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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배우자
함석헌
겨울이 또 옵니다. 씨알이 제 참 모습을 보는 때입니다.
木落水盡千崖枯(목낙수진천애고)
廻然吾亦見眞吾(회연오역견진오)
나뭇잎 내리고 물 끊어져 온갖 언덕 말랐구나.
나 또한 저 멀리 내 참 나를 보리로다.
그것은 주희(朱熹)만이 아닙니다. 마음 가진 인생인 다음에는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계절 속에 두셨습니다. 우리의 씨알은 계절의 변화를 따라 자랍니다. 겨울은 속으로 여무는 때입니다.
버리고 나간 자식도 찬바람이 해어진 옷자락을 들치게 되면 “아, 내 아버지 집” 하고 목구멍에 눈물을 삼키고 일어섭니다. 푸른 그늘 밑에 취해 해가는 줄을 모르던 어리석은 젊음도 거센 바람이 낙엽을 몰아쳐 쫓기는 피난민의 흐트러진 행렬처럼 재 너머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면 내팽개쳤던 제 의무가, 맞으면서도 엄마 품으로 달려드는 애기같이, 아장아장 눈앞에 나타나 부시시 떨고 일어서게 됩니다. 누구를 위해선지, 무엇 때문인지 미처 생각할 여지도 없이 본능적으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죽은 나무 등걸처럼 서 있던 졸병도 눈을 빠는 듯한 처절한 달빛이 참호 속에 비치게 되면 꿈을 깨치는 사람같이 “아, 산다는 것이 무엇이야?” 하고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푸름을 노래합니다. 푸른 산, 푸른 바다, 푸른 청춘, 푸른 서울, 늘푸름, 늘봄, 물론 푸름은 생명의 빛입니다. 그러나 정말 푸름은 푸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푸르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생명이 제 즐거움에서 푸름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푸른 것이 생명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겉 푸름이 있고 속 푸름이 있습니다. 속 푸름에서 겉 푸름이 나왔지 겉 푸름이 속 푸름을 낳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다시 푸름이 되려면 반드시 한번 죽어 썩어서 근본에 돌아가지 않고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늘 푸름이란 없습니다. 없는 늘 푸름을 사모하고 숭배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늘 푸름은 전체에만, 근본에만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푸름은 푸름이 아닙니다. 늘 푸름을 가지는 것은 씨알뿐입니다. 씨알 속에는 푸른 잎도 있지만 또 검은 뿌리도 있고, 붉은 꽃도 있고, 갈색 나무통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봄·여름·갈·겨울의 온 계절을 다가지고 있습니다. 늘 푸름은 전체에만, 바탈에만, 나타나지 않은 속알(德)에만, 다 같이 함(公)에만 있습니다. 나타난 것은 분명히 볼 수 있으니만큼 그것은 제 한때를 가질 뿐입니다. 그런 것을, 스스로 좋다는 생각에, 늘 가지려 하면 그것은 욕심이요 사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말 늘봄일 수 있는 것은 씨알뿐입니다. 그러나 속에 늘봄을 가지는 씨알은 늘 푸름, 늘봄을 원치 않습니다. 늘 청춘이자, 늘 푸르게 살자, 늘봄을 노래하자 하는 것은 일하지 않는 자, 주워다 먹고, 빼앗아 먹고, 도적질해 먹는 것들의 하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생명족이 아니라 사망족, 삶족이 아니라 다스림족의 하는 어리석은 노래입니다. 그런데 세계가, 더구나 젊은이들이, 온통 늘 푸름족이 되어가는 것은 참 한심한 일입니다. 타임(TIME)지는 이 11월 7일 호에 인류의 진화에 대한 연구의 재미있는 글을 냈는데, 그 가장 요점 되는 것을 말한다면, 사람은 천만 년 이상을 두고 서서히 발달하는 가운데서 돼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 발달의 동기는 갑작스럽게 닥쳐온 기후의 변동에 적응하여 이겨내려 노력하는 데서 나왔다는 것, 특히 공동체의 살림을 하게 된 것이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문명이 발달했다 해서 사람의 재주로 못할 것이 없는 양 헐한 생각을 품고 여가의 시간과 물자를 늘 푸름식으로 향락하려는 것은 멸망하는 사고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은 천연자원도 풍부하고 기술도 먼저 발달했고, 더구나 긴 세월 종교, 도덕의 가르침 밑에 사회의 틀이 잡혀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도 당장 망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 같은 나라는 그런 나라들의 잘못된 지배주의의 희생이 되어 고난의 길을 걸어오는 나라인데, 우리가 그런 흉내를 낸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류의 당초의 조상이 고난을 극본하려 애쓰는 가운데, 겨울족 노릇을 하는 가운데, 속 푸름을 지키는 가운데, 혼자서 하자 하지 않고 갖가지 생각을 한데 아울러 운명을 같이하는 것을 가장 슬기롭고 보람진 일로 여기는 가운데, 저도 살고 남도 살아, 어느 동물에서도 볼 수 없었던 빛나는 정신적 세계를 개척해 나왔던 것같이, 오늘 우리의 할 일도 거기 있습니다. 남의 복을 얻어먹거나 도적질하고 빼앗아 먹는 것보다 우리 당한 화를 복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야말로 참 복이요, 참 역사 빛냄이요, 참 세계사적 공헌입니다. 한 발걸음 옆으로 나가면 두 겹의(선진국과 내가 하는) 압박 속에 인간다운 살림의 최저 필수조건도 갖추지 못한 형제들이 수두룩한데, 내 손에 가진 것이 있다고, 그 쫓아온 경로는 생각도 않고, 늘푸름을 노래하려는 것은 너무도 몰인정, 몰이성한 일입니다.
예수는 “오늘 양식”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밥을 대할 때는 우선 그 밥이 “어디로 쫓아왔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공력이 들어서 내 상에 올랐는지 그것부터 생각해 보라” 했습니다. 그러해서야 은혜도 알 수 있지만, 또 남의 받을 것을 빼앗는 죄를 범치 않을 수 있습니다. 허다한 사람이 늘 겨울의 고통 속에 사는 것은 재주 있고, 힘 있는 것들이 늘봄에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씨알 여러분, 우리는 속푸름에 살아야 합니다. 겨울을 맞을 줄 알아야합니다. 계절의 겨울만 아니라, 역사의 겨울도, 우리는 누림으로가 아니라 봉사로, 씀으로가 아니라 간직함으로, 잘 삶으로가 아니라 잘 죽음으로, 이 나라를 차지해야 합니다.
정부는 요새 뒤늦게야 자연보호의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늦었지만 이것은 잘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옳은 말입니다. 이런 지당한 말을 왜 일찍부터 하지 않았을까? 노자(老子)는 2천 년 전에 벌써 말했습니다.
큰길 버려서 어짐 옳음 있고, 앎 슬기롬 나와서 큰 거짓 있고, 여섯 붙이 고르게 되지 못해서 어버이 섬김 어린이 헤가림 있고, 나라 어둡고 어지러워서 속 곧은 아래 있느리라(大道廢 有仁義, 智慧出 有大偽, 六親不和 有孝慈, 國家昏亂 有忠臣)
자연 보호 부르짖을 때는 벌써 자연 망가진지 오랩니다. 왜 일찍부터 좀 하지 못했을까? 몰라서 못한 것 아닙니다. 그것 모르이만큼 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최고지식 기술을 다 사다놓은 사람들입니다. 근대화를 내세울 때에 벌써 자연파괴는 따라올 것을 알았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근대화는 기어코 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만 마음이 급해서 그 결과로 오는 자연파괴에 대한 경고는 묵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점이 알고도 모른 점입니다. 무엇을 몰랐단 말입니까? 자연은 산 것인데 그것을 죽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파괴가 된다는 것은 알았어도, 그것은 죽은 물건을 짓밟고 자르고 쑤시고 지지는 일이지, 그런다고 그것이 움질움질 살아나서 지층 밑에서 공룡(恐龍)이 일어나듯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엄정한 의미에서, 모른 것 아니라 무시했던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사실은 자연은 산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들은 천만년 넘는 세월 그 자연을 믿으며 싸우며 살아오는 동안에 체험에 의하여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란 것을, 생명체 중에도 엄청난 생명체란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이름은 여러 가지요 방식도 여러 가지지만, 신화요 전설이요, 원시적인 종교입니다. 발달 못했으니만큼 소박, 유치한 것이 있지만, 소박하니만큼 불멸의 빛이 있고, 유치하니만큼 호소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그 실험적인 효과에 놀란 나머지 천만 년 이루 헬 수 없는 마음들이 눈물과 피와 애탐과 기도를 얻은 종합적인 그 지혜와 믿음을, 그 스케일이 너무 커서 그런 줄은 모르고, 한마디로 미신이라고 제쳐놓게 됐습니다. 물질주의, 공업주의, 기계만능주의는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L. P. Jacks 란 사람이란 사람이『살아있는 우주』(The Living Universe)란 책을 써서 생각하는 마음에 한때 시원한 소생재를 던져준 일이 있습니다. 내용인즉 인류 있은 이래 처음 겪는 이 참혹한 전쟁은 대자연의 복수라는 것입니다. 자연은 산 것인데 그것을 죽은 것으로 알고 마음대로 파먹다가 살아 있는 자연이 노해서 복수를 하기 시작한 것이 그 끔찍한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물질주의, 과학주의 문명에 대한 큰 꾸지람입니다. 그랬는데도, 과학자와 사업가와 그들을 장 안에 기르는 토끼같이 망대로 휘두르는 큰 나라의 정치가들은 그러한 경고를 우습게 여기고 더 심하게 끔찍한 제2차 대전을 또 일으켰습니다.
첫 번 환란을 설명하면, Jacks는 인도 옛날 신화를 빌어서 말했습니다. 어떤 호사를 부리는 임금이 만세반석을 골라 굉장한 궁궐을 짓고 그 낙성연을 하노라고 신하들을 불러 먹고 마시고 뛰며 질탕하게 노는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고 야단이 났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지진이 아니라 그 작은 소견에 반석으로 알았던 것이 반석이 아니라 큰 거북이의 잔등이어서 이제 거북이 그 시끄러움에 노해 몸을 흔들흔들 흔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근대문명이 그 밑에서부터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그 경고를 알아들었다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듣지 않았고 다만 소수의 생각하는 사람들만 그 말을 마음에 둘 뿐이었습니다.
제1차 대전 결과는 지진 정도만이 아닙니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핵무기문제, 인구문제, 갖가지 오염문제, 천연자원의 고갈 문제 등등 입니다. 그래서 미래학이 나오게 됐고, 인류의 장래를 위해 상당히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어느 만큼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어느 만큼 용기가 있는지, 무엇보다도 어느 만큼 믿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믿음만이 참 지혜, 참 능력을 가져다줍니다. 제발 이번만은, 이 문제만은 나와 내 당파를 잊고, 행복 쾌락을 다 밀어젖히고,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자연 속에 숨은 절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추호도 거짓 없는 참된 태도로 임해주기를 바랍니다.
사업가도 갑니다. 정치가도 갑니다. 학자도 예술가도 가버릴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가도, 다 모른다 해도, 마지막까지 남아서, 누가 시켜서 하는 것 아니라 왠지 모르게 그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건질 책임을 스스로 지는 것은 씨알뿐입니다. 한 점 더한 것도 없고 한 점 덜한 것도 없는, 그저 사람인 씨알뿐입니다.
자연은 산 것입니다. 살아 있는 전체입니다. 그는 우리 어머니요, 우리 스승입니다. 이 생명을 내놓고는 말씀을 들을 길도 없고, 우리 깨달은 것을 닦아볼 터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호 정도 가지고는 보호가 되지 않습니다. 배워야 합니다.
생각하는 인간은 생각 때문에 교만해졌지만, 우리 생각한 것도, 안 것도, 만들어본 것도 다 자연에서 배우고 얻지 않은 것 없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그 앞에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 생각한 것은 분명하지만 분명하니만큼 작습니다. 자연의 하는 것은 흐리멍덩,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그것은 영원을 단위로 두고 하기 때문이요, 다 같이 하여(公) 일시동인(一視司仁)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믿느냐 묻습니까? 입을 닫으시오. 무엇이란 것이 없습니다. 물음이 끝난 지경입니다. 그저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이 가르칩니다. 믿으면 믿어지고 아니 믿으면 없습니다. 모든 우상을 제해버리십시오. 그리고 그저 믿으십시오. 내가 믿는 것 아닙니다. 맨 첨부터 믿음이 있었습니다. 약하다 걱정 마십시오. 걱정하는 것이 약한 것입니다. 약하다면 강할 날이 있고, 강하면 건방져 집니다. 건방지면 망합니다. 거짓 하는 자도 건방진 자요, 남을 미워하고 지배하려 드는 자도 건방진 자입니다. 이름 할 수 없으니 님이라 합시다.
그저 이름 할 것 없이 믿는 것이 자연, 곧 저절로 함입니다.
씨알의 소리 1977. 10월 68호
저작집; 9- 165
전집; 8- 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