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정초 해마다 하는 대로 광주 방림에 있는 동광원에서 한 달 동안 연속하는 수양회를 인도할 때 건강상태가 극히 악화되었다. 한번 하는 강론시간이 적어도 두 세 시간씩 계속했는데도 시종 그냥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하였다. 강의가 끝나면 무릎이 굳어져 일어서지 못하며 제자들이 양쪽에서 겨드랑이를 끼어 부축해 세웠고, 거실까지는 업어다 모셨다. 누우면 또 다시 송장 같았다. 한 달간의 수양회를 그렇게 인도하고 나서 자신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평소 마음에 둔 경기도 벽제 계명산 분원에서 지냈다. 도착한지 엿새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의 자리는 계명산 속, 동광원 분원에서 500미터나 더 산중으로 들어가 옛날 현동완 선생의 산장자리에서였다. 1964년 3월 16일 저녁, 선생은 혼수상태에서 영적인 대화를 하고 있던 것을 조정은 수녀가 들었다. “예, 예, 저는 죄인입니다…예…” 혼자의 독백이었다. 그리고 조금 후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을 불렀다. 그제서야 조정은 수녀는 따뜻한 물을 들고 방에 들어가서 ‘선생님 아까 새벽에 누가 왔습니까?’ 물으니 “주님께서 내일 새벽 3시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산장의 새벽은 너무도 고요했다. 병든 이선생은 아랫목에 누워있고 왼편에는 계명산 수녀 원장인 김한나 수녀, 오른편에는 일생 잠시도 선생 곁을 떠나 본 일이 없는 김준호, 방구석에 김희옥 수녀, 조정은 수녀가 앉아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두 수녀에게 정결을 지킬 것을 당부하며, 준비된 선생의 수의(壽衣)로 깨끗이 빨아둔 누더기 옷 바지저고리로 갈아 입혔으나 죽는 사람은 그런 옷이 필요 없다면서 도로 헌 옷을 입은 그대로 묻어 달라고 당부했다. 관(棺)도 쓰지 말고 자기는 죄인이니 거적대기에 싸서 내다 파묻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무덤은 평토장(平土葬) 우로 하라면서 죄인의 시체니까 아무도 모르게 하고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게 하라고 했다.
최후의 순간이 가까워 오면서 이선생은 기도하기를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파 무척 애썼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마다 주님은 저를 피하셨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메 못참겠네. 아이고 기뻐!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어.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고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얼굴은 하늘을 향하여 쳐다보면서 마지막 호흡을 내 쉬었다.
1964년 3월 17일 새벽 3시 정각이었다. 이리하여 만51세의 향년으로 별세하셨다. 이때 그의 외모는 80된 노인보다 더 연로해 보였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벽제 계명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