대입구 착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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