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7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 イエス様の愛で愛する事。
https://youtu.be/1tgQn9glqCc
본문; 마태복음 22:34-40
마 22:34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가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자리에 모였다. 35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36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3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38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39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40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34. 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イエスがサドカイ派の人々を言い込められたと聞いて、一緒に集まった。35. そのうちの一人、律法の専門家が、イエスを試そうとして尋ねた。36. 「先生、律法の中で、どの掟が最も重要でしょうか。」 37. イエスは言われた。「『心を尽くし、精神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しなさい。』 38. これが最も重要な第一の掟である。 39. 第二も、こ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ある。『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 40. 律法全体と預言者は、この二つの掟に基づいている。。
지난 주일에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랑을 가장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할 것에 관하여 나누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솔선수범하여 사랑을 가장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제일 소중하게 여기며 순종할 때 주님의 역사하심과 능력이 현실의 열매로 맺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랑의 순종으로 주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영광가운데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 중에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율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말이죠.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올바르고 범죄하지 않는 삶을 갈망해 왔습니다. 정결함과 경건함, 그리고 거룩한 삶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굳게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 덕분에 성경의 율법과 경건하고 윤리도덕적인 행동지침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온 것이지요. 그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율법의 중요성에 대해서 수도없이 많은 구절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복된 삶을 살고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수 1: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시 19:7)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딤전 1:8)
그러므로 율법은 적법하게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취지대로 사용한다면 인간에게 큰 유익과 축복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서 연약한 자들과 가난한 이들, 그리고 사회적인 소외계층이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율법에는 반드시 이런 이들을 의무적으로 보살펴야 한다는 조항이 있지요.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신 24:19)
신명기 율법의 일부입니다. 이 구절만이 아니라, 율법은 곳곳에서 율법을 지킴으로 강자들만 살아남고 약자들은 모두 손해를 보게 되는 무법천지의 잔혹하고 잔인한 세상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율법은 인간을 인간답게 유지하는 최소한의 보호장치였던 것이죠. 즉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구체적으로 현실화되는 장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취지보다 그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에 몰두하며 가치를 두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을 실족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질문을 던졌던 것인데요. 예수님의 답변으로 인해 율법의 율법답게 하는 요소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확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바로 율법에 기록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최고의 율법이고, 강령이고 선지자들의 예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을 위해 순종하는 자가 곧 구원받은 자이며, 동시에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사랑을 위해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요한 사도는 먼저 요한복음에서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였는데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구원에 이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기록한 서신서를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일 3:14)
믿음이란 곧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면 주변인들의 옳고 그른 행동과 말에 대해서 분별하고 판단함과 동시에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먼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시지요.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힘과 뜻과 마음을 다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변인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변인들을 사랑함으로 구원받은 증거를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랑은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사랑하려고 애를 쓰고 노력해도 우리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것이지요. 물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랑하는 연기는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을 표현하고 애쓴 만큼 상대도 자신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애를 써야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어떠한 감정의 활동으로만 오해합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면 사랑이라고 말하고, 그런 감정이 약해지면 사랑이 식었다고 말하지요.
성경적 사랑에 대한 주제영상은 사랑을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G4pi_NC29Y&list=PLdjM8wRcBQnmIJFPq19BxCCvg0_oI8gYA&index=4
그렇습니다. 사랑은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행동하는 순종이며, 현실에 드러나는 열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영상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예수님과 관계없이 우리 안에 활동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면,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게 되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순종하여 사랑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의 구원은 더욱 명확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사랑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셔야 가능한데요.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연구하여 지식을 쌓고 있어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으로 가장 중요한 율법에 대해서 고민하고 애쓰고 노력하기를 마지않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세단계를 통해 우리 안에 사랑을 붓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이 세단계를 잘 기억하시며 순종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우리 안에 사랑이 없음을 깨우치게 하십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애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사랑하게 해 달라고 몸부림치며 기도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사랑하지 못한 것이 죄임을 알게 하시고, 그 죄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고 탄식하며 기도하게 하십니다. 사실 사랑하게 해 달라고 갈망하며 간구하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보통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무관심한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지요.
마지막 세번째 단계에서 비로소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내면에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이 마지막 단계는 사랑을 하려고 억지로 애쓰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마음이 솟아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도무지 사랑할 감정이 생기지도 않고 좋아할 수 없던 그 사람을 아끼고 사랑으로 섬기는 의지가 생기고 몸을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자원하여 섬기게 되는 것이지요. 불가능한 사랑의 활동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과 동행함으로 사랑의 사람으로 매일 하루에 하루만큼씩 자라고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감정의 표현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실천입니다. 그런데 그 실천은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시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그 사랑의 은혜를 갚기 위한 마음과 태도와 자세로 우리의 몸을 자원하여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평소 좋아하지 않던 이웃과 주변인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돕고, 응원하고, 배려하고, 아끼고, 챙기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실감나게 체감되기에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나의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우리가 누군가를 주님의 사랑으로 아끼고 섬기게 될 때는 아무런 대가를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의 부정적이고 죄악에 물든 감정도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며 그저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과 매일 동행하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