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 양선례
“마음의 준비를 하래.” 힘없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 말끝에 덧붙인다. “오늘이 내 생일이야. 환갑 생일.”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점심 먹었어? 지금 어디야?” 아침에 남편을 가퇴원시켰기에 다시 입원 수속 중이라고 했다. 집에서 가까운, 바로 어제까지 입원했던 병원으로 다시 온 모양이다.
명이는 대학 동창이다. 고향, 학교, 과, 동아리, 종교 어느 것 하나 같은 게 없다. 첫 발령지도 전남의 양끝으로 갈렸고, 이후로도 지역은 같았으나 한 학교에 근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그녀와 나 사이에 접점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를 대학 2학년 때부터 알고 지냈다. 내 단짝 친구의 여고 동창이라서 1학년 때 한방에서 자취했단 말을 들어서였다. 키 크고 마른 명이는 돌도 씹어 먹을 20대 초반부터 건강을 생각하는 정성이 대단했다. 자취방에 온갖 잡곡을 쌓아 두고 밥을 지었다. 또 우리 엄마 나이대에나 적당한, 유분이 많은 참* 화장품을 종류별로 갖춰 두고 발랐다. 스킨, 로션도 사치였던 내게는 그녀의 그런 노력이 신기하면서도 별나게 여겨졌다.
결혼 적령기를 놓치고 마흔이 넘어서 결혼했는데 남편이 세 살 연하라더라. 둘 사이에 아이는 없더라 등을 간간이 풍문으로 들었다. 그런데 그녀와 3주간 한지붕 아래서 산 적이 있었다. 그녀와 나, 내 친구가 교감 연수를 함께 받게 된 것이다. 출퇴근 시간을 줄이려고 연수원 근처에 있는 친구 지인의 주말 주택을 빌렸다. 하루 종일 강의 받고 집에 와서 저녁을 간단히 먹고는 책상 앞에 앉았다. 즐겨 보는 저녁 시간대의 드라마까지 보고서야 자리를 잡는 나와 달리 둘은 밥숟가락 놓기가 바쁘게 책을 펼쳤다. 어찌나 그 모습이 진지한지 말을 붙이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교감 발령도 나와 친구는 동부, 명이는 서부로 받았다. 어쩌다 출장지에서 만나면 반갑게 안부를 물었으나 전화하거나 약속을 정해 만나지는 않았다. 운전 못 하는 그녀를 남편이 편도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직장까지 월요일 아침이면 데려다준다는 이야기를 바람결에 들었을 뿐이었다.
지난주에 ‘어제의 용사’ 셋이 다시 만났다. 그녀는 무려 8년 만에 집 가까운 학교로 옮긴 터였다. 학기 중 관리자 연수는 새로운 걸 배우기보다는 머리 무거웠던 학교를 벗어나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동료들과 만나 정보를 나누며 쉬려는 목적이 더 크다. 그런데 이번 연수는 그런 예상을 벗어나서 3일간 20차시 수업으로 짜여졌다. 꼬박 일곱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데다 출퇴근에도 두 시간이 넘게 걸려 학교 나가는 것보다 강행군이었다. 가르치고 설명하는 티칭(teaching)이 아니라 지원과 지지, 칭찬과 격려가 중심이 되는 코칭(coaching)이 필요하며, 그 대화는 어떻게 하는지를 실습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오래전에도 그랬듯이 나와 친구가 교대로 운전대를 잡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명이가 지나가는 말로 남편이 아파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관사 이삿짐도 혼자 나르느라고 살이 빠져서 맞는 옷이 없다고도 했다. 꼬치꼬치 물으니 그제야 간이 안 좋아서 병원에 입원 중이란다. ‘어떻게 알게 되었냐, 증상이 나타나서 병원에 간 거냐, 지금은 어디에 있고 누가 간병하나?’ 등의 질문을 쏟아냈으나 얼버무릴 뿐이었다. 속 시원하게 말하지 않는 그녀가 답답하면서도 또 그게 입 무거운 그녀의 특징이라는 걸 알기에 캐물을 수도 없었다.
연수 마지막 날 명이가 나와 친구에게 밥을 사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른 날과는 달리 차에서 작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이어갔다. 불편해할까 봐 친구와 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모른 척했으나, 그녀의 기분이 몹시 상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식당에 도착해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문자질은 계속되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우리에게 그녀, 비로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남편이 지난 2월부터 아팠는데, 병원에 가 보니 간암이란다. 시티(CT)밖에 찍지 않아서 조금 더 큰 대학 병원에 예약해 놓은 날이 바로 내일이라서 연가까지 받아 두었는데 남편이 이제와서 안 간다고 한단다. 병원에 동행하기로 한 시누이조차 본인 마음 편하게 해 달라며 오지 않겠다고 문자를 보냈단다. 계속 남편을 설득하고 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아 속상하다고 했다. 3일간 배운 코칭 대화법으로 남편과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눠라. 정확하게 병의 상태는 알아야 하지 않느냐, 어렵게 잡은 일정이니 내일은 가는 게 좋겠다는 말밖에는 해 줄 말이 없었다.
이튿날, 어땠는지 궁금하여 명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더니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하는 거다. 환갑 생일에 남편의 사형선고를 받은 명이의 마음이 오죽할까 싶어서 위로조차 하지 못했다. 자식이 있었더라면 이리 쓸쓸하게 환갑을 맞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아무리 주말부부지만 병이 깊어가도록 몰랐다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고 말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다며 거절하는 바람에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일까. 환자의 의지가 더 꺾여버리는 건 아닐까. 죽을 병은 아니라고, 곧 나아질 거라고, 아직은 살날이 많이 남았다고 하얀 거짓말이라도 하는 게 나았을까.
황사 낀 하늘이 뿌옇기만 하다.
첫댓글 남편 분 병원이라도 갔으면 좋겠구만 하얀 거짓말할 시기도 너무 늦었네요.
아이고, 마음이 아프겠네요.
마무리가 하얀 거짓말이었기를 바라면서 읽었어요.
건강이 제일인 것같아요. 그런 일을 겪어 보지 못해 글을 읽으면서도 두렵고 무섭네요.
저도 거짓말 글감 받았을 때 선의의 거짓말 생각했어요. 이야기가 슬퍼요.
대다수의 남자들은 병원가는 것을 꺼려 하더군요.
환자에게는 있는 그대로 말하기보다 조금은 하얀 거짓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환갑 생일날을 쓸쓸하게 보낸 친구분 마음이 어땠을까요?
쓰담쓰담 위로를 보냅니다.
너무 안타깝네요. 부부가 어떤 마음일지... 의학이 발달했는데, 너무 늦게 갔나봐요...
생일날 그런 말을 듣다니... 너무 슬프네요. 어떤 위로가 힘이 될는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슬픕니다. 요즘은 암도 치료가 되니 의지를 갖고 치료하시면 좋겠군요.
먹먹합니다. 용기내라는 말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하얀 거짓말이라도 해주고 싶을 따름입니다.
하얀 거짓말이 통할 수 있음 좋겠네요. 가슴이 아프네요.